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이 주목한 시집 |대표시 - 김재근
장마의 방 외 4편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닿기에
여긴 너무 멀어 몸은 어두워진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몸은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바깥에서 몸 안을 들여다보는
자신의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아직 본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아
말없이 서로의 젖은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숨소리 같아
잠속을 떠도는 몽유 같아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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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서로의 막다름이 되어두자
서로의 바퀴를 굴리며
친절한 얼굴이 등 뒤에 있다고 믿으며
오늘은 뒤로 가는 풍경이 되어두자
낮달을 보면
어제의 목이 말라
햇빛을 우회하는 그늘 속으로
눈먼 나비가 몸을 숨기듯
방금 떠오르는 동사자의 흰 눈알로 내륙에 눈보라가 내린다
*
어제는 살인을 하고
개명을 하고
오늘은 목욕탕을 나왔다
발자국이 말끔해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막다름
죽은 나비의 입에서 ‘살고 싶다’ 고드름이 맺혔다
머리를 털면 얼굴이 떨어져 내렸다
누군가 불을 지르고
불 속으로 달려가는 거울 속 막다름
연기가 타올라 눈이 멀어질 때
눈 속 비경은 수포가 되어 몸에 돋아났다
무덤을 몸에 들이는 것이다
자신의 무덤을 미리 살아보려
한밤에 술래가 되어
죽은 자신이 이슥하도록
자신의 묘비를 찾아 떠돌았다
*
눈보라는 가벼워
녹는 줄도 모르고 내렸다
몸에 꼭 끼는 옷을 입고
옷에 꼭 끼는 잠을 자다
꿈이 비좁아
잠 밖으로 발을 내밀면
죽은 나비가 목덜미에 앉아 피를 빨았다
*
물기 맺힌 생가
생가에 매달린 처마
처마에 목을 맨 몇 겹의 거미
낮을 우회하는 밤으로
밤을 기억하는 짓무른 무릎으로
서로의 서툰 혀를 찾아
젖은 눈동자로
서로의 살냄새를 떠올려야지
여긴 비좁은
서로의 무덤 속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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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9호선
그에게서 여자 얼굴이 보였다
흰 뼈만 남은 가지 사이
바람은 불어오고
숲에는 적요가 흘러 그의 몸을 감쌌다
오늘의 이름과
내일의 얼굴과
그 틈을 비집고 기우는 숨결
이대로 밤이 검어진다면 어디쯤 몸은 식어갈까요
그림자가 물을 때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감추고
말할 데를 몰라 혀를 숨기고
기도를 했다
잠든 자의 목소리 들리십니까
계곡을 떠도는 바람소리
구름은 하나 둘 옅어지는데
죽은 새는 어디에 둘까
꽃병에 꽂아 둘까
잠들기 전 읽은 문장
내일은 우물이 맑아 허공에서 신발이 우박과 함께 떨어지고 주운 신발을 신고 잠든 채로 예배당을 가야 하는데
기도할수록 버림받은 얼굴이 된다
미리 버려진 거라면 버려진 장소쯤 기억해야 하는데
어떤 연주법으로 이 행성을 연주해야할까
기도할수록 짧아지는 손가락을 가난이라 불러도 될까
어떤 운지법이 이 계절의 숨소리를 두드리는지
기차는 지하에서 지하로 이어 달리고
칸칸마다 악몽을 꾸는 창문들
문이 열려도 출구는 어렵다
미안해, 이제 그만 하자
왔던 길을 몇 번씩 되돌며
입술이 빨간 남자를 다시 보고 다시 지나고 다시 마주치는
지하역
출구를 찾으시나요?
물어볼 수 없었다, 그의 애인이 될까 봐
차가워진 물뱀의 발개진 살갗에 내리는 네온의 짓무른 불빛
흐느적거리는 태양의 긴 혀처럼,
문 닫은 카페처럼,
이대로 밤이 검어진다면
이대로 몸이 식어 간다면
기도할수록 흐려지는 목소리
죽은 나는 아무 말도 들려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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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
침대가 잠들지 않아
바람은 멀리서 불고
얼굴을 내밀면 밤은 느려진다
태양이 남긴 숨소리
화병에 꽂혀 점점 멀어지는데
누구의 밤인지
누구의 낮인지도 몰라
누구도 머물 수 없는
여기까지
가라앉아야 한다면
누군가의 맥박소리를 듣다
조금씩 잠들어도 괜찮은데
천천히 다른 행성이어도 괜찮은데
여긴 너무 환해
아무도 태어날 수 없군요
보드카를 마시며
우리가 우리를 잊을 때까지
밤의 기타소리 들리지 않는 먼 곳으로 취기는 태양 너머로 데려간다
밤의 이면에 떠오르는 미열처럼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그림자
여러 번 두근대는 밤의 발자국 같아
자신의 그림자를 지우는 한낮의 정면 같아
누구도 들을 수 없다
누구도 잠들 수 없다
한낮이 남긴 태양의 기침소리
병든 당신의 침대
아무도 닿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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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앉아도 될까요
너는 아프다
아픈 너를 보며
같이 우울해야 할까
혼자 즐거워도 될까
처음 걷는 사막처럼
처음 듣는 빗소리처럼
어디서부터 불행인지 몰라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몰랐다
너를 위한 식탁
창문은 비를 그렸고
빗소리가 징검다리를 건널 때까지
접시에 담길 때까지
그늘이 맑아질 때까지
고요가 주인인 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너를 위한 식탁
촛불은 타오르고
촛불 위를 서성대는 그림자
너를 밝히는 시간
너를 기다리는 시간
시간을 함께 나누려면 얼마나 더 멀어져야 할까
너를 처음 읽는 것 같아
헤아릴수록 빗소리 늘어나는데
너는 오늘의 불안인가
식탁은 불멸인가
수프는 저을수록 흐려지고
빗소리에 눈동자가 잠길 때
아무도 초대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너를 위한 식탁
너를 본 적 없어
너라고 부를 수 없다
우리를 증명하는 우리의 봉인된 불행
미래에서 미래로 다시 오늘의 불안으로
너를 지울 수 없어
너를 잊을 수 없다
너를 인정해야 할까
불행이 너라면
우리가 불행이라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여기 밖에 없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