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는 날이면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워 뻑뻑해진 눈을 비비며 찻속에서 단잠을 청하는 때가 많다 쉽게 잠들지 못할 때 창 밖을 보면 온통 어둠뿐이다 뭉쳐진 어둠의 바다 그 끝은 어디인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때문에 새벽녘의 풍경을 보는 때의 감회는 사뭇 남다르다 어둠이 걷히고 동이 틀 무렵이면 한 올 한 올 옷을 벗는 여인의 신비로움 같은 그 무엇이 느껴지기도 한다 오늘은 잿빛 하늘 우울함에 사로잡힌 버지니아 울프의 눈빛 같다 눈꽃으로 유명하다는 남덕유산 지난해에도 가 본 적이 있지만 적이 실망감을 안고 왔기에 또 다시 산행에 나선다 화면으로 볼 때면 너무도 아름답던데 이번에는 제대로 된 모습을 볼 수 있겠지 하며 남모를 설렘에 잠긴다 늘어 선 나무들 사이로 평평하게 다져진 등산로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한참을 걷다보니 멈춰 선 사람들 길은 좁은데 사람은 많으니 꼭 도심의 정체를 이곳으로 옮겨 놓은 듯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나무들을 본다 벌거벗은 나무들 겨울이면 나무들은 모두 옷을 벗는다 바람이 거세고 눈보라가 세찰 때면 더욱더 옷을 벗는다 벗고 떨구고 털어내야만 봄날의 싱그러움을 맞이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조그만 추위에도 옷을 껴입기에 급한 인간들을 비웃는 듯 채우기에만 급급한 인간들에게 보라는 듯 추위 속에 드러내는 나무의 맨몸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고 하였던가 열이 많은 체질이어선지 조그만 추위에 쉽게 굴복하고 싶지 않겠다는 알량한 자존심 때문인지 웬만해선 장갑을 끼거나 모자를 쓰고 싶진 않다 그런 나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안쓰럽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손이 시리지 않으냐고 모자를 쓰면 따뜻할 텐데 하며 염려의 말을 건넨다 따뜻한 마음을 가슴에 묻으며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지어 본다 여전히 늘어 선 사림들 머리를 들어 멀리 있는 산들을 본다 엄마의 품속 같고 여인의 젖가슴 같은 산의 능선들 적당히 흰눈을 쓰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며 삶의 굴곡을 생각하고 삶의 가을을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마음일까 눈꽃 하나 없는 나무들의 모습을 보며 적잖은 실망감에 사로잡힌다 올해도 제대로 된 눈꽃은 볼 수 없다는 말인가 또 언제를 기약해야 한다는 말인가 몇 번의 겨울을 보내야만 눈꽃다운 눈꽃을 볼 수 있을까 머리를 들어 정상쪽을 본다 큰바위얼굴 같은 모습을 하고 적당히 눈을 뒤집어 쓴 채로인 정상 계단을 따라 늘어 서 있는 사람들 고생을 하며 정상에 오른들 머무는 시간은 얼마이지 않을 텐데 맞아주는 것은 세찬 바람뿐일 텐데 한사코 정상에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상에 도달하지는 못하지만 바위를 굴려 산을 오르는 시지프스의 삶이 오히려 아름다운 건 아닐까 도달하면 내려서는 일밖에 남지 않는 것보다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 더욱 아름답지 않은가 절망의 확인보다 희망을 간직하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그것은 형벌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다 언젠가는 정상에 오르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육중한 바위도 눈덩이처럼 가볍게만 느껴지지 않았을까 오늘도 바위를 굴리고 있을 시지프스가 그립다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그가 너무도 부럽다
정상에 올라 널리 펼쳐진 산들을 본다 펼쳐 놓은 병풍처럼 아름다운 산봉우리들 눈을 이불 삼아 연무 속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산봉우리들 저들도 봄이 오면 이불을 걷고 푸른 잎 붉은 꽃으로 몸 단장을 하겠지 그런 믿음과 희망이 없다면 언제까지나 저렇게 눈을 덮어 쓰고 있지만은 않겠지 얼음장 밑에서도 물고기는 헤엄 치고 쓰레기통 속에서도 장미꽃은 피어난다 하지 않던가
믿음과 희망이 없는 삶은 향기 없는 꽃이요 어둠의 사막임을 새삼 느끼며 발길을 돌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