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그림의 설악가-79
무거운 목걸이 14
낙엽이 눌린 자리를 살피던 알렉산더 박사가 호랑이가 자고 간 자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털끝이 밝은 고동색으로 보이는 호랑이 털을 찾아서 건네준다. 털을 받아들고 살펴보며 호랑이를 끌어안고 있는 듯 한 느낌 속으로 빠져든다. 설악산에 호랑이가 한 가족만 있어도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입는 일은 없었을 텐데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손을 대 본다. 정말 그대가 누웠다간 자리란 말인가? 우묵하게 눌린 자리는 길이가 1m 60cm가 넘고 폭이 50-70cm 쯤 되는 누웠다 간지 4-5일 쯤 되었다고 했다. 머리털이 쮸뼛서는 느낌과 함께 두리번거리면서 숲 속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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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아브렉 산을 삶터로 수컷 한 마리와 암컷 한 마리, 그리고 새끼 한 마리가 가족을 이루고 살면서 이곳에는 1주일에 한번쯤 다녀간다고 했다. 눌린 자국이 4-5일 쯤 되었으니까 2-3일이면 호랑이를 만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함께 기다려 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 잡혔었다. 마음뿐 정말 그렇게 하라고 한다면 할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오그라드는 느낌이지만 이런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마음에 따라 멈추기도 하고 쏜살같이 지나가기도 할 것 같았다. 설악산에서의 기다림과는 다른 느낌으로 온몸을 휘감는 전율은 호랑이라는 범상치 않은 존재 때문일 것이다.
구름이 잔뜩 끼고 해는 서산으로 기운다. 멀리 테르네이는 저녁연기가 낮게 깔리면서 마을을 휘감고 있다. 스산한 저녁 바람이 일고 목덜미를 파고드는 차가움에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지만 써늘함이 온몸을 부르르 떨게 한다. 낙엽을 밟으며 내려오는 길에 뜯겨진 검은 털이 흩어져 있었다. 털을 살펴보니 곰이 누군가에게 잡아먹힌 것이었다. 곰을 잡아먹을 수 있는 짐승이 누굴까? 호랑이 말고 누가 또 있을까? 털을 한 움큼 봉투에 담고 아침에 지나친 호수 쪽으로 가는 산길로 들어섰다. 신갈나무가 무리지어 있는 가운데 자작나무가 하나둘 보인다.
이 때 낙엽 위에 곰 발 하나가 살은 모두 뜯어 먹힌 채 뒹굴고 있었다. 곰 털이 있었던 곳과는 꽤 떨어진 곳인데 어떻게 발만 이곳에 있는 것일까? 털이 있던 곳에서 곰을 잡아먹고 발 하나만 물고 왔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짐승이 먹고 남은 찌꺼기에서 발을 하나 물고 온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은 그칠 줄 모르고 삶과 죽음에까지 다다른다. 자연이 살아있는 산에서 보고 느끼는 것과 죽은 산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얼마나 다른가.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산길에서 오직 경관만 바라볼 뿐인 설악산에서 사람들은 짐승들의 흔적을 찾으려는 마음까지 잃어버린 지 오래다.
신갈나무 군락은 어느 새 자작나무 숲으로 바뀌었고 작은 호숫가에는 여전히 짐승들의 발자국과 똥이 눈에 띈다. 호수를 지나 강바람을 맞으며 배를 타고 강을 건넌다. 흰꼬리수리 한 마리 머리 위에서 맴돌며 사냥을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밀렵은 매우 많아서 감시원들과 마찰이 잦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의 욕심은 다르지 않았고 그것을 막아내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이곳은 매우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