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화상>
" 그의 얼굴과 체구를 접할 때마다 '이 사람이야말로 영락없는 예술가'라는 실감을 갖는다.[...]
저 독수리 같이 매서우면서도 때론 비둘기처럼 부드러운 눈빛은,
자연의 섭리와 역사의 공포와 인간의 붕괴와 애환을 골고루 보았으면서도 끝끝내 미와 진실을 믿고,
예술에의 순교를 각오한 의지와 정감으로 가득 차 있다." - 소설가 이병주
<올림픽 1988>
200점이 넘는 조각공원의 작품 중에서 가장 큰 높이를 가진 이 작품은 25m, 스테인레스 스틸로 만들어졌습니다.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기둥은,
각각 묵주처럼 생긴 20개의 반구형(半球形)이 층층을 이루며,약간 어긋나게 이어져 있습니다.
두 아름이 훨씬 넘는 두 기둥 주위로 각각 한 알 반의 작은 기둥이 네 개 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고,
간격은 여섯 발자국씩입니다.
또, 동남 방향에 있는 작은 기둥 두 개는 세 개의 묵주알로 붙어 있고,
작은 기둥 네 개의 알은 모두 1/4 이 잘려나가고 없습니다.
* 거울 ?
스테인레스 기둥은 거울처럼 하늘과 해,구름과 나무와 꽃과 풀밭을 아름다운 그림처럼 펼쳐 놓고,
작품 앞에 서 있는 사람들도, 하늘을 날고 있는 새도 새로운 모습으로 그 속에 나타납니다.
소설가 이병주의 말대로,
'매섭고도 부드럽고, 자연과 인간, 의지와 정감이 두 개의 기둥 속에 담겨 마주보고 있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대한민국의 문신(文信)입니다.
미국의 NBC 방송은 1988년 올림픽공원 현장 인터뷰에서,
<세계 72개국 각국 대표 191명의 조각작품 중 최고의 명작이다>라는 평가를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보도했습니다.
6m짜리 '엄지' 손가락을 출품시킨 ‘프랑스의 자존심’으로 일컬어지던 조각가 세자르가,
이 작품의 화려한 평가에 묻혀 개막식 행사에 불참하는 해프닝도 벌어진 일화를 남긴 '세계적'인 작품입니다.
* 높이 13m <태양의 인간> 1970년작 ▣문화저널21
"섭씨 45도의 찌는 듯한 모래사장에서 나는 작업을 하는 동안 수시로 손목을 베었다.
다행히 응급용 붕대로 지형을 했지만 작업실 곳곳은 난자했다.
나는 상처의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마치 격렬한 전장에서 피를 쏟은 채 쓰러져가는 전사(戰士)를 보고 복수심에 불타 돌격하는 군인이 된 기분이다.
지금 나는 붕대를 맨 뒤 소음이 진동하는 소음하는 전기톱을 마치 기관총을 잡듯 붙잡고 있다" ⊙ 1970년 - 작가노트-
프랑스에서 <태양의 인간>을 제작하면서 '전기톱을 기관총 잡듯 잡고 돌격하는 군인'이었던 작가는,
한국에 돌아와서도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만 평가를 받는다" 는 치열한 예술가의 영혼을 가지고 이 작품에 몰입했습니다.
<올림픽 1988> 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그린 드로잉만 200여점,
작품성까지 지녀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 보존되고 있습니다.
* 드로잉
문신은 이 작품의 제작 심경을 친필원고에 남겼습니다.
" <올림픽 1988>의 두 개의 거대한 묵주 알 기둥은,
올림픽이란 국가적 경사를 맞이하여,
남북한이 평화와 화합을 하면서 종국적으로 통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이 <올림픽 - 화합>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조각해설을 할 때 이런 조언을 꼭 해 줍니다.
" 두 개의 사물이 나란히 서 있으면 A와 B의 관계라고 생각하며 바라보라."
작가는 남한과 북한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지만,
나와 너, 사상, 종교, 인종의 대립 등등, 얼마든지 관계의 범위를 넓힐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조언,
" 한 층 한 층 쌓아 올린 작품을 대할 때는 탑을 쌓는 사람의 마음으로 대하라. "
여기에서도 묵주 한 알 한 알을 넘기면서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 '평화와 화합'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소망 - 사랑이 담기고, 안식이 담기고, 성공이 담기고, 건강이 담기고,
또 부와 권력과 명예가 담길 수 있습니다.
* 불빛과 견제
지금 이 작품은 소마미술관 앞 기획전시마당의 한가운데 풀밭 위에 서 있지만,
올림픽이 열린 1988. 9월, 연못 위에 높이 25m의 반구형 큰 조각을 세워 불빛으로 비춘다는 구상을 한 뒤,
작품 자체는 금성전선 군포공장에 작업을 의뢰하여 약 100여일에 걸쳐 장정 40여명이 힘을 모아 만들었고,
공원에 연못을 만들고 철근을 박아 개막 행사 때 서울 올림피아드 조각공원에 전시,
서울올림픽의 기념비적인 작품이 탄생하였습니다.
자연과 인간을 모티브로,
평화와 화합, 사랑을 이야기하는 문신의 작품 세계를 시메트리(Symmetry·좌우균제) 라고 부릅니다.
왼쪽의 A와 오른쪽 B의 균형과 견제는, 상생(相生)과 조화 그리고 배려라는 차원으로 해석합니다.
흰 석고 덩어리가 / 조각가의 손에 의해 /두개의 심장으로 빚어진다
마치 우주가 신에 의해 /음과 양의 대칭으로 이루어지듯 / 마주보는 두 얼굴로
시인 신규호가 문신 작가를 칭송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문신이 작고한지 15년이 지났지만(1923~1995) , 한반도의 불균형과 위기상황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그래서 '평화와 화합'을 아름답게 반사하는 그의 작품은 '위대하다'는 역설적인 설득력을 보이며 우뚝 서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