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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당西庵堂 홍근鴻根 대종사大宗師의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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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이 먼 데까지 무엇하러 오려고...힘든데 올 것까지 없어요"라는 서암 큰스님의 말씀 속에는 따뚯하신 배려가 녹아 있었다. 그에 힘입어 재삼 청원드리자, 4월 초순에 서울 갈 일이 있으니 그때 보자는 약속을 해주셨다.
약속 당일 서울 삼각산 중흥사 개토제(開土祭)에 참석하신 서암 큰스님은 매우 건강해보이셨다. 서암 큰스님은 "태고보우국사께서 창건하신 중흥사가 터만 남아 있어 마음이 아팠는데 역사적인 이 도량을 건립하여 불교발전의 초석으로 삼고, 국민정신을 통일시키는 도량으로 일구어 남북분단을 극복하자"는 내용의 법어를 내리시며 불사가 원만히 회향되기를 축원하였다. 개토제가 끝나자마자 서암 큰스님은 또다른 일정을 위해 서둘러 산을 내려가셨다. 젊은 사람들이 못 따라갈 정도로 가볍게 내려가시는 스님을 겨우겨우 따라가며 몇말씀 여쭈었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가시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은 톤으로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씀하시는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기자는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삼각산을 법당 삼은 웅장한 법석이었다.
지나는 새들도 솔바람소리까지도 잠잠히 스님의 말씀을 경청하듯 고요한 산 속에서 스님의 법향(法香)이 봄햇살 처럼 퍼져 나갔다.
-스님,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나야 떠돌이 중이니 떠돌아 다녔지요. 여기도 가고 저기도 가고 이리저리 인연 닿는 대로 떠돌아 다니면서 중이 하는 소리 듣고 싶다면 해주고 다녔어요."
-스님, 미국에 가셔서 포교하시는 등 대내외적으로 무척 바쁘게 지내신다고 들었습니다. "미국 가서 포교를 안 했다고도 할 수 없고 했다고도 할 수 없지요. 여러 교수들을 만나 이야기했는데, 어느 교수는 "지식으로 짜내는 이론을 탈피한 공부, 입 열지 않고 하는 공부를 일러 달라"고 하더군요. 한마디로 상념의 세계는 접어두고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세계, 인생의 참모습을 이야기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어쨌든 인간의 실상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가 매우 인상적이었지요."
-그 교수처럼 요즘 미국사람들은 아니 미국사람뿐만 아니라 현대 서구인들은 서양문명에 한계를 느끼며, 동양사상 특히 불교사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글쎄 그런 것까지는 내가 모르겠고, 불교에 관심을 가진 지식인들이 퍽 많은 것은 사실이예요. 그들은 신 중심의 서양문화에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서양의 종교는 자기는 없고 신만 의지하는 종교인데, 물질문명이 치성해지고 과학이 발달하면서 서구 종교는 사실상 쇠퇴일로를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서구의 학자들은 현대를 서양문화가 벽에 부딪힌 위기의 시대라고 진단하면서 그 구원을 동양의 불교,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님을 설파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찾으려 하고 있어요."
-스님 말씀처럼 요즘 서구에서는 해체이론이라 하여 탈로고스 이론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허구로서 해체되어야 마땅하다는 이론이 풍미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질과 유일신관(唯一神觀)에 파묻혀 살다가 이제는 그 허상을 깨닫고 뒤늦게나마 부처님의 가르침, 물질을 초월하고 나아가 모든 삼라만상이 서로 상의상관(相依相關)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연기적 세계관에 눈뜨게 된 것은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에요. 그네들 가운데 깨달음의 차원에서 공부하려는 사람들, 삶의 실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더러 봤는데 오히려 우리보다 구도자세가 더욱 진지해 보였어요."
-미국에 동양의 선(禪)이 마치 모래 사장에 물 스며들 듯이 스며들고 있다는 말이 실감나는데요. 사실 선에 대한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우리 한국의 불자들도 제대로 선(禪)을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선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십시오. "선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에게 일러주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눈을 뜨고 보면 일상사 모두 선 아닌 것이 없고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부처 아닌게 없어요. 꿈을 깨면 되는데 모두들 꿈에 형상에만 사로잡혀 제 본성이 부처인 줄 모르고 있어요. 선은 상념을 쉬어버리고, 일체 알음알이로 축적된 지식보따리를 벗어버리고 진짜 자기의 본성, 자기의 주체를 찾으러 가는 방법이에요. 그래 절절마다 일주문에는 "입차문내(入此門內) 막존지해(莫存知解)라, 이 문 안에 들어서면 알음알이를 내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자기의 지식저울대로, 자기 잣대로 재기만 하지 자기의 밝은 마음을 깨치려고 하지를 않아요. 선을 해서 깨우치려면 육체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만 급급해 살지 말고 영원한 자기를 찾으려 노력해야 해요.
-선을 통해 마음이 열려지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게 없다는 말씀은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을 설파하신 부처님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겠군요? "그래요, 누구나 다 부처입니다. 다만 부처가 부처인 줄 알지 못하고 부처의 구실을 못하고 사는 게 문제예요. 『금강경』에 비유가 나오는데, 산 속에 금이 아무리 많아도 광부가 용광로에서 잡석을 녹여내고 정련해야 순금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모양은 천차만별 달라도 금인 것은 한 가지이지만 아무리 그의 성품을 가졌더라도 정련을 거치지 않으면 순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곧 부처님의 성품을 가졌더라도 밤잠 안자고 정진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부처가 된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해탈한다고도 말하는데 그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십시오. "부처는 온 우주의 이치를 깨친 각자(覺者)를 말합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각자가 되기 위한 방법이 바로 선이에요. 그럼 해탈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닫고 모든 괴로움과 속박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 말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울어도 내가 울고 지옥을 가도 내가 가고 천당을 가도 내 발로 가야 해탈입니다. 천당을 가더라도 만약 누군가에게 끌려간 것이아면 그것은 해탈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내가 주체적으로 사는 것, 마음이 마치 갈대가 흔들리듯 흔들리지 않고 초지일관 똑바로 자기 부처 찾아 사는 게 수행생활입니다."
- 인간에게 성불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시고 성불의 방법까지 일러주신 부처님께, 그리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스님의 출가 인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참 험난한 시절이었지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우리네 인사말은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에요. 일제 때 하루밤에도 수십 명 씩 끌려가 고문 당해 죽는 사태가 다반사로 일어났기 때문에 인사가 밤새 안녕하셨는가였어요. 또 아무리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일인들이 다 뺏어가니 허구헌날 배를 곯는 거라, 그래 인사가 진지 드셨습니까예요. 그런 인사법이 다 일제 때 만들어진 겁니다. 그렇듯 험악한 시절, 우리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어요. 가산은 다 탕진되고, 날이면 날마다 일인 순사들이 아버지 찾으려고 눈을 부라리고 감시하고, 그러다 보니 나는 아버지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크면서 늘 공포와 괴로움 속에서 자랐지요. 물론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어요. 여기저기 다니면서 동냥글로 이삭 줍기 공부를 했어요. 그렇게 고통받는 생활을 하면서 "인생이 뭔고, 인간이 왜 태어나서 이렇게 볶여 사느고, 이 몸뚱이가 뭐길래 이토록 괴로운고" 하는 의문이 저절로 드는 거예요. 친구따라 교회에 가서 목사와 문답도 나눴는데 시원한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데 자꾸 반감만 드는 거예요. "아니 무슨 신이 그렇게 심술맞은가, 이왕에 창조하려면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만들것이지 왜 이렇게 괴롭게 만들었는고, 누구는 잘 살고, 똔 누구는 못 살고"하며 원망하는 마음만 들어 교회당에도 나가질 않았어요. 그러나 늘 마음 속에는 "인생이 뭔고"하는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지요. 소학교도 신문배달하며 다닐 정도였고 하루하루 사는 게 그야말로 고역이었으니....
나이가 열두서너 살 때였던가, 하루는 동네 뒷산의 절에 찾아갔었지요. 절의 노장이 어떻게 사나 궁금하기도 하고, 내 의문에 답변을 들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가 물었지요.
이러저러 여쭈었더니 노장이 빙그레 웃으시며 "니가 지금까지 배우고 들은 것 다 집어던져버리고 니소리 한번 해봐라" 하시는데 그만 말문이 꽉 막혀버리는 거예요. 아무리 애기 하려 해도 맨 학교에서 배운 것 뿐이더란 말씀이에요. 몇날 며칠 연구해도 도무지 배운 것 말고 진짜 내 소리는 한마디도 없는 겁니다.
며칠 뒤 다시 스님을 찾아가서 "그럼 스님이 답변해보시오"하고 억지소리를 하자 또 빙그레 웃으시는 거라, 아무튼 말씀은 안 하셔도 스님은 뭔가 통쾌하게 사시는 것 같아 중되게 해달라고 졸랐지요. 안 된다고 하시는데 자꾸 졸랐더니 2년동안 머슴살이를 하라고 하시더군요. 그래 꼬박 2년동안 머슴 살고 난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지요."
- 출가하신 위에 일본에서 갖은 고생 하시면서 일본대학 종교학과를 다니신 이야기는 스님의 회고록에서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일본에서 얻은 폐병을 참선으로 극복하셨다는 대목이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죽고 사는 일이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참선에 돌입했지요. 김용사 선방에 들어가서 하루 12시간 이상 정진했어요. 그 때 약은 입에 대지도 않은 것은 물론이지요. "이 뭣고"하는 화두에 생명을 싣고 정진하다보니 각혈도 멈추고 기침도 줄어들더니 어느결엔가 병이 나았지요. 그러나 병이 낫고 안 낫고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칫하면 사람들이 참선의 효용성에만 빠져들 수 있는데 그러면 참선의 본말이 전도되는 겁니다."
- 그래도 생명을 건 정진, 화두를 참구하며 선정삼매에 드신 결과 고질병을 고치신 이야기를듣고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옛날 이야기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옛 스님들의 일화가 결코단순한 얘깃거리가 아니라는 것도... 40안거를 성만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일화 한 토막만 얘기해주십시오.
"한달도 굶고 두 달도 굶고 바위 틈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한 적이 있지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수좌들이 지리산, 태백산, 계룡산 등지에서 정진했지요. 정진을 하다보면 자기도 없어지고 우주도 없어져버리는데 그 없어진 것을 아는 마음은 있어요. 한마디로 시공을 초월한 우주가 텅 비고 아주 밝은 자기가 빛나고 있지요.
아무리 설명해도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어요. 이 경지에 이르면 죽고 사는 것 또한 생각의 기멸(起滅)임을 깨닫고 그대로 태평객이 됩니다. 이렇듯 잔잔한 명경지수처럼 근본 마음이 나타날 때는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라요. 어떤 수좌는 밥을 해놓고 "뜸들거든 먹어야겠다"하고 정진하다 삼매에 들었어요. 이만하면 밥이 다 됐겠다 보니 밥이 썩어버린 겁니다. 괴로울 때는 일각이 여삼추요, 재미날 때는 후딱 지나가는 것처럼 시간도 관념의 문제예요."
- 앞으로 특별한 원력이 있으시다면 말씀해주십시오.
"부처님 가르침은 천고에 누구도 가감할 수 없는 완벽한 교법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의 교법을 이탈하는 이들이 있어요. 오늘날 사회는 물론이고 한국불교의 가장 큰 병폐 또한 집단이기주의에요. 각 문중마다 세상 욕심법에 물들어 세력 다툼을 하는 것은 참말로 눈뜨고 볼 수가 없어요. 모든 중생이 절대 평등한 것을 알고 남의 허물이 있으면 자비심으로 다독거려 주어야 하는데 서로 허물을 캐내며 세속법에 의지해 다투면서 부처님 욕먹이는 일이 많으니... 중흥사를 복원하는데 힘을 기울여 앞으로 니 문중 내 문중 떠나서 참말로 불교를 일으키는 포교운동을 할 겁니다. 어둠은 아무리 쓸어버리려 해도 쓸어지지 않지만 부처님 밝은 등불 켜기만 하면 어둠이 저절로 스러진다 그 말입니다.
우리 불자 모두 참말로 순수한 불교를 일으키는 운동을 서로서로 힘을 합쳐 일으키고 부처님 사상을 고취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불법을 실천하며 살 때 자기가 행복하고, 그 행복한 마음을 가족과 이웃과 사회와 나누어 가질 때 인류평화에 기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쪼록 좋은 법 나눠주어 행복한 세상 만드는 불자가 되길 뵙니다."
-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출처 : 월간 불광 1996년 5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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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교는 어느 절을 가보아도 큰 스님만 있고 '작은 스님' 이 없다. 세속의 상대적 분별심으로는 대 (大)가 있으면 소 (小)가 있게 마련인데 참으로 괴이한 일이다.
통상 종단의 감투를 썼거나 쓰고 있는 스님, 나이가 많은 스님, 사암의 간부 승려등을 큰 스님이라 칭한다. 얼핏 보아도 큰 스님이라는 호칭의 필요 충분 조건인 법력 (法力).지혜등과 같은 불교 인격은 간과되기 일쑤다.
불성 (佛性) 절대평등론이나 만물일체사상의 선리 (禪理) 라면 큰 것이 곧 작은 것이고, 작은 것이 곧 큰 것인지라 큰 스님도, 작은 스님도 없고 그냥 '스님' 만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국의 대표적 선종 사찰인 경북 문경 봉암사 조실을 20여년이나 했고 조계종 종정까지 지낸 '작은 스님' 서암(西庵) 선사를 찾아가 보았다.
그는 86세의 노령인데도 제자들을 공부하라고 모두 선방으로 쫓아 보내고 태백산 끝자락의 무위정사 (無爲精舍) 라는 가건물 토굴에서 시자도 없이 손수 밥짓고,빨래하고, 변소 치우며 살고 있다.
문 : 태백산의 미묘한 경계 (境界) 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바람은 물소리를 베갯가에 실어오고, 달빛은 산 그림자를 잠자리로 옮겨 온다.(風送水聲 來枕畔 月移山影 到牀邊) 일체의 인공 (人工) 을 배제한다는 뜻을 담은 '무위' 라는 토굴 편액부터가 흔히 유위법 (有爲法)에 대칭시켜 무위법이라 부르는 선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무위정사는 겉으로 봐선 전혀 절 냄새도 나지 않는 공사장 야방막 같다.
물음의 '태백산 경계' 는 서암선사의 깨친바 경지를 상징한다. 경계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의 고카라 (Gocara).비사야 (Vishaya) 는 어떤 행위가 발생할 수 있는 영역, 장 (場) 을 뜻한다.
고카라는 소들이 풀을 뜯어먹기도 하고 노닐기도 하는 목초지다. 소들이 그들의 삶을 위한 목초지를 갖고 있듯이 인간도 자신의 내적 삶을 영위할 장소를 나름대로 가지고 있다.
서암 작은 스님의 대답은 태백산 겨울 솔바람을 한껏 즐기고 있는 한 편의 시다. 10평 남짓한 외딴 철판 가건물의 토굴이지만 밤새 벗이 되어주는 빈 창 (虛窓) 의 달빛이 정신속까지 스며드는 월야 (月夜) 의 백광 (白光) 을 어루만지며 사는 삶이다. 기막힌 경계다.
온갖 인해 (人害) 를 뼈저리게 체험하고 난 노장 (老長) 이 그처럼 작은 스님이 돼 자연의 순리에 자신을 내맡긴 방임 (Let - go) 속의 무위 (無爲) 를 살고 있는 경계는 아름답기만 하다.
세상에서 가장 작다는 겨자씨 안에 우주에서 가장 크다는 수미산을 집어넣는 게 선의 묘용 (妙用) 이다. 그렇다면 작은 토굴 속에서 저 큰 태백산으로 마음을 꽉 채워 더 이상 무엇도 들어갈 수 없는 포화 상태가 된 그의 마음 (卽心) 도 한껏 비워낸 무심 (無心) 이다.
문 : 법랍 (法臘 : 승려 경력) 이 얼마나 되셨습니까.
답 : 8×9는 77이다.
세속 곱셈법의 진리는 8×9= 72다. 그렇다면 8×9= 77의 소식은 무엇일까. 서암 작은 스님의 곱셈법은 내가 수행해 닦은 5년분의 도 (道) 는 너한테 줄테니 어서 견성개오 (見性開悟) 토록 하라는 독촉이다. 따라서 77에서 5를 빼면 72가 된다.
그는 원래 승적 (僧籍) 이라는 걸 만들지 않았다. 작은 스님 서암이 승려 호적을 올린 것은 승려가 된지 50여년이 지난 1979년이었다.
그것도 조계종 총무원장이라는 감투를 쓰게 돼 부득이 필요하다고 해서 만들었다.
그러나 현재는 승적이 없다. 94년 조계종단 종권분규 때 종정을 잠시 맡았다가 봉변을 당하자 종단 탈퇴 성명을 내고 무적 승려가 돼버렸다. 이렇게 그는 원래 무적승이었던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깨달음이라는 게 뭔가.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는 절대 자유를 획득하는 일이다. 승려 자격증이라는 건 우는 어린 아이를 달래기 위한 가짜 가랑잎 돈 (黃葉錢)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문 : 어떤 것이 계 (戒).정 (定).혜 (慧) 입니까.
답 : 내 여기에는 그렇게 많은 쓸모없는 가구가 없다.
"한국에는 이미 불교가 없어진지 오래" 라고 목청을 높였다. 문중이나 따지고 네 절, 내 절이나 구분하는데 열중하는 불교라면 아무 쓸모 없는 불교란다.
그는 불법 (佛法) 상의 절은 승려의 절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의, 민족의 절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그래서 현재 사찰들이 문화재 관리.보수를 내세워 받고 있는 '사찰입장료' 도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는 절을 가는데 돈을 내야 하는 불교라면 썩은 불교라고 단언한다.
문 : 찾아 오는 납자들한테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답 : 아침에는 쟁기 끌고 저녁에는 고무래 끈다.
초기 선종은 모기와 산짐승들한테 물리면서도 숲속 바위 위나 자연동굴 속에서 좌선을 계속하는 육체적 고행인 두타행 (頭陀行) 수행을 즐겨 했다. 두타행에서는 일의일발 (一衣一鉢) , 오후 불식 (不食) 의 1일2식으로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면서 법력을 양생하는데 전력했다.
그후 선승들도 절을 짓고 모여 사는 개산주사 (開山住寺) 의 승단을 형성했다. 이 때부터는 밥 짓고 농사일 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불법 진리를 터득하는 이른바 농선병행 (農禪倂行) 의 수행 방법을 권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암선사의 대답은 만행 (萬行) 입네 하고 차비나 거두는 운수행각을 일삼지 말고 자신을 아는 것이 곧 만유 (萬有) 를 아는 것이니 일상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자기성찰이나 부지런히 하라는 얘기다.
문 : 오늘 아침 여기에 오느라 한강다리를 건너 오는데 다리가 흐르는지 물이 흐르는지 몽롱하던데요. 어떤게 맞습니까.
답 :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橋流水不流)
선은 이처럼 기존의 사유체계를 때려 부수려는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차있다. 과연 그렇다면 선의 논리는 무엇인가. 만약 태양계나 은하계의 수많은 별들 중에 인간과 같은 동물이 살고 있어 그곳 사람들은 '다리가 흐르고 물은 흐르지 않는다' 라고 보기로 약속하고 그렇게 고정관념화 했으면 그 곳의 진리는 '교류수불류' 다.
따라서 우주 본체에서 보면 '수류교불류' 라는 지구상의 진리관은 아무런 절대성도 가질 수 없는 인간들끼리의 언어적 표현 약속에 불과할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이 설파하고 있는 기막힌 '발상의 전환' 과 마주하게 된다. 최근 냉동실을 맨 위칸에 두는 고정관념을 깨고 거꾸로 냉동실을 맨 아래에 배치한 냉장고가 히트한 것도 이같은 발상의 전환이다.
지금 '변화와 개혁' 이 개인.가정.사회.기업.국가.세계의 화두다. 이제 혁명적인 변화와 개혁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문명을 건설하지 않고는 환경오염을 야기한 20세기 현대문명 이후의 3천년대 인류는 더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절규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종업원 수를 줄이고 부서를 통폐합 하는 구조조정이나 리엔지니어링.벤치마킹 등을 통한 외형적 변화와 개혁은 물리적인 사상누각일 뿐이다.
본질적인 개혁은 발상의 전환에 따른 의식혁명이 수반될 때에만 가능하다. 선은 이미 1천5백년 전 부대사 (傅大士.497 - 569) 라는 선객이 '교류수불류' 라는 화두를 내놓았다. 이래서 선은 이 시대가 목말라 하는 발상의 전환을 이끌 무한한 보고 (寶庫) 인 것이다.
문 : 요사이 감옥에 사는 80노인이 상도동 사는 옛 어른께 뭉칫돈을 준 일이 있다 하고 당사자는 받은 일이 없다 해서 세간의 화제인데 어느것이 맞을까요.
답 : 유치원엘 가보라.
유치원 어린이들은 남자 아이가 옆의 여자 친구 치마를 한번 훌떡 걷어 올리고는 "나 의 뭐 봤다" 고 한다. 이렇게 계속 놀다 보면 여자 친구의 뭐, 남자 친구의 뭐를 서로 다 보고 만다. 그러나 한 어린이도 친구의 진짜 뭐를 본 일은 없다. 이렇게 돼 유치원생들의 울고불고 하던 놀이는 '유치' 하게 끝나고 만다.
심각한 질문이 솜털처럼 태백산 맑은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마침 찾아 온 대구의 한 처사가 사온 귀한 겨울철 포도 한 송이를 먹고 4시간여의 긴 법담 (法談) 을 끝낸 후 산중 어둠을 헤치며 서울로 돌아왔다.
출처 : 중앙일보 1999년 0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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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 큰스님]
[자기 마음 자기가 찾아 쓰라는게
부처님 가르침인데 밖에서 찾아요]
부처님 법대로 살면
불교도 발전하고
세상도 바로 서요
사회와 유리된, 당대 민중들의 삶에 따뜻한 시선을 보내지 않는 종교는 생명력을 유지할 수 없다. 한국 불교계가 ‘깨달음의 사회화’ 혹은 ‘생활 불교’라는 화두로 고심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고, 어느 정도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불교는, 세상의 병증(病症)을 가장 먼저 감지하고 이를 치유하는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에는 미온적이다. 오히려 조계종단의 잦은 분규로 인한 불교계 전체의 이미지 실추는, 세상으로 하여금 불교를 더 걱정하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지난해 말 ‘불교 바로 세우기 범불교 재가연대’가 결성된 것도 그러한 의구심에 대한 불교계 내부의 반성적 자기 점검이라 할 수 있겠다.
‘불교 바로 세우기’란 결코 불교계 내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에 제8대 조계종 종정을 지내셨던 서암 큰스님을 뵙고 한국 불교의 혁신을 위한 경책의 말씀을 들었다.
―세상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불교적 처방부터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불교는 마음 밝히는 종교예요. 그런데 모두들 바깥으로 손을 내저으며 어떤 위대한 힘이나 신비로운 능력을 구해요. 여기에서 모든 착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자기 노력을 하지 않고 밖으로 기적이나 어떤 힘을 갈구한다는 자체가 근본적인 잘못이에요.
물질 추구도 마찬가지예요. 바깥으로만 돌다보니까 믿을 거라곤 재물밖에 없어 보이고, 그러다 보니 물질에 예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다툼이 생기고 혼란이 오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언제나 자신의 내부 즉 마음을 살피라는 겁니다. 천하에 쉬운 게 불교예요. 세상에 불교보다 쉬운 게 없어요. 자기 마음을 자기가 찾아 쓰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속이고 엉뚱하게 바깥으로 헤매니까 세상이 어지러운 겁니다. 자기 마음을 밝히면 세상은 저절로 밝아집니다.
―불교의 사회적 책무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불교는 안타깝게도 사회적 지도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불교 자체가 지금 병들어 있어요. 그러니 어찌 제 구실을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말 조계종단 분규 때도 일반 언론으로부터 아수라 조계종이라는 야유를 듣지 않았어요? 이 정도로 사회적 신용을 잃어버렸는데, 어떻게 불교 고유의 사회적 책무를 수행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불교가 바로 서면 나라가 바로 서고, 불교가 병들면 모든 게 병든다고 하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바른 이치가 통하지 않으니 세상이 어지러울 수밖에요. 지금 이 말이 새삼스럽게 상처를 건드리자는 게 아니예요. 좀더 솔직히, 냉철하게 자신의 모습을 살피자는 뜻이지요. 지금 서 있는 지점을 명확히 알아야 가야 할 목표도 세울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항상 자신을 돌아보면서 부처님 가르침 한 마디라도 제대로 실천하면 되는 건데, 건성으로, 말로만 불법을 들먹이니까 병이 생기는 겁니다. 한국 불교의 현실을 직시해 보세요. 거기에 문제점도 있고 해결책도 다 들어 있어요. 나 같이 산중에 사는 사람한테 물을 것도 없어요.
―불교계의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신데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요.
▲먼저 승려 자신들이 각성해야 합니다. 과연 ‘인천사(人天師)’의 자격이 있는가 하는 자기 반성부터 철저히 해야 합니다. ‘인천사’라는 게 뭡니까. 인간 뿐 아니라 천상 세계에서도 스승이라는 말이예요. 그만큼 고귀한 존재가 바로 승려예요. 따라서 승려는 남을 제도하기에 앞서 자신부터 밝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중생 제도는 저절로 되는 겁니다.
한암 스님 같은 분 보세요. 오대산에 가만 앉아서 설법 한 마디 안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받았어요. 한암 스님 얼굴 한 번 못 보고, 음성 한 번 듣지 않았던 사람들도, 입만 벌리면 욕지거리를 해대는 사람들도 한암 스님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를 숙이곤 했어요. 참된 수행자의 덕화는 그런 겁니다. 향기와 같은 것이지요.
향기가 벌을 불러 모으듯이, 여법한 행동만으로도 중생들을 감화시킬 수 있는 겁니다. 우리 나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아도 화상이 법당을 짊어지고 왔습니까. 머슴살이를 하면서 이 땅에 불심의 씨앗을 뿌렸어요. 그러면서도 이 민족의 정신 세계를 이끌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어요. 이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 승려들은 옛 조사들의 그림자에만 안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예요. 하루빨리 인천사로서의 자기 본분을 자각하고, 일거수일투족이 부처님의 제자다워질 때 그 향기가 시방에 두루퍼져 뭇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대형 불사 위주의 외형적 성장이나 행사 위주의 포교도 썩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으로도 들리는데요.
▲불교라는 종교의 바탕은 정신입니다. 물질이 아니예요. 근본적으로 물질적 성장추구는 비불교적인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보세요. 맨손으로 설산 고행을 했고 맨손으로 나왔어요. 물질로 세상을 구한 게 아니라는 거지요.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최소한의 물질로 가장 인간다운 삶을 사는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비구를 일컬어 걸사(乞士)라고도 합니다. 얻어 먹는 선비라는 말이지요. 얻어먹음으로써 일체중생을 다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의 스승이기 위해서 얻어먹는 것이고요. 이것만 봐도 불교는 돈 가지고 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걸 알 수가 있지요.
부처님을 보세요. 부처님도 얻어자셨어요. 탁발의 정신 즉 걸사의 정신이란, 오욕락을 초월해서 사는 출가 수행자의 청빈한 삶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가 아만과 아집을 굴복시키는 하심의 수행이자 보시한 사람에게는 베풂의 공덕을 주는 보살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듯 수행자는 얻어먹는 것만으로도 능히 중생을 제도하는 겁니다. 떳떳이 얻어먹고 얻어먹음으로써 오히려 존경을 받는 것이지요. 부처님 제자는 부처님 흉내라도 내야 해요. 부처님의 행과 동떨어진 것은 불교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이 절 저 절 파당을 짓거나 절집에서 재산을 쌓는 일 같은 건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이름만 걸어놓은 종단까지 치면 100개가 넘어요. 이건 무얼 의미하느냐. 그 옛날 구산 선문과 같은 사상적 갈래가 아니라 분란이에요. 이제 불교는 새출발을 해야 합니다. 출세간법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문제 해결도 못해서 세간법에 의지해 재판을 하는 추태는 다시 없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체중생을 구제한다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누구 하나 듣지 않습니다. 인천사라는 사람들이 관청 사람한테 찾아가 이 중이 잘했소 저 중이 잘했소 한다면 누가 그를 스승으로 여기겠습니까. 부디 부처님의 정신으로 돌아가 1600여년에 걸친 아름다운 불교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는 데 모두가 일심으로 노력을 기울입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의 한국불교는 자기 구제부터 확실히 하는 각오로 새로이 시작해야 합니다. 썩은 살은 도려내어야 새 살이 나오는 이치와 같습니다. 좋은 차 타고 다니면서 온갖 호강은 다 하는 자세로는 중생 구제는커녕 자기 구제도 못해요.
―그렇지만 아직도 여법하게 수행하는 스님들도 많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지요. 과거도 지금도 대부분의 승려들은 공부 잘해요. 항상 일부가 문제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승려들은 그런 꼴이 보기 싫어서도 공부를 합니다. 그런 사람 많아요. 그런 이들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불교는 발전합니다. 진짜 공부하는 스님들은 그러한 행위만으로도 중생들을 이롭게 합니다.
―큰스님께서 오랫동안 조실로 계셨던 봉암사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것에 얽힌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을 법한데요.
▲사연이 많았지요. 봉암사마저 관광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평생 안 가 본 청와대도 가 보고 건설부도 가 보고 국회도 가 보고 그랬어요. 가서 그랬어요. 천년 고찰을 관광지 만들어서 도인 못 살게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느냐 했지요. 그래서 도립공원인가 뭔가로 지정되기로 결정된 걸 뒤집었어요. 옳은 소리는 총칼로도 누를 수 없는 것이거든요. 물론 사찰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 대한 예경의 공간이기도 하고 중생 교화의 공간이기도 해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고찰을 봉암사처럼 할 수는 없지만 상징적인 의미로라도 그러한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한국불교를 넘어서 한국 사회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요즘처럼 절에 들어가는 데도 극장 가듯이 돈 내고 들어가게 해서는 안되요. 사찰 재정도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돈 없는 사람은 부처님 세상에도 못 찾아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해서는 안 되요.
―큰스님 말씀대로 조계종단의 잦은 내홍으로 인한 불교의 이미지 실추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안정을 회복하고 있고 대 사회적 책무에 대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사찰이 환경 보호에 적극 나서는 한 예이고 말입니다. 이러한 활동이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 사부대중이 힘을 모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한 당부 말씀 한 마디 일러 주십시오.
▲거듭 말하지만 불교 만큼 간명한 진리는 없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이 우주 만물을 창출해 낸 근본자리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사세요. 그래야만 똑바로 살 수 있습니다. 조물주니 신이니 하는 넋빠진 소리 하지 말고, 이 마음이 곧 부처임을 밝게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우주의 주인공이에요. 만물만생이 절대 평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은 부처님 한분에 국한된 의미가 아니라 일체 중생이 절대 평등해서 다 본래 부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본래 차별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 도리를 제대로 알아야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 줄 수 없어요. 천하의 사람이 다 칭찬을 한다고 해서 자신의 인생에 터럭 하나 보탤 게 없고, 천하의 사람이 다 자신을 욕한다고 해도 터럭 하나 뽑혀 나가는 게 아니예요. 하늘 위나 하늘 아래에도 자신의 인생을 간섭할 제3자는 없어요. 이걸 모르고 정신 없이 살면 중생이고 똑똑히 알면 부처예요. 결코 저 금물 칠한 불상이 부처가 아니예요. 그런데 바깥으로 헤매고 찾고 하면 어지러워집니다. 자기 마음 찾으면 성불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뭘 구제하겠다는 둥, 광고 문구 같은 도인 흉내 같은 건 내지 마시고, 부처님 법대로 살면 불교도 발전하고 세상도 바로 서는 겁니다. 오늘의 인류 문명 자체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입자니 원자니 소립자니 하는 현대 물리학이 찾아낸 물질의 근본 또한, 만유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공의 의미를 확인시켜 주고 있지 않아요. 그런데 어찌 부처님의 근본 사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문 밖에서 얼찐거릴 겁니까. 부처님 법대로 사세요. 부처님 법대로 포교도 하고 불사도 하면 다 잘 될 겁니다.
―잘 새겨 듣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곧 물러 나려고 하니까 큰스님의 근황이나 일과가 궁금해지는데요.
▲늙은 사람이 무슨 일과가 있겠어요. 먹고 싶으면 먹고 졸리면 자지요. 그야말로 천하태평이요.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은 없습니까.
▲조금 모자라는 사람들이나 가끔 찾아와요.
-교통이 불편해서 거동하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조금만 걸어 나가면 버스가 다녀요. 손만 들면 세워 주는데 얼마나 편해요. 불편할 거 하나도 없어요.
―무위정사(無爲精舍)라는 당호처럼 그렇게 걸림없이 사시는 것 같습니다.
▲세간 법을 떠나서 사니까 무위는 무위인 셈이지. 하지만 몸을 가지고 사는 한 걸리지 앓을 수야 없지요. 소변 마려우면 눠 줘야 하고, 갈증이 난다면 물도 먹어 줘야지요. 몸 벗기 전에는 이놈 말을 들어 주지 않을 수 없어요. 버릴 땐 미련 없이 버려야 할 몸뚱이지만. 자 그럼 이런 너절한 얘기는 치우고 죽이든 밥이든 먹을 것은 있으니까 하루 푹 쉬었다 가세요.
하룻밤 묵어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뒤로 하고 마당으로 내려 서니, 바람 한 점 없는 6월 한낮은 물 속처럼 가라 앉아 있는데, 간간이 새 울음 소리는 오히려 산중의 고요를 더하고 있었다. 서암 큰스님 또한 그러한 고요의 일부가 되어 산처럼 살고 계셨다.
---- 현대불교신문 2000-06-21 【큰스님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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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선을 위한 서암 큰스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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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도송인지 육도송인지 그런 거 없어." |
절대 평등한 이치를 밝히는 참선 |
기초가 단단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과학문명이 발달했다 해도 아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푸르게 알든지 둥글게 알든지 길게 알든지 짧게 알든지 궁극에 가서는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알음알이가 갖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불교요, 참선은 참된 불법으로 곧장 들어 가는 방법입니다. 알음알이의 한계를 뛰어 넘자면 먼저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리저리 따져서는 모른다는 결론이 안 나옵니다. 그래서 대의단大疑團이 참선의 첫째 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커다란 의심 덩어리를 안고 뚫어 가는 것이 화두話頭입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 의심하는 것은 화두가 아닙니다.
가령 주먹을 딱 쥐고 ‘이 안에 뭐가 들었는고?’, 혹은 ‘저 궤짝 속에 무엇이 들었는고?’ 하면서 한계를 정해 놓고 의심해 들어 간다면 알아 봐야 주먹 속에 있는 것과 궤짝 속에 있는 것뿐입니다. 따지고 분석하여 원리를 캐려는 자세로 온갖 선입견을 갖고 화두를 배우고 따라 행한다면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 수천 년을 해도 깨달음은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에 임하는 태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저 의심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지식이 없어지는 그 순간,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로, 다시 들어 갈 수 없는 벽에 딱 부딪치는 그것이 화두입니다. 그렇게 화두는 전체가 의심 덩어리 하나뿐이어야지, 거기에 무슨 조건이 붙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가르칠 수 있는 알음알이 지식 보따리는 다 집어던지고 들어서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그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이것은 무엇이고 저것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의심해서는 참선의 근본을 깨치기는 어렵고, 되지도 않습니다. 마치 붉은 안경을 쓰면 하얀 것을 봐도 전부 붉게 보이듯이 자기가 안다는 한계, 그 선입관에 가려서 근본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신을 믿는 그 생각을 갖고 참선 화두에 몰두하면, 결국은 자기도 모르는 무의식 중에 그 모르는 것을 신에다가 붙여 버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하는 바른 자세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충분한 기초를 닦고 해야 합니다. 그저 남의 말 듣고, 남이 하는 것 보고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집을 지을 때에도 지도자가 필요하고 기초를 잘 다져야 합니다. 만약 급한 생각으로 모래밭에 기초도 닦지 않고 집을 짓는다면 한 순간 반듯했다 해도 오래 가지 않아 무너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법의 이치에 단도직입적으로 들어 가는 참선을 하려면 그런 기초가 단단해야 합니다. 그냥은 잘 안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철학이나 모든 종교나, 모든 인간이 짜낸 지식을 다 섭렵해서 그것이 아닌 줄 알아 완전히 포기한 입장, 그런 자격이 되어야 참으로 참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강원에 가서 10년이고 5년이고 철저하게 팔만대장경 경전 공부도 하여 이론이 그 한계에 달해 더 이상 필요가 없는 데까지 도달해 버리면 참선 공부가 제대로 되지요.
반면에 그렇게 모든 것의 한계를 알도록 깊이 공부하지 못했다 해도 참선의 길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자 무식일지라도 헛된 상념 없이 어느 선지식을 절대로 믿는 사람도 참선의 길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모든 것이 타당성이 있어야 하고 객관성이 있어야 하고 또 이성적으로 모든 것이 맞아야 남의 말을 믿지 맹목적으로 믿는 시대는 아닙니다. 우리의 인지가 이렇게 발달할수록 뭔가 자기 상념을 구사해서 자기 창의력에 비추어서 비판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지 맹목적으로 따라 가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불교가 널리 인정되고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도 인지가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하여 밝게 알고 그만큼 지혜가 밝아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참선과 화두는 지혜를 갈고 닦아 그 지혜의 한계를 넘어서 이론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들어설 때 제대로 공부가 됩니다. |
집중해야 힘이 생긴다 |
24시간 하루를 살아도 정신없이 사는 것이 우리 중생의 삶인데 그런 가운데에도 항상 자기의 근본 마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이 참선입니다. 그래서 밖으로 일체 경계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안으로 자기 마음에 모든 산란심이 사라진 자리가 참선 자리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모든 상념이 불끈불끈 일어나 계속해서 온갖 생각이 들끓습니다. 이래서는 백 년을 앉아서 참선한다고 해도 잘 안 되게 마련입니다. 거울에 초점을 맞추어 햇빛을 모아야 불이 일어 나듯이 우리의 생각도 초점을 맞추어야 그 모르는 의심 덩어리를 뚫고 갈 힘이 생깁니다. 기쁜 생각, 슬픈 생각, 미워하는 생각, 사랑하는 생각, 과거·현재·미래의 온갖 잡념에 흩어지면 집중력을 잃고 힘이 없어집니다.
사실 세상의 모든 학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철저히 알면 알수록 마음이 정돈됩니다. 그래서 공부가 많이 된 사람들은 몇 마디 안 해도 서로 마음이 통합니다. 몇 마디 근본만 얘기해도 그것이 무슨 말인지 정리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한두 마디로 인류의 모든 이론을 다 끊어 버리는 것이 가능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말이 간단해집니다. 어리석고 공부 정도가 얕을수록 말이 많습니다. 바닷물을 한 군데만 찍어 먹어 보고도 그 바닷물이 다 짠 줄 알 듯이 우리가 한 가지를 딱 이해할 때, 우주의 모든 것이 파악됩니다. 그렇게 꿰뚫는 이치를 모르고 일상 생활에서 그저 토막토막 “이게 뭐꼬, 저게 뭐꼬” 이렇게 의심내어서는 참선 화두가 안 됩니다. |
어떠한 물건이 이래 왔는고? |
회양 선사는 소동파니 백낙천처럼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그러한 학자인데도 자기가 아는 것은 캄캄한 그림자 같고 안심이 안 되어 항상 미지근하여 통쾌하질 못했어요. 그런데 일자 무식인 혜능 스님의 명성이 천하에 진동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마음을 열고 혜안을 얻었다 하니 회양 선사는 신기해 했습니다. 회양 선사 자신은 그렇게 학문이 막힘이 없이 넓고 깊은데도 찾아 오는 사람도 별로 없을 뿐 아니라, 우선 자신의 인생이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따르고 답답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일자 무식인 자가 그럴 수 있는가 궁금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직접 찾아가 본다고 길을 떠났습니다. 요즈음 같으면 차나 비행기를 타고 휙 갔다 오지만 옛날에는 교통편이 불편해서 그 넓은 땅을 가는 데 몇 달이 걸립니다. 크고 험한 재를 넘고, 작은 강은 헤엄치고, 큰 강이 막고 있으면 조각배라도 타고 건너고 해서 많은 고통을 겪으면서 여러 달이 걸려서 찾아 갔습니다.
드디어 혜능 스님의 처소에 이르러 방문을 열고 인사를 하려다 스님의 모양을 떡 보니, 큰 학자였거든요. 그러니까 회양 선사 눈에 보이는 혜능 스님은 그야말로 아는 것이 꽉 차 있는 큰 학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사를 하는 찰나에 혜능 스님이 “어떠한 물건이 이래 왔는고?” 하고 소리질러 묻는 것이었어요. 그 순간 회양 선사는 그 ‘어떠한 물건이 왔느냐?’는 말에 모든 생각이 꽉 막혀 버립니다.
오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왼쪽 손 한 번 내흔들고 오른쪽 손 한 번 내흔들고 왼쪽 발 한 번 내딛고 오른쪽 발 한 번 따라 딛고 몇 달을 그렇게 힘들여서 왔단 말입니다. 눈을 크게 떠서 물에 빠지지도 않고, 지나 가는 사람과 부딪히지도 않고, 수레에 치이지도 않고 오기는 왔지요. 그런데 여기서 ‘어떠한 물건이 이래 왔다.’고 되받아야 하는데 꽉 막혀 버린 거지요. 마치 혼빠진 할머니가 딸네집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우두커니 쳐다 보듯 그렇게 정신 없이 얼마 동안 서 있던 회양 선사는 막힌 그것을 그대로 안고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립니다. ‘내가 오기는 왔으면서도 어떠한 물건이 이래 왔냐고 묻는 말에 한 마디 대답도 못하면서 종일 이야기를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평생 갈고 닦은 지식이라는 것이 그 대답 하나 못했으니 어디다 써먹을 지식인지 통탄할 노릇이었지요. 그야말로 지식의 금자탑이 일자 무식인 혜능 스님의 한마디에 와르르 다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자기 재산 전부를 다 바람에 날려보내고 빈털터리가 되어 정신없이 돌아 가는 판입니다. 마치 목에 가시가 하나 걸린 것처럼 이놈의 꽉 막힌 것이 그냥 삼키려고 해도 안 넘어 가고 뱉으려 해도 안 뱉아지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어요. 누가 곁에서 무슨 말을 해도 다 마이동풍馬耳東風이라 묻는 말에도 동문서답이요, 오직 그 놈 하나가 딱 걸려서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무슨 책을 들고 찾아 보고 사전을 뒤지고 찾아 볼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구할 대상도 아니었죠. 꽉 막혀 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꽉 막혀 버리니까 무슨 공부인들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잖아요? 그렇게 답답한 걸 풀지 않고서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까요.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밥을 먹으나 소변을 보나 그 문제 하나가 꽉 걸려서 잠자기 전까지는 그 문제를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고, 친구에게 편지를 하나 쓰려 해도 그 의심이 꽉 막혀서 잠시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회양 선사는 바로 그렇게 꽉 막힌 의심 덩어리를 한시도 놓지 않고 붙들고 갔기 때문에 결국 하루아침에 확연히 깨치게 됩니다. 이것이 참선이 되는 이치입니다. |
꾸밈없는 평상심平常心이 도道 |
이렇게 한번 딱 깨쳐서 본래의 성품을 안다고 해서 머리가 하나 더 생기고 눈이 하나 더 붙는 것은 아닙니다. 그 모습 그대로 진리인 것입니다. 요즈음은 흔히 신통력이나 부리고 기이한 재주가 보이는 경지가 도인 줄 아는데, 우리 인생 문제에 있어 그까짓 신통력 하나 갖다가 어디에 써 먹겠습니까? 미혹한 중생 세계에서나 그런 것에 호기심이 동할 수 있지, 생사를 초월한 자리에 무슨 신통력 같은 것은 쓸 자리도 없습니다.
평상심이 도라,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먹는 그대로의 세상,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 세계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지, 무슨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도가 아닙니다. 참으로 이것이 불교의 위대함이지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데 그러면 도란 별게 아니지 않은가 하고 문제를 제기할지 모르지만, 사실 보통 중생은 평상시 그렇게 살지 못하거든요. 뭔가 자기 색안경을 하나 쓰고 보기 때문에 이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권력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대하여 친구의 의리조차 끊어 버리고, 욕망의 빛깔에 가려서 일을 바로 판단하지 못하는 등 중생들이 모두 이 병에 들어있지요.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고 탐진치에 병들지 않는 참으로 꾸밈이 없는 삶을 산다면 그대로가 성인의 세계입니다. |
절대 평등한 하나된 이치를 따라 |
오늘날 사회가 혼탁한 것은 모든 중생의 정신이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불교의 인과만 알아도 혼란은 오지 않습니다. 인과 원리만 안다면 길가에 돈이 굴러도 줍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정당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나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 도움이 되지, 우연이나 기적이나 요행은 있을 수 없는 것이 인과의 이치입니다. 이 세상은 전부가 조리정연한 이치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 이치에 조금만 어긋나도 우주는 파괴됩니다.
세상 만사는 전부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그 이치를 밝힌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라는 연기법이 그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니 세상만물의 근본 핵심, 그 이치로 보면 전부 하나입니다. 그 하나를 알 때 우주 전체를 알게 됩니다.
종교도 그렇습니다. 불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뭐든지 인간 지혜가 극도에 다다르면 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조금도 다른 소리가 없거든요. 진리가 하나이지, 이치가 둘이고 셋이고 그러한 것이 설 수 있느냔 말입니다. 자기 소견대로 중간쯤 보고 자기가 판단해서 옳다고 모두 으스대는 것이지 극에 달해서는 모두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불이법不二法입니다. 우리의 모양은 형형색색으로 남자냐 여자냐, 잘났느냐 못났느냐, 건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들은 있지만, 그 마음 자리는 누가 더 모자라거나 누가 더 길다는 것은 없습니다. 절대 평등합니다. 모양이 있는 자리는 차별이 있을 수 있지만, 모양이 없는 자리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그 자리는 누가 훔칠 수도 없고 해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자리입니다. 그 절대적인 자리를 완전히 파헤쳐서 각성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부처님만 중한 것은 아닙니다. 부처라는 말도 깨치면 없어집니다. 중생이 있음으로 해서 부처란 말이 있고, 밝은 것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밝다는 말이 있고, 착한 것은 악한 것이 있기 때문에 착함이 있습니다. 이것이 모두 두 쪼가리 상대적 원리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착하게 한다고 해도 그러한 착한 이면에 악한 그림자가 따르고,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금방 따라 붙습니다.
이러한 것을 뛰어넘어서 절대 평등한 안목을 얻기 전에는 참선의 방법을 찾을 수 없음을 아는 것, 이것부터가 참선을 바르게 하는 기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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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