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선교의 아버지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 2021. 5. 16
에드워드 아담스 선교사님은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해 부산 선교부에서 2년간 한국어와 지방풍습을 공부하고 1897년 대구 선교부로 파송됩니다. 그는 1898년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대구 제일교회의 모태가 됩니다. 또한 의사인 죤슨 선교사와 함께 제중원을 설립해 복음을 전하게 되는데, 이 병원이 지금의 동산병원입니다. 지금의 동산병원과 계명대 켐퍼스 자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지 못해 몰래 시신을 묻었던 버려진 땅이었습니다. 당시 고관들에게도 그 땅이 골치 아픈 땅이었기에 선교사님들은 쉽게 그 땅을 구입할 수가 있었습니다.
26세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 사역을 감당 하던 아담스 선교사님은 부인 ‘닐 딕’의 죽음으로 큰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님은 그 고통가운데에서도 조선 사랑을 이어갑니다. 제일교회 내에 남자 소학교를 세워 교육선교를 지속하면서 계성중학교를 세웠고 후에 계명대학까지 세웁니다.
그는 전 재산을 복음전도기금으로 내놓고 1923년 대구선교부를 은퇴하기까지 근 40년 동안 한국선교를 위해 온 생애를 드렸습니다. 그는 4남1녀를 두었는데,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조선 사랑을 위해 한국에서 우리 민족과 아픔을 같이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대구의 ‘사과 미인’이라는 말도 선교사님들이 대구에 사과를 심음으로 생겨난 말입니다. 그들은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우고 우리 민족을 위해 한 평생 헌신의 삶을 살고 가신 분들입니다.
선교사님들은 십자가의 복음만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을 남기고 가셨습니다. 동산병원 선교관 앞에 자리 잡은 선교사님들의 무덤은 우리 민족이 어떻게 놀라운 변화를 이뤄낸 민족이 됐는지를 알려주는 증표로 남아 있습니다.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막론하고 아담스 선교사님은 근대 대구의 아버지라 할 만한 분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