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저는 순교자성월 성인 발표하라 하여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저와 세례명 같고 괄괄하고 불같은 성격을 믿음의 정신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주위 사람
들이 그의 본래 성품이 온순한 것으로 알고 온화한 그의 성품에 탄복했었다 한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을 소개하겠습니다.
성인은 일명 영환, 영눌, 치운 이라고도 하고, 우리나라의 두 번째 방인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아버지인 성인은 충청도 홍주땅 누곡 지금의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다락골에서 부친 최인주와 모친 경주이씨의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집안이 원래 교회창설 시대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 온 집안이라 어려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성장해서 '내포지방의 사도' 이존창의 후손인 이성례 마리아와 혼인한 뒤, 가족들과 상의하여 교우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의
벙거지골 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박해와 외교인들의 탄압 때문에 가산을 버리고 서울을 떠나 강원도 금성, 경기도 부평을 거쳐 과천의 수리산. 현재의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수리산에 정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회장으로 신자들과 소공동체인 교우촌을 만들어 돌보며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습니다. 그리고 1836년에 큰 아들 최양업 토마스를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맡겨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지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습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합니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고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으며,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습니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셨다고 하였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는데.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으며,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으며,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고.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으며.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40도와 곤장 1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정리하면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은 수리산에서 체포돼 순교할 때까지
보여준 훌륭한 표양들만으로도 오래 기억하기에 충분한 인물”이며
“공소회장으로 당시 교회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그는 기해박해에서 평신도 순교자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한국교회 평신도의 대표격인 정하상과 동시대를 살았고, 한국교회의 디딤돌을 함께 놓으며 평신도의 위상을 높였다.
최경환은 자신이 선종할 때까지 평신도의 사명과 본분을 다했다.
아들을 신학생으로 봉헌하고, 마을의 ‘회장’직분까지 맡았던 최경환은 체포됐을 때도 남보다 더 많은 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만 했다.
최경환(프란치스코)와 이성례(마리아) 사이에서 후손 중 최양업 신부님을 비롯한 12분의 성직자와 9분의 수도자가 하느님께 봉헌되었으니 크나 큰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집안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성인을 기리기 위해 수원교구에서는 수리산성지를 조성하였다
이 성지는 최경환 성인의 가족들이 이웃들과 더불어 복음적 기쁨과 희망으로 살았던 신앙선조들의 옛 신앙촌 소공동체입니다.
총명함과 바른 인품을 지닌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사제의 길을 시작한 한국교회 성소의 요람입니다.
박해와 환난을 당해서도 모두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기꺼이 잡혀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뜨거운 믿음의 산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하여 성인의 놀라운 증거의 삶을 본받고 배우도록 성인으로 하여금 순교하신 후에도 다시 이곳에서 안식을 누리도록 섭리하신 교회사에 빛나는 순교자의 사적지입니다.
수리산 성지엔 최경환 성인의 묘와 십자가의 길, 순례자들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 ‘최경환 성인 고택’ 등이 있습니다.
미사는 월요일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봉헌됩니다.
안양 역에서 병목안 삼거리를 지나 성지로 가는 도보순례도 권장할만하고, 풍광이 빼어나 신자 뿐 아니라 일반인들의 방문도 잦은 성지는 한국관광공사의 ‘2009년 1월 가볼만한 곳’에 선정되기도 했으며, 시간을 내어 수리산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를 권고하고 싶습니다.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한국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첫댓글 수정사항이나 다른표현 생각나면.
어드바이스 부탁~
아주 좋습니다. 그리고 수고하였고요
위 글은 구술체로 풀어 놓은 흔적이 좀 있지만
아직까지 소설등 문학적 형태로 기술되어 있는것 같습니다.
(그것을 강론상 많이 풀어 이야기로 하면 되겠지만)
이것을 말로 이야기 하는 것이니까
나름대로 말하는식으로 쉽게, 또 조미료를 첨가한다고 생각하여
현대적으로 풀어 바꾸어 놓으면 강론이 참으로 멋있게 될것이라 생각이 듭니다만 ---
조그만 더 고민하면 크나큰 은총이 보입니다. ㅋ
아주 적절한 지적입니다. 강론용이라면 구어체로 씀이 적합합니다.
덧붙여서...너무 어려운 용어보다는 쉬운 용어를 선택하여 쉽게 전달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발표 시간이 대략 오분 정도인데 위 내용만으로는 짧은 감이 듭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 아버님이시니 16살에 마카오에 신부 수업 차 떠난 최신부님을 위한
기도 얘기도 끼어 넣으면 좋을 듯합니다.
그리고 아직 성인 반열에 오르진 않았지만 부인 이성례마리아 순교 장면도 슬쩍 곁들이면 더
훙미를 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오늘을 살고있는 우리들도 비록 피를 흘리는 순교는 아닐지라도
창조주께서 지으신 성전,즉 몸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사람답게 사는 소박한 꿈을 이루기위해
가마동에서 땀을 흘리는 것도 순교의 삶일 것입니다.
사람답게 사는 순교.
원래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는 체질이니 잘 하실겁니다.
7분 정도 발표하라하여,
시간 체크하니 11분이나되어 가지치기 하고 있습니다.
7분?
긴 시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