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 왜성(西生浦 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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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 목 |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
- 소재지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일원 |
- 지정일 |
1997.10.30. |
- 시 대 |
조선시대 |
- 소유자 |
울산광역시 |
- 관리자 |
울주군청 |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쫒긴 왜군은 축성과 양식 확보의 계획을 세웠는데, 남해안의 중요 지점을 기점으로 해서 한강 이남의 4도를 차지할 목적으로 선조 26년(1593)에 전라도 순천에서 경상도 서생포 사이에 18개의 성을 쌓았다. 이 성도 그 중의 하나로 선조 25년 7월부터 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1593)에 완성한 것으로 그 내부가 45,960평에 달하는 거대한 석성이다.
현재 이 성의 형태로는 약 15도 가량 기울기를 가지는 성벽이 산정상을 향해 300m 정도 길게 뻗어 있어며, 진하바다를 바라보는 200m높이의 나즈막한 산정에 3단으로 겹을 두르고 있으며, 성벽의 높이는 6m가량 된다.
3단 가운데 가장 하단인 3지환(三之丸)은 마을이 조성되면서 거의 허물어지고 산정을 향한 성벽만이 거의 원형태로 보존되고 있다. 3지환 내에는 집과 밭이 들어서 있어 성안이라는 흔적 거의 찾아보기 힘드며, 성벽을 왼쪽으로 하고 정상을 향해 5분여 오르면 2지환에 들어서는 입구가 있다. 이 입구는 성벽이 양쪽에서 사선으로 길게 아래로 긋는 형태로 문을 만들고 있다.
본지환으로 들어서면 사방이 다시 성벽으로 둘러쳐지고 네모진 마당이 있다. 가토오 기요마사가 본부로 삼고 조선의 점령을 꿈꾸던 곳이다. 북쪽과 서쪽으로 문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장군수라는 우물 흔적도 있다. 장군이 기거했던 천수각(天守閣)이라는 누각도 있다고 전해진다. 성안은 네모지만 성벽이 둘러쳐진 모양은 마치 미로처럼 보인다. 승리를 나타내는 승(勝)자의 옛 전자를 묘사하여 쌓은 것이라고도 전해진다.
지형적으로는 바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서쪽 문루에 올라서면 진하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쪽 문루에 올라서면 울산쪽이 내려다 보인다. 아래에서는 소나무 숲에 가려 성이 있는지를 잘 알 수 가 없다.
성안에 설치된 안내 표시판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선조 25년(1593) 임진왜란 때 왜장 가토오 기요마사가 축성한 일본식 석성으로써 계단식으로 쌓았다. 산의 정상부에서 아래로 성벽을 겹으로 두르고 성벽은 기울기를 많이 가지는 특징이 있어 16세기 말기의 일본성곽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석축 성벽만 남아 있지만 비교적 완연하며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우리측에서도 사용했던 성이다. 이 성은 기장 죽도성과 부산진성 및 울산왜성(학성)과 봉화로 서로 신호연락하였다 하여 일명 봉화성이라고도 이름한다. 성터에는 당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충신 애국지사를 모신 창표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이 성에서 왜군이 물러간 것은 선조31년(1598) 명나라 마귀제독(麻貴提督)이 정유재란때 왜군을 대파하고 탈환했다. 기록으로는 선조 27년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이고을 찾아와 카토오 기요마사와 담판을 벌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4차례에 걸친 회담은 왜군의 어처구니 없는 제안으로 결렬되었고 마침내 명나라 마귀제독의 도움으로 서생성을 탈활한 것이다. 서생성은 임진란때 왜군이 가장 오래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던 성이기도 했다.
<자료참조> '동해 고래는 반구대에 살고'
찾아가는 길
덕하 검문소에서 온산공단을 지나면 진하해수욕장이 나온다. 진하해수욕장 입구에서 삼거리를 만나는데 왼쪽으로 해수욕장으로 가고 오른쪽으로(성안마을)길을 따라 가면 왜성의 성문이 보인다. 여기서 오른편으로 조금 올라가면 넓은 평지가 나오는데 도로방면으로 길을 따라 산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3지환, 2지환, 정상에는 본지환을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