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우리 집 민화병풍 이야기
심 영 희
우리 집에는 구입한지 육십 년 넘은 민화병풍이 있다. 친정아버지의 지혜와
어머니의 알뜰한 정성이 담긴 물건이다.
내가 초등학교 삼학년 때 함께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외동딸인
어머니와 사위인 아버지께서는 장사를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제사까지 모시며 효를 행하고 외할머니를 그리워하셨다.
어느 날 외출했다 돌아오신 아버지 등에는 커다란 물건이 붙어있었다. 아버지께서
병풍을 사가지고 천으로 끈을 매서 등에다 지고 오신 것이다. 온 가족이 모여들어 병풍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다. 지금은 어디에서 사오셨는지는 기억도 안 나지만 어린 나이에도 병풍이 참 예쁘다고 느낀 것은 기억
속에 생생하다.
앞쪽은 그림이고 뒤쪽은 글씨인데 그 글씨가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문자도인 열 폭 병풍이다. 물론 어릴 때는 그 글씨가 문자도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냥
설이나 추석 외할머니 제사 때 벽에 붙여 펴놓으면 예쁘다고 환호하며 동생들과 병풍 뒤로 숨기놀이를 하면서 즐겼을 뿐이다.
외할머니 제사 때는 뒤쪽의 문자도를 펴놓고 제사를 지내고 명절에는 글씨 쪽을 펴놓고 차례를 지낸 뒤 그림 쪽으로
바꾸어 집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 아름다운 병풍 앞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세배를 받고 동네
젊은이들에게도 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고 음식을 대접하셨다. 어머니의 정성은 아름다운 병풍의 모습처럼
온 동네로 향기를 전파하셨다.
뒤쪽 문자는 모두 먹을 사용해 흑백으로 그려졌는데 문자도 밑으로는 한문 글귀가 네 줄로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한시(漢詩)인 것 같은데 내 한문실력이 좋지 않아 읽을 수 없다.
효(孝)자에는 잉어와 대나무 연꽃이 그려져 있고 제(悌)자에는 할미새 한 쌍과 연꽃 산앵두 꽃이 그려져 있는데 한 송이 산앵두 꽃에 양쪽으로 하나씩 달린 잎은 귀엽기까지
하다. 충(忠)자는 글씨의 절반을 용으로 장식하고 잉어와 조그만 새우도 있다. 신(信)자에는 할미새와 기러기 한 쌍이 그려져 있는데 할미새는 얼굴도 할미처럼
생겨서 웃음을 자아낸다.
예(禮)자에는 복숭아 꽃과 거북이 그려졌고 거북이 등에는 태극기도 그려져 있어
이채롭다. 의(義)자에는 한 쌍의 새가 의리를 다지며 조잘대고 꽃이 그려져 있는데 마치
도라지꽃 같은데 뿌리는 아니다. 의(義)자에는 주로 복숭아꽃을 많이 그린다고 했는데 활짝 핀 복숭아꽃을 지나치게 끝을 뾰족하게 그려 내 눈에는 도라지꽃으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염(廉)자에는 게 한 마리와 소나무 국화 대나무 국화꽃까지 그려져 있다. 수양산에 달이 뜬다는 뜻으로 치(恥)자에는 수양산과 달 매화나무도 있고 청이비(淸餌碑)라고 쓴 충절비도 세워져 있다.
내가 보기에는 그림보다는 한문 글씨가 대단한 수준인 것 같다. 정자체가
아니라 읽어볼 수는 없지만 여덟 편의 한시이거나 아니면 ‘효제충신예의염치’에 대한 해설일 수도 있다는 궁금증뿐이다.
앞면은 뒤와 대조적으로 물감으로 색을 칠한 전통적 민화다. 첫째 폭에는
노송에 학 두 마리가 앉아 있고 한 마리는 하늘을 향해 날고 있다. 아래쪽에는 말을 타고 가는 남자가
담뱃대를 입에 물고 있다. 둘째 폭에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에 두 쌍의 새가 그려져 있는데 한 쌍을
사이 좋게 마주보고 앉아있고 다른 한 쌍은 멀리서 서로 애타게 부르는 듯하다.
셋째 폭에는 오동나무와 공작 대나무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넷째
폭은 탐스러운 매화나무에 두 쌍의 새가 정겹게 그려져 있고 밑부분에는 암수 사슴 한 쌍이 저마다 입에 꽃 한 송이를 물고 걸어가는데 참 예뻐 보인다.
다섯째 폭은 바닷속 풍경이다. 크고 작은 다섯 마리의 물고기에 새우
산호 바위틈으로는 해초가 자라고 있다. 여섯째 폭 그림은 기명절지도처럼 바구니 안에 석류 한 개와 복숭아
두 개가 담겨 있고 화분 같은 곳에는 난이 자라고 꽃을 피워 나비 한 마리가 꽃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
일곱째 폭에는 튼실한 대나무에서 뻗은 대나무 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어 금방이라도 나뭇가지가 휘어져 땅에
닿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또 한 마리의 새는 하늘을 훨훨 날고 있다. 여덟째 폭도 역시 바닷속
풍경이다. 고기 여섯 마리에 바위와 해초를 그렸는데 아래쪽은 큰 고기 두 마리를 그리고 차츰 올라가면서
고기를 작게 그려 그림에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아홉째 폭은 석류나무로 장식했다. 석류꽃도 피고 석류도 여덟 개나 달렸다. 석류나무 가지에 앉은 한 쌍의 새와 바위 위에서 마주보는 한 쌍의 새가 석류나무의 단조로움을 보충해 준다. 마지막 열 번째 폭은 그림이 더욱 재미있다. 연꽃이 활짝 피고 연밥도
연잎도 제자리에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삐죽 내민 연꽃봉오리도 귀엽다. 연밥 위에 앉아 연밥을 쪼아먹는
새와 하늘을 날고 있는 새가 닮은꼴이다. 청둥오리 두 마리가 열심히 헤엄을 치는가 하면 네 마리의 물고기가
앞을 향해 돌진하고 그 앞에는 몸통은 바위에 숨기고 꼬리만 바위틈으로 내민 두 마리의 물고기가 있는 반면 뒤쪽 바위틈에서는 연못을 질주하려는 듯
두 마리의 물고기가 머리를 살짝 내밀고 있다. 참 아기자기한 화폭이다.
그 시대에도 그림 아래쪽은 연속문양을 그려 넣어 더욱 아름다운 장식효과를 나타내는 정교함까지 보여주어서 좋다.
이 병풍을 친정 집에서 오랫동안 사용했는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남동생이 붓글씨를 배운 적도 없는데 붓글씨로
열두 폭 병풍을 만들었는데 참 근사하고 큰 병풍이다. 집에 있던 민화병풍은 새로 만든 병풍에 비하면
크기가 둘째 동생쯤 될 것이다. 새 병풍을 사용하다 보니 이용가치가 떨어진 민화병풍은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가 되어 이리저리 치이다가 친정 집이 헐리게 되면서 남매들 중 내가 그림이나 붓글씨를 제일 좋아한다며 오빠가 우리 집에 실어다 주어 내
것이 되었다.
뒤쪽의 그림이 문자도인지도 모르던 내가 민화에 관심을 가지고 민화 책에서 이론 공부하다 보니 그것이 바로 문자도여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구입한지 육십 년이 넘었으니 그림이나 글씨는 그런대로 괜찮은데 병풍틀을 싼
천은 찢어지고 붙이고 엉망이다. 그래도 그림을 펴보면 금새 기분이 좋아진다.
누가 그린 그림인지 원본인지 복사본인지 알 필요도 없다. 아버지의 지혜로
민화병풍을 구입하게 되었고 어머니의 정성으로 제물을 병풍 앞에 차려놓고 제사도 지내고 설날 분위기를 한껏 살려주었던 민화병풍,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병풍 속에 배어들어 추억을 만들어준 병풍이기에 더욱 소중하게 생각한다.
언젠가는 이 병풍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그대로 그려볼 생각이다. 그러나
그림 아래 쓰여진 한문글씨는 내 실력으로는 쓸 수도 없고 그대로 따라 그릴 수도 없으니 안타깝다. 그리거나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하니 그저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로다가 정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