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의 엄위(嚴威)
27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예레미야서는 “열국”(46장-51장)에 대한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이미 36장에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반복하므로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①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롬 8:18) 하고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열국을 심판하사 보수하여주실 일은 장래에 있을 일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고난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도들이 처한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②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 하신 경각심을 일깨워주기 위해서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51:64에서 “예레미야의 말이 이에 마치니라” 하고 사실상 끝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예레미야서를 여기서 마치고 있다면 죄에 대한 경각심이 해이해 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상기시켜야할 필요를 아셨습니다.
③ 하나님 말씀의 엄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예루살렘이 심판 받은 현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로 하신 경고가 일점 일획도 어긋남이 없이 성취되었음을 증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를 들어서 후대에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점을 역대하 36:22에서는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하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④ 예루살렘의 심판을 통해서 열국에 대한 심판, 특히 바벨론이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의 확실성을 말씀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은 예언 성취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11)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둘째 단원(12-30) 본토에서 떠났더라
셋째 단원(31-34)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첫째 단원(1-11)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3).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2). 그리하여 “여호와의 진노하심이, 그들을 그 앞에서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고 말씀합니다. 본 단원의 핵심이 “쫓아내시기까지에 이르렀더라”에 있습니다. 오죽했어야 쫓아내시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쫓아내시는 일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들어서 역사하셨을 뿐입니다.
① “그 성을 대하여 진을 치고 사면으로 흉벽을 쌓으매”(4중), 이는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나무를 베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흉벽을 쌓으라 이는 벌받을 성이라”(6:6)의 성취입니다.
② “성이, 에워싸였더니”(5), 이는 “너희를 에운(포위한)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21:9하)의 성취입니다.
③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매”(6), 이는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11:22, 21:9)의 성취입니다.
④ 시드기야 왕이 밤중에 도주했다가 붙잡혀옴(7-9), 이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바 “내가 또 내 그물을 그의 위에 치고 내 올무에 걸리게 하여 그를 끌고 갈대아 땅 바벨론에 이르리니 그가 거기서 죽으려니와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겔 12:13) 하심의 성취요, 바벨론으로 끌려가지만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⑤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 날까지 옥에 두었기”(11)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엄위를 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1)입니다.
둘째 단원(12-30) 본토에서 떠났더라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27).
12-16은 파괴하는 내용인데,
①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불사르고”(13상),
②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13하),
③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14),
④ “사로잡아 옮겨가고”(15하) 합니다.
17-23은 약탈하는 내용인데,
① “바벨론으로 가져갔고”(17하),
② “다 가져갔으며”(18하),
③ “시위대 장관이 또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는데”(19) 합니다.
24-30은 인명(人命)에 관한 내용인데,
① “세 사람을 잡고”(24),
② “잡아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26),
③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죽였더라”(27).
④ “사로잡아 옮긴 백성이 이러하니라”(28) 하고 포로로 잡아간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총수가 사천 육백 인이었더라”(30)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추가로 사로잡아간 자들(왕하 24:14)은 포함되지 아니한 수입니다. 이상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경고대로 성취된 일임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셋째 단원(31-34) 그 머리를 들게 하고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간 지 삼십 칠 년, 유다 왕 여호여긴을 옥에서 내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31).
① “머리를 들게 했다”는 말은 그의 지위를 회복시켜주었음을 뜻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오 나의 영광이시오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시 3:3) 하고 고백하고 있는데, “인장 반지”(22:24) 같은 여호야긴을 내어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머리를 들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② “그와 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32),
③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33) 했다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회복시켜주셨을까요? 그 점을 족보를 통해서 엿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 시드기야로 알고 있는데, 성경은 여호야긴(여고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다의 왕위가 요시야-여호야김(요시야의 아들)-여호야긴(여호야김의 아들)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야긴의 뒤를 이은 시드기야는 여호야긴의 아들이 아니라 요시야의 아들로 끼어 든 셈입니다. 이 점이 왜 중요하냐 하면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하기 위하여 내세운 주님의 족보가 이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족보에 의하면 유다의 마지막 왕은 여호야긴으로 되어있을 뿐(마 1: 11) 시드기야는 없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께서 그 여호야긴의 머리를 들게 하시고, 그 위를 높이고, 의복을 바꾸게 하셨다는 것은 “이전에 다윗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대하 21:7) 한 그 언약을 지켜주심을 나타냅니다.
⑤ 그러므로 그냥 여호야긴이라 말하지 않고, “유다 왕 여호야긴”(31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구속사의 관점에서 본 예레미야서를 마쳐야만 하겠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확실히 해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가 실패의 역사인가 하는 점입니다. 이 점을 성경은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하리요”(롬 3: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철저하리만치 “불의” 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결과 멸망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자기 의”로는 구원의 가망이 없고 “하나님의 의”만을 기대할 것 밖에 없음을 입증해 주었다는 말입니다.
구약 성경은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음”(롬 3:20)을 철저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서는 유다의 멸망으로 마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말하면 유다 왕의 머리를 떨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유다 왕 여호야긴의 머리를 들게” 하시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사 42:3) 항상 등불을 남겨주셨다가 그리스도를 어두운 세상에 “참 빛”(요 1:9)으로 보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형제의 머리를 들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