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나석중
학림다방 외
검은 목조계단을 올라서 거기
의외로 선남선녀들이 가득하다.
유서 깊은 곳을 찾는 꽃이라면 어깨에
무엇이라도 올려놔도 되겠다.
배경에 맞지 않는 노인은
식어가는 추억을 한 잔 주문해 읽고 있지만
저 물망초 같은 눈동자들은 어떤 미래를
미루나무 잎처럼 수군거리는가?
얼룩진 목조 다탁의 닳아빠진 모서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이 만지고 갔는지
소란 가운데 인적 깊은 고풍이란 고요에는
오욕의 지난날도 그리워진다.
마로니에 잎 푸르른 날에
민주화를 위한 학림사건 이후 대학로는
벌 나비로 붐비고
복개천 위의 교통은 물 흐르듯 원활하지만
상선약수가 흐르던 그 이름
흥덕동천을 잊고 그 이름 대학천을 잊고
지금 바로 그 아래에는 시궁창
어떤 죽은 이념이 흘러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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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낭만시대
가로수 샛노란 은행잎이 뭐라고
중얼중얼 떨어집니다
그 봉인하지도 않은 편지를
지상의 발바닥이 다 읽기도 전에
노랑 형광조끼를 입은 미화원이
플라스틱빗자루로 팍팍 쓸어냅니다
그 비밀이 없는 공개편지를
며칠을 두고 볼 수는 없는 건가요
하늘은 깊을 만큼 깊어지고
인심은 순할 만큼 순해지는 날에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누군가에게 편지를 받으면 좋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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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중
2005년 시집 『숨소리』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저녁이 슬그머니』, 『목마른 돌』, 『풀꽃독경』 외 여러 권이 있으며 시선집 『노루귀』, 전자시집 『추자도 연가』, 전자디카시집 『라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