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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大寒)이 지났어도 아직은 겨울입니다.
하지만 1월 마지막 주말은 초봄 같은 겨울이라고 할 만큼 바람조차 부드럽고 따스했습니다.
불과 3일 전만 해도 칼바람을 동반한 눈보라가 치던 변덕스런 날씨는 잠시 물러간듯합니다.
그래서 집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어 두터운 파카 대신 후리스를 걸치고 길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영산홍과 산벚꽃이 피는 4월이나 철쭉 군락이 황홀한 늦봄에 찾아가려 아껴두었던 충남 아산 영인산(靈仁山) 자연휴양림입니다.
15년 전 대학동창 모임 때문에 영인산에 갔다가 자연휴양림의 훈련소 막사 같은 허름한 건물에서 하루 묵은 적이 있습니다.
가운데 통로가 있고 양쪽에 마루가 이어진 열악한 숙소에서 친구들은 훈련소 내무반 시절의 추억을 소환해 술 잔을 기울이며 군대 시절 얘기로 밤을 지새운 기억이 납니다.
당시 초겨울 휴양림 주변은 등산로외에는 별다른 볼거리도, 고즈넉한 산책로도 없었습니다.
다소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분위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 밥을 해먹고 일찍 체크아웃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후배가 영인산을 다녀왔다며 휴대폰으로 찍은 여러장의 사진까지 보여주며 꼭 한번 가보라고 권유하더군요.
사진 속 계절은 봄인데 온 산을 봄꽃으로 화려하게 채색해 산 전체를 마치 '시크릿가든'처럼 꾸민듯 했 습니다. 그래서 봄이 오기 전 사전답사한다는 마음으로 영인산 자연휴양림을 찾았습니다.
37만 평에 달하는 자연휴양림은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떠오를 만큼 변했더군요.
산 곳곳에 중심지구, 습지학습지구, 계곡학습지구, 복원지구 등 지구별로 다양한 형태의 주제와 테마에 따라 디자인된 것을 보고 살짝 놀랐습니다. 숲속에 들어앉은 숙소도 통나무집으로 바뀌었습니다.
아산시가 이곳에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 수목원이나 관광휴양 시설로 개발한 듯합니다.
차를 주차시킨뒤 세 갈래길중 무장애 데크로드를 택해 정상방향으로 올라갔습니다.
데크로드 아래에는 고즈넉한 오솔길이 물흐르듯 나있어 숲 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걸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데크로드엔 아이들과 손잡고 가족단위로 방문한 탐방객들이 많더군요.
벌써부터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날씨라 울창한 숲은 나무뿌리에서 서서히 생기가 올라왔습니다.
정상은 멀리서 보면 무척 높아 보이는데 걷다 보면 오르막이 완만해 힘들지 않습니다.
정상 바로 아래에는 두 마리의 학을 형상화한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 건립돼 청일전쟁 당시 전략적 요충지였던 영인산의 역사적 질곡(桎梏)을 보여줍니다.
탑에서 5분만 올라가면 정상(해발 364m)을 밟을 수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없이 탁 트인 정상은 역시 다릅니다.
바람이 심하게 불었지만 '뷰'는 빼어나더군요.
비록 높은 산은 아니지만 정상에 서면 멀리 서해 바다, 삽교천, 아산만 방조제와 아산 시가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이날은 운무(雲霧)가 끼어 시야는 흐렸지만 눈 맛은 상쾌했습니다.
조망에 정신이 팔려 잠시 정상에 머물렀다가 산림복원지구 전망대를 거쳐 황금빛 갈대가 수놓은 계곡학습지구와 습지학습지구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도중에 레포츠 시설인 스카이 어드벤처와 포레스트 어드벤처를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보였지만 겨울이라 운행은 중단된 것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상투봉, 신선봉, 깃대봉, 연화봉으로 거미줄처럼 종횡으로 연결된 걷기 코스가 많아 겨울에도 지루할 틈이 없이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눈에 띄었습니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숲을 통해 휴식과 치유를 위한 장소로 조성됐다는 산림 박물관은 문을 굳게 잠가놨더군요. 탐방객들이 가장 많이 몰리는 주말에 휴관하는 것은 행정 편의적인 발상입니다.
또 미니어처 같은 초가집 등 드문드문 설치한 조악한 조형물은 영인산의 멋진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예산낭비입니다.
그렇다고 영인산의 매력이 반감되지는 않습니다.
우리 일행은 올 봄에 다시 영인산 자연휴양림을 찾기로 했습니다.
겨울이 지나기만 학수고대하고 있는 매화와 영산홍, 철쭉꽃이 지천이라 봄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