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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미자(윤정희)는 문화원에서 '시'를 배웁니다. 특별출연한 '섬진강 시인' 김용택 시인은 한달 안에 한 편의 시를 써보라는 과제를 던집니다. 난생 처음 써보는 시가 제대로 될 리 없죠. 그래도 양미자는 열심히 씁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
2010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이창동 감독은 ‘돈보다 명예’를 선호하는 감독입니다. 왜냐고요? 이 감독이 만든 이전 네 편의 영화 가운데 돈 번 영화 별로 없거든요. 기억을 더듬어볼까요?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밀양>입니다. 데뷔작 ‘초록물고기’가 관심 끈 것을 빼면 흥행에선 그다지 재미 보지 못했습니다. 소설가 출신이면서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감독이라서 그런지 돈이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로 보이나 봅니다.
대신 그의 마음은 유럽을 배회합니다. 특히 칸에 꽂혔습니다. 감독생활 하면서 더러 상도 탔지요. 벤쿠버국제영화제(1997·2002), 베니스영화제 특별감독상(2002),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밀양·2007). 상을 많이 탄 건 아니로군요. 그러나 2009년엔 칸영화제 경쟁부문 심사위원을 맡을 정도로 유럽에서 이창동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번 영화 ‘시’도 칸영화제 공식 경쟁부문에 진출했습니다. 칸영화제에서 큰상 한번 타야죠. 아, 정말 이창동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영화 ‘시’는 그에게 그런 영광을 안겨줄 만한 영화일까요?
인내심이 부족하다면 보지 마라, 이 영화...
런닝타임 139분짜리 영홥니다. 사건이 느리게 전개되는 영화를, 그것도 이리저리 사건을 배치해 시선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어 집중도를 떨어뜨리는 영화를 2시간 19분 동안 꼼짝없이 앉아서 보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화장실도 못 갑니다. 옆 사람을 생각하면 몸을 배배 꽈서도 안 됩니다. 하물며 꾸벅꾸벅 졸수는 없는 일이죠. 인내심 테스트 해보겠다는 심보라면 모를까, 천성적으로 인내심이 부족하다면 포기하세요, 이 영화.
그러나 인내심 하나는 타고 났다고 자신하는 분은 이 영화 볼 자격 있습니다. 이 영화 정말 지루합니다. 사운드는 민숭민숭, 화면 전개는 느릿느릿, 이제는 할머니가 된 대배우 윤정희의 불규칙한 호흡, 영화를 이끄는 두 개의 사건 얼개는 지그재그 갈지 자 걸음, 그 흔한 액션도 없죠, 세 마디 하면 두 마디를 차지하는 욕지거리도 없죠,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사람도 없죠, 무슨 놈의 대사는 그렇게 소곤거리던지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영화냐고요?
▲이창동의 다섯번째 영화 '시' 포스터. |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고숩니다. 영화를 아는 감독이라는 말이죠. 관객에게 뭔가를 생각하라고 강요하는 감독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양미자(윤정희)는 단어(명사)를 깜박깜박 잊는 초기 치매 증세에 시달립니다. 양미자의 치매는 이 사건의 중심 사건이자 외손자가 연루된 ‘집단 성폭행’ 사건에서 그녀를 이탈시킵니다. 또 그녀는 문화원에서 시를 배우면서 사건에서 자꾸만 떨어져 나갑니다.
그녀는 시를 쓰기 위해 ‘섬진강 시인’ 김용택 선생이 가르쳐준 대로 시상(詩想)을 찾아 헤맵니다. 그러다가 ‘집단 성폭행’ 후유증으로 자살한 아네사의 행적을 쫓습니다. 아네사 어머니와 합의하기 위해 찾아가서는 엉뚱한 얘기만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헤어질 때 자기가 아네사 어머니를 찾아온 진짜 이유를 깨닫고 당황합니다. 이런 식입니다. 일관성이 없단 말입니다.
좀 진부하지만, 가해자 아버지들이 늘어놓는 사설들은 분노를 일으키기보다는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설은 대단히 사실적이고, 현실에 맞는 말입니다.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마음이나 죄책감은 온데간데없고, 오로지 가해자인 산자(자식)들만 염려하면서 그들의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줍니다만, 아무튼 진부했습니다.
이 감독은 특별출연한 김용택 시인의 대사를 통해 ‘지금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라고 주장합니다. 심지어 ‘시 같은 건 죽어도 싸다’고 외칩니다. 이 감독은 시가 죽어가는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관객에게 묻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영화가 죽어가는 시대에 영화를 만드는 자신에게서 해답을 구하려고 하는 듯했습니다.
▲촬영현장에서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아마도 모니터를 하는 중인가 봅니다. 이 감독은 윤정희를 어떻게 섭외했을까요. 궁금합니다. 근데... 윤정희 많이 늙었죠? |
배우들의 연기는...?
60년대 문희, 남정임과 더불어 트로이카의 한 축이었던 윤정희가 주연으로 출연합니다. 이창동 감독이 어떻게 윤정희를 섭외했는지 뒷얘기가 궁금합니다. 나중에라도 알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윤정희의 연기는 돋보이지 않았습니다. 거친 호흡과 낯선 동작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오랜만에 해보는 연기였을 테니 당연한 현상이겠지만, 윤정희의 환상이 깨지는 아픔을 맛봤습니다. “거절하지 그랬나...”하고 중얼거릴 정도였다니까요. ‘마더’의 김혜자가 생각났습니다. 비교해보니 김혜자가 연기는 참 잘하는 배우구나, 여겨지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오르더군요. 이창동 감독은 윤정희의 유럽 이미지가 탐났던 게 아닐까. 알다시피 윤정희의 남편은 백건우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특히 프랑스에서 장기간 체류하며 유럽에서 연주활동을 했던 사람이죠. 프랑스 사람들도 ‘시’를 보게 될 겁니다. 그때 윤정희의 존재감이 빛을 내지 않겠습니까? 윤정희 하면 백건우의 아내이자, 한때 한국의 여배우였다는 것쯤 프랑스 사람들이 금방 알게 될 테니까요.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다 나오잖아요. 게다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가 출연하고, 한국의 문화부장관 출신 감독이 만든 영화 ‘시’>라는 카피를 생각했더니, 칸영화제가 떠오르더군요.
좀 앞서 나갔나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억측입니다. 아무튼 윤정희의 연기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어디서도 치료받지 못할 상처가 되었습니다.
김희라. 참 대단한 배우입니다. 한국의 대배우 김승호의 아들로써 아버지의 후광을 적지 않게 입었으면서도 스스로 성격파 배우로서 영역을 구축한 훌륭한 배우입니다. 그는 지금 지병을 앓아 거동이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에서 독특한 캐릭터로 깊은 인상을 심어줍니다.
▲꽃장식 모자에 화사한 의상을 입은 양미자. 그녀는 치장하는 걸 좋아하고, 호기심도 많은 엉뚱한 캐릭터 입니다. |
“나, 마지막으로 남자구실 하고 싶어.”
그는 집안청소를 해주고, 목욕을 시켜주는 양미자에게 비아그라를 먹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까 먹은 약 비아그라죠?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러세요.”
양미자는 목욕을 시키다가 말고 수건과 김희라의 옷가지를 욕조에 던지면서 이 한마디를 남기고 떠납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양미자가 곤경에서 벗어나는데 결정적 도움을 받게 해줍니다. 내용을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 건너뛰겠습니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는 특별한 게 없습니다. 모두 자기에게 맡겨진 몫을 실수 없이 해냈다는 정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시’는 소란스럽지 않은 영화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악다구니를 써가면서 살았구나, 하는 거... 소란스런 영화에 눈과 귀와 가슴이 익숙해졌구나, 하는 거... 뭐 이런 것들을 생각나게 만들더군요. 그런 면에서 이 감독의 '시'는 참 조용하고 차분한 영화였습니다. 이창동 마니아가 아니면 이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제63회 칸영화제에서 이창동 감독에게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만약 좋은 결과가 나온다면 100% 윤정희 때문일 겁니다. 아니면 말고요. 개봉은 5월13일(목)이고, 런닝타임은 139분입니다.
첫댓글 놀랍고도 새로운 발견입니다. 누구 얘기냐구요? 이창동 감독? 배우 윤정희? 아뇨. 바로 차세대 영화비평가로서의 장가방님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의 발견입니다. 여기 스크랩 제가 한 거 였습니다. 슬렁슬렁 대충 보기엔 좀 미진한 측면이 있어서요. 꼼꼼히 읽었습니다. 대단히 잘 익히며 그런 시각도 있구나, 하는 참신함도 돋보입니다. 앞으로 혹 소설이 안되거나, 삶이 영 재미없거나 무료할 때, 오래된 영화건 새로운 영화건 가리지 말고 영화를 한 편 때리고(^^) 그 평을 써보세요. (아, 어쩌면 이미 쓰고 계셨을 수도 있겠군요) 제 소견이지만, 굉장한 성취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저 와는 꽤 다른 시각을 가졌지만....요^^;
먼바다님 댓글을 읽고 어리둥절해서 혼났습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과했습니다. 남이 일껏 만들어놓은 것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공짜로 영화를 보여줬으니 느낌 정도는 말해줘야 하겠기에 써본 건데... 먼바다님도 영화에 깊은 관심과 조예가 있으신 듯합니다. 영화 한 편 만들어보는 게 제 여망인지라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경박한 세상을 짊어지고 있는 이창동, 그의 어깨 때문에 잠못 이룬 날이었습니다. 전 윤정희씨의 서먹한 연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양미자의 이미지는 세련된 연기가 아니라 그 서먹함으로 더욱 깊게 다가왔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봤습니다. 시란 저런 양미자 같은 얼굴이 아닐까. 잡은듯 하지만 절대로 잡히지 않는, 연기이되 연기가 아닌 영화로 만든 영화 같은, 꽃무늬 치마를 입었지만 검은 치마의 무게를 느끼게 하는 영감, 빛나는 나뭇잎이되 구멍 숭숭 뚫린 헛점, 그리고 낙하! 그냥 그런 생각이 문득 들어 횡설수설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윤정희는 전설입니다. 윤정희의 연기가 안타까웠던 겁니다. 욕심이 컸던 탓이죠. 아침노을님의 생각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도 윤정희를 좋아합니다. 어렸을 적 제가 본 윤정희는 우리 엄마보다 예뻤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