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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좋은 프로필
큰스님은 기상이 좋으시고 활달하셨다.스님들이 오셔서 인사를 나누시는데 가야산에서 온 스님에게 “가야산 정기를 좀 나눠달라”고 하셨다.
오늘은 불교방송에서 엔지니어들이 와서 문수선원 광고를 찍는다고 했다.
“화면에 꽉차도록 스님들이 자리를 앞으로 당겨서 앉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스님들께 안내 말씀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담당자가 큰스님께 여쭸다.
“입승스님에게 부탁하세요. 한 두 번 권유해서 안되면 더 이상 권유하지 말아요. 스님들은 절대 다그치면 안돼요.”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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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비구니 스님 한 분은 오실 때마다 오메가 쓰리나 종합비타민 프로폴리스가 든 약병을 가져오시는데 이번에는 파파야를 가져오셨다.
“열대과일 파파야?” 하고 큰스님이 웃으셨다.
그 과일의 고약한 냄새와 솜씨좋게 잘라놓았을 때의 신선한 풍미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과육이 순간적으로 생각났다. 큰스님께서 파파야는 어디에 좋은지 물으셨다.
소화에도 좋고, 우선은 맛도 좋다고 가져오신 스님이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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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스님은 찾아오시는 스님들의 증명사진을 하나하나 찍어서 벽에 걸라고 하셨다.
"개인사진들을 크게 하나씩 찍어서 벽에다가 걸어요. 인적사항 적어서. 내가 둔해가지고 사람 잊어버린다고."
기억하기 좋게 사진 밑에는 스님들의 특징을 적으라고 하셨다. 예를 들어서 파파야를 가져온 스님, 오메가 쓰리를 가져온 스님 이렇게 말씀하셔서 우리들이 웃으니까 진짜라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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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직지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하시는 지리산에 사시는 비구니 스님이 오셨는데 큰스님은 이 스님을 보면 항상 출간 독촉을 하셨다. 이번에도 유마경을 주시면서 “가져가서 잘 봐. 보고 그런 걸 하나 빨리 쓰라니까. 사판(事判)은 끝도 없어.” 하셨다.
그러잖아도 절 소임이 너무 바빠서 힘드시다는 스님은 책을 보고
“제가 내려는 것과 같은 스타일이네요.”하셨다.
뭐가 같은지 말해보라고 하시면서 큰스님이 관심을 보이셨다.
유마경 판형이며 구성에 대해서 두 분이 말씀을 나누셨다.
“가져가서 좀 깊이 봐. 그냥 어름하게 대충 보지 말고.”
큰스님께서 당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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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에서 큰스님들을 모시면서 법회를 여는 도반이 있다고, 큰스님께 미리 의향을 여쭤보는 스님이 계셨다. 시간과 거리가 무리라고 두 분이 이야기 나누셨다.
새로 다시 인쇄한 ‘당신은 부처님’ 책을 많이 가져가서 나눠주라고 하시면서 그것으로 ‘내가 가는 것을 대신하면 좋겠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三
光明覺品 第九
八. 方便의 德
화엄경 광명각품 (민족사 p.304) 문수보살의 게송 중에 여섯 번째 과목인 증지방편을 공부할 차례다. 이 과목의 큰 제목은 ‘방편의 덕’이라고 하였다. 여러 번 말씀드리지만 화엄경 경전 자체에는 이런 과목이 없다. 화엄경을 연구하신 과거 조사스님과 후대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과목을 나눈 것이 화엄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우리도 이렇게 인용을 한다.
(6) 證知方便
佛所說法皆隨入하시며 廣大智慧無所碍하시며
一切處行悉已臻하시니 此自在修方便力이로다
부처님의 설법(說法)에 다 따라 들어가며
넓고 큰 지혜 걸림이 없으시며
온갖 곳에 다니는 일 모두 이르시니
이것은 자재하게 닦은 방편의 힘이시다
부처님의 설법(說法)에 다 따라 들어가며
넓고 큰 지혜 걸림이 없으시며
온갖 곳에 다니는 일 모두 이르시니
이것은 자재하게 닦은 방편의 힘이시다
*
증지방편(證知方便) :증득하여 아는 방편을 찬탄하다
*
불교에는 방편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어찌보면 불교 전부가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경이 현묘한 이치를 드러내지만 역시 방편이다.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 이치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화엄경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고준한 조사스님들의 법어라 하더라도 역시 말씀이고 문자이기 때문에 방편이다.
방편이라고 해서 시시하게 함부로 취급할 일이 아니다.
방편은 방편대로의 큰 덕을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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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소설법개수입(佛所說法皆隨入)하시며 : 부처님이 설법한 그 설법 내용에 다 따라간다.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했으면 화엄경을 보고, 법화경을 설했으면 법화경을 보고, 금강경을 설했으면 금강경에 들어가서 그 의미를 참구한다.
광대지혜무소애(廣大智慧無所碍)하시며: 광대지혜로써 이해하는 데 걸림이 없다. 부처님 설법을 이해하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체처행실이진(一切處行悉已臻)하시니: 모든 곳, 모든 행위에 다 이르지 아니함이 없다. 다 이미 거기에 도달했다.
차자재수방편력(此自在修方便力)이로다 : 이것은 자재하게 닦은 방편의 힘이다.
(7) 寂用方便
恒住涅槃如虛空하시며 隨心化現靡不周하시니
此依無相而爲相이라 到難到者方便力이로다
항상 열반에 있어도 허공과 같으며
마음대로 화현(化現)하여 두루 하시니
이것은 무상(無相)으로 상(相)을 삼음이라
이르기 어려운 데 이른 이의 방편의 힘이로다
*
적용방편(寂用方便): 고요한 작용의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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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寂)은 본체자리다. 그 본체의 작용을 용(用)이라고 표현한다. 적용(寂用)을 다른 말로 조용(照用)이라고 쓰기도 하고 묵조(黙照)라고도 쓴다. 이때의 묵(黙)은 체가 되고 조(照)는 작용이 된다. 의미를 가만히 살펴보면 다 이해가 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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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열반여허공(恒住涅槃如虛空)하시며: 항상 열반에 머물지만 허공과 같다. 마치 허공에 머물 듯이 항상 적멸하고 적정한 자리에 머문다.
허공은 텅 비었지만 모든 존재를 다 수용하고 용납한다. 그와같이
수심화현미부주(隨心化現靡不周)하시니:마음을 따라서 교화하여 나타나는 것이 두루하지 아니함이 없다. 부처님의 교화방편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차의무상이위상(此依無相而爲相)이라: 무상을 의지했지만 상이 된다. 근본은 항상 무상이다. 상 없는 자리에서 상을 나타낸다. 적용방편이라는 말에 딱 떨어지는 내용이다.
지금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모든 상은 무상을 근본으로 한다. 무상을 의지해서 다시 상을 나타낸다.
익숙한 말로 이것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眞空)에서 묘유(妙有)로, 차(遮)에서 조(照)로, 부정에서 긍정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무상의 의미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일차적인 입장에서 보는 것은 가관(假觀)이다. 가관으로 사람을 본다면 우리는 온갖 장애투성이고 걸리는 것 투성이다.
도난도자방편력(到難到者方便力)이로다 : 이르기 어려운 곳에 이른 방편력이다. 부처님은 일반 중생이 이르기 어려운 곳에까지 이르러 가신 분이다.
부처님을 여러 가지로 수식할 수 있다. 참으로 깨닫기 어려운 것을 깨달은 분, 이루기 어려운 것을 이루신 분이 부처님이다. 그러한 분의 방편력이다.
(8) 時劫方便
晝夜日月及年劫과 世界始終成壞相을
如是憶念悉了知하시니 此時數智方便力이로다
낮과 밤과 달과 해와 겁과
세계의 시작과 마침과 이뤄지고 무너지는 모양을
이러한 것을 생각하여 다 아시니
이것은 시간의 숫자지혜인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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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겁방편(時劫方便) : 시간의 숫자를 아는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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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잘 쓴다.
여기 시겁방편은 시절인연을 잘 이해해서 시간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지혜를 말한다.
자연현상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나 수행하는 일까지도 무엇이든지 다 시절인연에 적용된다.
맹자에 ‘송나라 사람처럼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무약송인연(無若宋人然)’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에 어떤 사람이 벼를 심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벼가 자라지 않자 어느날 논에 들어가서 벼 싹을 쑥쑥 뽑아 놓았다.
벼가 어느 정도 키가 커인다고 뿌듯해서 집에 돌아갔다. 그런데 다음날 논에 가보니 벼는 전부 하얗게 말라 죽어 있었다.
이런 이야기도 시절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모든 것은 다 시절인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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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야일월급년겁(晝夜日月及年劫)과 : 주야일월년겁 그런 시간을 통해서
세계시종성괴상(世界始終成壞相)을 :이 세계나 다른 세계나 드넓은 공간에 떠 있는 많고 많은 별들까지도 성주괴공의 과정을 거쳐서 모든 세계들이 시작과 끝이 있다.
사물은 생주이멸이 있고, 계절은 춘하추동이 있고, 인간은 생로병사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여시억념실요지(如是憶念悉了知)하시니 : 잘 기억해서 다 환히 안다.
차시수지방편력(此時數智方便力)이로다: 시절인연을 제대로 관찰해서 그것을 자기살림살이 자기 삶으로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의 방편력이다.
짧게는 주야로 일월로 년이나 겁으로, 우리는 생로병사 하고 계절은 춘하추동으로 흘러가고 세계는 시종(始終)이 있다. 그 가운데 성주괴공이 있다. 짧은 구절속에 시간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9) 難思方便
一切衆生有生滅과 色與非色想非想의
所有名字悉了知하시니 此住難思方便力이로다
모든 중생들의 생멸과
색(色)과 비색(非色)과
상(想)과 비상(非想)의
모든 이름을 다 아시니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데 머문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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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사방편(難思方便): 생각하기 어려운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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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를 두 자로 표현하면 난사(難思)다. 생각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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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중생유생멸(一切衆生有生滅)과: 우리가 9류중생을 이야기할 때 태(胎) 난(卵) 습(濕) 화(化) 유색(有色), 무색(無色),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 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체 중생은 전부 생멸이 있다.
색여비색상비상(色與非色想非想)의 : 거기에 형상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생각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소유명자실요지(所有名字悉了知)하시니 :그에 대한 이름들, 태난습화, 유상, 무상, 비유상비무상 하는 모든 것들을 환히 아시니
차주난사방편력(此住難思方便力)이로다: 불가사의한 경지에 머문 사람의 방편력이로다. 이 또한 아무나 쉽게 이해하는 내용은 아니다.
이런 구절 하나하나 깊이 음미하고 우리의 삶과 연관시켜서 다각도로 해석을 해내면 이 네 구의 한 게송에서 어마어마한 논문이 나올 수 있다.
화엄경이 워낙 방대하다. 지금 여기서는 대강 설명해도 그 깊은 뜻을 여러 스님들은 다 이해할 것이고, 또 너무 그렇게 길게 부연설명 할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쯤에서 넘어간다.
(10) 廻向方便
過去現在未來世의 所有言說皆能了하사대
而知三世悉平等하시니 此無比解方便力이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 세상의
모든 말을 다 능히 알되
삼세가 다 평등함을 아시니
이것은 비할 데 없이 아는 방편의 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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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방편(廻向方便) : 회향(廻向)의 방편을 찬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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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현재미래세(過去現在未來世)의: 과거 현재 미래세에 있는
소유언설개능요(所有言說皆能了)하사대:모든 언어를 전부 안다. 러시아 말이나 미국 말, 아프리카 말을 아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세의 모든 언어들을 전부 다 능히 안다.
이지삼세실평등(而知三世悉平等)하시니:과거 현재 미래를 아는데 있어서 모두 다 평등하게 어디에도 빠짐이 없다.
차무비해방편력(此無比解方便力)이로다 : 이것은 비교할 바 없는 이해자의 방편력이다. 역시 부처님의 지혜 방편을 이렇게 표현한다.
九, 大悲濟衆德
1, 光明遍照
爾時에 光明이 過一億世界하야 遍照東方十億世界하고 南西北方과 四維上下도 亦復如是하시니 彼一一世界中에 皆有百億閻浮提와 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其中所有가 悉皆明現하니
저때에 광명이 일억 세계를 지나서 동방의 십억 세계를 두루 비추니 남.서.북방과 네 간방(間方)과 상방(上方)과 하방(下方)도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였다. 그 낱낱의 세계 가운데 모두 백억 염부제와 내지 백억의 색구경천(色究竟天)이 있는데 그 가운데 있는 것이 다 모두 분명하게 나타났다.
*
대비제중덕(大悲濟衆德) : 큰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덕을 나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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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는 대비제중덕, 대비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덕이라고 하였다. 화엄경은 원만교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여러 각도에서 원만함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래서 십십법문을 한다.
제목도 무조건 열 제목으로, 게송도 무조건 열 게송으로 짝을 맞춘다. 광명각품에도 열 가지 과목을 맞추었다.
*
광명변조(光明遍照): 광명이 동방으로 십억세계를 두루 비추다
*
불교의 본질은 깨달음에 있다. 그 깨달음이 곧 지혜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바로 불교이기 때문이다. 광명은 그 부처님의 깨달음, 지혜를 상징한다. 그것을 간단히 각인시키기 위해 불교에서는 등불로써 지혜를 상징한다.
법당에 인등을 켜고, 부처님 앞에 촛불을 켜고, 초파일에 등불을 밝히는 것은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한다. 이것을 늘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
이시(爾時)에
광명(光明)이
과일억세계(過一億世界)하야: 일억 세계를 지나서
변조동방일억세계(遍照東方十億世界)하고 : 동방으로 십억 세계를 두루 비추고
남서북방(南西北方)과
사유상하(四維上下)도
역부여시(亦復如是)하시니: 또한 다시 이와 같이 하시니
*
피일일세계중(彼一一世界中)에 저 낱낱 세계가운데
개유백억염부제(皆有百億閻浮提)와 :다 백억 염부제가 있고
내지백억색구경천(乃至百億色究竟天)이라: 내지 백억 색구경천도 있다.
기중소유(其中所有)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세계가
실개명현(悉皆明現)하니 : 환하게 다 나타났다.
2, 世尊坐座
彼一一閻浮提中에 悉見如來가 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 十佛刹微塵數菩薩의 所共圍遶라 悉以佛神力故로 十方各有一大菩薩이 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俱하야 來詣佛所하시니 其大菩薩은 謂文殊師利等이며 所從來國은 謂金色世界等이며 本所事佛은 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그 낱낱의 염부제 가운데 다 여래께서 연화장 사자좌에 앉으셨는데 열 불찰미진수의 보살들이 함께 둘러싸고 있었으며 다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시방에 각각 한 큰 보살이 있고 그 보살들이 낱낱이 각각 열 불찰미진수의 모든 보살들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니 그 큰 보살은 이르되 문수사리등이며 좇아온 바의 국토는 이르되 금색세계등이며 본래 섬기던 부처님은 이르되 부동지(不動智) 여래등(如來等)이었다
*
세존좌좌(世尊坐座): 세존이 사자좌에 앉으셨다
*
피일일염부제중(彼一一閻浮提中)에 : 저 낱낱염부제 가운데서
실견여래(悉見如來)가: 다 본다.
좌연화장사자지좌(坐蓮華藏師子之座)어시든: 여래가 연화장 사자좌에 앉아 계시는데
십불찰미진수보살(十佛刹微塵數菩薩)의 : 십불찰 미진수 보살로
소공위요(所共圍遶)라 :에워싸여 있더라. 이런 것을 다 본다.
*
실이불신력고(悉以佛神力故)로 : 다 불신력을 쓰는 고로, 불신력을 활용해서
시방각유일대보살(十方各有一大菩薩)이 :시방에 각각 일대보살이
일일각여십불찰미진수제보살(一一各與十佛刹微塵數諸菩薩)로 :낱낱이 각각 십불찰 미진수 보살로
구(俱)하야: 더불어 함께하고 있었다. 그들이
래예불소(來詣佛所)하시니 : 부처님 처소에 오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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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보살(其大菩薩)은: 그 큰 보살은
위문수사리등(謂文殊師利等)이며: 이를테면 문수사리 등이며
소종래국(所從來國)은 : 좇아온 바 국토는
위금색세계등(謂金色世界等)이며 : 금색세계 등이며
본소사불(本所事佛)은
위부동지여래등(謂不動智如來等)이니라 :위부동지여래등이니라.
문수사리, 금색세계, 부동지라고 하는 세 낱말의 의미를 잘 이해하면 화엄경의 종지를 이해할 수 있다.
3, 文殊菩薩의 偈頌
爾時에 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各於佛所에 同時發聲하사 說此頌言하사
그때 온갖 곳에서 문수사리보살이 각각 부처님 계신 곳에서 동시에 소리를 내어 이 게송을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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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보살(文殊菩薩)의 게송(偈頌): 문수사리보살이 게송을 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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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爾時)에
일체처문수사리보살(一切處文殊師利菩薩)이 :일체처 문수보살이라고 하는 말이 또 나왔다. 시사하는 바가 크고 중요한 말이다.
각어불소(各於佛所)에: 각각 부처님 처소에서
동시발성(同時發聲)하사: 동시에 소리를 내셔서
설차송언(說此頌言)하사:이 게송을 설해 말씀하사대
(1) 修行圓滿
廣大苦行皆修習하사대 日夜精勤無厭怠하사
已度難度師子吼로 普化衆生是其行이로다
광대한 고행(苦行)을 다 닦으시며
밤낮으로 부지런히 게으름이 없으사
제도하기 어려움을 이미 제도한 사자후(獅子吼)로
중생들을 널리 제도함이 그 행이로다
*
수행원만(修行圓滿) : 수행이 이미 원만함을 표하다
*
광대고행개수습(廣大苦行皆修習)하사대: 광대한 고행을 다 수습했다. 고행은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수행이라고 할 때는 고행을 이야기 해야 얼른 마음에 와닿는다. 부처님의 수행에서도 고행을 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궁중에서의 향락 생활을 사람의 바람직한 삶이 아니라고 해서 버리고 출가한다. 그 후 6년간 수행을 한다. 그런데 그 수행의 8,90퍼센트는 고행이었다.
부처님이 출가후 6년간 고행의 생활을 해보니까 고행 역시 사람으로서 꼭 바람직한 삶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깨달으신 부처님은 고행도 향락도 아닌 중도적인 삶을 천명한다. 일반적인 불교 상식으로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일야정근무염태(日夜精勤無厭怠)하사: 밤이든 낮이든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열심히 수행해서 싫어하거나 게으름이 없었다.
이도난도사자후(已度難度師子吼)로: 이미 제도하기 어려운 것을 제도한 사자후로써
보화중생시기행(普化衆生是其行)이로다. : 널리 중생들을 제도하시니 이것이 바로 그 행이다. 광대고행이 바로 그 행이다. 시기행(是其行)이라고 하는 말이 열 번 반복해서 나온다.
(2) 敎化三毒
衆生流轉愛欲海하야 無明網覆大憂迫일새
至仁勇猛悉斷除하시니 誓亦當然是其行이로다
世間放逸着五欲하야 不實分別受衆苦일새
奉行佛敎常攝心하사 誓度於斯是其行이로다
衆生着我入生死하야 求其邊際不可得일새
普事如來獲妙法하사 爲彼宣說是其行이로다
衆生無怙病所纏으로 常淪惡趣起三毒하야
大火猛焰恒燒熱일새 淨心度彼是其行이로다
衆生迷惑失正道하야 常行邪徑入闇宅일새
爲彼大然正法燈하사 永作照明是其行이로다
衆生漂溺諸有海하야 憂難無涯不可處일새
爲彼興造大法船하사 皆令得度是其行이로다
衆生無知不見本하야 迷惑癡狂險難中일새
佛哀愍彼建法橋하사 正念令昇是其行이로다
見諸衆生在險道하야 老病死苦常逼迫하고
修諸方便無限量하사 誓當悉度是其行이로다
중생들이 애욕의 바다에 흘러 다녀서
무명의 그물에 덮여 크게 근심하거늘
지극히 어지신 이가 용맹하게 다 끊으시니
서원도 또한 당연히 그 행(行)이로다
세간 사람들 방일하고 오욕에 집착하여
잘못 분별하여 온갖 고통 받거늘
부처님 법 받들면서 항상 마음 거두어
제도하기를 서원함이 그의 행이로다
중생이 아(我)에 집착하여 생사(生死)에 들어가서
그 끝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거늘
널리 여래를 섬겨 미묘법을 얻으사
그들 위해 설명함이 그의 행이라
중생이 의지가 없고 병이 얽히어
항상 악취(惡趣)에 빠져 삼독을 일으켜서
크고 맹렬한 불에 항상 타거늘
깨끗한 마음으로 그를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중생들이 미혹하여 정도를 잃고
늘 삿된 길 걷고 어두운 집에 들어가니
그를 위해 정법(正法)의 등불 크게 밝히사
길이 밝게 비춤이 그 행이로다
중생들이 온갖 번뇌의 바다에 빠져서
근심과 어려움이 끝없어 머물지 못할새
그를 위해 큰 법의 배를 만들어
모두 제도하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중생들이 무지하여 근본을 못보고
미혹하고 어리석어 험한 길로 달아날새
부처님이 불쌍히 여겨 법의 다리를 세우사
바른 마음으로 가게 함이 그의 행이로다
모든 중생들이 험한 길에서
노.병.사의 고통에 쫓김을 보고
온갖 방편 한량없이 닦아서
맹세코 다 제도함이 그의 행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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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화삼독(敎化三毒) : 중생들의 애욕과 어리석음을 교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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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유전애욕해(衆生流轉愛欲海)하야 : 중생은 애욕의 바다에 유전한다. 우리들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지간에 그렇게 고생스럽다고 하면서도 계속 그 일을 하고 있다. 스님들의 포교당 운영도 그렇고 주지살이도 그렇고 부전살이도 그렇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그 일을 계속한다. 결국 그것은 애욕이다.
애욕이라는 말에는 갈애 같은 것도 포함되지만 일반적으로 애착이라고 말하면 제일 이해하기 쉽다. 십중팔구 애착이라고 표현하면 다 맞다. 너나 할 것 없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애착하고 살아간다.
무명망부대우박(無明網覆大憂迫)일새: 무명의 그물이 뒤덮여서 크게 근심스럽고 핍박할새.
중생이 애욕의 바다에 유전하는 것은 번뇌무명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를 뒤덮고 있어서 근심스럽게 하고 핍박한다.
지인용맹실단제(至仁勇猛悉斷除)하시니 :부처님은 다 그것을 떠나서 제도하시니. 지인(至仁)은 지극히 어지신 이다. 이런 표현은 도교나 유교적인 표현이지만 불교에서도 가끔 이런 표현을 한다. 이럴 때 지인은 부처님을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무명과 애욕의 삶을 살고 있는데 부처님은 무명의 그물을 끊고, 애욕의 그물을 끊고, 이 모든 것을 다 끊으시니
서역당연시기행(誓亦當然是其行)이로다 : 부처님이 애욕을 끊으려고 하는 그 서원이 또한 마땅히 그러하니 시기행이로다. 또한 당연히 수행이다.
사홍서원에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가 아무리 많다 한들 맹세코 내가 끊고 말리라’라는 말이 있다. 그 서원이 광대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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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방만착오욕(世間放逸着五欲)하야: 세상 사람들은 방일해서 오욕에 집착해 있어서
부실분별수중고(不實分別受衆苦)일새: 분별을 실답게 분별하지 아니한다. 여기 토를 어쩔 수 없이 ‘-일새’라고 달아놓기는 했지만 원칙적인 토읽는 방으로는 ‘부실분별수중골새’라고 읽어야 맞다.
봉행불교상섭심(奉行佛敎常攝心)하사: 불교를 봉행하는 것은 항상 마음을 거둬들이는 일이다.
나는 이 구절이 참 감동스러웠다. 이 구절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세상사람들은 방일해서 오욕에 집착해 있다. 그러면서도 그 경계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온갖 고통을 받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봉행불교상섭심이다.
한마음 관리 잘하면 그것이 그냥 불교다.
한마음 관리를 섭심이라고 했지만 섭심이라는 말 속에는 모든 마음에 대한 의미를 다 가지고 있다.
불교는 자기 마음 하나 관리 하는 것이다.
달마스님은 마음 잘 관찰하는 것에 모든 수행이 다 포섭된다고 하여서 ‘관심일법총섭제행(觀心一法이 總攝諸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관심선이다. 초기의 선은 반야선도 아니고 묵조선도 아닌 마음 하나 관찰하는 관심선이었다.
제행이란 모든 수행이다. 육바라밀 내지 주문을 외우는 것, 경을 읽고, 좌선을 하고, 화두를 드는 일체 수행이 마음하나 관찰하는 속에 다 포섭된다.
마음 관리 잘 하면 행복이 그 가운데 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내가 거기에서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행복일 수 있고, 불행일 수 있다. 마음에 따라서 그 일이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고, 천당일 수가 있고, 극락일 수가 있다. 얼마든지 그렇다.
이것을 편한 말로 ‘불교는 한마음 깨닫는 일이다’라고 한다.
그것이 사실이다. 마음하나 깨달으면 끝이다.
‘봉행불교상섭심’이라는 말이 참 좋은 구절이다.
우리가 이 구절 하나를 정말 제대로 마음에 새겨야 한다.
불교 공부하는 것이 뭐냐, 마음관리 하는 것이다.
마음관리 제대로 못하면 불교 공부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누구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서도어사시기행(誓度於斯是其行)이로다 : 서원으로써 제도하니 이것을 이룬다. 건널 도(度)자에는 의미가 많다. 예를 들어서 고해를 건넌다 하는 것은 고해를 다 벗어난다는 뜻이고, 지혜를 건넌다 하는 것은 지혜를 완성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度)를 완성이라고도 번역한다.
여기서 도는 상섭심을 성취하고 내 공부로 완성시켜 가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그 행이 부처님이 처음에 수행하신 광대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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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착아입생사(衆生着我入生死)하야: 중생들이 나라고 하는 데 집착해서 생사에 들어간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고 하듯이 아(我)가 제일 우선이고 근본이다. 나의 것이라고 하는 아소(我所)도 그렇다.
나와 나의 것에서 그 외 온갖 것이 다 벌어진다.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면서부터 8만4천 집착이 다 벌어지는 것이다.
구기변제불가득(求其邊際不可得)일새 : 그 끝을 찾아볼래야 찾을 길이 없더라.
어떤 경우에 우리는 초견성을 했다고 생각하고 도통도 했다고 생각한다. 불교에 몸담고 그만한 세월 보냈다면 한 번씩 착각으로라도 수행이 어느 정도 됐다고 여길 수 있고, 도를 어느 정도 깨달았다고도 착각할 수가 있다. 그런 착각은 사실 괜찮다.
나에 대한 집착을 이야기할 때, 나 중심으로 끊임없이 나에 대한 세계가 펼쳐지는데 그것은 끝도 없다.
구기변제불가득(求其邊際不可得)이라고 하는 이런 말들이 썩 수긍하지 못하고 어쩌면 좀 거리를 두고 싶은 내용이지만, 깊이 따져보면 여기에 해당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라고 하는 문제에 얽매어서 끝도 없다.
보사여래획묘법(普事如來獲妙法)하사 :널리 여래를 섬겨서 묘법을 얻어서
위피선설시기행(爲彼宣說是其行)이로다: 그들을 위해서 법을 선설하시니 바로 이것이 그 행이더라. 중생들이 나에 집착해서 끝없이 아견 속에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위해 선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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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호병소전(衆生無怙病所纏)으로 : 중생이 믿고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러한 병이 얽힌 바로써
상륜악취기삼독(常淪惡趣起三毒)하야 : 항상 악취에 빠져서 삼독을 일으킨다. 탐진치 삼독뿐만 아니라 온갖 독을 다 일으켜서 마치
대화맹염항소열(大火猛焰恒燒熱)일새 :큰 불이 맹렬하게 타올라서 항상 온 세상을 태우는 것과 같다.
삼독의 불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마음에 평정을 유지할 때는 ‘언제 무슨 삼독의 불이 있더냐’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떤 상황에 닥쳐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삼독의 불이 활활 타오를 때는 감당을 못한다. 대화맹염이다. 그래서 항상 뜨겁게 타고 있다.
정심도피시기행(淨心度彼是其行)이로다 :청정한 마음, 텅 빈 마음으로 그러한 것을 건너가니 이 또한 그 행이더라.
이 또한 광대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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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미감실정도(衆生迷惑失正道)하야: 중생들이 미혹해서 바른 길을 잃어버려서,
상행사경입암택(常行邪徑入闇宅)일새 : 항상 삿된 길을 다니면서 어두운 집으로 들어갈세.
지혜의 반대는 어리석음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어두울 암(闇)으로 표현한다. 중생마음의 어리석음이 어둠과 똑같기 때문이다.
바른 길을 잃어버리고서 어디로 들어가느냐, 캄캄한 집 속으로 들어간다. 삿된 길을 가다가 가다가 결국은 캄캄한 집 속으로 들어간다. 어리석으면 캄캄한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위피대연정법등(爲彼大然正法燈)하사: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크게 정법의 등불을 밝힌다.
연(然)자는 불 화(火)가 붙은 연(燃)자와 같이 쓴다.
집 이름을 대연각이라고 지어놓으면 불이 나게 되어있다. 대개 불탈 연(燃)자를 쓰기 때문이다.
영작조명시기행(永作照明是其行)이로다: 영원히 환하게 밝히는 조명등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이 행이다. 광대고행(廣大苦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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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나온 김에 이야기 한다면 이름을 잘 지어야 된다. 불자는 세속 이름을 아무리 잘 지었다 해도 다 버리고 불명을 갖는다. 그런데 이름을 지을 때는 뜻도 중요하지만 한국말의 음도 중요하다.
내가 어느 절에 가서 여러 보살님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물었다. 어떤 보살님이 “뜻은 참 좋은데” 하면서도 이름 밝히기를 꺼려했다.
그 보살님의 이름은 묘할 묘(妙)자 지혜 지(智)자 행할 행(行)자 묘지행(妙智行)이었다. 묘지(妙智)는 부처님 깨달음의 지혜다. 그 뜻은 참 좋다.
그런데 묘지행이라고 해놓으니 우리 말로 연상되는 것은 딱 한 군데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묘지로 가지만 이름을 부를 때마다 묘지행이 연상되면 곤란하다.
스님들은 주지 사시면서 모두 이름을 지어 줄 입장에 있다. 이름을 지어놓고는 최소한 일주일 이상 책상 앞에 걸어놓고 뜻으로도 음으로도 음미해 봐야한다.
자기 상식이 미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지만, 묘지행은 누구든 꺼리는 이름일텐데 그 정도는 분별해서 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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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표익제유해(衆生漂溺諸有海)하야: 중생들이 제유의 바다에 떠다닌다.
빠졌다 나왔다 또 빠졌다 하는 것이 표익이다. 유해란 모든 존재의 바다를 말한다.
지금까지 중생의 병통을 열거했다. 중생은 애욕의 바다에 흘러다니고 오욕에 집착하고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고 의지함이 없다. 사실 우리는 불교에 들어오자마자 삼귀의를 배우고, 부처님께 의지하도록 말뚝을 박아놓고 목을 맨다. 이렇게라도 확실하게 의지할 데가 있어야 된다.
중생은 의지할 데 없이 미혹을 하고, 존재의 바다에 떠다녀서
우난무애불가처(憂難無涯不可處)일새 : 그 근심스럽고 고난 어려움이 끝이 없어서 어디 있을 곳이 없다.
가는 곳 마다 존재의 바다에 떠다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위피흥조대법선(爲彼興造大法船)하사 : 부처님이 그들을 위해서 큰 진리의 배를 만들었다. 대법선(大法船)은 큰 진리의 배다. 그것을 흥조(興造)했다. 표현도 참 좋다.
중생들이 고통에 허덕이는 모습과 원인과 상황을 소개하면서 중생이 모두 존재의 바다에 떠다니며 침몰한다고 하였다. 그들을 건지려면 큰 배에 실어야 하는데, 그 배는 큰 진리의 배인 대법선(大法船)이다.
큰 진리의 배를 만들어서 거기에 다 태워서
개영득도시기행(皆令得度是其行)이로다 : 그들로 하여금 다 제도를 얻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광대고행이다. 수행이다.
부처님도 수행을 해서 그것을 얻었고, 우리도 또한 수행하지 아니하면 그런 큰 배를 만들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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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지불견본(衆生無知不見本)하야: 중생이 무지해서 근본을 보지 못하여. 중생병통을 여기서는 무지라고 표현했다.
미혹치광험난중(迷惑癡狂險難中)일새: 미혹해서 아주 험난한 가운데 미친 듯이 돌아다닌다. 자기자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불견본(不見本)의 본(本)이란 자기 본심이다.
자기본심을 모르면 그렇게 험난한 세상을 떠돌아 다닌다.
마치 연야달다라는 사람이 자기머리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머리가 없다고 착각을 해서 ‘내 머리 못 봤느냐고’ 하며 온 시중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근본을 보지 못하고, 자기 근본 자리를 모르면 우리는 아무리 명예가 높고, 부귀영화를 누린다 하더라도 미혹이고, 치광이며 험난중에 헤매는 것에 불과하다.
불애민피건법교(佛哀愍彼建法橋)하사 : 부처님이 그들을 애민이 여기사 진리의 다리를 건립했으니
정념령승시기행(正念令昇是其行)이로다 : 바른 생각으로 거기에 오르게 했다. 법의 다리, 진리의 디리에 오르게 한 것이 바로 그 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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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正念)은 8정도에도 있는 정념이다. 이것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한 견해이고, 중도다.
초기불교에서도 8정도를 설명할 때는 꼭 중도로써 설명을 해야 한다. 중도로 설명 하는 것 중에 제일 극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 정명(正命)이다. 정명은 생존방법이다.
이것을 중도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정명을 바른 직업으로 설명하면서 도적질하지 말고, 베풀기만 하고, 착한 일하고, 살생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고, 무조건 살리는 직업만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 말은 도덕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중도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도덕적인 관념을 초월한 것이 중도다.
중도의 입장에서 보면 사형 집행을 하는 망나니도 정명이다.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정명을 설명하는 사람들은 망나니나 백정같은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저것 도덕적인 기준을 세워놓고 거기에서 피해가려니까 그것이 피해질 수가 없다. 백정 역시 그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정명이다. 팔정도를 그런 차원으로 이해를 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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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중생재험도(見諸衆生在險道)하야 : 모든 중생들을 보니 아주 험한 곳에 올라가 있다.
노병사고상핍박(老病死苦常逼迫)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이 항상 핍박하고 있다. 인생의 네가지 고통인 사고(四苦)를 말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말하지만, 사실 생이라고 하는 태어날 때는 고통인지 뭔지 모른다.
노병사(老病死)가 진짜 고통이다.
수제방편무한량(修諸方便無限量)하사 : 모든 방편을 닦아서 한량이 없으사, 끝없는 방편을 계속 닦아서
서당실도시기행(誓當悉度是其行)이로다 :서원으로써 당연히 모두 제도하는 것이 그 행이더라.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이라고 하는 사홍서원이 여기에 다 적용된다.
그 중에서도 여기는 광대고행이라고 했으니까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의 내용이 제일 많이 포함되어 있다.
(3) 慈悲와 智慧
聞法信解無疑惑하며 了性空寂不驚怖하고
隨形六道遍十方하사 普敎群迷是其行이로다
법을 듣고 믿어 알아 의혹 없으며
성품이 공적함을 알아 놀라지 않고
형상을 육도에 따르며 시방에 두루 하사
많은 중생 널리 교화함이 그의 행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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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지혜 : 자비와 지혜가 있음을 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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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신해무의혹(聞法信解無疑惑)하며 :법을 듣고 믿고 이해해서 의혹이 없다. 이해가 안된다든지 아니면 궁금하다든지 납득이 안된다든지 하는 의혹이 전혀 없다.
요성공적불경포(了性空寂不驚怖)하고 : 성품이 공적함을 요달해서 놀라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다.
어떤 고통도 그 본성은 텅 빈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은 자성이 없이 우리 한 생각이 일으킴에 따라서 죄가 일어난다. ‘죄무자성종심기(罪無自性從心起)’ 라고 하는 것이 참회에 있어서는 이참(理懺)이다.
예를 들어서 하루에 백만배를 하는 것은 참회중에 사참(事懺)이다. 사참만으로는 치우치고 편협한 참회다.
이참과 사참을 병행해야만 진정한 참회다.
수형육도변시방(隨形六道遍十方)하사 : 형상이 육도를 따라서 시방에 두루하사
보교군미시기행(普敎群迷是其行)이로다 : 널리 많은 중생들의 미혹을 보고 가르치니 이것이 그 행이더라.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것을 성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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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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觀心一法이 總攝諸行. 고맙습니다_()()()_
불교란 자기마음 하나 잘 관리하는 것이다...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비구니스님께서 선물하신 프로폴리스~ 저도 구입해서 캡슐은 매일 먹고 스프레이는 목감기에 사용하고 있는데, 천연 항생제에 효능까지... 아주 좋더군요.
문수선원 안내~ 내레이션까지 차분하게...어쩜~~
이번에는 시간이 많이 부족해서 어쩌나~ 걱정했습니다. 이렇게 글이 나오기까지 힘들었을 혜명화 님! 고맙습니다. _()()()_
아주 세심히도 ..고맙습니다_()()()_
奉行佛敎常攝心...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_
奉行佛敎常攝心...고맙습니다_()()()_
정념(正念)은 8정도에도 있는 정념이다. 이것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한 견해이고, 중도다.
초기불교에서도 8정도를 설명할 때는 꼭 중도로써 설명을 해야 한다. 중도로 설명 하는 것 중에 제일 극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 정명(正命)이다. 정명은 생존방법이다.
이것을 중도로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정명을 바른 직업으로 설명하면서 도적질하지 말고, 베풀기만 하고, 착한 일하고, 살생같은 것은 절대 하지 않고, 무조건 살리는 직업만 가져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 말은 도덕적으로는 맞다. 그런데 중도는 도덕과는 관계가 없다. 도덕적인 관념을 초월한 것이 중도다.
중도의 입장에서 보면 사형 집행을 하는 망나니도 정명이다.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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