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5.3. 공감5시
제목: 화천의 미륵바위
1. 오늘은 화천의 미륵바위를 소개해 주신다고요. 미륵바위라면 바위가 미륵모양을 하고 있어 영험성을 나타내는 바위인 것 같습니다. 화천 어디에 있는 바위인가요?
화천의 미륵바위는 상당히 많이 알려진 바위이고, 설화를 비롯해서 마을제사 등을 지내고 있는 바위입니다. 위치는 화천읍 대이리 큰길가에 있어서 길 가는 사람들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화천읍내에서 화천댐 방면으로 약 5리 정도 가다가 보면 오른쪽에 있습니다. 지금은 정자도 세워두고, 안내판도 해놓아서 더욱 잘 눈에 띕니다.
2. 설화도 있고 마을제사도 지낸다면 정말 유명한 바위인 것은 확실한데요. 어떻게 이 바위가 길가에 덩그러니 놓이게 되었나요?
소금장수 또는 뗏꾼들이 이 돌을 강에서 주워 올렸다고 합니다. 옛날 강원도 일대에는 소금배와 뗏목이 많이 있었습니다. 생활에 꼭 필요한 소금과 생필품을 한강을 통해서 인천과 서울에서 날랐습니다. 배에다 소금을 싣고 물을 거슬러 올라와 중요한 지점에 소금배를 대고 물건을 팔아 곡식 등을 싣고 내려간 것입니다. 또 뗏꾼들은 강원도 산간에서 자란 좋은 나무를 뗏목으로 묶어 서울까지 운반해서 팔았습니다. 황장목이라 해서 나라에서 벌목을 금하는 곳이 곳곳에 있었던 것을 보면 강원도의 금강송이 무척 좋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산에 있는 소나무를 보면 붉은 색깔을 띠면서 하늘로 곧게 쭉쭉 뻗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가히 감탄을 자아 낼만 합니다. 이런 나무를 물길을 따라 운반한 것이지요. 이 미륵바위를 소금장수와 뗏목꾼들이 발견해서 물가로 옮겼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소금장수 발견설은 이렇습니다. 현재 미륵바위가 있는 곳에 소금장수가 소금배를 저어 오는데 갑자기 소금장수가 길을 잃고 헤매다가 깜박 잠이 들었습니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 미륵이 나타나서 자신을 강에서 건져 이곳에 옮겨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금장수의 길을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금장수는 이 마을에 와서 미륵의 말을 전하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미륵을 물에서 건져 올렸다고 합니다. 그 돌은 모두 5개인데, 어른 크기의 돌이 두 개, 아이 크기의 돌이 세 개입니다. 소금장수들은 그 돌을 홍수에 쓸려가지 않도록 길가에 올려놓고는 무사고를 기원하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역시 뗏목꾼들도 그곳을 지날 때마다 제사를 지내고 갔습니다.
3. 이 미륵바위에는 전설이 있다고 했잖아요. 전설은 어떻게 되나요?
전설 때문에 이 바위를 미륵바위 또는 동자바위라고도 부릅니다. 동자승이 과거를 보는 서생과 한양까지 동행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설은 이렇습니다.
조선조 말엽 화천읍 동촌리에 장 아무개라는 가난한 선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선비는 가끔 이 미륵바위에 와서 음식을 차려놓고 극진한 정성을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를 보려고 한양으로 가기 위해 이곳을 지나는데 난데없이 괴나리봇짐을 한 초립동이 한 명이 나타나 한양까지 동행하기를 청하니, 선비는 선뜻 응낙하고 동행을 했습니다. 며칠을 걸려 한양까지 가는 동안 선비는 초립동이가 갖고 있던 봇짐 속 삼베 세 필을 팔아 노자로 쓰면서 불편 없이 한양에 당도했습니다. 한양에 당도한 초립동은 어느 큰 주막으로 선비를 안내한 다음 주막집 주인에게 성찬을 차리게 하여 배불리 먹고는 간다온다 말 한마디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며칠을 기다려도 초립동이가 나타나지 않아 음식 값에 묶인 선비는 과거 날까지 넘기고 음식 값을 갚기 위해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졌던 초립동이가 나타났습니다. 선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으나 참으면서 그 간의 연유를 물었습니다. 초립동은 죄스러운 기색조차 없이 무슨 환약을 선비에게 건네주면서, “장안에 들어가면 김 아무개라는 대감의 무남독녀가 백약이 효험도 없이 앓고 있는데, 이 약을 먹이면 즉시 회생할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범상치 않은 인물로 생각한 선비는 약을 받아 대감집으로 찾아가 명의로 자청, 규수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하는 척 하면서 약을 먹였습니다. 대감의 딸은 신기하게도 하루 만에 병석에서 일어났습니다. 기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감 내외에게 선비는 길이 멀어 과거 날짜에 당도하지 못해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대감은 “지난 과거 시험에는 장원이 없어 사흘 후 다시 과거가 있으니 그 때까지 내 집에 묵으면서 책을 보도록 하시오.”하면서 선비를 눌러 앉혔습니다.
선비는 사흘 후 과거에서 장원급제를 하여, 양구현감을 제수 받고 초립동이가 기다리는 주막으로 돌아오니 초립동이 화색이 만면하여 선비를 맞았습니다. 화천 귀가 길에도 선비는 초립동과 동행했는데, 지금의 미륵바위에 이르자 초립동은 바람결 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선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미륵바위를 초립동의 대신으로 믿고 그 후 더욱 극진히 미륵바위에 정성을 드렸다 합니다.
4. 정말 신비한 바위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아마 다른 영험담도 많을 것 같은데, 조사한 것 중에 몇 개 소개해 주세요?
제가 2003년에 이 마을에 사시는 이병기(당시 62세) 씨로부터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정말 무시무시한 영험담이 있습니다.
화천읍에 살고 있던 전 아무개 씨가 이 돌을 탐낸 끝에 자기 집 정원으로 옮겼다가 큰 변을 당하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고 한다. 전 씨가 이 돌을 집에 옮긴 후부터는 집안이 흔들리는가 하면, 아들이 갑자기 정신이상이 되면서 폐병으로 일 년 만에 죽었답니다.
대이리 미륵바위
또 십여 년 전 모 부대 군인들이 영내를 조성하기 위해 이 돌을 옮기려 하자, 갑자기 팔다리가 떨리면서 통증과 함께 마비 증세가 와 기겁을 하고 되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옵니다.
5. 영험담이 상당히 무시무시합니다. 절대로 이 미륵바위는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미륵바위에 얽힌 또 다른 이야기는 없나요?
이 미륵바위가 어린애 또는 남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해 마다 보면 아기 못 낳는 사람들이 와서 치성을 드리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립동이의 도움으로 과거에 급제했다는 전설 때문에 매년 입시철이 되면 자식들 대학입시를 기원하는 행렬이 끝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지난해는 모 지방신문에 이곳에 와서 입시 기도를 한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습니다.
6. 마을에서도 동제를 지낸다고 했는데, 언제 어떻게 지내나요?
대이리는 매년 음력 9월 9일에 마을 뒷산에 있는 산제당에서 산치성을 먼저 지내고, 미륵바위에 내려와서 미륵제를 지냅니다. 미륵치성의 제수는 돼지머리, 포, 과일만을 올립니다. 미륵치성이 끝나면 산제당 밑에 동네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하루를 논다고 합니다. 일종의 마을제의이면서 마을축제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7. 화천군에서는 이를 달리 개발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화천군에서는 이 지역의 산책길을 산소길이라 명명하여 강 옆으로 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미륵바위 아래로는 자전거길을 닦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미륵바위 주변을 잘 정비를 해놓았고, 6.25한국전쟁 때 타버린 정자도 새로 지어 놓았습니다. 안내판도 새로 마련해 두었고, 미륵바위와는 상관이 없지만 시계가 새겨진 조각품을 설치해 두어서 볼거리를 마련했습니다. 이곳은 자전거를 타고 화천에서 구만리 화천댐, 꺼먹더리, 딴산, 처녀고개 등으로 갈 수 있는 길목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전통적인 우리 조상들의 삶과 신앙의 형태를 잘 전승하는 사례로 보아도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