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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리암의 어머니 나나의 죽음
아버지 잘릴이 매주 찾아오는 어느 목요일, 다섯 살의 마리암(월하향)은 어머니에게 하라미(사생아)라는 말을 처음 듣는다. 그러나 잘릴은 한 번도 마리암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어여쁜 꽃이라고 하며, 올 때마다 다정하게 이야기를 해 주고 귀여워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 존경하고 사랑했고, 나나의 악담을 마음 속으로는 믿지 않으려 했다.
아버지에게는 세 아내와 아홉 명의 아이들이 있었다. 그는 헤라트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로, 영화관을 가지고 있었다.
나나는 그의 가정부였는데, 그녀가 잘릴의 아이를 임신하자 그의 부인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녀는 가파른 언덕 위의 외딴 오두막으로 쫓겨나 홀로 마리암을 낳았다.(1959년)
나나를 찾아오는 손님으로는 매달 한 번씩 찾는 마을의 아르바브(지도자)인 하비브 한과 어쩌다 들르는 석공(아버지의 친구)의 아내인 비비 노파가 거의 전부였다. 또 마을의 아훈드(코란 선생)인 늙은 파이줄라 선생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마리암에게 일일 기도와 코란을 가르쳤다. 그는 현명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녔으며, 마리암이 아버지 다음으로 좋아하는 진실한 사람이었다.
마리암이 열다섯 살이 되던 1974년 봄 어느 날 그녀는 아버지를 졸라 영화관에 데려가 달라고 하여 약속을 했지만, 약속 시간에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네가 가면 난 죽을 거야.’하는 나나의 말을 무시한 채 헤라트를 향해 아버지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문 앞에서 밤을 새운다. 이튿날 아침 그녀는 이층 창문에서 내려다 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슬픔과 분노와 치욕과 환멸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나뭇가지에 목을 맨 나나의 모습을 마주친다.
2. 마리암의 결혼
잘릴은 그녀를 집에 데리고 갔지만, 그녀는 이제 아버지의 위선, 무책임함을 알 수 있었다. 이층의 어느 방에 틀어박혀 창문으로 집안의 모든 것들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나가 말했던 것이 진실이었음을 깨달았다. ‘마리암, 너한테는 나밖에 없다. 내가 죽으면 너한테 아무 것도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내가 있을 곳은 어디인가? 나는 이제 어찌 해야 하지?
한 주가 지나자 아버지의 부인들 아프순, 하디자, 나르기스는 그녀에게 열다섯이면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라며(같은 나이의 자기 딸들은 카불 대학교에 보낼 예정이었다) 10년 전에 상처한, 나이 많은 카불의 구두장이 라시드로부터 청혼이 들어왔다고 말한다.
마리암은 거절하고 잘릴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의 답은 겨우 ‘제기랄, 마리암. 나한테 이러지 마.’하는 것뿐이었다. 여자들은 그녀를 윽박지르고 내일 혼례식이 있을 거라며 마리암을 2층 방에 가두고 문을 잠갔다.
이튿날 아침 간단한 혼례식을 치르고 그녀는 라시드를 따라 버스를 타고 750km 떨어진 카불을 향해 결코 뒤돌아 보지 않고 떠났다. 부녀의 관계는 여기서 끝이라 스스로 결연히 다짐한다.
“저는 아버지를 존경했어요. 목요일이 되면 몇 시간이고 기다리며 앉아 있었지요. ... 저는 아버지가 저를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는 걸 몰랐어요.”
3. 마리암의 불행한 결혼 생활
이튿날 도착한 라시드의 이층 집은 잘릴의 집보다는 훨씬 작았지만 옛 오두막에 비하면 저택이었다. 그녀가 쓸 방은 침대와 낡은 갈색 경대, 작은 벽장이 하나 있었다.
마리암은 서서히 라시드와의 결혼 생활에 적응해갔고, 라시드도 처음에는 그녀를 부드럽게 대하고 함께 나들이도 즐기며 행복한 생활을 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부르카 입기를 강요하고, 자유로이 행동하는 이웃 파리바를 못마땅해 하는 남편에게 답답함과 위압감을 느낀다.
1974년이었다. 라마단이 그해 가을에 찾아왔다. ... 도시는 단식을 끝냈다. 마리암은 빵과 대추 하나를 먹으며 십오 년 만에 처음으로 집단적 경험을 공유하는 달콤함을 맛보았다. 그날 밤 그들은 차만에 가서 황홀한 폭죽놀이를 구경했다. 그녀는 파이줄라 선생이 그리웠고, 무엇보다 나나가 그리웠다.
집에 이드 손님들, 라시드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녀는 남편과 함께 하는 동안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아이를 가졌다. 라시드는 무척 좋아했고, 지난 날의 슬픔과 외로움과 비참함이 씻겨내려 가고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나 라시드가 데려간 하맘에서 그녀는 유산을 하고 말았다. 그녀는 밖에 나가는 게 두려웠다. 이웃 여자들과 그들의 많은 자식들이 부러워졌다.
어떤 날은 ‘인샬라. 너는 또 낳을 거야. 너는 젊어.’ 자신을 위로하고, 또 어떤 날은 자신이 나나에게 한 짓으로 인해 벌 받고 있다고 자책했다.
라시드는 많이 달라졌다.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음식과 사소한 것들을 트집잡기 시작했다. 이따금 밤늦게 잠깐 들어와 거칠게 그녀의 몸을 취했다.
1978년 4월 18일, 마리암은 열아홉 살이 되었고, 처음 이후 4년 동안 여섯 번에 걸쳐 유산을 거듭했다. 그때마다 라시드는 더 멀어지고 화를 냈다. 그녀는 그의 변덕, 경멸과 폭행을 일삼는 난폭한 성격을 두려워하며 살았다. 그녀는 이제 그에게 자신이 짐밖에 되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는 동안 아프간의 정치 상황은 꼬리를 무는 내전의 연속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혼돈을 헤매었다.
4. 라일라와 타리크의 사랑
한편 마리암의 이웃집에 사는 고교 교사의 아내, 파리바는 또 딸을 낳고, 이름은 라일라로 지었다.
1987년 봄, 아홉 살이 된 라일라는 타리크와의 작별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부모님과 남쪽 가즈니 시에 사는 숙부 댁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아래 층에서는 오늘도 그녀의 부모가 싸우고 있었다. 엄마는 사납게 소리질렀고, 아버지는 폭풍우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아빠 바비는 몸집이 작고 집안일에는 서툴렀지만, 늘 책을 읽고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녀에게 다정했다. 지금은 빵 공장에서 일하지만, 공산 정권에 의해 해고되기 전에는 고교 교사였다. 두 아들 아마드와 누르가 소련군과의 전쟁에 나가는 것을 아빠가 허용하기 전에는 엄마도 아빠의 모든 것들을 좋아했었다.
라일라는 그날 수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타리크가 없어서, 또 그녀의 부모가 싸워서도 그랬다.
때때로 엄마의 기분이 괜찮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에는 라일라와 함께 시장에도 가고 놀이도 했으며 빵을 굽고, 이웃 여자들과 어울려 수다도 떨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는 커튼을 친 채 어둡고 지저분한 방에서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벽에는 아마드와 누르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밤 라일라는 거리 아래쪽에서 자그만 플래시 불빛이 비치는 걸 보았다. 다음 날 라일라는 하딤과 친구들을 지나 타리크의 집으로 갔다. 타리크는 삼촌이 아프셔서 늦어졌다고 하면서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파쉬툰족인 타리크의 아버지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마흔 살이 훨씬 넘어서야 타리크를 낳았다. 그들은 항시 서로 사랑하고, 식탁은 늘 화기애애했다.
타지크족이었던 라일라의 아빠는 두 종족 사이에 많은 적대감과 갈등이 있다고 말했지만, 타리크의 집에서는 전혀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다음날 그들이 버스정거장으로 걸어갈 때 하딤을 만났고, 라일라는 자기도 모르게 타리크에게 며칠 전 하딤이 그녀에게 오줌물을 쏜 사실을 말해 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타리크는 벌써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잠시 후 풀어낸 의족 다리를 어깨 위에 칼처럼 든 타리크가 하딤에게 다가갔다. 주먹질이 오가며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하딤은 다시는 라일라를 괴롭히지 않았다.
바비는 저녁을 먹고 나면 라일라의 숙제를 도와주었다. 그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해고되었으면서도, 여자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한 그들의 정책만은 좋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파키스탄 인접 지역인 남동쪽의 파쉬툰 사람들은 고대의 부족법에 따라 살면서, 수백 년을 이어 온 자기들의 전통을 모욕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 때 낯선 사람이 찾아와 아들들의 전사 소식을 전했다. 장례식이 거행되는 동안 엄마는 거의 실성한 것 같았다. 이후로 엄마를 괴롭히는 병이 시작되고 날로 쇠약해갔다. 두통, 관절염과 알 수 없는 가슴 속 응어리. 엄마는 대부분 침대에 누워 지냈다.
바비는 라일라와 타리크를 데리고 큰 돈을 들여 택시를 대절해 여행을 떠났다. 오래 전부터 많은 이민족 침략자들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요새, 붉은 도시라는 뜻의 샤흐르에조하크를 찾았다. 이어 장엄한 두 개의 불상과 각양 각색의 동굴들과 풍요로운 논밭이 펼쳐진 바미안 계곡에 도착했다. 그 너머로는 흰 눈이 덮인 힌두쿠시 산도 보였다. 바비는 라일라와 타리크가 조국의 아름답고 위대한 유산을 보고 풍요로운 역사를 알기를 바랐다.
바비는 라일라에게 엄마의 아름답고 매력적이던 옛 모습과 아들을 잃고 힘들어 하는 마음, 라일라가 훌륭한 교육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희망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이 땅을 사랑하지만 이 모든 비극을 잊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떠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너무도 완강히 떠나기를 거부하는 엄마로 인해 실현되기는 어려운 꿈이었다.
5. 소련군의 철수
1988년 4월, 제네바에서 조약에 서명하고, 소련군이 떠나게 되었다.
라일라가 열한 살이 되던 1989년 1월. 그녀는 부모와 함께 마지막 소련군이 도시를 떠나는 걸 보러 갔다. 엄마는 두 아들의 사진을 머리 위로 들고 있었다. 다른 여자들도 죽은 남편, 아들, 형제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타리크도 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몸이 많이 쇠약해졌다.
3년이 지난 1992년 4월, 타리크는 키가 더 컸고, 적십자에서 새로운 의족을 받았다. 소련은 빠르게 무너져 많은 동구권 국가들이 독립하고, 크레믈린 궁에서는 소련기가 내려오고 러시아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나지블라는 전략을 바꿔 자기가 독실한 이슬람교도라고 선전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무자히딘에게 항복하고 도시 남쪽의 유엔 공관으로 피신했다.
엄마의 영웅인 아들들의 형제 전사들이 승리했다. 그 속에는 타지크 사령관 아마드 샤 마수드도 있었다. 그는 판즈시르의 사자라 불리는 사려 깊고 카리스마가 강한 인물이었다.
엄마는 새로운 여자가 되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안을 청소하고 오래 목욕을 하고서 다음 날은 거창한 파티를 할 거라며 준비에 분주했다. 그러면서 라일라에게 이제 타리크와의 관계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행동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타리크는 그녀보다 30cm쯤 더 컸고, 어깨가 벌어져 있었다. 라일라는 엄마의 말이 일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억울한 느낌이었다.
남자들은 차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며 큰 소리로 무자히딘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여자들은 거실, 통로 부엌에 모여 얘기를 나누었다. 무자히딘의 여러 도당들이 여섯 달 사이에 임시 정부를 구성하고 2년 동안 통치하다가 자연스럽게 민주 선거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지도자 평의회는 라바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다른 도당들은 종족 편중이라 비난했다. 이제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무자히딘은 서로를 적으로 만들었다. 카불과 산 사이에 로켓탄과 기관총탄을 쏘며 전투가 계속되고, 주민들은 죽음의 공포에 떨었다. 그들은 서로를, 또 무고한 주민들을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했다. 이들이 엄마가 영웅이라고 했던 자들의 실체였다. 파리바는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머리 위에 담요를 뒤집어썼다.
라일라가 외출할 때는 타리크가 항상 함께 했는데, 그는 총을 장만해서 가지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