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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2 편
종교적 믿음의 기초
.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
. 1934년
102:0.1 믿지 않는 유물론자에게 인간은 단순히 진화의 우연에 불과하다. 그의 생존에 대한 희망은 필사자 상상력의 산물이며, 두려움, 사랑, 갈망, 믿음은 생명이 없는 특정 물질 원자들이 우연한 배열에서 생긴 반응일 뿐이다. 어떤 에너지의 표출이나 신뢰의 표현도 그를 무덤 너머로 데려갈 수 없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의 헌신적 노력과 영감을 주는 천재성도 영원한 망각과 혼의 소멸이라는 긴 외로운 밤에 의해 죽을 운명이다. 말할 수 없는 절망이 유일한 보상이다. 인생의 매일매일은 냉담하고 잔인한 물질 우주가 선언한 냉혹한 운명에 붙잡혀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조여지는데, 이것은 인간이 바라는 아름답고, 고귀하고, 고상하고, 선한 모든 것에 대한 더없는 모욕이 될 것이다.
102:0.2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끝이자 영원한 운명은 아니다; 그러한 환상은 단지 영적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물질 철학의 기계론적 궤변에 직면하여 용감하게 싸우며, 복잡한 학문의 혼란과 왜곡으로 눈이 먼, 어떤 헤매는 사람이 내뱉은 절망의 외침일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어둠의 파멸과 절망의 운명은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고 미숙한 하나님의 자녀가 용감하게 믿음을 내딛는 한 순간에 영원히 사라진다.
102:0.3 이 구원의 믿음은 인간의 도덕적 의식이 인간의 가치가 물질에서 영적인 것으로, 인간적인 것에서 신성한 것으로, 시간에서 영원으로 옮겨질 수 있음을 깨달을 때 인간의 마음에서 태어난다.
1. 믿음의 확신
102:1.1 생각 조절자가 하는 일은 인간의 원시적이고 진화적인 의무 감각이, 드러나는 영원한 실체들 안에서 더 높고 더 확실한 믿음으로 바뀌어지는 과정을 설명한다. 최상의 성취에 이르는 믿음의 길을 이해할 수 있는 자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완전에 대한 갈망이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신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한다면, 그는 진리의 길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글자 그대로 진실인 것은, “인간의 일들은 사랑받기 위해서 알아야 하지만, 신성한 일들은 사랑을 받아야만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직한 의심과 진심 어린 질문은 죄가 아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완성에 이르는 진보적인 여정의 지연을 의미할 뿐이다. 어린아이 같은 신뢰는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주지만, 진보는 전적으로 성숙하고 확신에 찬 믿음의 활발한 실행에 달려 있다.
102:1.2 과학의 이성은 관찰 가능한 시간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종교의 믿음은 영원의 영 프로그램에서 주장된다. 지식과 이성이 우리를 위해 할 수 없는 일을, 참된 지혜는 종교적 통찰과 영적 변화를 통해 신앙이 성취할 수 있도록 권고한다.
102:1.3 반란의 고립으로 인해, 유란시아에 대한 진리의 계시는 종종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우주론의 진술과 혼동되었다. 진실은 대대로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만, 그와 관련된 가르침, 물리적 세계에 대한 가르침은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다르다. 영원한 진리가 어쩌다가 물질세계에 관한 낡은 관념과 함께 발견된다고 해서 경시되어서는 안 된다. 네가 과학을 더 많이 알수록, 네가 확신하는 것이 줄어든다; 네가 종교에 대해 더 많이 알수록, 너는 더욱 확신을 가진다.
102:1.4 과학의 확실성은 전적으로 지성에서 비롯된다; 종교의 확신은 전체 personality의 근본에서 솟아난다. 과학은 mind의 이해에 호소한다; 종교는 신체, 마음, 혼, 나아가 전체 personality의 충성과 헌신을 호소한다.
102:1.5 하나님은 너무도 실제적이고 절대적이어서, 그의 실체를 증명하는 물질적 증거나 이른바 기적의 어떤 증거도 제시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항상 그를 알게 되고, 그 안에 있는 우리의 신념은 전적으로 그의 무한한 실체의 신성한 발현에 대한 우리의 개인적 참여에 전적으로 기초한다.
102:1.6 깃드는 생각 조절자는 인간의 혼 속에서 완전을 향한 참된 탐색적인 갈망과 함께 신성한 조절자의 원천인 하나님과의 친교를 통해서만 충분히 만족될 수 있는 광범위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의 간절한 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personal로 깨닫는 것 외에는 만족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높고 완전한 도덕적 personality보다 더 높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갈급하고 유한한 개념 속에서 그보다 더 적은 것이 될 수 없다.
2. 종교와 실체
102:2.1 관찰하는 지성들과 분별하는 혼들은 동료들의 삶에서 종교를 발견할 때 그 종교를 알게 된다. 종교는 정의를 내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종교의 사회적, 지적, 도덕적, 영적 열매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종교가 인류의 재산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문화의 소산이 아니다. 사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여전히 인간적이며 따라서 무지의 속박, 미신의 노예, 궤변의 속임수와 거짓 철학의 망상에 지배되고 있다.
102:2.2 진정한 종교적 확신을 보여주는 특징 중 하나는, 확실한 절대성에 대한 태도를 억제하기도 하지만, 영적인 표현이 너무 침착하고 부드러워서, 결코 자아 주장이나 자만의 인상을 전혀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종교적 체험의 지혜는 그것이 인간적으로 특유하고 조절자에게서 파생된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다. 종교적 힘은 개별적 개인의 특권적인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모든 지혜의 영구한 근원과의 그 숭고한 파트너쉽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참되고 더러워지지 않은 종교에서 나오는 말씀과 행위는 모든 깨우친 필사자에게 강력한 권위를 갖게 한다.
102:2.3 종교적 체험의 요인들을 식별하고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만, 종교적 실천자들이 마치 이미 영원한 존재의 앞에 있는 것처럼 살아가고 행동하는 것은 관찰하기 어렵지 않다. 신자들은 이 현세의 삶에 반응하면서 마치 불멸이 이미 그들의 손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이러한 인간들의 삶에는 유효한 독창성과 자발적인 표현이 있으며, 이는 그들을 오직 세상의 지혜만을 흡수한 동료들과 영원히 구별짓는다. 종교적 사람들은 시간의 유동성에서 내재된 번잡함과 고통스러운 스트레스로부터 효과적으로 해방된 듯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personality의 안정과 성품의 평온함을 보여준다.
102:2.4 시간은 지식 습득에 있어 불변의 요소이다; 종교는 그 축복을 즉시 제공하지만, 은혜의 성장과 모든 종교적 체험의 단계에서 명확한 발전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 지식은 영원한 탐구이다; 항상 배우고 있지만, 절대 진리의 완전한 지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지식만으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으며, 오직 점진적인 근접 확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조명된 종교적 혼은 현재를 알고, 현재를 인식한다. 그러나 이러한 심오하고 긍정적인 확신은 건전한 종교인으로 하여금 느리게 움직이는 과학의 발전과 함께 물질적으로 묶여 있는 인간 지혜의 진보의 기복에 관심을 덜 가지게 하지는 않는다.
102:2.5 과학의 발견조차도 인간 체험의 의식에서 그것들이 풀리고 연결될 때까지, 그리고 관련된 사실들이 mind의 생각 흐름 속에 순회하면서 실제로 의미가 될 때까지는 진실로 실제가 아니다. 필사 인간은 그의 물리적 환경조차 mind 수준에서, 심리적 기록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따라서 사람이 우주에 대하여 상당히 통일된 해석을 내리고, 다음에 과학에서 이 에너지의 통일성을 그의 종교적 체험에서 영의 통일성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Mind는 통일성이다; 필사자의 의식은 mind 수준에서 살고, 부여받은 mind의 눈을 통해서 우주의 실체들을 파악한다. Mind의 관점은 실체의 근원인 첫째 근원 중심의 실존적 통합을 제공하지 않지만, 때때로 에너지, mind, 영이 Supreme Being 존재 안에서, 체험으로 통일됨을 사람에게 제시할 수 있고, 언젠가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mind가 물질적 사물, 지적 의미를 가진 것, 영적 가치에 대한 확고한 인식 없이는 이러한 실체의 다양성을 통합하는데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직 이 기능적 실체의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만이 통합이 이루어지며, 오직 통합속에서만 우주적 일관성과 일치의 실현에 대한 personality 만족이 존재한다.
102:2.6 인간 체험에서 통합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철학을 통해서이다. 철학적 사상의 몸체는 언제든 물질적 사실에서 기초해야 하지만, 참된 철학적 역동성의 혼과 에너지는 필사자의 영적 통찰력이다.
102:2.7 진화된 인간은 자연적으로 힘든 일을 즐기지 않는다. 그의 삶의 체험에 발맞추는 것은 종교적 체험의 성장, 지적 성장, 사실의 확대, 그리고 사회봉사의 끊임없는 활동을 의미한다. 진정한 종교는 매우 활동적인 personality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더 게으른 사람들은 종종 틀에 박힌 종교적 교리와 신조가 주는 잘못된 은신처로 피신함으로써, 일종의 교묘한 자기 속임수로, 진정한 종교적 활동의 단련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참된 종교는 살아있다. 지적인 종교적 개념의 고정화는 영적 죽음과 동등하다. 사상 없는 종교를 상상할 수 없지만, 일단 종교가 하나의 사상으로만 전락했을 때,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단지 일종의 인간 철학이 된 것이다.
102:2.8 다시 말해, 종교의 감상적 아이디어들을 삶의 짜증나는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불안정하고 훈련이 부족한 혼들도 있다. 어떤 변덕스럽고 소심한 인간들이 진화하는 삶의 끊임없는 압박에서 벗어나려 할 때, 그들이 생각하는 종교는 가장 가까운 피난처, 가장 좋은 도피 수단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사명은 인간이 삶의 우여곡절을 용감하고, 심지어 영웅적으로 맞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종교는 진화하는 인간이 가진 최상의 재산이며, 그가 계속 나아가고 "보이지 않는 이를 보듯이 인내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종종 삶으로부터의 물러나는 것으로, 인간 사회와 상업이 펼쳐지는 무대에서 종교적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수용된다. 참된 종교는 행동해야 한다. 인간이 실제로 종교를 소유하거나, 아니면 종교가 참으로 인간을 지배하도록 둘때, 행동은 종교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종교는 단순한 생각이나 실행하지 않는 느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
102:2.9 우리는 종교가 종종 현명하지 않게, 심지어 비종교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종교는 행동한다. 빗나간 종교적 신념이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초래했지만, 그러나 항상 종교는 무언가를 한다; 종교는 역동적이다!
3. 지식, 지혜, 통찰력
102:3.1 지적 결핍이나 교육적 빈곤은 높은 수준의 종교적 성취를 불가피하게 방해하는데, 왜냐하면 영적 본질에 대한 저하된 환경은 종교가 과학 지식의 세계와 철학적 접촉을 하는 주요 경로를 빼앗는다. 종교의 지적인 요소들도 중요하지만, 과도한 발전은 때때로 매우 장애가 되면서 곤란하게 만든다. 종교는 역설적인 필요성 아래 끊임없이 수고해야 한다: 모든 생각하는 영적인 유용성을 줄여나가는 동시에 반면 깊은 사색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102:3.2 종교적 추측은 불가피하지만, 항상 해롭다; 추측은 어김없이 그 대상을 왜곡한다. 추측은 종교를 물질적 또는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로인해 논리적 사고의 명확성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한편, 종교가 영원히 대조를 이루어야 하는 세속적 세계의 기능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므로 종교는 항상 역설, 우주의 물질적 수준과 영적 수준 사이의 체험적 연결, 즉 진리 분별과 통합 인식을 위한 초철학적 민감성인―모론시아 모타―의 부재로 인한 역설로 특징 지워질 것이다.
102:3.3 물질적 감정, 인간의 정서는 직접적으로 물질적 행동, 즉 이기적인 행위로 이어진다. 종교적 통찰, 영적 동기들은 직접 종교적 행동으로 사회봉사의 이타적 행동들과 이타적 자애로 이어진다.
102:3.4 종교적 소망은 신성한 실체에 대한 갈망이다. 종교적 체험은 하나님을 찾아냈다는 의식을 실현한 것이다. 인간이 혼(soul)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을 찾아낼 때, 발견하고서 말할 수 없는 승리에 들뜬 상태를 체험하고, 그래서 그는 그보다 깨달음이 적은 동료들에게 사랑에 넘친 봉사로 그들과 접촉하도록 재촉을 받는데, 그가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료들이 생기를 되찾게 하고 고귀하게 만들려고 자기 혼 속에서 영원한 선이 넘쳐흐르게 두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는 사회적 봉사의 증가로 이끈다.
102:3.5 과학, 지식은 사실 인식으로 이끈다; 종교, 체험은 가치 인식으로 이끈다; 철학, 지혜는 조화된 인식으로 이끈다; 계시(모론시아 모타의 대체물)는 참된 실체를 인식하도록 이끈다; 사실, 가치, 그리고 참된 실체의 인식이 조율될 때, personality 실체, 최대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지며, 이와 함께 바로 그 personality가 생존할 가능성을 믿게 된다.
102:3.6 지식은 사람들의 순위를 정해 사회적 계층과 계급을 형성한다. 종교는 사람들을 섬기게 하여 윤리와 이타주의를 창조한다. 지혜는 사상과 동료들 간의 더 높은 차원의 동료애를 형성한다. 계시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그들을 영원한 모험으로 이끈다.
102:3.7 과학은 사람을 분류한다; 종교는 심지어 네 자신과 같이 사람을 사랑한다;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한다; 계시는 사람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과의 파트너쉽 능력을 드러낸다.
102:3.8 과학은 문화적 형제애를 창조하려고 헛되이 노력한다; 종교는 영적 형제사랑을 가져온다. 철학은 지혜로운 형제사랑을 위해 노력한다; 계시는 영원한 형제사랑, 파라다이스 최후 군단을 묘사한다.
102:3.9 지식은 personality 사실에 대한 자부심을 낳는다; 지혜는 personality 의미를 의식한다; 종교는 personality 가치를 인식하는 체험이다; 계시는 personality가 살아남는 것을 보장한다.
102:3.10 과학은 무한한 우주의 분할된 부분을 식별하고 분석하며 분류하려고 한다. 종교는 전체 우주, 즉 전체의 개념을 이해하려고 한다. 철학은 과학의 물질 부분과 전체의 영적 통찰 개념을 일치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철학이 이 시도에서 실패하는 곳에서 계시는 성공하며, 우주 영역이 보편적이고 영원하며 절대적이며 무한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의 우주는 또한 끝이 없고, 제한이 없으며, 모든 것을 포괄한다 ―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으며, 조건이 없다. 우리는 무한한 '스스로 계신 이'가 또한 네바돈의 미가엘의 아버지이자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이신 것을 증언한다.
102:3.11 과학은 신(Deity)을 사실로서 나타낸다; 철학은 한 절대자 개념을 제시한다; 종교는 하나님을 사랑의 영적인 personality로 상상한다. 계시는 신의 통일적 사실, 절대자의 사상, 하나님의 영적인 personality, 이 세 가지가 통일됨을 확인시켜 주며, 더 나아가 이 개념―존재하는 우주적 사실, 영원한 mind 개념, 생명을 가진 무한한 영―을 우리의 아버지로서 제시한다.
102:3.12 지식의 추구는 과학을 구성한다; 지혜의 탐색은 철학을 형성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종교이다; 진리에 대한 갈망은 계시를 의미한다. 그러나 우주에 대한 인간의 영적 통찰에 실체감을 부여하는 것은 깃들어 있는 생각조절자이다.
102:3.13 과학에서, 개념은 실현의 표현에 선행한다; 종교에서, 실현하는 체험은 개념의 표현에 선행한다. 진화적인 믿음의 의지와 계몽된 이성, 종교적 통찰, 계시의 산물인 믿음의 의지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102:3.14 진화에서, 종교는 흔히 하나님 개념들을 인간이 창조하도록 이끈다; 계시는 하나님이 바로 사람을 진화시키는 현상을 드러내고, 한편 그리스도 미가엘이 땅에서 사신 삶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에게 드러내는 현상을 바라본다. 진화는 하나님을 인간 모습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계시는 사람을 하나님처럼 만드는 경향이 있다.
102:3.15 과학은 오직 첫째 원인으로 만족하고, 종교는 최상의 personality로 만족하며, 철학은 통합으로 만족한다. 계시는 이 셋이 하나이며, 모두 선하다고 확언한다. 영원한 실재는 우주의 선이며, 시-공간적 악의 환상이 아니다. 모든 personality들의 영적 체험에서, 그 실제는 선이고, 선이 실제라는 것이 항상 진실이다.
4. 체험에 대한 사실
102:4.1 생각 조절자가 너희 mind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너희가 다른 mind, 즉 인간이나 초인간 mind 의식을 아는 것 만큼이나 하나님의 mind를 아는 것은 더 이상 신비가 아니다. 종교와 사회의식은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있다: 이것들은 다른-mind 의식에 근거를 둔다. 다른 사람의 사상을 너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기술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mind를 너희 안에 있게” 하는 것과 같다.
102:4.2 인간의 체험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활동적인 질문하는 자아와 다른 활동적인 다른 실체 간의 상호작용이다. 체험의 양은 개념의 깊이와 외부 실체에 대한 인식의 총합에 의해 결정된다. 체험의 움직임은 기대하는 상상의 세력과 접촉된 실체의 외부 특성을 감각적으로 발견하는 예리함을 더한 것과 같다. 체험하는 사실은 자의식과 다른-존재들, 다른-것들, 다른-mind들, 다른 영들―의 합에서 발견된다.
102:4.3 인간은 아주 일찍부터 자신의 세상이나 우주에서 혼자 가 아니라는 의식을 갖게 된다. 자아의 환경 속에서, 타아에 대한 자연스러운 자의식이 생겨난다. 종교 안에서 믿음은 이 자연스러운 체험으로 전환시키는데, 즉 하나님을 다른 mind의 실체-근원, 본성, 운명-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그런 지식은 언제든지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실체이다. 하나님이 personality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한 인간 personality가 얻는 진짜 종교적 체험의 살아있는 부분이 될 수 없다.
102:4.4 인간의 종교적 체험에 존재하는 오류의 요소는, 우주 아버지에 대한 영적 개념을 오염시키는 물질주의 내용과 직접 정비례한다. 우주에서 영 이전 상태의 인간 진보는 순수하고 참된 영 실체인 하나님 본질에 대한 잘못된 사상을 그 스스로 벗어버리는 체험에 있다. 신(Deity)은 영(spirit) 그 이상이지만, 상승하는 인간을 위한 유일한 가능성은 영적인 접근뿐이다.
102:4.5 기도는 정말로 종교적 체험의 일부지만, 현대 종교는 예배의 본질적 소통을 더 많이 소홀히 함으로, 기도가 잘못 강조되어왔다. Mind를 반영하는 힘은 예배로 인하여 깊어지고 넓어진다. 기도는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지만, 예배는 운명을 밝혀준다.
102:4.6 계시된 종교는 인간 존재의 요소를 통일하고 있다. 계시는 역사, 조정된 지리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 심리학을 통합한다. 영적 체험은 우주에 있는 인간의 진짜 혼이다.
5. 의도적 잠재력의 우월성
102:5.1 믿음의 사실을 확립하는 것이 믿음이 담고 있는 사실을 확립하는 것과 같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단순한 생명이 personality 지위까지 진화로 진보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personality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시간 우주에서는, 잠재력은 항상 실제보다 우월하다. 진화하는 우주에서 잠재력은 무엇이 되는 것이고, 무엇이 되는 것은 신(Deity)이 의도한 명령이 펼쳐지는 것이다.
102:5.2 이같은 목적 있는 우월성은 원시 동물의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우주에 대한 경외감으로 변모하는 mind 관념의 진화에서 잘 보여진다. 원시인은 믿음보다 종교적 두려움이 더 컸으며, 실제적 mind 위에 있는 영적 잠재력의 우월성은 이 소심한 두려움이 영적 실체들 안에서 살아있는 믿음으로 전환될 때 증명되었다.
102:5.3 너희는 진화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영적 기원을 가진 개인적인 체험의 종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인간의 도덕은 가치를 인식할지 모르지만, 오직 종교가 그러한 가치를 보존하고, 높이고,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한 활동이 있어도, 종교는 감정화된 도덕 그 이상이다. 종교와 도덕의 관계는, 사랑과 의무, 아들 신분과 노예 상태, 본질과 물질의 관계와 같다. 도덕은 전능한 통제자, 섬겨야 할 신(Deity)을 드러낸다; 종교는 모두를 사랑하는 아버지, 즉 예배와 사랑을 받을 하나님을 드러낸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종교의 영적 잠재력이 진화된 도덕의 실제 의무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6. 종교적 믿음의 확실성
102:6.1 종교적 두려움은 철학적으로 제거하고, 과학의 꾸준한 진보는 거짓 신들(gods)의 죽음을 크게 높인다; 인간이 만든 신들의 이러한 죽음은 잠시 영적인 상상을 일시적으로 모호하게 할 수 있지만, 결국 그들은 영원한 사랑이자 살아있는 하나님을 그렇게 오랫동안 모호하게 만들었던 그 무지와 미신을 파괴한다. 생명존재와 창조자 사이의 관계는 살아있는 체험이고, 힘찬 종교적 믿음이며, 이를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삶의 부분을 고립시켜 그것을 종교라 부르는 것은 삶을 흐리게 하고 종교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배를 받는 하나님이 전적인 충성을 요구하거나 전혀 요구하지 않는 이유이다.
102:6.2 원시인의 신들은 자신들의 그림자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하나님은 모든 공간의 창조적 그림자를 구성하는 신성한 빛이다.
102:6.3 철학적 성취를 이룬 종교인은 개인적 구원의 personal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실체 이상의 어떤 것, 가치, 성취 수준, 고양된 과정, 변형, 시-공간의 궁극적 존재, 이상화, 에너지의 personalization, 인력의 존재, 인간의 예측, 자아의 이상화, 자연의 상승, 선에 대한 성향, 진화의 전진적 추진력, 또는 숭고한 가설 이상의 것이다. 종교인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 사랑은 종교의 본질이자, 뛰어난 문명의 원천이다.
102:6.4 믿음은 철학적 확률의 하나님을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에서 확실한 구원의 하나님으로 변화시킨다. 회의주의는 신학의 이론에 도전할 수 있지만, 개인적 체험의 신뢰에 대한 확신은 믿음으로 성장한 신념의 진리가 확인한다.
102:6.5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지혜로운 추론을 통해 도달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은 오직 믿음, 개인적으로 겪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다. 삶과 관련된 많은 부분에서, 그 확률은 고려되어야 하지만, 우주 실체와 접촉할 때, 그러한 의미와 가치가 살아있는 믿음으로 접근할 때 확실한 것이 체험될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혼은 이런 하나님의 지식이 전적으로 지적인 논리로 뒷받침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신빙성을 부정하는 불신자들의 질문을 받을 때에도 감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모든 의심하는 자에게, 그 믿는 자는 오직 "내가 모르는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알겠는가?"라고 대답할 뿐이다.(☞)
☞ 추수편(秋水篇)에 물고기에 관한 혜자(惠子)의 물음에 대하여 장자(莊子)가 한 대답
102:6.6 비록 이성은 언제나 믿음을 의심할 수 있지만, 믿음은 언제나 이성과 논리를 보완할 수 있다. 이성은 믿음이 도덕적 확신, 심지어 영적 체험으로 변할 수 있는 확률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은 처음 진리이자 마지막 사실이다; 따라서 모든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기원을 가지며, 한편 모든 사실은 하나님과 관련되어 존재한다. 하나님은 절대 진리이다. 사람이 진리로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을 이해하기-설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의 사실을 탐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체험과 하나님의 사실에 대한 무지의 엄청난 간격에는 오직 살아있는 믿음이 있어야만 메워질 수 있다. 이성만 가지고 무한한 진리와 우주적인 사실을 조화시킬 수 없다.
102:6.7 확신은 의심을 뿌리치고 두려움을 이겨내기 힘들 수 있지만, 믿음은 항상 의심을 이긴다. 믿음은 적극적이고 살아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것이 항상 부정적인 것보다 우위에 있으며, 진리가 오류보다, 체험이 이론보다, 영적 실체가 시-공간의 고립된 사실들보다 우위에 있다. 이러한 영적 확신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그러한 신봉자들이 진정한 영적 체험의 결과로 맺는 영의 사회적 열매에 있다. 예수는 말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네 동료를 사랑한다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02:6.8 과학에서 하나님은 가능성이며, 심리학에서는 바람직한 것, 철학에서는 가능성, 종교에서는 확실성, 종교적 체험에서는 실제이다. 이성은 있음 직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는 철학이, 확실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또 발견하는 그 종교적 믿음을 매우 존중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또한 과학은 인간의 지적, 철학적 재능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점점 더 낮은 지능에서 생겨났고, 마침내 모든 사고와 느낌이 전혀 없던 원시 생활에서 기원했다는 가정을 고수하면서, 신빙성을 근거로 종교적 체험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102:6.9 진화의 사실들은, 하나님을 아는 필사자의 종교 생활에서 얻는 확실한 영적 체험이 실재한다는 진실에 맞서 대항해서는 안 된다. 지적인 사람들은 아이들처럼 따지기를 그만두고, 사실의 관찰과 나란히, 진리의 개념을 너그럽게 대하는 논리, 일관성 있는 어른의 논리를 사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거듭하여 일어나는 우주 현상 하나하나와 마주쳐서, 틀림없이 높은 것을 틀림없이 낮은 것의 탓으로 돌림으로 현재의 반론을 지속해서 되풀이할 때, 과학적 물질주의는 무너져버렸다. 일관성이 있으려면, 목적을 가진 창조자의 활동을 인정해야 한다.
102:6.10 유기체의 진화는 하나의 사실이다. 의도한 진화, 곧 진취적 진화는 진실이며, 늘 올라가는 진화적 성취 현상, 다른 면에서 모순되는 현상을 일관성 있게 만든다. 어떤 과학자라도 그가 선택한 과학에서 높이 올라갈수록, Supreme Mind가 지배한다는 우주 진리의 편을 들어, 물질주의적 사실에 근거를 둔 이론들을 점점 더 버릴 것이다. 물질주의는 삶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예수의 복음은 모든 필사자를 엄청나게 향상시키고 신성하게 고양시킨다. 필사 존재는 사람이 위로 뻗은 손과 신이 아래로 뻗은 구원의 손이 만나는 실체를 깨닫는, 흥미롭고 매혹적인 체험으로 시각화되어야 한다.
7. 신성한 자의 확실성
102:7.1 우주의 아버지는 스스로 존재하므로, 또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는 실제로 모든 이성적인 필사자 안에서 산다.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아들 신분은 아버지 신분을 확실하게 만드는 유일한 체험이다. 우주는 어디서나 변화를 겪고 있다. 변하는 우주는 의존적인 우주이다; 그러한 창조는 최종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유한한 우주는 온전히 궁극위와 절대자에게 의존한다. 하나님과 우주는 동일하지 않다; 하나는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이다. 원인은 절대적이고 무한하며 영원하고 변함이 없다; 결과는 시-공간을 초월하지만, 끊임없이 변화하고 언제나 성장한다.
102:7.2 하나님은 우주에서 스스로 원인이 된, 하나뿐인 사실이다. 그는 사물과 존재들로 이루어진 온 창조의 질서, 계획, 목적의 비밀이다. 어디서나 변하는 우주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법칙,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습관에 따라 규제되고 안정된다. 하나님의 존재, 신성한 법칙은 변함이 없다; 즉 우주와의 관계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우주에 항상 적응할 수 있는 상대적인 계시이다.
102:7.3 하나님 없이 종교를 창안하려는 사람들은 나무 없이 열매를 따고 부모 없이 자식을 낳는 사람들과 같다. 원인 없는 결과는 있을 수 없고, 오직 '스스로 계신 이' 만이 원인 없는 존재이다. 종교적 체험의 사실은 하나님을 의미하며, 그러한 개인적 체험의 하나님은 personal 신(Deity)이어야 한다. 화학 공식에 기도하거나, 수학 방정식을 간구하거나, 가설을 숭배하거나, 가설에 의지하거나, 과정과 소통하거나, 추상화를 섬기거나, 율법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는 없다.
102:7.4 사실, 많은 종교적 특성은 비종교적 뿌리에서 성장할 수 있다. 인간은 지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면서도 도덕적으로 선하고, 충성스럽고, 효도하고, 정직하고, 심지어 이상주의적일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기본 영적 본성에 많은 순수 인본주의적 가지를 접목하여 신이 없는 종교를 대신하여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험에는 생존 가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께로 상승하는 것이 빠져있다. 그러한 필사 체험에는 겨우 사회적 열매는 열려도, 영적 열매는 열리지 않는다. 접붙인 가지가 열매의 본질을 결정하지만, 생명력을 제공하는 것은 원래의 신성한 자질인 mind와 영의 뿌리에서 뻗은 것이다.
102:7.5 종교의 지적 특성은 확실성이다; 철학적 특성은 일관성이다; 사회적 열매는 사랑과 봉사이다.
102:7.6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미신과 전통, 현대의 물질주의적 성향의 복잡한 미로에서 하나님을 찾는 데 어려움이나 장애물을 무시하거나 눈을 감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 모든 방해물과 마주쳐서 이겼고, 살아있는 믿음으로 이겨내고, 방해물이 있는데도 영적 체험의 고지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내면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확신을 가지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데 대한 반대 의견과 어려움을 확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러한 확신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결점을 찾아내고, 질문을 던지고, 이의를 제기하는 데는 큰 지적 깊이가 필요하지 않지만,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뛰어난 지혜가 필요하다; 믿음의 확신은 이러한 피상적인 논쟁들을 다루는 가장 훌륭한 기법이다.
102:7.7 만약 과학, 철학, 또는 사회학이 참된 종교의 선지자들과 논쟁하면서 독단적이 된다면,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영적 체험의 확실성으로 더 멀리 보는 독단으로 대응해야 한다. "나는 내가 체험한 것을 안다, 나는'스스로 계신 이'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앙인의 개인적 체험이 교리에 의해 도전받는다면, 체험적 아버지의 믿음으로 태어난 이 아들은 그 도전할 수 없는 교리, 즉 우주 아버지와의 실제 아들 관계에 대한 진술로 대답할 수 있다.
102:7.8 오직 한 절대자, 무제한 실체만이 감히 일관되게 독단적일 수 있다. 독단적이 되려는 사람들이 일관되게 행동한다면, 결국 에너지의 절대자, 진리의 보편자, 사랑의 무한자에게로 몰릴 수 밖에 없다.
102:7.9 우주적 실재에 대한 비종교적 접근이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믿음의 확실성에 도전한다고 가정한다면, 영 체험자도 과학의 사실과 철학의 개념에 대해서도 그들이 역시 증명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것들은 과학자나 철학자의 의식 속에 있는 체험이기 때문이다.
102:7.10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피할 수 없고, 모든 사실 중에서 가장 실재하며, 모든 진리 중에서 가장 살아있고, 모든 친구 중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신성한 하나님, 우리는 모든 우주 체험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확실히 해 둘 권리가 있다.
8. 종교의 증거
102:8.1 종교의 실체와 효력에 대한 가장 높은 증거는 인간 체험의 사실에 있다; 본래 두려워하고 의심이 많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강한 자기 보존 본능과 죽음 이후의 생존에 대한 갈망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현재와 미래의 가장 깊은 관심을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그 힘의 성격자에게 온전히 맡길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핵심 진리이다. 이러한 보살핌과 마지막 구원을 받는 값으로 그 능력의 성격자가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하여 어떤 두 종교도 일치하지 않는다; 사실 모두가 어느정도 의견이 다르다.
102:8.2 종교의 진화적 위치를 평가할 때, 그 도덕적 판단과 윤리적 기준이 가장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종교의 수준이 높을수록, 그것은 지속적으로 향상되는 사회적 도덕성과 윤리적 문화에 의해 더욱 장려되며, 또한 그러한 도덕성과 문화에 의해 자극받는다. 종교를 그에 수반되는 문명의 상태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문명의 실제 본질은 그 종교의 순수성과 고귀성에 의해 평가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세계의 많은 저명한 종교 지도자들은 사실상 무학에 가까웠다. 영원한 실재에 대한 구원의 믿음을 실천하는 데 세상의 지혜가 필요하지는 않다.
102:8.3 다양한 시대의 종교 차이는 전적으로 인간의 현실에 대한 이해 차이와 도덕적 가치, 윤리적 관계, 영적 실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 달려 있다.
102:8.4 윤리는 영원한 사회적 또는 인종적 거울로서, 관찰할 수 없는 내면의 영적 및 종교적 발전의 진전을 충실히 반영한다. 인간은 언제나 그가 아는 최선의 조건으로, 가장 깊은 개념과 가장 높은 이상의 조건으로, 하나님을 생각했다. 역사적인 종교조차도 항상 인식된 최고 가치를 바탕으로 하나님 개념을 창조해왔다. 모든 지능적인 존재는 자신이 아는 가장 좋고 높은 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102:8.5 종교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표현으로 축소될 때, 윤리 문화와 도덕적 진보라는 자체 기준에 따라 문명과 진화의 진보를 대담하게 비판해 왔다.
102:8.6 개인적 종교는 인간의 도덕적 진화를 앞서지만, 조직화된 종교는 천천히 바뀌는 인류의 풍습 뒤에 항상 처졌다는 것을 기록하는 것은 유감이다. 조직된 종교는 줄잡아 느린 것이 입증되었다. 선지자들은 종교의 발전에서 보통 사람들을 이끌었다; 신학자들은 보통 그들을 저지했다. 종교는 내적이거나 개인적인 체험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종의 지적 진화보다 훨씬 앞서 발전할 수는 없다.
102:8.7 그러나 종교는 이른바 기적에 대한 호소로 강화되지 않는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마법의 원시 종교로 회귀하는 것이다. 참된 종교는 기적과 관련이 없으며, 계시된 종교는 결코 권위의 증거로 기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개인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가장 높은 종교인었던 예수의 생애도 바로 그러한 개인적인 체험이었다;육체를 입고서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다가 한껏 찾아내는 인간, 필사 인간이었고, 한편 바로 그 인간 체험 속에서 사람을 찾다가 무한히 높은 완전한 혼이 한껏 만족하기까지, 사람을 찾아내는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네바돈의 우주에서 가장 높은 종교, 즉 나사렛 예수의 지상 생활에서 드러난 종교이다.
102:8.8 [네바돈의 한 멜기세덱이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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