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1-802-803…, 500보(步) 쯤 걸으면 종아리 근육 통증이 오기 시작하던 것이 800 걸음이 넘어가는 이 쯤에서야 약간 부담이 느껴질 정도면 그 병원 효과가 컸던 모양이다.
통증 클리닉이라는 게 신속한 거로구만…. 앓느니 죽는다는 말도 있지만 그 말이 바로, 통증이 죽음 이상이라는 경험담이지 뭐야. …가만 있자, 어디, 뒷걸음질로 걸어볼까? 뒷걸음질이라… 언젠가는 한 번 시행해 보려고 했던 동작이 아닌가.
나는 뒷걸음질을 시작한다.
하나, 둘, 셋, 넷…. 앞으로 걷기만 해온 내 다리 근육에 탈이 났으니, 뒤로 걷기를 해서 이제껏 ‘벤치’만 지켜온 ‘뒤로 걷기 근육’을 부려 강화시켜 줌으로써 이 통증 클리닉에 ‘시너지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假設)을 실험하기로 한다.
일종의 ‘윈윈(win win) 전략’이라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뒤로 57~58 걸음 까지는 세었는 것 같은데 중간에 그만 숫자를 놓쳐버린다. 가만 있자. 내가 몇 걸음 까지 세었더라?
이래 가지고 어떻게 만보(万步) 걷기를 한다는 거지?
만보기를 하나 사야겠군. 이 순간, ‘아차, 뒤를 한 번 돌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든다.
천변 둔치 자전거 전용 도로라지만. 이따금씩 규정 어기고 들어선 오토바이가 심심찮게 지나가곤 한다.
‘충돌 공포’ ‘걸림 공포’‘낙상 공포’등이 여름날 생선에 파리떼 엄습하듯 한다.
공포라는 놈은 ‘짜장면 배달부’처럼 항상 대기 상탠가보다. ‘기류’가 이렇게 흐르자 ‘기체’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고개는 처신머리 없어 보일 만치 여시(여우) 뒤돌아 보듯하게 되고, 스텝이 ‘지그재그’ ‘之’자 획을 긋게 됨에 따라 몸통이 남 보기 민망할 정도로 흔들리는 것 같다.
이 뒷걸음치기를 하루, 이틀, 한 두 걸음 걸을 것도 아니고, 남 안 보는 데서 할 것도 아닌데 껄쩍지근한(마음이 개운치 않고 꺼름직한) 감(感), 볼썽사나운 ‘폼(form)'으로 이 짓거리를 한다는 것은 나 개인적인 성향(꺼름직한 건 죽어라 못 견디는)으로나 사회적(남이 보는 데서 행해진다는 점에서)으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해결되어야 할 문제임이 분명하다.
내 깐으론 신종 운동인 이 ‘뒤로 걷기 운동’에서 문제의 원천이 되는 심리 상태는 ‘불안’이다.
이 불안만 제거한다면, 나는 지극히 편안한 마음과 우아 무비한 자세로 ‘뒷걸음도 저렇게 멋있게 할 수 있음’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또 한 번 뒤를 돌아본다.
아까 가늠해 둔 직선 코스의 거리를 거의 다 왔음직 해서다.
그런데 막상 확인해 보니, 10m 쯤이나 남았다.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맞아, 불안의 제거야. 나는 우선 불안의 제거 작업에 나서기로 한다.
누구나 해 보면 바로 알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뒷걸음 걷기에서 바로 만나는 제1의 불안은 진행하고 있는 ‘지표면의 고저가 일정치 않는 데서 오는’ 불안이다.
뒷걸음질 치다가, 방금 디딘 땅보다 약간만 꺼진 곳을 디뎠다든가, 갑자기 돌출된 부분에 스텝이 걸려서 끔쩍 놀라 본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놀라거나 넘어지고나서 털털 털고 ‘사고 현장’을 살펴 보면, 그 부분의 움푹 패인 깊이나 돌출된 높이가 예상 외로 ‘별 것 아닌 것’에 혼자 웃었던 경험들이 있었을 게다.
그런데 이제는 이 불안으로부터 해방되어도 된다.
세상 좋아진 덕에 이 코스는 측량 기사가 재어 설계한 도면에 따라 ‘우레탄’으로 포장된 ‘평평 대로’인 것이다. 사실, 이 뒤로 걷기는 시골 오솔길에서는 절대 시행 불가능한 운동이 아닌가 말이다. 평탄 대로 그것도 차량 통행이 금지된 이런 도시의 천변 산책로는 내가 고마워 하는 몇 안되는 현대 선물의 하나인 셈이다. (이를 확인하려고 뒤를 돌아본다. 확실하다.)
두 번째로 대기고 있는 불안은 ‘충돌에 대한 불안’이다. 저 쪽에서 걷거나 달려오는 사람, 자전거, 규정 어기고 들어선 오토바이… 이들과의 부딪침은 곧 낙상을 연상하게 되지 않는가 말이다.
이 사안에 대하여는 단도직입적으로 단언컨데 이 건 ‘믿음’으로 해결된다.
‘인간 사 잘 모르겠는’ 것은 대개 종교적인 것이라던 한 야인의 말씀이 생각 난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게 아니라, 지극히 실증적이고 수학적인 검토 연후에 얻은 것이다.
즉, ‘나는 뒷꼭지를 앞세우고 가지만 자기들은 두 눈 앞세우고 오는 만큼 이런(뒷걸음 중인) 나를 본 저들이 비켜가겠지. 혹, 나처럼 뒤로 걷는 자와 충돌할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경우에는 피차 중상(重傷)을 수수(授受)할리 없고(뒤로 걷기는 서행이 본질) 서로 허허 웃는 마당이 될 거고…. 그 동안 지켜 봐서 알지만, 요새 사람들 제 앞 감당하는 데는 얼마나 도사들인데….’라고 일 점 의심 없이 믿는 것이다.
이 믿음은 확실히 믿을 만하다고 확인한 순간, 앞(진행 방향편으로 치면 뒤)이 환해진다.
그리고 걸음이 내가 봐도 활달하다.
100여m는 족히 왔지 싶다. 중앙선이 오른 쪽으로 완곡하게 휘어진다.
○○아파트 근방인가보다.
잠시 전과 달리, 마음이 편해지고 한가롭기까지 하니, 정말 눈 앞이 훤하다.
‘나는 지금 뒤를 바라보며 앞으로 가는 건지, 앞을 보며 뒤로 가는 건지 잠시 혼돈에 빠지며….
옳아, 인제부터 진짜 뒤로 걷기 하는 것이다. 물구나무서서 보는 풍경이 별미가 있듯이 뒤로 걸으면서 멀어져가는 풍경 또한 제법이다.
거기에다 양 팔을 바삐 흔들어대는 앞으로 걷기와는 달리, 배형(누워서 하는 수영의 한 종목)하듯 팔을 유연하게 번갈라 대기를 저어 가노라면, 제법 동적이고 입체적으로 전개되는 주위의 풍물들이 ‘한려 수도’에 무진장 펼쳐지는 ‘선경’같기도 하고 관광 다녀온 친구들이 침이 고갈되도록 상찬해 마지않은 바다 건너 외국승경이 저런 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나 더 있다. 한 발 한 발 이렇게(뒤로) 나아가는 만큼 시야가 넓어지는 거다. 뭐 그리 신통하거나 해명이 어려운 현상은 아닌데, 막상 좁장한 화면이 ‘씨네마스코우프’의 확 펼쳐지는 넓은 화면처럼 안계(眼界)가 확대되어 가는 걸 보니 이 또한 예사 아니게 느껴지는 것이다.
소실점이 한 발 한 발 멀어짐에 따라 새로 편입되는 근경이 넓게 펼쳐지게 마련이고, 원경은 아까 근경 때보다 아름답고 신비한 형태미를 보이는 것이다.
추억의 아름다움처럼…. 이러고 가는사이 아니나 다를까 걷는 사람 뛰는 사람 타는 사람들이 무탈하게 휙휙 지나간다. 족히 1km는 왔으리라.
-나이 먹으면서 필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뒤로 걸으면서 보게 되는/ 넓어지고 아름다워지는 풍경이다- 얼추 시적인 말이 버물러진다.
도시 계획상으로도 도시 일주 자전거 전용 도로는 천변 둔치를 이용하는 게 좋을 듯하다.
상 내 신 종목 ‘뒤로 걷기’는 자전거 도로를 이용하는 게 제격이고…. 천변 길이고 보니, 군데 군데서 다리를 만나고, 다리를 만나면… ‘다리밑 피난민’을 만날까?
(예전에 우리 어린 시절에는 아늑하고 튼튼한 다리 밑이면 어김없이 밑천 없는 목수들의 농방이 있거나, 사글세방도 못 얻는 어려운 부모들이 도란도란 애들을 키우는 ‘변형 오막살이’들이 오글거리고 있었지) 그런데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우선, 반갑다.
다음 순간, 조심스럽다. 그곳 사람들을 만날텐데 행여, 실수할까 봐…. (내가 6.25때 U.N군이나 되는 것처럼 행세하다가는 큰 코 다치지)
들깻잎 다듬으면서 힐끔 쳐다보며 ‘왠 뒷걸음?’하는 표정들이기에,
“…아, 예, 이렇게 걸으면 다리 부실한 데 좋다고 해서요.”
눈이 마주쳐지기에 다소 겸연쩍어, 묻쟎은 대답을 한다. 그리고 이 ○○교(橋 )에서 오늘 뒷걸음은 마치기로 한다.
“광천동 중간 쯤에서 여그(여기)까지 5리는 되지라우?”
아줌마들이 그럴 거란다.
음식물 남은 거 간물 쪽 빼서 썩힌 것 외에는 일절 화학 비료 안 준 것이라고, 기고 만장 자랑들 하기에, 기회는 요 때다 싶어, “아따, 자랑만 하지 말고 나 조끔 주쑈.”하고 얻어왔다.
들깻잎이랑, 상추 한 줌, 암에 좋다는 민들레 몇 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