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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종주 산행기
20년 직장생활 중 처음 맛보는 5일간 황금연휴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하루는 샌드위치 데이로 반 강제
무급휴가까지 포함해서 5월 1일에서부터 5일까지 5일입니다. 어떻게 보낼 것인가 고민합니다. 4년전 6월 현충일 지리산
주능선 종주 기억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마치 꿈을 꾸듯 하루동안 내달리던 지리산 주능선, 새벽의 노고단, 한낮의 세석과
천왕봉, 석양의 중산리 그리고 돌아오는 진주발 밤 버스에서 느끼던 짜릿한 피로감과 종주의 성취감, 옛 추억에 몸이 떨립니다.
순간 바로 “지리산이다.”
이번에는 비교적 넉넉한 시간을 최대한 이용 오래 머물며 길게 걸어볼 생각 끝에 나온 것이 태극종주 였습니다. 지리산
태극종주는 이미 4년전에 알고 있었고 또 하나의 꿈으로 언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리산 태극종주는 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태극 종주를 꿈꾸며 시도해 보려는 사람들은 다 알다시피 종주의 한 구간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시는 분은 다 하십니다. 그래서 나 역시 겁없이 무식하게 시도한 것입니다.
저마다 산을 좋아하고 산에 가는 이유가 다 있을 것입니다. 나는 산에서 만나고 싶은 것들이 있어 산에 갑니다. 보고싶다는
생각이 들면 산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산속으로 빠져듭니다. 산에 가서 보고 싶었던 것들과 만나지만 결국 또 하나의 만남은
나 자신입니다. 그런 만남들과 사이 좋게 속삭이며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는데 그게 참으로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런 일을
일상에서 쉽게 얻을 수 없는 산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러니 특별히 밤낮 구분 없이 산속에서 가능하면 오래 그리고
혼자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 홀로 태극종주 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종주 내내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만남은 나의
종주여정에 어쩔 수 없는 절대절명의 만남들이 였으며 그 만남이 있었기에 종주를 무사히 끝낼 수 있었습니다.
출발
4월 30일 저녁, 방안 가득 널부러진 산행짐들이 배낭 속을 들어갔다 나갔다 반복합니다. 총 무게 6.5키로에서 배낭작크가
채워졌습니다. 걸쳐 메어보니 중량감이 어깨가 아니라 가슴으로 걱정되어 전해옵니다. “아 이거 너무 무거운데…” 그러나
이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일을 마치고 서둘러 짐을 꾸리니 지금이 막 출발해야 할 시간입니다.
인천에서 서울 남부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이 밤11시를 넘겨 벌써 진주행 버스는 출발대기를 하고 있네요. 허둥대며 여기까지
오다 보니 뱃속이 출출합니다. 우동 한 그릇을 비우고 생수 두병을 챙겨 버스에 오르니 막 출발입니다. 버스 안은 연휴를 맞아
산행객들로 만석을 이루었고 자정 정시에 출발한 버스는 정확히 3시10분 원지에 나를 포함 3명을 내려줍니다.
같이 내린 2명은 기다리던 차를 타고 어딘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고 홀로된 나는 바로 개인택시 정류장 컨테이너에 들어가
희미한 불빛에 행장을 정리하면서 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눴습니다. “혹시 지리산 태극종주 출발점을 아십니까? “알지요.
시천 주유소 있는데.. 입구에 표딱지 같은 게 많이 붙어 있고..”“예전에도 한 사람 태워 준적이 있는데.. 오늘도 혼자시네..
어디서 왔어요?” 요금 만 오천을 미리 계산해 드리고 택시에 오르니 연세 좀 드신 기사 아저씨가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
‘옛날에 어떤 아가씨 혼자서 처음으로 이 길을 열어 종주하여 신문에 나고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아 든다. 그 길 다 가려면 100
시간 넘게 걸린다. 잠은 어디서 자고 먹는 것은 어떻게 할거야? 아직은 밤에 추운데..’ 드디어 정확히 덕산 태극 동남부
들머리에 내려 준 시간이 3시 30분, 주위는 온통 어둠에 쌓여있고 태극종주를 꿈꾸는 태극 팬들에겐 유명해진 에스케이
주유소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조금의 지체없이 정확히 사전 예약이나 한 것처럼 원지에서 덕산 들머리까지 옮겨준 택시 기사님이 오늘 첫만남의
주인공이십니다.
(원지 개인택시 정류장)
첫번째 구간 (동남부 능선)
이 구간에서는 만남 사람은 없습니다. 이 시간 이런 곳에 사람을 만난다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그런데 머리에 메단 램프
불빛을 통해 여러 가지를 만납니다. 무엇보다 제일 반가운 것은 종주 선배님들이 수고하여 메어달아 놓은 시그널이 였습니다.
실로 눈물겨운 만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양산 꼭대기나 926봉을 거처 웅석봉까지 조금의 지체 없이 길안내를 담당해준
리본들, J3클럽, 태사자, 백두대간.. 등등의 만남은 감격스럽기 조차 합니다.
아무래도 혼자다 보니 들 머리 초입에 간간이 만나는 무덤들과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가게 됩니다.
이제 먼동이 트고 날이 밝아옵니다. 날이 밝으면 많은 것과 만나게 됩니다. 5월초 갓 피어 오르는 새싹과 여린 잎, 새소리, 꿩
소리, 부드럽고 상큼한 봄바람, 이 모든 온갖 것이 다 만나고 싶었던 것들입니다. 발 거름은 가볍고 신이 납니다. 926봉 부근
전망 좋은 곳에서 배낭을 벗어 내리고 주먹밥으로 요기를 때우면서 저 멀리 끝없이 이어지는 지리산 줄기와 천왕봉을
조망합니다. 저 산을 다 넘어야 한다니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갈 길이 멀다 보니 웅석봉은 그냥 지나칩니다. 오전 11시 정각에
밤머리재에 도착했고 오늘 두 번째 만남의 주인공이신 밤머리재 쉼터 사장님을 만났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부드러운 미소와
잔잔한 음성을 가지신 참 좋으신 분이 였습니다.
(덕산 들머리)
(고마운 시그널)
(밤머리재 쉼터)
두 번째 구간 (동부능선)
태극종주코스 지리산 동부능선은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그러나 종주를 해야 된다면 반드시 건너야 합니다. 쉼터 사장님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리산 국립공원 소장이 새로 왔고, 샛길 출입단속이 강하되었으며, 걸리면 예전과 달리 바로
50만원에 하산조치’ 라는 억장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나 정말이지 낙담과 실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극심한 절망감에 맥이 빠진 제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단속반원은 대개 등왕재를 지나 세재에 있을 것이며
거의 5시쯤이면 하산할 것 같고, 그러니 굳이 가겠다면 쉬었다가 늦게 출발해 보라’고 하십니다. 일단 좀 쉬기로 하고 공터에
공사용 컨테이너 문을 열고 들어가 온갖 공사용 폐 자재로 어지러운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1시간 가량 눈을 붙었습니다.
일어나 보니 동부능선 넘기를 주춤거리는 처지가 나와 똑 같은 분 두 분이 계십니다. 서로 의기 투합하여 일단 넘어 보기로
했습니다. 전략은 새재를 오후 5시 이후 단속반원 하산시간에 맞춰 넘기로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오늘 세 번째 만남이
되었습니다.
오월 초하루 날씨가 정말 너무 좋습니다. 세 사람은 사이 좋게 지리산 동부능선을 넘고 있습니다. 동행이 있으니 외롭지 않아
좋았고 광주에서 오신 분은 한 시간 늦게 나와 동일하게 덕산에서 출발하셨고 울산에서 오신 젊은 분은 어천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두 분은 모두 산을 좋아하고 등산고수에다 한 분은 백두대간 종주를 진행 중이랍니다.
시간을 조절하여 5시가 거반 다되어 두개의 동서 등왕재를 막 넘어 고산습지대로 내려가는데 앞에 난데없이 텐트와 사람이
보입니다. 발 거름을 딱 멈추고 아래를 조심스럽게 내려 보다 아래쪽 사람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관리소 직원 같아 보이지는
않아 가까이 다가가니 진주 모 방송국에서 지리산 다큐 프로그램 찰영차 나왔답니다. 멋지게 생기신 방송국 PD선생이 오늘의
네 번째 만남입니다.
‘태극종주를 하시냐’고 묻고는 다짜고짜 그냥 내려가라고 합니다. 방금 관리소 직원 두 사람과 같이 왔으며 새재쪽에서 텐트를
치고 야간에도 쭉 지키고 있을 거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당신들 재수가 좋아 여기서 나와 만나 50만원 벌었다’는 의도를
다분히 풍기며 ‘가시는 것은 자유나 반드시 걸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아시다시피 새로 온 소장의 뜻대로 무조건 과태료에
하산조치’라는 것입니다. 같이 온 두 분은 그다지 미련 없이 하산을 택하신 것 같은데 나는 한사코 방법이 없겠냐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자 지도를 펴놓고 설명하기를 일단 새재 마을까지 하산하여 윗새재 마을을 지나 대원사 길로 해서 치밭목 산장을
지나 중봉으로 올라가서 나머지 구간을 종주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남아 있는 동부능선 구간은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시절이 좋아지면 다시 시도하면 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마치 보채는 아이를 달래듯 자상하게 설득조로 말씀하시니
다른 방법이 있을 리 없습니다. 우리 세 명은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내려가니 식수가 있었고 마음껏 냉수를 들이키고
아래 새재 마을까지 하산하였습니다.
(방송국 텐트)
(등왕재 고산습지)
(윗새재 마을)
역시 울산에서 오신 분은 여기서 산행을 접겠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한 분은 일단 날이 저물었으니 새재 마을에서 민박을 하고
보겠답니다. 그야말로 이제 나홀로 산행입니다. 이제 슬슬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합니다. 산속의 어둠은 빠르게 다가옵니다.
졸졸 흐르는 물을 만났습니다. 어둡기 전에 찬물에 발을 담그고 싶어 배낭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습니다. 왼쪽 엄지발가락
밑에 엄지발가락 넓이만큼의 물집이 생겼습니다. 떠나오기 일주일전에 새로 산 등산화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놈이
가볍기는 합니다. 물이 너무 차가워 오래 있을 수도 없어 신발을 다시 챙겨 신고 중봉을 향해 출발합니다.
이제는 캄캄해 졌습니다. 헤드램프도 켜고 후래쉬도 들었습니다. 밤이 되니 걷기가 좀 수월해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새벽 3
시 반에 불을 켜고 시작한 첫걸음이 이제 또 밤이 되어 다시 불을 켜고 계속 되고 있습니다. 아마 오늘 밤새도록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곰 출몰지역'이라는 표시판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데 절대로 곰은 만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8시를
넘겨 대원사에서 올라오는 길과 합류를 하고 나니 배도 고프고 좀 쉬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쉴만한 장소를 물색하면서 계속 올라갑니다. 이 구간은 돌과 바위가 많은 계곡길이 계속 이어집니다. 드디어 좋은 장소를
만났습니다. 길에서 좀 벗어나 펑퍼짐하게 널찍한 바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위 위에 올라서니 편하고 정말 좋습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헤드램프를 벗어 나뭇가지에 걸어 등불처럼 밝히고 짐을 풀었습니다. 우선 비상식량에 물을 부었습니다.
산에 오기 전 등산용품 점에서 구입한 것인데 더운 물을 붓고 기다리면 밥이 된다고 하기에 2봉지를 싸 가지고 왔습니다.
찬물도 되는데 더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혹시 산에서 자야 될 일 즉 비박을 할지도 몰라 여름용 얇은 침낭과 은박지 깔 판도
가져왔습니다. 밥이 되는 동안 돌 바닥에 은박지를 깔고 침낭을 펼쳐 습니다. 밥을 먹고 나면 드디어 오랜 세월 갈망하던
지리산 산속에 누워 별을 보며 잠을 잘 것입니다. ‘자고 있을 때 곰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나…? 설마 곰이 오겠어 곰을
만난다면 그것처럼 기막힌 일이 어디 있어?’ 괜히 흥이 나고 콧노래가 터져 나옵니다.
오늘 밤은 바람 한 점 없고 별빛은 유난히 초롱초롱 반짝이며 바위 옆으로 조금씩 흐르는 낮은 물소리만 들리는 더없이
편안하고 조용한 지리산 산속의 밤입니다. 밥을 먹고 양치질까지 하고 나서 땀에 젖은 옷만 빼고 가져온 옷은 모두다 껴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딱딱한 바닥에서 싸늘한 냉기가 전해옵니다. 그러나 한없이 편안합니다. 스르르 눈이 감기고 깜빡
잠이 들었으나 이내 다시 눈이 떠졌습니다. 한 시간도 채 안돼 추워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더 누워있다가 정말 깊은
잠이 든다면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일어나 주섬주섬 짐을 챙겨 다시 출발했고 이때가 밤 12시 전입니다.
(지리산 호텔)
치밭목 산장을 지나는데 산장에서 기르는 개가 자지러지듯 짖어 됩니다. 다행히 우리에 갇혀있으니 뛰쳐나오지는 못하고 죽을
듯이 짖어대는 개를 향해 전등 빛을 비추니 짖는 개소리 크기 만큼이나 커다란 개의 두 눈깔에서 빨간불이 철철 흘러 나옵니다.
가능하면 새벽 4-5시경 천왕봉에 도착하여 일출을 볼 작정으로 가다 쉬고 가다 쉬고를 반복하며 최대한 저속으로 가고
있습니다. 두 시경에 드디어 중봉에 도착하였습니다. 동부능선으로 향하는 길목쪽으로 철조망이 쳐있고 입산금지 현수막이
걸려있네요. ‘아! 정상적으로 동부능선을 지나왔다면 저 철조망을 넘을 것이고 완벽한 태극문양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밤새껏 돌아서 다시 제 능선을 찾았고 약간 찌그러진 태극문양을 그린 것이 아쉽지만 이제 남은 구간은 문제될게 없으니
다행입니다.
(중봉)
곧바로 4시가 안돼 천왕봉에 올랐으니 쓸쓸하기 그지 없고 정상은 스산한 바람만 불고있습니다. 멀리 구례쪽으로 불빛이
내려다 보이고 하늘의 별빛은 여전하며 주위는 어슴푸레 합니다. 시커먼 새벽 홀로 천왕봉 꼭대기를 이리 저리 빙빙 돌다가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돌덩이를 껴안고 마구 비벼 보았습니다. 추워서 일출 때까지 기다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 시간쯤 버티고 있으니 멀리 아래쪽에서 고물고물 불빛이 올라옵니다. 저 아래 장터목산장에서 일출을 보기 위해 올라오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반딧불처럼 보입니다.
(천왕봉)
드디어 제일 먼저 한 젊은이가 일등을 합니다. 바위 뒤에 숨어 있다 “일등” 하고 소리치며 나타나니 가뿐 숨을 몰아세며 깜짝
놀랍니다. 아마 본인이 일등인줄 알았는데 사람이 뛰쳐나오니 놀랄 수 밖에요. 뒤이어 금새 정상은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룹니다. 일출을 보려면 아직 3-40분은 더 기다려야 하기에 일출을 포기하고 장터목산장을 향해 내려갔습니다.
산장에 도착하니 자고 빠져나간 빈 자리가 담요와 함께 널 부러져 있네요. 잽싸게 담요를 푹 뒤집어 쓰고 눈을 부쳤습니다.
따뜻한 담요에 언 몸을 녹이면서 꿀맛 같은 2시간의 단잠을 자고 나니 산장 안은 거의 텅 비어 있네요.
세 번째 구간 (주능선)
이번에는 친절한 이웃으로부터 적선 받은 더운물로 남은 비상식량을 맛있게 비벼먹고 오늘의 일정인 주 능선 공략에
들어갔습니다. 2008년 5월 2일 金曜日 지리산의 날씨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너무 좋습니다. 오월 두 번째 날을 지리산 주
능선에서 열어 피어 오르는 생명력과 호흡하면 신나게 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덥습니다. 때 아닌 더위인 것 같습니다.
거칠 것이 없으니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세석산장을 한 시간쯤 지나 긴 나무계단을 내려가다 언뜻 어디서 많이 본듯한 분이 스쳐 지나갑니다. 고개를 돌려 다시
보았습니다. 맞습니다. 20년 동안 너무도 잘 아는 분입니다. 같은 회사 사장님이시네요. ‘세상에 회사 사장님을 이 지리산
능선에서 만나다니!’ 피차에 반가움에 앞서 놀라웠습니다. 평소에 산을 좋아하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이번 연휴를 이용
사모님과 함께 지리산 종주를 하시고 계시네요.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훌륭하십니다. 연세가 환갑을 넘기신 분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회사에서 일을 제일 많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중국, 지방 등 여러 사업체를 어려운 경영여건 속에서도 세심한 관리
경영으로 회사를 단단하게 유지하며 나날이 확대 발전시켜 나가시는 분입니다.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 엄청난 노동력을
소화해 내시는 사장님 체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지. 선채로 몇 마디 간단하게 나누고 바로 헤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뒤를
돌아 계단을 오르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배낭이 크고 무거워 보였고, 특히 사모님께선 무리가 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렇게 하여 다섯번째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습니다.
벽소령산장에서 햇반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진행속도를 조금 낮추었습니다. 아무래도 노고단을 찍는 것으로 오늘 목표를
삼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왼쪽 발바닥의 물집을 싹 무시하려고 해도 걸음걸이가 어색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같은 발
뒤꿈치에도 보기좋게 봉긋한 물집이 잡혔네요. 능선길을 따라 마주오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연화천을 지나 뉘엿뉘엿 붉은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쯤 멀리 노고단이 보입니다. 거반 다 온 것입니다. 드디어 노고단에 도착 사진 하나를 남기고 바로
산장으로 내려가 숙박가능여부를 물으니 딱 하나 자리가 있답니다.
3일 만에 편안한 잠자리를 얻었으니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담요를 빌러 짐과 자리를 정리하고 햇반을 구해 저녁까지 먹고
자리에 누우니 아직 8시도 안되었습니다. 오전에 만난 사장님이 궁금합니다. 오늘 목표가 장터목산장이고 내일새벽 일출을
보시고 중산리로 하산하실 예정이랍니다. 그 동안 내내 통화 불능으로 꺼 두었던 전화기를 켜 보니 통화가능 신호가
들어옵니다. 문자를 날렸습니다. “무사히 도착하셨습니까? 일출시간 5시40경 천왕봉까지 급경사 1시간 소요” 약 1분후
문자가 도착합니다. “잘 도착했네 자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남은 구간 조심하게” 수신 확인차 “네 감사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보내고 다시 전화기를 끄고 잠을 청해 꿈나라로 빠져들었습니다.
(연화천 산장)
(주능선 진달래)
네 번째 구간 (서부능선)
눈을 뜨니 3시가 채 안되었습니다. 그대로 누워 다리를 쭉 뻗어 스트레치을 하면서 몇 분간 누워있다가 3시쯤 일어나
조심스럽게 짐을 챙겨 살며시 산장을 빠져 나왔습니다. 성삼재를 향해 10분쯤 내려오니 등산객이 구름 때처럼 몰려옵니다.
저마다 머리에 램프을 켜고 알록달록 화려한 등산장비 치장에 행복에 겨운 모습들입니다. 모두가 올라 가는데 유독 한 사람만
내려갑니다. 넓은 주차장은 차와 등산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연신 대형버스에서 등산객을 계속 쏟아냅니다. 흔치 않은
연휴에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삼재에 도착하여 발생했습니다. 이 북새통에 갈 길을 찾지 못해 쩔쩔매고 있습니다. 도대체 서부능선으로 가는
들머리가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동남부 시작점은 엄청 챙겼으나 정작 성삼재에서 서부능선 들머리는 챙기지
못했습니다. 사방을 빙빙 돌아도 도저히 찾을 길 없고 속절없이 시간만 자꾸 갑니다. 마땅히 물어 볼 사람도 없습니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등산객이 구례 반대쪽 찻길로 내려가는 모습이 눈에 딱 띄었습니다. 쏜살같이 좇아 가니 찻길 옆 철망
문을 열고 산으로 오릅니다. 잠시 행장을 여미기 위해 서있는 두 분을 겨우 따라잡아 가뿐 숨을 몰아 세며 이 길이 서부
능선길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태극종주 마지막 구간 서부능선길이 시작되고 이번 산행에서 가장
소중했던 여섯번째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두 분은 광주에서 오신 부부시고 산을 펄펄 날아 다니시는 엄청난 체력으로 특히 남편 되시는 분은 산은 물론이고 마라톤까지
하시며 지리산 주능선인 성삼재와 천왕봉 왕복 주파를 10시간 이내에 즐기신다고 하니 우리 기준으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같은 인조인간 사이보그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역시 엄청난 속도로 달리십니다.
도저히 따라가기가 힘이 듭니다. 평소 즐기는 속도의 반밖에 안 되는 속도라고 하십니다. 여하튼 이 분들을 놓치기 싫었습니다.
마치 오래 전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처럼 두 분은 모두 친절했고 편안했습니다. 무엇보다 초행길인 저에겐 길잡이가
필요했고 가야 할 길이 같으니 죽기 살기로 따라갑니다.
조금지나 날이 밝고 주위가 환해지니 지리산 서부능선의 자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주능선과 달리 탁 트인 전망과 편안한
등산로가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저 멀리 지나온 주능선과 천왕봉을 조망하면서 만복대를 지나는데 이미 아침해가 힘차게
솟아 올랐습니다. 참으로 신선한 아침입니다.
(만복대와 수호천사)
정령치휴게소에서 아침을 해결할 의도였는데 막상 도착하니 휴게소 문은 잠겨있고 먹을 물 조차 없습니다. 큰일 입니다.
배고프고 목마른데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식사, 물, 간식까지 이분들이 모두 다 깔끔하게 해결해 주시는
겁니다. 두 분과 불청객인 저는, 휴게소 벤치에서 싱그러운 아침 햇살을 맞으며 기분 좋은 아침식사를 끝냈습니다. 다시 출발
길에 오르니 늦어도 오후 1시경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비록 물집으로 발을 아프고 몸은 지쳐있지만 힘이 납니다. 오늘은 5월3일 토요일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오월 초순 날씨치고는 너무도 덥습니다. 햇볕에 노출된 얼굴과 팔목이 벌겋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멀찍이 뒤쳐져
헉헉 거리며 겨우 따라가는 저에게 중간중간 음료와 간식을 계속 공급해 줍니다. 고맙다 못해 이젠 염치가 없어 송구하기까지
합니다. 도대체 이분들 이상합니다. 누군가의 지령을 받고 체력과 생존자원을 모두 고갈시켜버린 완전초보자의 태극종주
마지막 코스 지원자로 나오신 분들이 틀림없습니다 “저 불쌍한 놈을 살려서 종주를 끝내도록 하여라!” 누가 보냈을 까요? 길
인도에서부터, 식사, 식수, 음료, 간식, 그리고 힘과 용기 등 백 퍼센트 완벽하게 척척 자동으로 지원 보충되고 있습니다.
서부능선 진짜 너무 좋습니다. 넓게 탁 트인 전망과 편안한 등산로며 제 개인적으로는 주능선 보다 서부능선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바래봉을 향해 진달래 군락지를 통과해서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아직 만개 안된 상태의 꽃망울이 더 많이 보입니다.
저것들이 만개 되면 정말 장관을 이룰 것 같습니다. 역시 끊임없이 이어져 오는 등산객들과 지나치다 또 언뜻 본듯한 얼굴이
지나갑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바로 뒤이어 경기도 안양에 살고있는 친한 친구가 달랑거리며 오고 있네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친구 엉덩이를 들고 있던 스틱으로 후려 쳤습니다. 앞서 가던 친구 아내와 우리 셋은 반가움에 까무러칠 뻔했습니다.
친구색시는 왜 혼자냐고 나무라고 친구는 혼자가 아니고 앞서간 여자가 수상하다는 의심의 눈초리로 째려봅니다. 그 친구
와이프 역시 산을 좋아하고 자주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말 뜻밖입니다. 이번 연휴 바래봉에서 천왕봉까지 종주를
직접 주선하고 게으른 남편을 억지로 끌고 가는 중이랍니다. 세상 참 좁네요. 어제는 회사 사장님, 오늘은 친구 연 이틀
기적적인 만남이 지리산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일곱번째 만남이었습니다.
(서부능선)
바래봉 정상에서 꿀맛 같은 찐 빵을 한번 더 공급 받고 이제 덕두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바래봉에서 덕두산 방향도 입산금지
였으나 바로 엊그제 5월 1일부터 진달래 축제기간동안 개방한다는 안내현수막이 있습니다. 이제 덕두산을 지나 인월마을로
하산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한시간 남짓후면 비록 깔끔한 태극은 아니더라도 좀 변형된 태극문양을 그리며 종주를 마치게
됩니다. 덕두산 정상을 지나 하산길이 겹겹이 쌓인 갈잎으로 점점 흐려지더니 드디어 소실되어 버립니다. 이리저리 소실된
길을 찾다 하산코스를 살짝 벗어나고 말았습니다. 다 내려온 곳이 구 인월 마을회관 쪽이 아니라 조금 위쪽 백련사라는 절이
있는 중근마을로 내려왔습니다. 드디어 태극종주는 끝이 났습니다. 5월 1일 오전 3시 30분에 덕산에서 출발 5월 3일 오후 1시
10분에 산을 내려왔으니 총 종주시간 57시간 40분으로 당초 목표 60시간 안에 들어 왔습니다
(중근마을)
나의 태극종주 여정에 가장 지치고 힘든 상황, 모든 자원이 고갈된 상태인 마지막 서부능선을 책임지고 완벽하게 지원하여
무사히 종주를 마치도록 해 주신 분들과 이제 헤어져야 합니다. 성삼재에 차를 두었다며 마치 제 임무를 완벽히 끝내고
철수하는 야전 군인들처럼 택시를 불러 훌쩍 떠나 버립니다. 아마 이 분들이 아니 였다면 나의 종주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설사 성공한다 해도 엄청난 고생을 했을 게 분명합니다. 수호천사의 역할이 끝나자 지체 없이 떠나버린 것입니다. 수호천사를
보내신 이에게 감사하고, 수호천사에게 감사합니다.
(사라지는 수호천사)
일찌감치 산을 내려오니 바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중근마을 어귀에서 남원행 버스를 기다립니다. 오늘 중으로 집에 돌아
가면 되고, 일단 남원을 가면 인천행 버스가 있을 것입니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나타나지 않아, 마을에서 나오는 작은
화물차를 세워 부탁을 하니 깍듯하게 자리를 내줍니다. 인월에서 남원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니네요. 큰 도시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고향 남원에 돌아와 가구사업을 하신다는 젊은 사장님이 드디어 이번 산행의 마지막 만남 여덟번째가 됩니다.
친절하게도 버스 터미널에 내려준 시간이 3시였고 바로 3시 30분에 인천행 차가 있답니다.
이번 산행 정말 이상합니다. 살다가 이런 일이 있을까요? 내가 가는 모든 여정이 누군가에 의해 잘 짜여진 프로그램처럼
사전예비가 다 되어 착착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앞으로 남은 생애에 다시 없을 것 같습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숙연해집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지리산은 다녀갈 때 마다 맑고 깊은 마음의
선물을 줍니다. 이 마음의 선물이 고갈될 때쯤 다시 오겠습니다.
“안녕 지리산!”
등산화를 벗어 갈잎 부스러기를 털어내고 버스에 올라 달리는 차장너머로 저 멀리 달려온 산을 바라봅니다. 사장님께 “지리산
태극종주 11시 완료” 문자를 다시 날리고 편안하게 눈을 감았습니다.
저의 기적적인 만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납니다.
첫댓글 한편의 소설을 읽은 기분이네요..태극종주 축하드립니다..
홍순종님!! 수고가 많았읍니다. 태극길 답사하신다고....다음에 멋지게 태극을 하십시요. 여러가지로 수고 하신 보람은 진짜 태극을 하신후에 느껴볼수 있을겁니다. 지리태극 답사기로 생각 하겠읍니다. 다음의 지리태극을 위하여...홍순종님!!!화이팅!!!!***PS; 클럽에서 올가을에 지리태극 이벤트가 있읍니다. 그때 지리태극무박종주의 참 맛을 느껴보실것을 권해드립니다^^.
홍순종님표 지리태극 종주를 축하합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인가? 복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동안 살아오며 지어오신 복덕이겠지요. 5월의 휴가! 멋지게 보내셨군요. 앞으로도 멋진 산행 계획하시고, 안산 즐산되시길...^^
서부능선 잘 찍으셨네요. 지리태극 종주 축하드립니다. 수고했습니다.
오랫시간 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대단하신 집념으로 이룬 태극종주 축하드립니다.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부평에 살고 있는데 이번 6월6일 태극종주에 참여할까 해서 님에 글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것 같습니다. 혹시 시간이 있으시면 제 메일로 연락 가능 할까요? 제일 주소는 33best@korea.com 입니다. 차 한잔 하면서 경험 담 부탁드립니다.
그 때... 거꾸로 태극종주 하고 있었는데, 이름없는... 소리없는 바람처럼 '님'을 스쳐 지나간 듯 합니다.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가슴깊이 애미는둣한 산행기 잘봅니다 주옥같은 만남과 인연을 그려낸 한편에 소설같습니다 태극종주 축하드립니다
이제야 님의 산행기를 접하네요.. 반갑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온 "세번째 만남"의 주인공입니다 밤머리재 사진에 제가 보이네요~ 님과 윗새재마을에서 헤어질때 많이 걱정 했는데.. 한밤중에 어려운 난관 극복하고 천왕봉에 올라 태극을 완성하셨군요 늦게나마 축하합니다 저도 3일 오후 4시경에 구인월로 하산해서 태극을 완성했지요..~~ 언젠가 산에서 만날수 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언제나 안산,즐산 하십시요
잘 계시죠? 인천에 갔을때 뵙고 왔으면 좋았을텐데, 아쉽고 미안한 마음뒤로 하고 그날 밤 늦게 광주에 돌아왔습니다. 노래도 있지요.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미리 연락주시면, 제가 지리길의 동행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늦게나마 님의 지태산행기를 접합니다. 지나온 지태길이 님의 글을 통해 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 가슴으로 읽고 마음으로 깊은 존경심을 갖습니다.
오! 부끄러운 글을 읽으셨네요. 고맙습니다. 님의 산행기를 접하고 다시 한번 지태를 도모해 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저의 산행기는 제 블러그와 OK M/T에만 올렸는데 지태 당시 도움을 주셨던 지삼 방장님이 친절하게 이곳에 실어 주셨고 제 글이 여기에 있는 것을 오늘에야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님의 산행기를 읽다가 제 글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 연유로 격려의 글을 주신 위의 분들에게 감사의 답글도 못 드렸습니다. 특히 아름드리님과 지리산칸님께 너무 죄송할 따름입니다. 지난 여름은 지태 당시 인연이된 회사 어르신과 지리산 산행을 수차 했고 이제 지리산과 많이 친해진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