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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지닌 능력
누가복음 17장 5-6절 /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구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는 것에서“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주기도’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약하여 말하면,“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하시면서“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 앞인 17장 1-4절에서 누가는 예수께서“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라고 하시면서,“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셨음을 언급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돌이켜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 때문에 세상에는 화가 있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다. 네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인자는 잃은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으시고는 양 일백 마리를 가지고 비유를 들어 예수님은 죄인을 회개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으며, 그에 따라서 찾은 자를 인하여 매우 기뻐하심을 나타내시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찾으심에 있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잃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때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주님, 형제가 제게 죄를 지었을 경우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누가복음 본문 앞인 17장 3-4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있습니다.“만일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이라도 네게 돌아와서‘회개한다’고 하면, 너희는 용서하라.”
마태복음에서는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를 드러내는 베드로의 물음에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용서인 일곱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말이죠. 마음을 합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들어주실 것이라고 하신데 따른 것입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용서에 있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형제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는 이미 그 용서를 뜻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에 따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자비가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자비에 하나님이 택정하신 모든 백성이 있게 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고자 하십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시고 맡기신 일이시기에 말입니다.
누가복음으로 돌아와서 보면, 예수께서 형제의 죄를 용서를 구하는 기도에 있게 하는 말씀을 하시자 사도들이 주께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예수께서 말씀하신 형제의 죄를 용서하라는 말씀에 따를 수 있는, 그래서 형제의 죄를 용서할 것을 구하는 기도에 있을 수 있는 믿음에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이죠. 사도들이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예수께 구한 것은 형제들이 주께 죄를 범함에 있는 잘못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에 있게 해 달라는 것에서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저질렀어도 그들이 죄를 저지른 그때마다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줄 수 있는 용서에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를 구하면 용서하는 자비에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지는 그 하나님의 자비에 있는 믿음에 있게 해 달라는 요청에서 제자들은 예수께“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예수님은 겨자씨를 들어 그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뽕나무더러 명하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 라고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의 겨자는 풀과에 속한 것으로 밭에서 재배하는 1년초 또는 월년초가 있는데, 그 키는 1-2m 정도입니다. 겨자는 근생엽과 경생엽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근생엽은 깃꼴로 갈라지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나, 경생엽은 거의 톱니가 없습니다. 겨자는 동양 및 서양에 모두 있는데, 동양 겨자에 비해서 서양 겨자는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이 겨자의 씨는 그 크기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누가 표현하기를 종이에 볼펜을 찍었을 때 그 점만 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습니다. 우리가 씨로써 작은 것을 생각할 때 깨의 씨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깨의 씨보다도 작은 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런 조그마한 아주 작은 겨자씨가 자라면 그 키가 무려 1-2m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이 겨자씨를 들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기어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태복음에서는“너희가 이 산더러 명하여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 17:20)라고 하였습니다. 백두산,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우리가 잘 아는 이런 태산에게 명하여“산아, 뽑혀 저 동해 바다 깊은 곳에 우뚝 서라!”라고 명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겠는지요. 예수께서 과연 이런 일을 하시겠는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의는 이것보다 더 큰 일도 하는 믿음에 제자들이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실제로 유대 땅에 있는 산을 명하여 갈릴리 바다에 세우는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일을 하실 수 없어서 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그리고 성령 하나님과 더불어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신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으며, 그 사람에게 생기를 주어 살아 움직이게 하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홍해를 갈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셨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창조 사역과 함께 구원 사역을 행하심에서 필요한 이적은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으시는 것보다 더 큰 능력을 행하십니다.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으시는 것이 구원 사역에 필요한 것이라면 능히 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여 알게 해주시기 위해서 비유로 들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으시는 일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태산을 옮겨 바다에 심으시는 일을 행하시는 것보다 더 큰 경이로운 이적이 행해지는 능력에 제자들이 있게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으로 태산을 명하여 바다에 심기어라 라고 하여도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는 것에서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는 믿음으로“우리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며“우리에게 그렇게나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 용서에 있을 수 있는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에서“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할 때“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라고 하신 그 용서가 제자들이 증거한 예수님에 의해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산상설교에서 주기도문을 통하여 가르치신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이루어짐에 제자들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믿음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에 믿음이 더해져서 더 크고 더 강력한 믿음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이루실 기도에 제자들의 구함이 있게 하신 것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은혜로 주신 믿음인 그들의 주님이신 것으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 믿음이 겨자씨 한 알로 여겨질지라도 태산을 옮겨 바다에 던져 깊은 물속에서 우뚝 솟아 있는 위용을 드러내는 능력을 발휘하듯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용서의 자비에 두시고서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늘의 능력을 이 땅에서 행하십니다.
“너희는 용서하라!”이는 달리 표현하면,“너희는 너희가 입은 하나님 나라의 자비의 풍성함을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이시는 용서! 예수님은 이 용서에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이 유대 지도자들의 충동에 의해, 체포되어 총독 빌라도 앞에 서 있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것을 목청 높여 외쳐 마침내 관철시켰을 때 예수님은 그 해를 당하시면서 유대 백성들이 예수께 저지르고 있는 것이 그 자신들과 자손 대대에 어떤 저주가 될 것인지를 알지 못함을 하나님 아버지께 아뢰며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것을 아버지께 구함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입음에 있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보며 자신의 죄를 용서하여 주실 것을 구하는 한편 강도의 죄를 용서하여 주님의 나라에 그가 있게 하시는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이 모두에서 예수님이“너희는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자비를 본 제자들은 성령강림 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함으로써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행해지는 용서를 베품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동서남북 사방에서 그 용서를 받은 자들이 밀물 듯이 몰려들어 하나님의 나라에로 들어와 하나님이 베푸시는 잔치의 떡을 먹는 참으로 복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으로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름에 있는 것은 뽕나무 또는 태산을 명하여 바다에 던져 깊은 한 가운데 우뚝 서게 라는 것보다도 더 큰 일에 있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온 천하를 가지고서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는 것인데, 예수께서 주신 믿음이 그 큰 일을 행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구원은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크기에 의해서 영향을 받고 좌우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은 사람에 따라서 적거나 많은 것이 아니며 또한 작거나 큰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자체가 온전함[완전함]이며, 이 믿음이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어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용서에 있게 하시는 하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베풀어지는 용서이기에 이 용서는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해서, 더 나아가서는 일흔 번에 칠천 번이라도 해서 용서에 있는 것이 우리 믿음에 있는 주께서 행하시는 용서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용서하고자 하셔서 하나님의 자비로 베풀어지는 용서는 온 땅에 있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다 베풀어져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충만수에 이를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에 말입니다. 이 용서의 품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입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이 함께 하며 자신들이 겪은 크고 놀라운 일에 대한 신앙고백에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