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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육신, 재단사의 꿈은 사라지고
증 언자 : 최영옥(여)
생년월일 :1960.(당시 나이 19세)
직 업 : 재단사(현재 가정주부)
조사일시 : 1989. 1
시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최영옥 씨는 19일 밤 옆방에 살던 사람들과 함께 금남로로 갔다. 금남로 2가 한국은행 앞에서 담을 타고 내려온 공수들에게 포위당했다. 도망칠 통로를 찾아 우왕좌왕하던 사람들 틈에 끼어 최영옥 씨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구타를 당했다. 머리채를 잡힌 채 머리와 어깨 등 온몸에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받고 실신해 버렸다. 그 후 구멍 뚫리고 찢어진 머리의 상처와 골절된 다리의 상처를 치료받았으나 현재까지 두통과 관절염, 기억력 감퇴에 시달리며 약에 의존하는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다.
꿈에 부풀었던 직장생활
나는 아주 평범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밀감을 밭뙈기로 사서 서울, 광주 등으로 파는 중간 상인인 아버지의 수입으로 우리 가족은 생활했다.
1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난 나는 광주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언니 밑에서 재단을 배웠다. 재단기술을 익혀 어느 정도의 경력을 쌓은 뒤 시내에 가게를 내서 양장점을 차리는 것이 내 소원이었다.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착실히 기술을 익혀 남동에 있는 양장점에 취직을 했다.
1980년에도 남동의 양장점에서 일했다. 재단일을 한 지 3년 정도 되었기 때문에 꽤 숙달되었고, 보수도 월 25만 원으로 다른 직종에 비해 후하게 받았다.
18일 출근해서 일을 마치고 오후 7시 40분경 퇴근을 했다. 그때까지 통행금지 시간이 단축된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채 남동에서 충장로를 거쳐 서동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충장로에 굉장히 많은 공수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우체국 앞을 지나가려는데 내게 총을 들이댔다.
"너, 데모 주동자지?"
"나는 학생도 아니고 데모도 하지 않았어요. 직장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니 제발 보내주세요."
그 많던 군인들이 다 한마디씩 거들면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퍼부었다. 너무 무섭고 겁에 질린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아무리 설명하고 사정해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나를 데모하고 다니는 학생으로 단정하고 심한 욕을 하였다. '이 사람들과 실랑이해 봐야 소용없겠다' 싶어서 '높은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러자 그중 한 사람이 동아극장 골목으로 해서 빨리 가라고 했다. 그 길로 뛰다시피 집으로 갔다.
다음날(19일) 출근시간에 맞춰 직장으로 갔다. 데모하는 학생들을 무조건 곤봉으로 때려서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을 버스에서 봤다. 전날 밤 나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던 공수들의 모습과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구타한 후 끌고 가는 군인들의 잔인한 모습을 확인하고 그때부터 군인에 대한 두려움이 극에 달했다. 퇴근길에 군인들만 보이면 멀리서부터 피해 다녔다. 퇴근할 때도 일부러 외곽도로로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서 집으로 갔다.
공수들의 구타로 머리에 구멍이 뚫리고
19일 밤, 옆방에 살던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시내에 난리가 나 도청으로 구경하러 간다고 했다. 옆방 아저씨는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부엌칼을 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나는 만류하는 남동생의 손길을 뿌리치고 따라나섰다.
집에는 아버지 혼자만 남고 모두 나갔다. 제주도에 계시던 아버지는 잠시 집에 들리러 오셨고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언니집에 가고 안 계셨다.
막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던 8시경에 출발하여 금남로에 있는 한국은행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굉장히 많은 시민들이 몰려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들과 시민들 사이에 싸움이 시작됐다. 한국은행 담을 타고 내려 온 공수들에 의해 우리들은 양쪽에서 포위당하고 말았다. 나는 그때 공수들이 얼마나 훈련이 잘되어 있는가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양쪽에서 최루탄을 쏘며 공수들이 밀어닥치자 난장판이 벌어졌다. 도망치기 위해 밀고 밀리기를 수차례 거듭했다. 갑자기 뒷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끼고 나는 그자리에 고꾸라졌다. 사람들 틈에 끼여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땅바닥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나를 향해 공수들이 달려들어 미친듯이 곤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공수들은 노래까지 부르면서 나를 개패듯이 팼다. 내 옆에는 많은 사람들이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 다.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으나 그들은 막무가내로 대들었다. 순간 나는 죽은 체하고 있으면 구타를 멈출지 모른다는 생각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이년이 죽은 척하고 있어' 하면서 머리채를 잡아 끄집어냈다. 놈들은 나를 군화발로 밟고 굴리는 등 갖은 포악한 행위를 다 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공수 한 명이 내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것을 느꼈다. 어린 나이로 실신하도록 맞은 내 가 불쌍했던지 그는 시민들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던졌다. 긴장이 풀려서였는지 다시 정신을 잃어버렸다.
격분한 아버지는 시민군으로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나를 병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가까운 곳에 있던 병원으로 가서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자 유리문을 깨고 들어가 응급치료만 받고 제일극장 옆 한일정형외과로 옮겼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새벽녘에야 정신이 들었다. 온몸이 피멍으로 변해 있고 퉁퉁 부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두 군데 찢어진 머리의 상처만 꿰맨 상태로 복도에 있는 의자에 누워 있었다. 왼쪽 다리가 삐었는지 아팠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 다리 좀 어떻게 해달라'고 고래고래 소리쳤으나 외상이 없어서 그런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간호원이 집 전화번호를 묻길래 가르쳐줬다. 병원의 연락을 받은 아버지가 새벽에 오셨다. 병원에 있어봤자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밀려든 환자들 때 문에 병실에 들어갈 수도 없어 그날 새벽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보니 한쪽 머리는 10센티미터 가량 찢어졌는데 그 상처는 꿰매졌고, 다른 쪽은 구멍이 뚫렸는데 그곳은 꿰매지 않고 그냥 방치해 놓았다.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일어나 보니 구멍 뚫린 머리에서 흐른 피로 이불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도 무서워서 병원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본 아버지는 열에 받쳐 그 길로 시내로 나가 시민군에 가담하셨다. 시위차량을 타고 다니면서 총쏘는 법도 가르쳐주고 시위에 합류하셨다고 했다. 아버지는 날마다 아침에 나가 밤이 되면 집으로 오셨으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지에 관해서 자세히 듣지 못했다.
내가 누워 있으니까 옆방 아주머니가 살림을 맡아 해줬고, 치료는 아저씨가 약방에서 구해 온 약으로 옆방 아저씨가 대충 해줬다.
19일 밤 우리와 같이 시내로 나갔던 옆방 아주머니 한 분도 머리가 찢어지고 온몸에 타박상을 입고 집으로 왔다. 그 분은 내가 집으로 오자 그때야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갔다. 그 후 계속 고통에 몸부림치다 1982년에 입원했으나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하여 퇴원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이사를 갔는데 그 분은 1982년에 사망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광주시내가 조용해지고 시외통화가 가능하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걱정할까봐 조금 다쳤다고 하고 내가 서울로 갔다.
계속되는 후유증
1985년까지 서울에 있으면서 병원과 한약방을 찾아다니며 사비로 치료받았다. 병원에 가서 내가 다친 경위에 대해 설명하면 의사와 간호원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오히려 나한테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했다.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해도 믿지 않아 어찌나 답답하고 복장이 터지던지 계속 얘기하다 보면 정말로 내가 미칠 것 같았다.
그동안 이름난 한약방을 찾아다니며 한약도 복용하고 심지어 금침까지 맞아봤으나 별 효험이 없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똥물도 가리지 않고 먹었다. 지네가루도 먹어보고 송장 썩은 물도 구해서 먹었다. 때로는 '삼씨'도 복용했으나 별다른 효과가 없어 지금까지 통증에 시달리며 약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봐도 정확한 병명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9년이 지난 지금까지 날마다 계속되는 두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 후 기억력도 없어져 방금 했던 일도 생각나지 않고, 물건을 어디다 두면 생각이 나지 않아 한참을 찾아야 한다. 체력도 급격히 약화돼서 힘든 일은 전혀 못 하고 남들 다 하는 살림만 하는 데도 너무 벅차다. 날씨가 조금만 꾸물거리면 자리펴고 누워서 꼼짝도 못한다. 허리, 어깨, 등,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결려서 미칠 지경이다. 머리가 아파서 그런지 손도 떨리고 그 후유증이 이만저만 심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한약이 떨어질 날 없이 먹고 한 달에 두 번 정도 영양제를 맞고 있다. 이렇게 몸보신을 하지 않으면 운신을 못 하고 누워버릴 정도로 몸이 허약해졌다.
서울에 있으면서 치료받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도 내가 부상당하게 된 과정에 대해 듣고 처음에는 이해하고 잘 보살펴줬으나 날마다 비실거리는 나를 몇 년 동안 지켜보면서 지쳤는지 요즘은 짜증을 낸다. 아마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도 약을 달여주는 데 이골이 났을 것이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지금까지 약을 끼고 살고 있으니 누군들 안 그러겠는가! 정부측에서는 그때 다친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나는 지금껏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부조리에 차츰 눈 떠
1980년 부상당한 후 집에서 치료받고 있을 때 동사무소에서 부상 정도에 대한 조사를 해갔다. 그 명단이 분명히 있을 텐데 나를 제외시켜 버렸다. 지금 정부에서 부상자를 한 사람이라도 줄이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사실도 부상자회에서 의료보험카드를 만드는데 나는 처음부터 신고한 사람이 아니라 부상자로 인정할 수 없어 발급할 수 없다고 해 그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무리 항의해도 소용없자 나는 하는 수 없이 이번 추가신고기간에 다시 신고했다.
1985년 서울에 살고 있으면서 잠시 광주 집에 들리러 왔다. 그때 나는 서울에 살면서 계속 치료받던 중이라 광주에 부상자회가 있는지도 몰랐다. 부상자회 홍보부장이 찾아와서 5·18 때 부상당한 사실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면서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했더니 서부경찰서에서 부상자 명단을 입수했다고 말했다.
나는 공수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면서 내가 왜 그렇게 맞아야 했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구타당했던 19일 밤의 일을 생각하면 항상 분노가 치민다. 길을 가다가도 그때 생각이 떠오르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그런데 당시 부상당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활동을 한다고 하니 무척 반가웠다. 나는 당장 가입하려고 했으나 아버지께서 '동생의 장래를 생각해서 가입하지 마라'고 극구 만류하셨다. 내가 부상자회 활동을 했을 때 가족들에게 미칠 후환이나 보복 이 두려워서 반대하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부상자회에 가입했다. 그 후 다시 서울로 가서 생활했기 때문에 가입만 했을 뿐 부상자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 1986년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광주로 온 뒤부터 본격적으로 부상자회 활동을 시작했다.
1988년 부상자회가 두 개로 분리될 때 나는 이지연 씨가 회장으로 있는 오부동으로 옮겨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기관원들의 횡포
나는 '오부동'에서 '부녀회 홍보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홍보부장이 하는 일은 부녀회원들의 집안에 애경사가 있을 때 회원들에게 연락하여 함께 참석하도록 도와주는 일을 맡아 한다. '오부동'의 정기적인 모임은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부녀회'와 토요일마다 갖는 오부동의 발전을 위한 토의가 있다. 그리고 회원들이 함께 의논해야 할 문제가 생겼을 때 모임을 갖고 각자의 의견을 발표한다.
'오부동'의 주된 활동은 5·18 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첫째고, 다음으로 회원들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같이 도와주고 위로를 해준다. 또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기관과의 협상이 결렬되면 회원들이 단체행동을 한다.
지금은 부상자들에 대한 대우가 좋아진 편이다. 1987년까지만 해도 사람 취급도 안 했다. 병원에서도 의료보험카드를 가지고 진료하려고 하면 굉장히 불친절하고 어떤 곳에서는 받아주지도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고위관직에 있는 사람이 광주에 내려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경찰에 의해 구타당하고 손목을 비틀린 채 강제로 잡혀갔다. 그때마다 높은 양반이 돌아간 후에야 집으로 보내졌다. 또 우리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점거농성이라도 하면 최루탄을 뿌리고 마구잡이로 구타해서 강제해산시킨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닭장 차에 태워 아무 데나 끌고 가서 두 명씩 내려주고 가버린다. 그럴 때 돈이라도 있으면 괜찮지만 수중에 돈도 없는데 객지에다 내려놓고 가버리면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 모른다.
청문회장에 난입
5공화국 시절에 이순자가 전남여고와 광주여고 출신의 사람들을 청와대로 초대했다. 시청에서 내준 다섯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분통이 터졌는지 모른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광주 출신의 여성들이 광주학살 원흉의 초대에 응하다니 말이나 될 법한 소린가! 우리 회원들이 시청으로 가서 떠나려는 차를 막고, 처음에는 납득이 가게 설명했다.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무시하고 차가 출발하려 하자 계란세례를 퍼부었다. 그 사이 출동한 경찰들이 우리를 두들겨패서 닭장차에 태워 송정리로 갔다. 그들이 송정리 부근에서부터 두 사람씩 강제로 내리게 하자 끝내 반항했다. 우리가 왜 이러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자 전경들이 광주 인근에다 모두 내려 주고 갔다.
우리는 다시 시청으로 갔다. 우리가 시청에 도착했을 때는 청와대를 향해 이미 다섯 대의 버스가 떠난 후였다. 부시장 앞에서 '우리를 왜 쓰레기 취급하느냐' 하며 항의농성을 했다. 단식을 하면서 철야농성을 하는데 전경들이 몰려와서 강제로 차에 태우더니 그때는 집에다 내려놓고 가버렸다.
1988년 12월 국회 청문회가 진행되고 있을 때 광주특위가 계속 그런 상태로 유지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지켜본 결과 5·18 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축소, 은폐하려는 경향이 짙고, 김대중의 누명을 벗기 위해 마련된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 5·18 유관단체들이 모여 '우리가 직접 진상규명을 하자'고 결의한 뒤 3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국회의사당으로 갔다.
의사당 안에서 전경들과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시가 6백만 원짜리 도자기 2개가 깨졌다. 잠시 후 평민당과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와서 우리를 평민당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청문회의 증인으로 유족과 부상자를 채택해 달라. 선 진상규명, 후 보상의 원칙을 지켜라' 등의 우리의 요구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고 의사당을 나왔다.
'청와대에 가서 우리의 입장을 밝히자'는 회원들의 의견이 많아 청와대로 가던 중 박물관인가 하는 건물 옆에 차를 세우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차 안에서 준비해 간 김밥을 먹고 있는데 언제부터 따라왔는지 전경들이 여러 대의 닭장차를 몰고와서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우리를 10여 명씩 분리해서 닭장차에 태워 서울시내 경찰서로 분산, 수용시켰다.
나는 12명의 회원과 함께 '청량리경찰서'로 강제연행 되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조서를 꾸미라고 했다. 나는 서울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항상 왔다가 경찰서에 끌려갔기 때문에 담이 커졌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며 반항 했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강제로 경찰서에 잡아다놓고 조서는 무슨 조서냐'고 항의하며 조서를 쓰지 않았다. 단식을 하면서 회원 한 명과 함께 계속 버텼다. 잠도 못 자고 새벽 4시까지 실랑이를 벌이는데 그들은 남녀 형사가 교대로 와서 조서작성을 종용했다. 다른 회원들은 그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나와 회원 한 명은 계속 거부하면서 '서울에 왔던 회원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해주면 쓰겠다'고 하며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들이 지쳤는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라도 써서 달라'고 했으나 그것도 거절했다. '우리가 지은 죄가 무엇이길래 경찰서에 잡아가두고 조서를 쓰라고 하냐'고 물었더니 '국회의사당에 있던 도자기를 깬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하도 어이가 없어 '사람을 수천 명이나 죽이고 부상시키고도 눈하나 깜빡하지 않는 놈들이 그 까짓 도자기 깬 것이 죄라고 사람을 잡아가두냐'고 소리지르자 아무 말도 않고 나가버렸다.
우리들한테 물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들이 회원들을 구슬렸는 모양이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저 여자들의 신원이 파악되어야만 한다'고 하니까 차마 회원들이 자기들 입으로는 말하지 못하고 과거에 '마포경찰서'에 잡혀간 일이 있다고 했다. 마포경찰서에서 명단을 뽑아와서 이름을 부르며 확인하자 회원들이 내 이름을 경찰에게 말해 끝이 났다.
오후 7시경 전경들과 함께 닭장차에 타고 터미널로 갔다. 그곳에서 회원 2명씩 조를 짜서 평민당사로 가기로 했다. 우리는 몰래 터미널을 빠져나와 무사히 평민당사로 갔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회장한테 전화가 왔다. 회원들이 가지 못하고 터미널에 있으니 빨리 오라고 했다. 터미널에서 다시 모여, 경찰서에서 받은 1인당 5천 원으로 차를 불러타고 집으로 왔다.
건강만 회복된다면...
1980년 당시 나와 함께 재단했던 친구들은 지금 시내에 직접 양장점을 차려서 운영 하고 있다. 그런 것을 보면 내 인생이 너무 억울하다. 나는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취직도 못 하지만 가끔 아는 사람들이 옷을 맡기면 집에서 만들어주기도 한다.
당시만 해도 어린 나이라 꿈도 많았다. 재단사라는 직업이 보수도 많은 편이고 일찍 자리잡으면 가게 운영을 직접 할 수 있어 좋은 직종이다. 나도 시내에 양장점을 차려 직접 운영하는 것이 꿈이다. 지금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부상당한 후 건강이 악화되어 후유증에 시달리다 보니 자신감이 없어지고 꿈이나 희망 같은 것이 거의 무너진 상태다. 그래도 소원이 있다면 제발 더 이상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고 건강이 좋아졌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강이 회복되면 계속 재단기술을 익혀 시내에서 양장점을 하고 싶다. 남편은 지금도 재단사로 일하고 있으니 내 건강만 회복된다면 그 일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부상당하지 않고 살았다면 나는 경찰서에 잡혀가서 큰소리치고 시내에서 데모하는 이런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건강은 좋지 않지만 옳은 일을 위해 싸울줄도 알고 그른 일을 보면 고치려고 노력하고 항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이 무엇보다 다행으로 생각한다.
국회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어느 정도의 진상은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두환, 최규하 씨를 증언대에 세워 확실한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자의 처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밝혀진 진상을 감추기 위해 발버둥이치는 노태우와 민정당의 작태가 가증스럽다. 광주의 비극을 낳게 한 책임자는 유가족과 부상자, 광주시민에게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 이렇게 진상이 밝혀지고 관련자의 사죄가 있고 난 후 처벌은 부상자나 유족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온 국민이 하게 될 것이다. (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