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시: 2024년 9월 1일 일요일.
2.참가 인원: 전과 동
3.코스: 호텔 조식 후 북릉공원과 서탑거리 관광 후 심양 공항 출발 인천 공항 도착 후 자유 해산.
여기 민산 호텔 조식이 4일 숙식한 곳 중에 최고다.
오랫만에 제대로 된 호텔 아침 식사다.
식사 후 잡담중.
호텔 입구
조식 후 집합 시간까지 널널하여 심양의 아침 거리를 산책했다.
'바람' 똥구멍은 안녕하신가?
늦은 아침까지 충분히 잔 덕분에 좋은 컨디션으로 아침 산책을 즐긴다.
자 이제는 집으로 원점 회귀할 준비가 되었다.
집을 떠났으면서도 또 어디론가 후울쩍 떠나고픈 역마살의 지존 바로 나 .
심양시에서 제일 큰 공원으로 면적이 330만 평방미터 이다.
1643년 청(淸) 태종 황태극(皇太极)과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의 능(陵)으로 건설 되었다.
당시에는 '소릉(昭陵)'으로 불렸고, 현재는 '북릉공원[北陵公園]'으로 불린다.
선양고궁, 동릉(東陵)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북릉공원은 왕릉과 청나라의 정원을 결합한 인기있는 관광 명소이다. 왕릉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우리의 왕릉 개념과 상당히 다르다.
이 호수에서 수영하는 인간을 두명이나 보았다. 오리가 유영하는 줄 알았는데, 내가 중국을 잘못 이해했다.
완전히 우리와 생각과 개념이 다르다.
왕릉과 현대 정원의 웅장함과 우아함을 보여준다.
석패방 앞에서.
신도(영혼이 다니는 길)의 시작을 알리는 입구 조형물.
석패방 앞에서...
뒤에서 본 석패방.
정홍문
정홍문 뒤로부터 북릉이 시작 된다.
여기서 북릉 입장료를 또 받는다.
가운데 문을 神門, 동편의 문을 君門, 서편의 문을 臣門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가운데는 영이 드나드는 문이고, 동문은 군주인황제가, 서문은 신하가 드나드는 문이다.
좌측이 청룡 우측이 흑룡이다.
북릉 륭은문 입구에서...
정홍문에서 륭은문까지의 신도, 양 옆으로 석상생이라고 불리는 석수들이 한쌍씩 배치되어 있다.
사자, 해태. 기린, 말, 낙타, 코끼리등.
북릉 륭은문 입구에서...
육은전은 홍타이지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육은전.
육은전 내부.
육은전 앞에서.
좌측은 서배전 우측은 동배전이다.
서배전은 청태종의 기일에 거행하는대제때 라마교 의식으로 망자의 극락왕생을 지원하던 곳이다.
청황실의 종교가 라마교인 것이다.
동배전은 제사때 축판과 제벡을 저장하던 곳이다.
육은전 앞에서.
'남인'은 꼽싸리 낀겨?
북릉 동영상.
홍타이지 무덤인 북릉은 도굴 방지를 위해 시멘트로 덮었다고 한다.
북릉을 둘러싼 보성은 길을 안으로 경사지게 만들었는데, 아마도 배수가 잘되라고 조성한 것 같다.
숭덕제보다는 청 태종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 역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도 "청 태종"이라 하면 알아도 "숭덕제"라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다. 이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다른 황제들을 연호를 딴 칭호로 부르고, 묘호로는 잘 부르지 않기 때문에 특이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 청 태종보다도 홍타이지로 더 많이 언급된다.
누루하치와 더불어 묘호보다는 홍타이지로 더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 다만 조선의 경우 홍타이지가 칭제한 후에 병자호란이 일어났고 결국 청나라가 중국의 통일 왕조가 되었기에 그를 청 태종이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를 다루는 매체에서는 "홍타이지"라고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좀 더 과거에는 "황태극"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출전 나무 위키-
'딱선생' 이 홍타이지의 후손이여?
원래 신라 왕족아니여?
청 태조 누르하치의 8남으로 태어났으며 이후 후계자가 되어 후금의 제2대 군주로 즉위했다. 첫째가 아닌데도 후계자가 된 것은 홍타이지의 모후가 당시 해서여진 예허부의 수장 양기누(yangginu)의 딸이었던 몽고 저저(monggo jeje)였기 때문으로, 혈통이 좋았으며 홍타이지 본인의 운과 노력도 뒤따랐다. 부황인 누르하치는 개인의 능력으로 여진 제부족들을 통합했지만 그 집안은 대단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정책적인 면에서 예허부의 명성을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에 후처로 예허부의 공주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누르하치의 장남 아이신기오로 추연은 누르하치에 의해 실각하며, 추연의 후손은 맏이의 후손임에도 불구하고 청대 내내 무시당했다.특히 홍타이지도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누르하치 바로 다음인 4대 버일러 자리를 얻었다.
-출전나무위키-
사진으로 보니 생긴 것이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현덕을 닮았다. 만화가 고우영씨가 이 사진을 보고 유비 현덕을 그린 것 일까,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의 그림과 똑 닮았다.
기이한 괴목.
점심 김치찌개.
어제 키핑했던 들쭉술과 반병 남은 고량주로 마지막 간 어텍 실시.
서탑거리전경.
청나라 2대 황제가 건립한 4탑4사(四塔四寺) 중 하나인 연수사(延壽寺; 백성들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로 건립)의 서탑(西塔)에서 명칭이 유래했으며, 남북을 가로지르는 500m가량의 서탑가(西塔街)를 중심으로 2.58㎢ 부지에 상가와 주거단지가 밀집해 있다.
서탑가 유래는 심양 시내에 동서남북에 탑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탑이 위치한 곳이라고 해서 서탑이라고 했다. 예부터 봉황이 깃든 살기 좋은 곳이라, 당지 사람들은 봉황이 떠나지 못하도록 탑을 세우고 네 귀를 든든히 못박아놓았다고 한다. 서탑은 1998년 11월에 재시공하였다.
조선족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 “조선독립운동가의 과부들이 그곳에서 국밥장사를 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이국땅을 찾아온 독립 운동가들을 위해 국밥이라도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 생각에서 당시 번화가였던 심양 역 부근에서 떨어졌던 곳에 국밥집을 차렸고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이곳의 조선족 뿌리는 그렇게 형성된 것이었다.
-출전 동북아 신문-
심양은 『심양 도성 황묘비(沈陽都城隍廟碑)』의 기록에 따르면, 원대에 고려 여진 만호부(高麗女眞萬戶府)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고려충선왕은 원 무종을 옹립했던 공으로 1307년 심양왕에 봉해지기도 하였다. 당시 심양을 포함한 요양 지역에는 몽골 침략으로 전쟁 포로나 이민해온 고려 유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요동지(遼東志)』에는 14세기 중엽 심양 일대의 조선인 인구가 지역 총인구의 10분의 3을 차지했을 정도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해 심양에 붙잡혀온 포로와 인질들이 5·60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은 심양에서 8년을 인질 생활로 보내야 했다. 당시 붙잡혀 온 포로들은 청인들의 노비, 군인으로 팔려가 죽거나 정착하여 점차 중국 민족의 일원으로 동화되기도 하였다. 서탑 지역으로 조선 민족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근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중국 민족』(2003, 9·10월호) 자료에 의하면, 19세기 중엽부터 많은 한인들이 심양부근의 혼하·요하·포하 일대로 이주하여 벼농사를 지으면서 서탑 지역을 중계역으로 삼았다고 하며, 1882~1887년 조선인 서상륜과 백홍준이 서탑 동관 교회에서 한글로 된 『성경』을 출판했다고 한다. 1900년 5월경 평안북도 영성군의 안봉태가 중국인 유씨와 왕씨의 도움으로 서탑 밑에 처음 조선집을 짓고 장사를 시작했으며, 1910년경부터 일제의 수탈을 피해 조선인들의 중국 망명이나 이주가 러시를 이루면서 당시 서탑 지구에 정착한 조선인가구가 50여 호에 이르렀다. 1911년 압록강철교가 부설되고 안동과 봉천을 잇는 안봉선[지금의 심단선]이 개통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이주한 한인들이 대거 서탑으로 밀려들면서 한인거리가 형성되었다. 1910-20년 사이 매년 중국 동북지구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의 수가 1만 2천여 명에 이르렀다.
출처: https://tadream.tistory.com/8046 [네오:티스토리]
중국의 스타벅스인 루이싱(luckin coffee) 커피점에서 커피 한잔.
커피점을 나오자 마자 똥구멍을 부여잡고 화장실로 내달리는 '바람' .
중국말을 못하니 고브린너를 대동하고 멀디 먼 화장실로 내달린다. 과도한 소고기 흡입이 원인이리라.
'바람' 똥구멍은 안녕하신가?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심양 공항에 도착했다.
가이드와는 빠라 삐리 뽕 인사를 하고 출국 수속을 마친다.
드디어 비행기 타는 게이트 앞이다.
무사히 아무도 다치지 않고 즐겁게 여행을 마칠 수 있어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여행중 의견 일치가 안되 다툼도 발생하는데, 우리는 여행 내내 그런 것이 없었다. 다만 즐거움만 았었을 뿐!
다들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받아들이고 감수한 덕분이 아닐까 한다.
역시 우리는 캐미가 잘 맞는 오랜 친구들이다. 앞으로도 쭉 건강하고 즐거운 남은 인생 되도록 하자!
그중 호텔 방과 여행 내내 캐미가 빛난 커플이 있었으니, '남인' 과 '바람'이 아니었나 싶다.
끊임없이 주제를 바꾸어가며 재잘대는 입 입 입, 우리는 아직도 귀에서 철철 피가 나오고 있다.
우리 친구들 홧팅!!!
첫댓글 글쓰느라 고생 많았다
백두산 천지의 기운과 광개토대왕및 장수왕의 보살핌이 우리 친구들의 남은생에 환하게 비추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