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인사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수 없는 전란과 천재 지변, 권력자들의 횡포 아래 살았던 우리 조상들의 피 눈물이 섞인 인사죠. 여러분은 어떠셨습니까? 밤새 안녕하셨는지요? 비 피해는 없으셨습니까?
2. 큰비가 5일째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서울에만 332mm라는 어마어마한 양의 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78년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집은 91년도 물난리를 한번 겪어놔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안양천 수위와 한강의 물높이를 보면서 목감천 범람은 초읽기에 들어가는 듯 했죠. 우리 옆집 박의순 목사님 댁은 일찌감치 짐을 싸서 윗층에 맡겨 놓고 교회로 피난하였습니다. 우리는 한번 경험이 있어서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짐을 빼내리라 생각하고 학생회와 주변의 집사님들게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다행히 11시쯤 비가 그쳤고 밤사이 다시 오지 않아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아침 뉴스 속보를 보니 서울 경기지방의 상황은 호전되었지만 충청권이 또 막대한 피해를 보고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3. 무섭게 쏟아 퍼붓는 이번 비를 보면서 그 의미가 뭘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기상 전문가들도 예측할 수 없는 게릴라 성 호우가 상상을 넘는 무서운 기세로 곳곳에 큰 피해를 남기고 있습니다. 무슨 자연의 조화인가? 하겠지만 따지고 보면 다 자업 자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비에 대한 이해 할만한 설명을 어제 김동완 통보관이 해 주더군요. 이번 장마가 이산했다는 겁니다. 보통은 장마 전선이 남태평양의 무더운 고기압과 오오츠크해 고기압의 찬성질이 우리나라 남쪽에서 부딪히면서 장마전선을 형성하고 남태평양 고기압의 발달로 서서히 북상하다가 남태평양 고기압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점령하면 장마는 끝나고 대신 무더위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장마는 오오츠크해 고기압 세력이 강해 우리나라 남부에서 장마가 소멸되었고 중부지역에서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다가 서해에서 발달한 비구름과 중국에 상륙한 2호 태풍이 몰고 온 많은 양의 습기가 수직상승 기류와 만나 비구름을 형성하고 게릴리성 폭우를 쏟아 붓는다는 것입니다. 기상대의 예측으로는 이번 주까지 내내 그러고 있을 예정이라 합니다. 얼마나 더 비가 내릴지 걱정입니다.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이런 기상이변이 우리 나라에만 있는게 아닙니다. 두달여 계속되던 중국의 수해 피해가 어제 양쯔강 뚝이 무너지면서 수천 명의 실종자를 만들었습니다. 호주에서도 피해가 크다고 합니다. 지구촌 곳곳이 홍수와 가뭄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이 우리에게 발하는 경고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1-2년에 한번쯤 몸살에 걸리는데 매우 심하게 알아 눕습니다. 몸이 너무 무리해서 쉬라는 경고로 받아 드립니다. 아직 몸 상태가 괜찮기에 이렇게 경고해 주는구나 하고 말이죠. 마찬가지로 봅니다. 이런 현상이 이 지구의 위기를 가르쳐 주는 것이죠. 하지만 이게 쌓이다 보면 불치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경고를 겸허이 받아 자신의 몸을 돌봐야 하는 겁니다. 이상 기후가 시작된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그 동안 인간이 저지를 죄 때문이죠. 자연을 약탈하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마구 써서 없애버린 탓입니다.
4. 오늘은 남북 평화통일 공동 기도 주간으로 지키는 첫날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남북 평화통일 기도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오후에는 광명 NCC 연합 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다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평화통일 기도 주일을 생각하면서 오늘 본문을 잡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라 새삼 다시 줄거리를 얘기할 필요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요약해 보면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간음한 여자를 잡아 끌고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우리가 알기에 모세의 율법에는 간음한 여인은 돌로 치라고 명하였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침묵합니다. 다만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뭔가를 쓰시죠. 예수의 침묵에 그들의 성화가 심해집니다. 계속 대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몸을 일으켜 말씀하시죠.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곤 다시 앉아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침묵...
갑자기 사위는 정적에 휩싸이고 누군가 양심의 가책을 받은 어른으로부터 젊은이까지 한 사람 한 사람 그 자리를 뜹니다. 결국은 정적 속에 예수님과 간음한 여인 만 남았습니다. 예수께서 묻습니다.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모기만한 목소리로 여자가 대답합니다. "예" 예수님이 여인에게 말하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범죄치 말라."
5.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시고 아침에 성전에 내려오니 많은 이들이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였습니다.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가 좋습니다. 그런데 방해꾼이 나타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성전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곤 예수를 곤경에 빠뜨릴 질문을 하죠. 어떻게 해서든 채을 잡아 예수를 제거하고자 그들이 꾸민 고도의 계략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살인 우상숭배와 함께 간음한 여자는 사형으로 다스리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레위기 20: 10-12) 이런 사실을 들먹이며 예수님에게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한다면 자신의 가르침인 사랑을 저버린 자로, 또 사형의 권한을 가진 로마에 대항하는 자로, 반대로 그 여인을 살려두라 하면 율법 파기자로 매도할 속셈이었습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릴 위기의 순간 예수님은 어찌하실른지요?
6. 침묵, 침묵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불합리한 율법 앞에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간음이란 게 혼자 할 수 없는 것이거늘 왜 여인만 죽여야 하는지? 죄 없는 인간이 없거늘 자신의 의를 들어내려고 남을 정죄 하는 저들의 모습 속에서 그릇된 지식과 무모한 충성심이 빚을 수 있는 비극을 생각하며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침묵할 밖에 ... 땅에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쓰시는 예수. 땅에 무엇을 쓰셨는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만일 그 내용이 중대한 것이라면 땅에 무엇인가를 쓰고 계신 예수에 대해 두번씩이나 언급하면서 그 내용을 밝히지 않을리는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손가락을 끄적거림으로 질문같지 않은 저들의 질문에 답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에레미아의 탄식이 생각나서였을까요? "이스라엘의 희망은 야훼께 있습니다. 주님을 저버리고 어느 누가 부끄러운 꼴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맑은 물이 솟는 샘 야훼를 저버리고 어느 누가 땅에 글씨처럼 지워지지 않겠습니까?"(렘 17:13) 어떤 사본에는 간음한 여인을 고소한 자들의 죄를 땅에 썼다는 내용이 있기도 합니다.
7. 침묵과 침묵 사이, 낙서와 낙서 사이에 할 수 없이 던지시는 한 마디 외침. 할말이 너무 많아 말이 막힐 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 답답함을 억누를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위가 낙서입니다. 가슴 찢어질 듯한 안타까움과 아픔, 그것을 너머서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 그는 단지 한마디 말로 그 심정을 대신합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도대체 너희는 어떤 인간들이냐? 누가 누구를 돌로 치겠다는 거냐? 너희 가운데 이 여자 보다 더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단 말이냐?
치솟는 분노와 안타까운 연민 사이에서 단지 예수가 할 수 있는 단 한마디! 침묵을 깨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씀하신 그 한마디는 천 마디의 화려한 웅변보다 힘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단호하고 열띤 음성으로 그들의 간교한 음모를 파헤치고 그들도 똑같은 죄인이라고 사자후를 토했다면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율법에 이미 눈멀고 그릇된 충성심에 불타는 그들이 그냔 참고 있었을까요? 누군가 어디선지 날아온 돌맹이 하나가 결국은 여인을 죽게 하고 예수를 궁지에 몰아 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조용한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 침묵에 들어가는군요.
8. 누군가 그날 그 자리에서 자기 속에 우러나오는 양심의 소리를 듣고 등을 돌려 떠난 사람은! 율법의 집행자가 되어 왔다가 양심의 소리를 통해 하늘을 만난 사람은 누굴까? 불교에는 여래장 사상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여래의 자궁이 있다는 것이죠. 여래의 씨앗이 있단 얘깁니다. 다른 말로는 불성이 있다는 거죠. 우리 성서도 그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천하에 몹쓸 사형수도 회개하고 자신의 장기를 남에게 나누어주고 죽을 수 있는 거지요.
하지만 오늘날의 기독교는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앗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원죄(原罪)에 대해서는 그리도 열심이면서 원복(原福)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우리 교회가 바리새인, 서기관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눈을 안으로 돌려 자신의 정체, 자기의 참모습을 보는 것이 종교의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에 다다르면 더 이상 음모도 범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선가 어른들로부터 젊은이까지 하나 둘씩 떠나 현장은 깨끗이 비워졌습니다. 오직 예수와 여인만 남았습니다. 진리와 진리를 만난 사람이 하나되어 존재합니다. 예수님이 말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 하지 않으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진리와 하나된 자리에서 남은 것은 깨끗이 씻기어져 해방된 존재가 된 이름 없는 여자와 그 속에 충만한 자유의 물결이었습니다.
9. 분단의 상처로 얼룩진채 서로를 간음한 여인이라고 송사 하는 남과 북이 있습니다. 북은 주장합니다. 남한은 미 제국주의와 붙어 온갖 죄를 저지른 간음한 여인이라고.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요. 남은 주장합니다. 김일성 부자를 하늘로 떠받들며 소련, 중국의 지원 아래 자유를 억압하고 일인 독재의 왕국을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있다고.
그러면서 벌써 50년 세월을 훌쩍 넘겼습니다. 남의 눈에 있는 들보만 쳐다보고 있었던 거죠. 어찌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궤멸 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자기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안에서 둘려나는 양심의 목소리를 들어야겠습니다. 그리되면 정죄의 칼날은 무뎌지고 신뢰의 눈빛이 더욱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위기에 처해 있는 남과 북. 서로의 상처를 싸 매주고 치유할 가장 적기입니다. 이미 체결된 남북합의서를 이행할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의 죄성을 고백하고 서로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찌해서든 상대를 죽이려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오늘 그런 축복이 남과 북의 교회와 백성들 마음속에 임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