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선수 출신의 주지스님
메릴랜드, 버지니아, DC의 3개주 경계선과 맞물린 트라이 앵글 상업지역에 위치한 메릴랜드 보현사는 일반사찰과는 다른 면이 많은 사찰이다.
우선 아난 주지스님이 사업을 하면서 중생제도를 하고 법당이 가게 위층인 2층에 자리잡고 있다. 젊은 시절에 씨름선수로 단련된 우람한 체구와 충청도 사투리는 친근한 가정교사 같기도 하고 충청도 머슴과 같은 인상을 지닌 아난스님은 스님으로 Liquor Business를 하기 때문에 외부에 알리기를 지극히 싫어한다.
스님이 사업을 하는 주목적은 경제적 밑바탕이 없는 현대포교는 죽은 포교와 마찬가지이고 현실적으로 불전에 의지하는 사찰운영은 갈수록 쇠퇴할 수 밖에 없다는 소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지는 않지만 중국 비구니 스님이 모자를 쓰고 네바다 주 리오의 카지로에서 딜러로 일하면 돈을 벌어서 큰 절을 건립한 이야기를 불교계 종사자로부터 최근에 들었다.
드라마틱한 인생유전과 출가동기
아난 스님의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과 매일 장사하면서 부딪히는 경험은 살아있는 법문으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중생의 고통을 현실감있게 이해하는 밑거름이 되고 있다. 주지스님의 인생유전과 출가동기를 살펴보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한국에서 잘 나가던 은행원 생활을 접고 장인회사를 돕던 중 부도를 맞아 도피생활을 시작한 것이 본의 아니게 해외를 전전하게 되었다. 그중 프랑스에서의 외인부대 생활을 거치며 12개 유럽국가를 전전하다 멕시코로 넘어오게 되었다. 아슬아슬한 미국불법 진입은 007영화를 방불케 하였으며 영주권없는 초기의 이민 생활은 공사판과 APT 청소원 등으로 닥치는 대로 7년을 살았다고 하신다. 미처 경험해 싣지 못했던 밑바닥 인생은 자살직전까지 몰고 갈 만큼 고독과 비참함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종교를 찾은 것이 첫 번째 기독교이었고, 열심히 3년간 교회출석과 성경공부를 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팔만대장경을 접하게 되어 탐독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비스럽고 불가사의한 몇 몇 내용들 때문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서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부처님 탄생과 그 과정이었으며, 둘째는 법화경을 설하실 때 미간에서 빛을 발광하신 점, 셋째는 법화경에서 근기에 따라 나투시다가 자타일시 성불도를 이루신 점.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열반에 드실 때 두발이 관 밖으로 나온 점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호기심이 남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던 중, 물밑에 감춰진 무량광대한 부처님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그 흥분과 감탄은 마치 감춰진 보물을 발견한 놀라움 이었고 이러한 놀라움은 곧이어 스님이 되기를 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 한다.
원리원칙과 내실위주
그러나 Liquor Business 인수한지 6개월 만에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으니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스님으로 1992년 계를 받고 형식에 얽메이지 않고 가게 2층을 법당으로 꾸미고 2명의 신도와 함께 법회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주일 내내 성심껏 준비해간 법문은 긴장되고 떨려서 10% 밖에 전달 못했으나 지금은 때로는 책상을 치며 설법을 하니 그동안 스님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다.
스님은 한국형 고질병인 허례허식과 빨리 빨리를 하루속히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몸집 부풀리기에 급급한 타종교 현실을 꼬집고 시대가 변하여도 부처님 시절의 근본정신을 지키도록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음식엔 오신채로 하루 한 끼만 식사하고, 그리고 15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불보살님께 직접 공양을 지어 올리고 있다.
또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를 미주에서는 대부분 편의를 위해 일요일로 조정하지만 스님은 당일 정시에 행사를 하고 있다. 원효대사는 산중불교에서 벗어나 저잣거리로 나아가 중생과 어울리며 포교하였듯이 아난스님은 도심 속 포교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포교는 멀리 있지 않고 매일 만나는 흑인손님이라고 생각한다. 또 흑인들로부터 얻은 수입을 흑인사회에 환원됨이 없이 타지역에 살며 흑인을 마치 범죄자 취급하는 일부 한인들의 편견은 큰 모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법당과 살림 집이 흑인거주 지역의 건물에 있는 것을 보면 24시간 흑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셈이다. 보현보살의 대원처럼 흑인들에게도 베풀고 이해하고 마음으로 다가서는 포교를 해서 그런지 흑인들로부터 존경받으며 인기가 짱인 것이다.
자랑스런 신도와 관세음보살 가피력
가끔 새로운 한국신자들이 찾아오지만 보현사의 외형상의 모습에 실망한 나머지 중도하차 하는 경우가 있으나, 스님은 개념치 않고 양보다 질을 중요시하며 겉모습에 현혹되는 불자들은 어디가나 부처를 찾을 수 없다는 신념으로 정진한다. 이러한 연유에서인지 한번 불심이 불붙은 보현사 신도들은 흔들림이 없고, 확고한 삼보에 대한 믿음과 自利利他行을 실천하는 것을 보면, 마치 특수부대 정예요원을 양성하는 산실 같은 느낌이다. 정예요원중 으뜸은 당연히 Tommy씨 가정으로 아들 5형제를 둔 가장으로 보현사가 자랑하는 보물임에 틀림없다. 부인은 교사이고 Tommy씨는 아들들과 불심이 혼연일체가 되어 108배와 참선, 경전공부, 사찰예절은 해인사 강원 사미과(?) 수준을 넘는다.
특히 Tommy 씨는 좋은 직장도 마다하고 스님을 존경하는 나머지 스님 사업장에서 일하며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돕고 있다. 한 벌의 여름옷으로 1년을 지내며 하루 한끼 식사와 평상심이 도라는 생활습관은 부처님 시절을 그대로 재현하는 거사님과 같다. 다음으로 자랑스런 신도님은 회장 부부이다. 회장은 월남해병 출신으로 힘든 이민생활을 술로 달래다가 불심이 깊어진 후로는 술도 멀리하고 무주상 선행을 안 밖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연유인지 연이은 사업성공으로 든든한 재력가이고 자식들 또한 성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는데 이는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누구보다도 흠뻑 받지 않았다고 볼 수가 없다. 혹자는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우연의 일치나 미신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여러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분명히 보현사는 관세음보살의 도량임에 틀림없다. 이를 증명하는 예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
스님이 운영하는 리쿼스토어는 매년 1-2번을 무장강도 침입을 연례행사처럼 치르지만 그때마다 무사하였다. 작년에는 그 지역 갱들과의 분쟁으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장면을 연출하였는데 움직이는 차안에서 여러 명이 자동기관총과 권총으로 가게를 벌집처럼 만들었으나 스님은 무사하였다. 그때 퍼부은 총알은 스님을 비켜가 선반에 진열된 수 많은 술병이 터져 술바다를 이루기도 하였다. 또 6년 전에는 돌풍을 동반한 태풍으로 전체가 정전사태를 맞았으나 스님 사업장만 전기가 살아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적도 있다. 그리고 초대 신도회장은 거듭된 실패 후 스님이 밀어준 종자돈으로 차린 짬뽕집이 대박을 터뜨려 상당한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그 외에도 사업 실패와 부진으로 답답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신도님들은 거의가 좋은 열매를 맺고 있다. 필자 또한 부모님 제사로 시작된 아난 스님과의 인연으로 잿더미에서 기사회생으로 일어났으며 인생관 마저 송두리째 바뀌어 남은 인생을 불교와 함께 하려고 포교사 시험도 치렀다.
그 밖에 불가능했던 영주권 취득, 수재들만 입학하는 TJ High School 합격, 건강회복 등은 관세음보살의 가피력이 아닐 수 없다.
끝으로 산중의 절이나 2층 다락방의 절이나 부처님은 그곳에 안계시고, 내마음이 곧 부처라고 깨달으면 진실한 불자라고 가르친다.
종연생 정연멸./ 선인산과 악인악과를 귀가 따갑게 부르짖고 계신다.
장소: 6223 Livingstone Rd.. Oxonhill, MD 20745 301-839-3366(Tommy 한국어 영어)
황인수 / 07 연꽃축제와 아세아 문화축제 준비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