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비결 2
이로써 조선에서는
일반 백성이스스로 신수를 볼수 있는
<토정비결>이 세간에 나온 것이었다.
<토정비결>은
곧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시작하였다.
그래서 지방에서 올라온 선비들은
한양에서 <토정비결>을 한 권 얻어가거나
필사를해가는 게 큰일이 되기까지 하였다.
이로써 역학은 은둔지사가 신비의 책으로 숨겨두고
비밀스럽게 보는 비서나, 관상감에서 금서로 묶어
다스리는 괴서가 아니라,
백성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함께 숨쉬며 애환을 나누는 생활 철학서로
자리를잡게 되었던 것이다.
토정은 이후로도
임진 대환난 준비에는 전혀 손을대지 않았다.
오랜만에 부인과 함께 집도 고치고
아들산휘를 다독거리면서 단란하게 살았다.
그러나 박지화를 비롯해 정휴, 전우치, 남궁두 등은
계속 준비를 해나갔다.
토정이 가회동 집에 돌아온 지 한 달쯤 뒤에
토정의형 지번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토정은 형 지번의 유해를 홍성 선산에 모시고
조카산해를 대신하여 직접 묘막살이 삼 년을 자처했다.
임진 대환난 준비에 대해서는 역시 일언반구 언급이없었다.
토정의 집안에서는 벌써부터 삼년 묘막살이로
고민이 많았다.
지번의 큰아들 산해가 묘막살이를하게 되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했으므로
앞길에 지장이적지 않을 터였다.
그러던 차에 토정이 나서서조카에게 말했다.
"산해, 듣거라. 너는 나라를 위해 일하는 몸이다.
지금 너는 묘막살이할 때가 아니다.
내가 삼 년을지킬 터이니
너는 나라와 백성을 섬기는 일에게을리하지 말아라.
무슨 이야긴지 알겠느냐?"
"예, 숙부님."
토정은 홍성으로 내려갔다.
토정의 아들 산휘는
일찍부터 과거와 멀찌감치 떼어놓고 있었기 때문에
틈틈이 홍성으로 내려오라고 일러놓고는
생계를 이을방도를 일러주었다.
생계를 이을 방도란 장사를 하는것이었다.
조카들에게는 공부를 해서 백성을 다스리는
올바른법을 배우라고 늘 다그치면서도
토정은 아들산휘에게만은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토정이 어린 시절에 어머니 죽음에 이르러
장례를치르면서 지관이 이른 말을
아직도 기억해서인 것만은아니련만,
토정은 산휘에게는 글자 한 자 가르칠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관은 그때 이렇게 말했었다.
이곳에 묘를 쓰면 첫째와 둘째 아들 쪽으로는
영상이 줄줄이 나오지만 막내 아들 쪽으로는
영 벼슬인연이 없게 됩니다.
다만 수백 년 지난 다음에는
막내 아들 쪽에서도 크게 될 인물이 나오게
됩니다만…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지번은 딴 자리를 알아보자고 했으나
토정이극구 형을 설득하여 그 자리에 묘를 썼다.
당대에 영상이 나오면 되었지
제 아들이 무슨상관이고
형님 아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다 어머니자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 지관의 말이 맞은 것일까.
맏형지번은 어려서부터
시원시원하게 과거 시험마다 척척붙어서
현감, 군수를 거쳐 큰벼슬은 아니어도
부제조까지 지내다가
명을 다하고 세상을 떠났던것이다.
그리고 지번 형의 아들 산해 역시
스물 한 살 나던해에 진사가 되고,
그로부터 삼년 뒤인 스물 네 살되던 해엔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등용되고,
그 이듬해에 홍문관 정자, 부수찬을 거쳐
그 다음해에는 병조 좌랑, 수찬, 이조 좌랑, 이조정랑,
직제학 등을 거쳐
동부승지가 되는 등 벼슬길이순조로웠다.
둘째 형 지무(之茂)의 아들 산보(山甫) 또한
영특했다.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춘추관에들어가면서 관직에 오른 그는
해미 현감, 정언 등을지내고
수찬, 교리 등을 역임한 뒤
이조정랑에 올라있었다.
그러나 토정 쪽은 달랐다.
토정 자신은,
친구가 사화의 칼날에 목숨을 잃고
약혼녀가 염병으로처참하게 죽었다 해도
벼슬길이 꽉 막힌 것은아니었는데도
그쪽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토정의 아들 산휘도 어려서부터 서당이라고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사촌들은 늘 책을 끼고다녔지만
산휘는 그저 놀이에만 정신이 팔려
여기저기쏘다녔다.
토정의 아내는 그런 아들을 걱정했지만
토정은 그에 그리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산휘는 이래저래 나이만 먹고
배운 것은별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심성이 유달리 곧고착했으며
불쌍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지 않고는못배겼다.
그리고 아버지를 하늘 아래 누구보다도존경해
시중을 도맡으면서 아버지가 시키는 일이라면
아무리 궂은 일이라도 가리지 않고 했다.
토정은 조카 산해와 산보가 어렸을 적부터
그둘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형 지번이 아버지처럼 그를가르쳤듯이
토정 또한 어린 조카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지번의 묘 옆에 움막을 지은 토정은
그 움막에서하루 두 번씩
형 지번에게 밥을 지어올리고 제문을낭송하면서
나머지 시간에는 두문불출하고
책 속에만파묻혀 지냈다.
그걸 두고 고향 홍성 양반가에서는
칭찬은커녕 크게비웃었다.
중도에 하차한 현감이라고 비아냥거렸던것이다.
게다가 양반이라면
하인을 시켜 묘지를지키게 할 것이지
다 늙은 어른이,
그것도 동생이그러는 법은 처음 보았다며
더욱 입질을 해댔다.
그러나 토정은 그런 이야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만 이따금 혼잣소리로 이렇게 한탄을 하기는 했다.
"그깟 사주, 역학이니 하는 잡술 가지고
어떻게백성을 보살핀다고
감히 현감직을 넙죽 받았더냐!"
그러나 토정과 함께 움막에 거처하게 된 정휴에게는
이 때가 더없이 귀중한 시간이었다.
낮이면 하루종일 토정한테서 가르침을 받고
밤이면 천문과 지리를익혔다.
홍성 선산에 있는 동안에도
토정은 이따금 먼발치서날아오는
애절한 시선을 느꼈다.
그 눈은
제수를마련하러 나간 장터에서도 느껴졌고
, 여염집 담너머에서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 시선의 실체를
좀체로 눈으로 잡을 수 없었다.
토정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도
그 시선에 자꾸마음이 쓰였다.
토정이 묘막살이 삼 년 생활을 끝내고
얼마 안되었을 때,
어느날 토정의 아들 산휘가
계룡산에머물고 있는정휴를 찾아왔다.
정휴는 그때 토정의 신상에
어떤 변화가 오고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버님이 아산 현감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아니, 다 늦게 무슨 현감 벼슬이란 말인가?"
"아버님이 임금의 명을 받아들이셨답니다.
제가그곳에 아버님을 따라 갔다가
스님을 뵙고 말씀을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왔습니다."
<토정비결>이 민간에 배포되면서
백성들이 몹시좋아하자
선조는
토정이 형의 묘막살이를 마치기를기다렸다가
불러 임무를 하나 맡겼던 것이다.
"토정, 선왕이 선생을 포천현에 떨어뜨려
궁지에빠뜨렸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때하셨던 말씀이
당장 현실로 드러나 선왕께서 이미 승하하셨소.
이제 그 노여움을 풀고 아산현을 맡아서
마음껏 다스려 주시오.
이번에는 소를 각하하는 일이없도록
각별히 애쓸 것이오."
토정은 이때 두말없이 어명을 받들었던 것이다.
정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형님은 도대체 알 수 없는 분이실세."
"아버님은 아산으로 부임하시기 전에
저희 가족을위해
가장결 한 권을 지어주셨습니다.
앞으로 가계를이끌어갈 지침과
변란을 당하여 어떻게 처신해야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정휴는 이 또한 몹시 의아했다.
가족에게 가장결을지어주었다니.
정휴는 토정이 마치 죽음을 준비하고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알 수 없는노릇이었다.
산휘가 돌아간 이후 정휴는 토정의 소식을
더 들을수 없었다.
포천 현감을 지내면서 크게 실망한어른이니
이번에는 또 얼마나 노심초사할까 하고
걱정만 할 뿐이었다.
그 뒤 정휴는 금강산으로 거처를 옮겨
수행을하면서 임진년 준비를 계속하였다.
정휴가 구곡성을 본 것은 금강산으로 간 지
일 년도채 되지 않은 때였다.
토정의 별이 꺼져가고 있었던것이다.
그제서야 정휴는
토정이 왜 아산 현감직을받아들였는지
조금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토정의 남은 목숨 일 년이
아산에서 소진되고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