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인 활동프로그램과 아내의 갑작스런 응급실 행으로 2주간 미뤄졌던 도토리 잔치를 드디어 열게 되었다. 그간 자동차 트렁크에서 고이 자고 있던 상품들이 빛을 보게 되는 날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혁, 성욱 형제와 현민, 현서 형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불참하게 되어 그 아이들이 그동안 모아놓은 도토리를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중딩 누나들을 대타로 썼다.
도토리 잔치는 크게 두 순서로 진행된다. 생활용품과 식료품으로 시장 물건을 나누고 생활용품은 경매의 방식으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게 되고, 식료품은 각각의 정해진 가격대로 지불하여 구입하면 된다. 우선 이번 생활용품은 신학기를 맞아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학용품 20가지를 준비했으며, 식료품은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주전부리 위주로 준비했다. 신학기여서 그런지 학용품은 대형할인매장에서 특별행사용으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상품을 준비할 수 있었는데 학년별, 성별 취향이 다르기 때문에 만족할만한 대상을 고르기가 여간 쉽지 않았다. 물건을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20가지 학용품을 선택하는 데에만 약 2시간이 소요되었다.
• 도토리 지급하기
윙윙실에 모여있는 아이들에게 우선 도토리 시장의 취지를 알리고 그동안의 활동에 대한 수고를 칭찬해주었다. 도토리 시장은 그동안의 노동을 통해 각자 벌어놓은 도토리(화폐)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마당이다. 도토리를 구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막대사탕 중 가장 저렴한 걸로 대신하기로 했다. 200개가 들어있기 때문에 이번 시장에 필요한 화폐로는 충분하다. 비닐봉지를 한 장씩 나눠주고 한사람씩 나와 기록된 개수에 맞춰 지급했다. 모두 10명에 총 130개 정도 지출되었다. 재민이가 20개로 가장 많았고, 상민이가 8개로 가장 적었다. 한 번 결석하면 2~3개 정도 손해를 보게 된다. 만일의 필요에 대비해 전도사님과 진행자는 10개씩 예비사탕을 나눠가졌다. 성혁, 성욱은 수민이가, 현서, 현민이는 은별이가 대신 활동에 들어간다.
• 경매 목록 작성하기
활동에 들어가기 전에 물품 목록표을 한 장씩 나눠주었다. 학용품 목록표엔 20가지 상품이름이 적혀있지만 음식 목록과는 달리 시장가격은 적혀있지 않다. 경매방식이기 때문에 가격은 사려는 사람의 수와 필요 정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시장의 가격결정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물건은 하난데 사려는 사람이 여럿이면 가격이 올라갈까? 내려갈까?” 아이들의 이해가 빨랐다. “모두 사고 싶어도 가지고 있는 돈은 정해져 있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꼭 필요한 것만 사야 돼요.” 그래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5개만 고르고 가장 필요한 순서대로 번호를 매기도록 했다. 경쟁을 해야하기 때문에 남에게 보여주면 안된다. 아이들이 숨어서 물건에 번호를 매기기 시작한다. 청소년들이 어려워하는 자원의 희소성, 경제원칙, 합리적인 선택, 기회비용, 시장의 가격 결정 등의 경제 개념들은 경매라는 활동을 통해 충분히 교육할 수 있다. 단 얻고 싶은 걸 얻지 못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주의사항과 충고를 단단히 해두고 들어가야 한다.
• 학용품 경매시장
자리를 옮겨 대예배실에 들어섰다. 전도사님께서 미리 예배실 뒤 테이블에 식료품을 진열해두셨다. 분위기 차원에서 박목사님이 마이크를 잡고 가위바위보 게임을 한다. 약간의 돈을 풀었다. 1등 3개, 2등, 2개, 3등 1개, 이어 눈치 게임. 일단 1,2학년 빼고 나머지 6명 앉게 한 다음 0부터 6까지 차례로 아무 숫자 대고 일어선 수가 맞으면 그 개수만큼 막대사탕을 타간다. 0이면 7개다. 아이들이 흥분한다. 상휘가 3개를 맞힌다. 이어 수민이가 제로. 7개를 타간다. 이어 상민이와 아영이 합세. 아영이는 번호는 안 부르고 자기가 자꾸 일어난다. 은혜, 상민 .... 돈을 너무 많이 풀었나? 인플레이션이 우려된다. 그래도 이런 재미가 있어야지. 경매를 시작하기 전에 약속대로 십일조를 거뒀다. 10개 이상은 1개, 20개 이상은 2개를 각각 내놓았다. 막대사탕 10개 가량이 가장 적은 상민이에게 구제비로 전달됐다. 이어 규칙을 간단히 설명하고 시작했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상품에만 참여해야 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막대사탕의 개수를 잘 확인하고 경매해야 한다. 만일 낙찰되어도 지급능력이 없으면 다른 경쟁자에게 돌아가니까. 뀌주는 거 절대 없다.
첫 번째 상품이 화면에 뜬다. 연필세트(10개). 아영이와 상민이가 손을 번쩍 든다. 성욱, 성혁이를 대신한 수민이와 현서, 현민을 대신한 은별이도 합세한다. 저학년이 강세다. 금세 도토리가 세개까지 올라갔다. 수민이 낙찰. 이어 짱구지우개(2개). 아영이와 상민이는 짱구란 말에 반사적으로 손을 든다. 도토리 세 개로 상민이 낙찰. 신바람 난 상민이. 재혁이와 재민이는 아영이를 코치한다. 이어 머니지우개도 아영이가 손을 번쩍 든다. 재혁이가 아영이 목록표를 확인하고 하는 말 “얜 다 똥그라미쳤어.” 그러자 아영이가 손을 슬그머니 내린다. ‘그러면 안 되나?’ 아직은 이해 못하는 눈치다. 필통은 도토리가 9개까지 올라갔다. 재민이와 상민이의 막판 대결. 상민이의 기에 재민이가 포기한다. 단순한 게 때론 유리하다. 연필깎이가 탑재된 스파이더맨 고급필통이 전달된다. 탄성과 아쉬움이 교차한다. 상민이 대박이다. 오늘 건질 건 다 건졌나 보다. 경매할 때마다 아이들이 물건을 보여달라고 야단이다. NO! 과열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미지는 절대 안된다. 상품을 전달하시는 전도사님이 장난삼아 아주 잠깐 보여주는 게 전부다. 동물스티커와 카스티커는 아영이가 1개로 낙찰되었다. 현서와 현민이가 있었다면 가격이 치솟았을텐데. 은혜가 대리인 은별이를 재촉했지만 은별인 참여하지 않았다. 청소도구, 딱풀, 커터칼, 공책세트들이 경쟁을 통해 각자 주인들을 찾아갔다. 이들에겐 생산자의 희망가격이나 원가엔 안중에 없다. 자기가 필요한 것에만 가치를 찾는 지극히 당연하고 단순한 사고방식. 그래서 전재산을 걸어서 사도 후회가 없나보다. 내가 보너스 선물로 학원에서 빼온 학습용 초시계를 걸었다. 상휘와 은혜의 각축. 상휘에게 낙찰. 물통과 파래트는 은별, 뽀로로 종합장은 아영, 가위는 수민, 고학년을 위한 고급 스프링노트는 수민과 재혁이가 각각 차지했다. 재혁이는 이거 하나에 목숨 걸었는지 가격이 계속 놀라가자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목소리로 기선제압을 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과학돋보기는 가장 많은 사탕을 보유한 재민이가 가져갔다. 거의 몰빵 수준. 마지막으로 그동안 경쟁에서 연거푸 밀린 은혜에게 와우커피무료음료권이 돌아갔다. 은혜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아까 경쟁에서 포기한 초시계를 5개 가격으로 다음주에 갖다주기로 약속했다. 추가상품 와우무료음료권은 상민이가 남은 사탕 5개 탈탈 털어 낙찰됐다.
• 식료품 가게
전도사님이 사탕 1개짜리, 내가 사탕 2개짜리 코너를 맡았다. 시작전부터 튀기기 시작한 팝콘이 솥에 가득 담겨져 있다. 한 봉지 당 사탕 1개, 왕꿈틀이, 마이쮸, 카스타드도 1개로 살 수 있다. 고래밥, 사발면, 뽀빠이, 쨈은 2개짜리다. 재혁, 상휘, 재민, 수민은 남은 사탕을 합쳐 사발면 4개를 주문한다. 은혜는 쨈을 싹쓸이하고, 유치부 삼총사는 이때다 싶어 자금을 융통해 먹거리를 사들인다. 사실 경매부터 참여하고 싶었으나 도무지 뭐가 뭔지 상황파악을 못하고 지켜만 보다가 만만한 음식 가게에서 활약을 보이고 있다. 전도사님의 기도와 정리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 피드백
사실 준비 내내 어린 초딩이 경매를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이 많았다. 그럴수록 안전장치에 대한 신경을 더 많이 쓸 수밖에 없었다. 워낙 실험적인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창의적이긴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그만큼 예기치 않은 위험성이 항상 도사리고 있다. 경매도 다분히 유익하고 괜찮은 프로그램인 건 사실이지만 모임의 구성원 파악과 치밀한 준비과정, 원활한 진행요령이 반드시 전제가 되어야 가능하다. 오늘은 재미있게 끝났지만 보다 성경적인 세계관에 뿌리를 둔 도토리 시장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화폐는 위조가 불가능하고, 반복적으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찾아봐야겠다. 막대사탕은 아이들에겐 딱 맡는 화폐이긴 하지만 비용(200개 11,000원) 부담이 있다. 오늘 화폐는 전도사님이 전도용이나 칭찬선물용으로 쓰실 계획이다.
첫댓글 경황이 없는 상황일텐데...수고하셨네요...전도사님, 임집사님, 백집사님 때문에 이땅에서 꿈을 꾸는 아이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