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성춘향』이라는 소녀 이름
초등학교 등굣길은 비포장 신작로로 언제나 뿌연 먼지를 마시며 햇볕에 노출되었고 방과 후에는 논밭에서 일하시는 부모님을 거들러 드렸기 때문에 뽀얀 살은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손바닥과 이빨을 제외한 팔뚝과 얼굴은 어린 시절 여름에는 언제나 구릿빛을 벗어나지를 못했다.
어쩌다가 학교나 마을에서 뜨거운 뙤약볕에서 일하지 않는 친구들의 뽀얀 얼굴을 보면 저 아이는 집에서 일하지 않고 하얀 쌀밥만 먹어서 저렇게 하얗고, 나는 일하고 보리밥을 먹어서 검은가 하면서 뽀얀 얼굴의 또래들이 그렇게 부러웠다.
어느 날 초등학교 또래쯤 되는 여자 친구가 유난히 피부가 뽀얗고 얼굴도 복스럽게 생긴 단발머리 소녀가 코로나의 후광을 띄고 클로즈업되어 나타나 내 망막에 자리를 잡더니 지금도 비켜주질 않는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그녀가 지나가거나, 어쩌다 마주치면 콩닥거리는 가슴과 눈 시선을 주체할 수가 없었던 너무 어린 시절에 나를 늘 설레게 했던 이름! 『성춘향(?)』이라는 소녀가 나를 일찍 이성으로 눈을 뜨게 했던 바꿈살이식 철부지 러브스토리였나 보다.
그 후로는 성춘향 이외 많은 소녀들을 봐도 그녀 외에는 이미 망막에 자리 잡음을 교체할 수 가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코흘리개 시절 병아리 떼 종종~ 어설픈 짝사랑, 첫사랑, 풋사랑의 푸념이다.
그렇게 저렇게 세월은 흘러 「갑순이와 갑돌이」의 노래 가사처럼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와 결혼을 했다.
나는 직장을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게 된다. 교직 34년 동안 남자고등학교에서 10년 정도 나머지는 여자고등학교에서 그것도 전교생이 1,000여 명이 넘는 큰 학교에서 근무하게 된다.
어쩌다가 운동장이나 복도 아니면 교실에서 『성춘향』과 엇비슷한 여학생을 만나면 갑자기 어린 시절의 백설 공주 같았던 그 소녀가 떠올라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저 멍할 때가 있었다. 남들이 나의 속을 들여다본다고 할 때 참으로 부끄럽고 채신머리없는 생각이며 행동이었다.
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될 때는 성춘향이라는 동명 2인이 실체 인물이 아니라도 이름 하나로 먼발치에서 위안이라도 갖고 싶어 신학기 때만 되면 전교생 명렬표에서 『성춘향』 이름 찾기가 아무도 모르는 나 혼자만의 업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게 전교생 명렬표나 교무 수첩 그리고 출석부 이름을 손가락으로 눌러가며 20여 년간 찾아봐도 『성춘향』이라는 이름은 없다.
인터넷이 보급된 시기에 마우스로 또 그렇게 뒤져봐도 백설 공주 이름인 성춘향은 지금도 없다. 실제 인물은 있는데 그렇게도 꼭꼭 숨어버렸을까? 등잔 밑이 어두워 내가 못 찾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녀의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으셔 아무나 짖지 않는 고귀한 이름으로 작명하신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20여 년 동안 여고에서 2만여 명을 대조하였으나 모두 다 헛수고였다.
그렇게 저렇게 세월은 흘러 정년퇴임이 가까워진다.
애를 먹이던 성춘향 이름은 찾지 못하고 퇴임을 한다고 생각하니 보고 싶은 것 못 보고, 먹고 싶은 것 못 먹어 보고 다른 세상으로 가야만 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 전교생 중 한 학년에 350여 명 전교생이 1,000여 명이 넘었는데 그때부터 내가 가르치고 출제했던 법과 사회,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에서 정규 고사를 출제할 때 3년간에 걸쳐 문제 지문 속에서 주인공 이름을 『성춘향』으로 등장시켜 간접적 위안을 얻었던 퇴직 3년 전부터 급박함이 만들어 낸 에피소드도 있었다. 그러나 나만이 간직한 비밀이었기 때문에 문제지 지문속의 인물을 누구도 백설 공주의 이름 성춘향을 되묻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고 그냥 무덤덤 넘어간다.
그 소녀 이름만 같으면 좋고, 피부색이고 복스러운 얼굴도 가리고 자실 필요도 없고 그냥 이름만 같으면 등교하면 옆에 다가가서 ‘성춘향! 공부 열심히 하고 있지~’ 하면서 여러 가지로 도와주고 싶었던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이름에 대한 집념처럼 운명은 앞에서 방해했고, 숙명은 뒤통수를 치면서 요리조리 비켜나가기가 태반사 이어서 이제는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도 알 수도 없다.
어쩌다가 호젓한 밤길을 걷는데 밤하늘 달님이 나를 계속 따라서 오시더니 길을 막고 세우시며 달님은 안방에 앉아 있는 그녀를 꼭 할 말 있다고 꼬드겨 마당으로 불러내고 서로 하고픈 말 다 하란다. 그녀는 나에 관해서는 관심도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어서인지 시큰둥하며 반응이 없다. 나 혼자 달님에게 내가 묻고 내가 답하는 위로로 가끔은 호젓한 밤길 걸을 때 하늘의 달님이 그렇게도 감사하다. 잊힐만하면 또 새롭게 그리고 잊혀질만하면 달님은 또 나타나셔서 삼 줄 같은 인연의 끊을 이어놓으신다. 그래서 망막(網膜)에 누렇게 빛바랜 그녀의 이름을 지우고 싶어도 심장 속에 박힌 가시처럼 쉽게 잊혀 지지 않는다.
그 뽀얀 피부에 복스러운 성춘향의 모습과 이름이 지금도 갈수록 더 또렷하여 이젠 노망이 들어가는가 보다.
쭈글탱이 줄에 앉아있는 푼수쟁이가 동화 속의 주인공을 상상하고 있으니 유치원 손자 놈이 웃을 일이다.
세상의 도적들은 이것저것 잘도 훔쳐 가더구먼, 낡아빠진 성춘향 사진과 이름은 가져가지도 않아 주책없이 다시 주워 흙먼지를 옷소매에 닦아서 안 주머니에 넣고 따독거린다.
자연은 때때로 천재지변을 일으켜 온 세상을 그리도 쉽게 바꾸어 놓은 적은 있어도 몇 자(尺) 안 되는 인간 속에 감추어진 마음은 바꾸지는 못하는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