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륙 강화 전등사(傳燈寺)를 찾아서
1.
전등사(傳燈寺)는 강화부(江華府)에 위치한 정족산성(鼎足山城) 안에 자리잡고 있으며, 많은 보물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史庫)가 있다.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은 병인양요(丙寅洋擾)당시 없어진 강화도의 보물들에 대해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병인년(丙寅年-1866) 9월에 법국(法國)-프랑스-의 군함이 강화에 정박하고 있었다. 그것은 순찰하기 위한 군함이며 침략할 뜻은 없었다. 혹자는 베르누 등이 사형을 당하고 서양의 사학(邪學)을 엄히 금하기 때문에 보복하러 온 것이라 하였다.
이때 유수(留守) 이인기(李寅夔)가 겁을 먹고 도주하여 성이 함락되었다. 양인(洋人)들은 10일동안 점거하고 있다가 많은 물품을 약탈해 갔다.
우리나라에서는 강화도를 천험(天險)으로 생각하여 군량, 무기.보화 등을 많이 비축하였으나, 이때 모두 없어진 것이다.>
또한 정족산성이 위치했던 정족산(鼎足山)과 관련하여 프로이센의 유대계 상인으로 1868년 조선(朝鮮)을 방문해 남연군(南延君-흥선대원군 부친)의 묘(墓) 도굴사건을 저질렀던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 (Ernst Jakob Oppert , 1832~1903)는 당시 정족산의 모습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이 반도의 정족산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가장 높은 산 중 하나인 정족산(鼎足山 -Table Mountain 또는 Tower Mountain)은 높이가 약 3-4,000피트였다.(약1200m)>
반도 강화도 정족산(鼎足山)의 높이는 220m이다. 또한 마니산(摩尼山) 높이는 472m로 이 산이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따라서 1868년 조선(朝鮮)을 방문했던 오페르트가 본 1,200m의 높은 산이 있었던 강화도는 이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섬이 아니라 대륙 강화도의 이야기임을 우리는 알아낼 수 있다.
우리가 여러차례에 걸쳐 고찰한 바와 같이 대륙 하남성(河南城)과 호북성(湖北省)이 겹쳐있는 단강구수고(丹江口水庫)가 바로 조선사(朝鮮史) 500년의 서해(西海)이자 강화도가 위치한 곳이 되겠다.
이전의 글 <노하구(老河口)를 찾아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역사속의 단강(丹江)은 대륙 사천성 북쪽에서 감숙성(甘肅省)으로 넘어가는 진령(秦嶺)산맥의 남쪽에 존재한 강(江)의 지명으로 정확히는 운하(運河)길이 된다. 따라서 현 단강구수고(丹江口水庫)는 1949년 중국공산당이 대륙전체를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얻은 이후 작은 한족(漢族)의 강역을 조선이 빠져나간 거대한 대륙전체로 확대-이전하는 과정에서 지명이동된 곳으로 지금으로부터 불과 100년전에 명확히 조선사오천년의 강화(江華)가 존재했던 역사의 터전이다.
2.
효종(孝宗)4년인 1653년 화재로 강화(江華)에 보관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소실되자 1660년 전등사(傳燈寺) 경내에 정족산(鼎足山) 사고(史庫)를 설치하고 실록을 보관하게 되었다. 이후 실록뿐 아니라 왕실문서까지 보관하는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해지기도 했다.
1866년 조선의 강화(江華)에 침입한 프랑스 군의 병력은 전함(戰艦) 7척과 정예병(精銳兵) 1,500명의 규모로 결코 적지 않은 전력(戰力)이었이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강력한 통치력아래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위계를 형성했던 조선군(朝鮮軍)은 호랑이 잡는 평양 포수까지 동원해 반격에 나서 결국 전등사(傳燈寺)에 포진한 조선군의 매복에 걸린 프랑스군은 순식간에 30-35명이 죽어나가는 패배를 겪고 삼십육계(三十六計) 줄행랑을 놓아 지부(芝罘)로 도망쳤으며, 이 전투는 청(淸)나라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어 1870년 천진(天津)사건을 불러일으켜 천진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이 모두 살해되고 프랑스 국기(國旗)는 뽑혀 강물에 던져지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병인양요(丙寅洋擾-1866)가 일어난 이면의 역사를 살펴보면 조선이 청국(淸國)의 속국이라는 간교한 말들이 거짓임이 단번에 드러나고 만다. 즉 당시 청나라에 있던 프랑스 대리공사 벨로네(Henri de Bellonet)가 청나라 공친왕(恭親王)에게 보낸 공한(公翰)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이 속국이란 말은 조선을 시기하는 간교한 자들이 꾸민 모략(謀略)일 뿐이었던 것이다.
<(중략) 며칠안에 우리의 군대(軍隊)가 조선정복(朝鮮征服)을 향해 진군할 것이며 현재로서는 프랑스 황제만이 오로지 그의 뜻대로 조선국(朝鮮國)과 공석인 조선국왕좌(朝鮮國王座)에 대하여 처분할 권한과 힘을 갖습니다. 청국(淸國)정부는 조선(朝鮮)에 대한 어떠한 권한도 영향력도 없다고 본인에게 여러차례 선언했고, 또 이 구실을 대서 그 나라에 천진조약(天津條約)을 적용하기를 거부하고, 우리가 요청했던 우리의 선교사(宣敎師)들을 위한 여권발급을 거부했다 (중략)>
조선에 대한 프랑스 원정군의 대원이었던 앙리 쥐베르(Henro Zuber-1844-1909)는 병인양요에 대한 그의 기록에서 조선에 대해 거대한 반도국 이라 기록했고, 산이 매우 높아 연중 상당시간 눈이 덥혀 있다고도 기록했다.
황하(黃河)와 장강(長江) 그리고 한수(漢水)에 의해 둘러싸인 경기-충청지역에 대해 거대한 반도국이라 칭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높이 2,600미터에 달하는 대륙 종남산(終南山)-북한산-과 3,000미터를 아우르는 진령(秦嶺)산맥의 높은 고봉(高峰)에 쌓인 눈에 대한 쥐베르의 생생한 기록임을 우리는 간파해 낼 수 있다.
3.
1997년 자작나무 출판사에서는 <중국선불교답사기>4권을 출판하였는데 저자는 중앙일보 기자출신으로 당시 종교전문기자로 활동하던 1941년생의 이은윤(李殷允)선생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의 각 성(省)을 방문하여 사찰(寺刹)에 대한 세밀한 기록을 남겨주었는데, 이 책의 가치(價値)는 우리가 대륙에 존재했던 조선사오천년의 문화유적인 사찰(寺刹)을 찾아내는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저자는 단순히 불교연구와 학문적 원류를 찾아 대륙을 누비고 다녔겠지만, 텅텅비어 있었던 거대한 사찰들에 대한 기록과 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당국의 관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사찰(寺刹)에 덧씌어진 선승(禪僧)들의 이야기는 조선이 빠져나간 자리에 들어선 명(明)청(淸)대의 종교역사가 지명과 함께 이동되어 만들어진 가공의 현실이란 증명을 충분히 검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검증은 먼저 강역고증과 중요지형지물에 대한 사실확정이 이루어진 후 펼쳐질수 있는 부분으로 특히 전등사(傳燈寺)에 대한 고증(考證)은 현 대륙 단강구수고(丹江口水庫)가 조선사오천년 강화부(江華府)의 입구임을 이미 확인한 우리로서는 오히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라 하겠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역사속의 전등사(傳燈寺)는 현재 향엄사(香嚴寺)라는 이름으로 변조되어 있다.
위치는 하남성(河南省) 석천현(淅川縣) 창방향(倉房鎭) 마도촌(磨沟村) 당자곡(堂子谷).
이 향엄사(香嚴寺)란 사찰(寺刹)을 방문했던 저자(著者)의 기록을 잠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향엄사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백애산(白崖山) 당자곡(堂子谷)은 30리나 뻗어있는 깊고 깊은 골짜기였다.
남양(南陽)시내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서북쪽으로 70여km의 밭 사이 비포장 시골길을 달렸다. 향엄사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단강구(丹江口)의 10시 도선(渡船)을 승선해야 했기 때문이다. 배는 하루에 단한 번 밖에 없었다.
등주(鄧州)시-남양-에서 진입, 석천현(淅川縣) 창방향 마도촌의 향엄사에 이르는데는 단강구(丹江口)라는 댐의 호수를 1시간40분 동안 배로 건너야 했다.
배를 내리니 차는 전혀 없고 경운기 택시가 줄을 지어 배에서 내린 손님을 맞았다. 중국의 시골 농촌이나 산간 벽지에는 이같은 경운기 택시가 주요 교통수단이다. 이보다 조금 발전한 게 현급(縣級)시에서 택시역할을 하는 오토바이 택시다.
산문(山門)에 도착하니 勅賜顯通禪門(칙사현통선문)이라는 글씨가 석주(石柱) 문틀 위에 새겨져 있다.
청대(淸代) 강희(康熙)연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절은 엄청난 규모로 고찰(古刹)의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1949년 공산혁명 이전에도 절은 비어 있었고, 지금도 승려가 없다. 고건축 보호를 위해 성(省)문물보호관리소가 83년부터 절은 관리하고 있다.
관리소 소장에 따르면 현재 정부가 사찰복원계획을 수립중이고 복원되는 대로 불교계에서 사찰관리를 위임할 예정이란다.
혜충국사(慧忠國師-육조 혜능의 법제자)탑을 보여달라고 했으나, 탑원(塔園)은 민국(民國)때 건물을 짓느라 허물어버려 없고 겨우 탑의 지궁(地宮)터만 남아 있다.
충국사 탑원(塔園) 바로 앞에는 대형의 청대 묘탑(墓塔)이 대나무 숲속에 우뚝 서 있다. 청나라 강희(康熙)연간에 향엄사 주지로 있으면서 사찰 중창에 크게 공헌한 전우밀(顓愚謐)선사의 부도(浮屠)다. 탑명은 법운탑이고 청 건륭(乾隆)년간에 건립된 것이다.
종루(鐘樓)옆 이 절의 중요한 사적비(寺蹟碑) 하나를 발견했다. 문화혁명 때 진주한 학생 홍위병들이 밥상으로 쓰다가 버렸다는 이 비(碑)는 충국사와 향엄지한선사의 행장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절내 행각의 긴 회랑 밑바닥은 자연석 포장이 아직도 옛것 그대로 깔려 있어 아주 고풍스럽다. 마치 옛 돌길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탈리아 로마의 골목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당대(唐代)이후 중건된 건축양식이지만 사찰 규모가 엄청나게 크고 옛날 풍취가 물씬한 고찰(古刹)이다. 답사한 80여개 선종(禪宗) 사찰 중 규모나 보존면에서 가장 고풍스런 픙광을 지닌 선찰(禪刹)이었다.
절 주위는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가 있고 왕실의 중요문서와 보물들이 가득했던 전등사(傳燈寺)였으니 그 규모는 거대했을 것임을 미루어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다.
구글지도로 검색해보면 향엄사(香嚴寺) 위치는 나오나 주변경관이 모두 모자이크 처리되어 세밀히 볼 수가 없고, 현 단강구수고(丹江口水庫)는 댐을 만들어 옛 모습이 모두 없어진 상황이라 강화(江華)를 둘러싸고 있었던 깊은 뻘의 모습은 온데간데 모르게 사라지고 말았다.
이렇게 모자이크 처리되어 알아볼 수 없게 만든 곳은 대표적인 곳이 바로 한양 경복궁이 존재했던 곳과, 평양으로 비정한 신강북부 동북쪽의 사막지대이다. 이곳들은 또한 관광불가지역으로 지정되어 가 볼 수조차 없는 곳들이다. 특히 평양지역은 근처에 비행장까지 들어서 있는데 주변에는 썰렁하기만 하다. 모두 모자이크 처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국측은 아직도 대륙조선(大陸朝鮮)의 역사부활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또한 국제법적으로도 식민역사가 불법이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터라, 명확히 대륙의 60-70%에 달하는 거대한 땅은 조선(朝鮮)의 강역이며 우리는 먼저 남북통일을 이룬 후 중공(中共)측에 우리땅의 반환을 강력하게 요구해야만 한다.
서희(徐熙,942-998)가 소손녕(蕭遜寧)과의 담판으로 강동6주를 돌려받았듯이, 우리에게는 우리땅인 대륙의 3분지2를 돌려받을 권리가 당당히 있다.
4.
지도를 통해 대륙 강화(江華)의 전등사(傳燈寺)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24.12.30.松溪
첫댓글 평소 너무나 궁금했던 역사적 사실들이었는데,
명쾌하게 정리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강화도를 조선말의 강화도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나 무리가 많았거든요.
고맙습니다
현 반도 강화도의 정족산은 아무리 봐도 ‘鼎足’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어느 위치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솥발같다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더불어, 해발고도 200미터 남짓한 뒷산에, 그것도 바닷길과 가까운 야트막한 곳에 사고(史庫)를 지었다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국가 공문서급의 중요한 서류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산기슭에 보관하는 게 상식입니다. 오대산이나 태백산쯤이라면 모를까, 현 강화도같은 곳에 보관하면 도선생들한테 그냥 약탈해 가라고 두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http://www.nyxys.cn/newsinfo/2433485.html 구글 검색해서 들어가 보니 앞은 강이고 뒤는 산속에 둘러싸인 천하의 요새군요. 남아 있는 사찰 주변이 마치 둥근 솥 같은 형태입니다. 아래 사찰은 68년 수몰되었다고 나오는데 2013년까지는 위쪽 사찰은 일부 개방되었다고 나오는데 지금은 폐허나 마찬가지네요.
네 사이트 들어가서 봤습니다..감사합니다.
글쎄요!전등은 불교에서 흔히 쓰이는 보통명사지요.역사의 강화는 고려와 이조에 걸쳐 있었다는 鎭江과 河陰이란 지명을 찾은후 정착할수
있습니다.
네...어려운 부분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역사의 강화는 江州와 華州의 합성지명이란
것도 참고 하세요.특히 원문의 비교 공부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원문의 교열 내지는 이해의 차이 또한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명을 찾아 원문의 오류를 잡아내는 것도 한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이미 대륙의 모든 지명은 완벽하게 이동되고 변조되었는데 원문의 기록을 잡고 궁리한들 어찌 제대로 고증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보다 광범위하게 근세기록과 현대기록까지 모두 아우르며 찾아가는 여정이 되어야 비로소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불가지론으로 간다면 역사공부는 멈추어야 하는 부분이고 그러한 오류로 빠져서는 더더욱 안될것으로 사려됩니다. 이중재씨나 김종윤 선생님. 그리고 기타 여러사람들이 사서에 매몰되어 지명고증을 한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작금의 현실이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알게되고 추적이 가능하게 된것도 원문의 역사서(텍스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 참고할 따름입니다.
@송계 그럼 무엇을 근거로 대륙조선을 주장하고 옮기레 합니까?윈전 역사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번역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주장에 앞서 근거를
제시하세요.강화란 역사지명도 역사서 원전에
나오기 때문에 끄집어 낼수 있는 겁니다.
@상선거사 역사해석 외연의 확대를 말씀드리는 것으로 이해하여 주십시오.. 어느방식이 맞는지는 후학들이 현명하게 알아서 처리할 문제입니다. 그것을 모를 정도로 후학이 어리석다면 역사해석은 멈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후생과외라고 현재보다 더 현명한 후학이 나오는 것이 역사의 정리이니 지켜보시고 조언해 주시면 후학들이 잘 해 나갈것이라 믿습니다.
혹시 역사서 원문을 번역하고 교열한 부분을
알고는 있는지요?
통계를 내보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서를 읽을때 문득문득 진실과 교열에 대한 확신이 서는 항목들이 많았던 것이 공부하면서 느겼던 생긱입니다.
@송계 그런 확신도 원문에서 찾아 야지요.삼국사기
원문도 보지않고 삼국의 역사를 반도나 대륙
에서 주장 할수는 없지요.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 원문의 역사서를 모르고는 금방 한계가
옵니다.얇음은 금방 탄로 납니다.
주장보다 역사 공부를 더하길 바랍니다.그주장
이 합쳐져야 삼큼한 저술이 나옵니다.
네 참고하겠습니다...
역사는 과거를 추적해 오늘을 시정하고 밝히는 학문인데,그 과거를 확인하는데 역사서
원전을 무시 한다는 것은 역사 공부를 안하겠
다는 뜻 입니다.과연 무엇으로 역사를
연구하겠다는 것 인가요?
어찌 원서를 무시할수 있겠습니까..하지만 또한 교열된 필사본이라는 엄연한 사실앞에서 외연의 확대를 말씀드린것입니다. 정부관인이 찍힌 사서만이 맞고 다른이들의 기록은 다 틀린것이라 할수 없는거 아니겠습니까. 서양인들의 방대한 기록과 독립군들의 회고록은 대륙의 강역을 찾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고, 또한 대륙서 이주당한 분들의 이야기 또한 많은 참고가 됩니다. 외연의 확대는 매우 중요한 논점입니다..사서연구만으로 한양을 찾아낼수는 없는 일입니다.
교열된 필사본이 뭔 말입니까?서양인들의 기록이 옳고 독립군들의 방대한 기록은 있나요?역사가 존재하는 긍극적 이유를 알아야지요.정사서에 정부관인이 왜?있어요.역사공부의 근본
이유와 목적없이는 주장의 저술이 힘들겁니다.
귀하가 앞으로 역시 저술을 할려면, 본인의
능력콰 현실을 인지해아 할 겁니다.실력은
그냥 생기는게 아닙니다.
후생과외라 했습니다. 뒤에 오는 후인들이 더 잘해내리라 믿습니다. 그 믿음이 없다면 어찌 지금의 일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한 결국 일은 이루어지고 창성해질것을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송계선생님 그리고 이 방에 계신 모든 분들께
변함없는 연구와 노력으로 알찬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가끔씩 글을 읽고 있지만, 돈이 나오는 일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고 응원해 주지 않아도 변함없는 탐구와 깊이 있는 글을
올려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한 마음으로 글을 읽고 있습니다.
2025년 새해를 맞이하여
대륙조선사 연구회의 발전을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네. 고맙습니다. 토론은 항상 중요하고 발전의 밑거름이니 그리 이해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약 송계 선생님의 영상 및 여러 글을 보고 모임에서도 뵙고 대화해본다면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 없을 겁니다.
꾸준한 새로운 지식에 대해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