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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어대(觀魚臺)
나는 동향 시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의「백설이 자ᄌᆞ진 골에」란 시조를 곧잘 음송한다. 멸망해 가는 고려를 바라보는 유자(儒子)의 안타까움이 절절하기 때문이다. 충신인 절의파를 “白雪”로, 조선의 신흥사대부를 간신 “구름”에 비유한 초장은 놀랍다. 시조의 풍격은 맺힌 데를 풀어주며 결곡한 절조가 있다. 골짜기마다 숨어서 영달(榮達)의 기회를 엿보는 자가 간신배가 아니던가. “머흐레라” 이 독창적 시구는, 간신의 음흉한 간교가 배면에 짙게 깔렸다. 고려를 배반한 역성 혁명파를 향한 일검(一劍)이 도사리고 있다. 목은의 빈틈없는 독행(獨行)의 선비 정신은 엄혹하고 쓸쓸하다.
白雪이 자ᄌᆞ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梅花ᄂᆞᆫ 어내 곳의 퓌엿ᄂᆞᆫ고
夕陽에 호을노 셔잇셔 갈곳 몰라 ᄒᆞ노라
초장에서 이어진 흐름은 중장에서 한 바퀴 감아 돌아, 시구 “梅花” 마디에 힘을 준다. 매화는 우국지사를 암유하지만, 목은의 입장에선 고려의 신하도 조선의 신하도 아닌 경계에 부딪힌다. 하여 자신의 매화는, 이 세상 “어내 곳”에도 필 수 없다는 절망적 심정이 된다.「백설이 자ᄌᆞ진 골에」의 백미는, 역시 종장이다. 다시 풀어내고 감아치는 것이 시조 미학의 묘처를 얻었다. 망국의 “夕陽에 호을노 셔잇셔 갈곳 몰라” 서성이는 늙은 유신(儒臣)의 몰골은 처연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평생 이색이 존숭한 성리학은, 역성 혁명파 제자 정도전에 의해 결실을 보게 된다.
이색은 6천여 수의 시를 남긴 대문장가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부친은 고려 말 문신 이곡(李穀, 1298~1351)이며, 영덕 괴시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관어대(觀魚臺)는 그분의 시,「관어대부觀魚臺賦」(목은집, 목은시고 제1권)를 지은 곳으로 유명하다.상대산 절벽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누각은 동해 제일 경(景)이다. 목은은 가끔 관어대에 올라영해부(寧海府)와 동해(東海)를 내려다보며, 낭떠러지 절벽 바위에서 바다에 고기가 노니는 것을 바라보았다.“영해부는 나의 외가(外家)가 있는 곳이므로 소부(小賦)를 지어서 중원(中原)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는 감회를 그의 시고(詩稿)에 남겼다.
영해의 동쪽 언덕 / 丹陽東岸
일본의 서쪽 물가엔 / 日本西涯
큰 파도만 아득할 뿐 / 洪濤淼淼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네 / 莫知其他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 其動也如山之頹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 놓은 거울 같도다 / 其靜也如鏡之磨
바람 귀신이 풀무로 삼는 곳이요 / 風伯之所橐鑰
바다 귀신이 집으로 삼은 곳이라 / 海若之所室家
고래들이 떼 지어 놀면 기세가 창공을 뒤흔들고 / 長鯨群戱而勢搖大空
사나운 새 외로이 날면 그림자 저녁놀에 잇닿네 / 鷙鳥孤飛而影接落霞
관어대가 굽어보고 있으니 / 有臺俯焉
눈에는 땅이 보이지 않도다 / 目中無地
위에는 한 하늘만 있고 / 上有一天
아래는 한 물만 있어 / 下有一水
아득히 먼 그 사이가 / 茫茫其間
천리만리나 되누나 / 千里萬里
오직 관어대 밑에는 / 惟臺之下
파도가 일지 않아서 / 波伏不起
고기들을 내려다보면 / 俯見群魚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 有同有異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 圉圉洋洋
제각기 만족해하누나 / 各得其志
임공의 미끼는 과장된 것이라 / 任公之餌夸矣
내가 감히 흉내낼 바 아니요 / 非吾之所敢擬
태공의 낚싯바늘은 곧았으니 / 太公之釣直矣
내가 감히 기대할 바 아니로다 / 非吾之所敢冀
아 우리 인간은 / 嗟夫我人
만물의 영장이니 / 萬物之靈
내 형체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 忘吾形以樂其樂
즐거움을 즐기다 죽어서 내 편안하리 / 樂其樂以歿吾寧
물아가 한마음이요 / 物我一心
고금이 한 이치인데 / 古今一理
그 누가 구복 채우기에 급급하여 / 孰口服之營營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 而甘君子之所棄
슬프도다 문왕은 이미 돌아갔으니 / 慨文王之旣歿
오인을 생각해도 바라기 어렵거니와 / 想於牣而難跂
부자로 하여금 떼를 타게 한다면 / 使夫子而乘桴
또한 반드시 여기에 낙이 있었으리라 / 亦必有樂于此
오직 고기가 뛴다는 짧은 글귀는 / 惟魚躍之斷章
바로 중용의 가장 큰 뜻이니 / 迺中庸之大旨
종신토록 그 뜻을 깊이 탐구하면 / 庶沈潛以終身
다행히 자사자를 본받을 수 있으리 / 幸摳衣於子思子
달성이 본관인 조선 제일 시인 서거정(1420~1488) 역시,「관어대부後觀魚臺賦」를 읽고, 훗날 관어대에 올라「후관어대부後觀魚臺賦」란 시를 남겼다. 나는이따금 도심이 적막하면, 고향 영덕 블루로드 길 따라 구계항, 강구항, 창포말 등대, 축산항 죽도, 이색문학관, 고래불해수욕장을 한 바퀴 휘돌아온다. 좋은 시를 쓰려면 ‘책 만권, 여행 만 리’는 좋은 벗이다. 관어대 위에 올라서, 탁 트인 동해를 바라보면 만(萬) 시름이 다 걷힌다. 뒤엉킨 탁기가 물러가고 빈 바다에 홀로 떠가는 배가 된다. 우주의 맑은 기운이 나를 휘감아 자연 합일의 경지에 노닌다. 시우(詩友)들과 바라본 노을 풍경과 초여름 발아래 펼쳐진 고래불해수욕장 바다 위로 떠 오른 보름달은 절경이었다. 울창한 송림에 에워싸인 이십 리 금빛 모래 벌은, 송천과 바다가 만나 절경을 이룬다. 고요히 누각에 앉아 눈을 감으면, 천겹 만겹의 그 푸른 물결 소리가 내 시정(詩情)의 묘음이 된다. 시「고래불해수욕장」은, 홀연히 관어대에서 들은 것을 그대로 옮겼다.
연인이여!
고래불해수욕장 위로 보름달이 뜨거든
상대산 관어대 위에서
해당화 허리 곡선이 고운 밤바다를 보라
해무海霧가 군 데 군 데 해송 사이로
달빛 해금을 켜는 한 폭 수묵화가 되리니,
연애를 하려거든, 연인이여!
이십 리 모래 벌 기막힌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라
이따금 돌고래가 수평선 위로 뛰어오르고
은빛 물이랑 사이로 어둠이 시가 되는
그 아름다운 바다 처녀가 소곤거리는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라
달빛 너머 빨간 등대가 보이리니
파랑과 흰색이 섞인 고래불 등대가 보이리니
연인이여! 달빛에 물이 너무 맑아 울고 싶거든
그 밤바다 은빛 꽃가루가 눈부신 고래불해수욕장으로 가라
― 김동원, 「고래불해수욕장」 전문
시의 정점은 허정(虛靜)에 있다. 언어 이전의 사물에 대한 청정한 정신이야말로, 예술의 묘처가 아닌가. 노자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 하여 큰 기교는 서투르다 하였다. 세계는 한 떨기 시의 꽃이다. 머무는 곳마다 시의 주인이 되면, 그 자리가 시가 태어나는 곳이다. 시흥(詩興)이 조화를 이루면 천지도 시에 화답을 한다. 세상 모든 “연인”들이여, “고래불해수욕장 위로 보름달이 뜨거든” 꼭 한 번 관어대에 올라 보라. “해당화 허리 곡선이 고운 밤바다를 보”리라. 말 없는 고요 속에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깨달으리라. 밤하늘과 철썩이는 바다와 그대 마음은 하나가 되리라. 여자여! 남자여! 관어대 “달빛”이 “해금을 켜”거든, “이십 리 모래 벌 기막힌” 그 바다를 향해 키스하라! 심연으로부터 벼락의 전율에 감전되리라. 바다는 일체의 언어를 버리게 한다. 서로의 몸을 깊게 깊게 파도에 사무치게 하라. 그리하면, 바다는 신령스런 영감(靈感)으로 밀려오리라. “연인이여!” 큰 아름다움은 형체가 없느니, “돌고래가 수평선 위로 뛰어오르고 / 은빛 물이랑 사이로 어둠이 시가 되”거든, 열렬히 껴안아라! 오직, 사랑만이 인생의 장엄한 바다를 구원할 수 있다.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여름 바닷가
김상환
정오의 모래사장에 누워 본 윌리암스의 교향곡 1번을 듣는다 모든 바다와 모든 배에게 말하노니 하늘과 구름 사이를 흐르는 물에 숨결이 있다면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이어져 있다 모든 곳은 모든 곳에 가 닿는다 아버지와 함께 찾아간 여름 바닷가엔 지금도 해당화 곱게 핀 모래 언덕이 지문처럼 남아 있을까 솔숲에 이는 바람소리는 예 그대로일까 실내악이 흐른다 뭍과 물이 만나듯 아버지와 내가 만나 찰나를 살다 헤어진 아픔을 저 바다는 알까 뱃전에 부서지는 물거품을 보면 아버지의 쟁기에 날이 선다 거울 속은 여전히 짙은 눈썹이다
거짓말
김동원
1
비는 퍼붓고, 여름 장대비는 퍼붓고,
퀴퀴한 지린 냄새 음습한 골방.
부들부들부들
격렬하게
엄마는 내 손 찾고 있었다.
아아아악, 아아아악,
비명소리 났다.
젊은 엄마가 움켜쥔 내 작은 오른손
마구마구 버둥대며, 빼내려 해도
빠지지 않던 손.
놀라 달려온 동네 어른들
죽은 엄마 손가락 부러뜨려 빼내주었다.
흐늘흐늘 늘어진 엄마 손가락 보며,
밤새
죽은 엄마 관(棺) 옆에 붙어 있었다.
2
차마 발길 안 떨어졌으리.
열 한 살 어린 날 두고 차마, 숨 안 떨어졌으리.
거짓말처럼, 거짓말처럼,
송천(松川)은 흘러 흘러 밤바다 안기는데,
천지간 내 엄마 묻어 줄 사람도 땅도 없어
광목 한 필 죽은 엄마 둘둘 말아 리어카에 실었다.
방문 앞 기둥, 매달린 석유병 들고
한밤중 관어대 뒷산 공터에 엄마를 내렸다.
나무껍질 죽은 엄마 곁에 모아
기름 붓고 성냥불 그었다.
화악 불길 치솟아, 너울너울 불길 치솟아,
어머니 마지막 가시는 모습 차마 볼 수 없어
한달음에 언덕을 뛰어내려온 난
한 점 불빛 없는 외딴집 혼자 남아
죽은 엄마 베개 끌어안고 엉엉 무서웠다.
3
그때 내 나이 열 한 살.
온밤 꼬박 뜬눈 세우고,
그 새벽 어머니 마지막 수습하려고
관어대 언덕으로 살금살금 되올라갔다.
거짓말처럼, 거짓말처럼,
뼈만 남아야 할 어머닌
빈 공터 오도카니 홀로 앉아 계셨다.
나무는 다 타고 아랫도리만 잃은 채,
젊은 어머닌 반쯤 불 탄 모습으로
날 보고 계셨다.
번개 꽂힌 듯, 번개 꽂힌 듯,
덜, 덜, 덜, 덜, 턱 굳었다.
나무 다시 긁어모아, 반쪽 어머니 또 눕혔다.
거짓말처럼, 거짓말처럼,
그렁그렁
내 두 눈 그득 불 고였다.
1955년생인 손경찬은 경북 영덕 영해 출신이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이요, 인생역전이다. 뮤지컬 배우, 연극인, 수필가, 정치인, 언론인 등 역경과 고난을 헤치고 살아온 강철의 삶이었다. 한 살 때 부친(父親)을 잃고 젊은 홀어머니 등에 업혀 생선 시장 바닥에서 어린 생을 전전했다. 나 역시 네 살 때 아비를 잃고, 외아들만 의지하고 사신 어미는 내가 청년기에 객지살이를 할 때 여의었다. 손경찬과 나의 삶은 어찌 보면 너무나 흡사해 마치 어릴 때 죽은 형이 다시 환생한 듯 착각도 든다.
시「거짓말」은 전적으로 손경찬의 수필에 뿌리를 박고 있다. 나와 손경찬을 동일 시적화자로 설정했다. “사실에 얽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더 추악하게, 더 진실 되게, 때로는 더 거짓 되게 만들어야 하며,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베이컨을 빌어 이승하는 말했다. 그렇다. 시인은, 홀연히 우주에서 시의 영감이 뻗칠 때 그 자리 그 찰나에 서 있어야 한다. 온몸으로 시를 받아야 한다. ‘내 심장으로 너의 심장’을 써야 한다.
첫 연의 시적 모티브는 네 살 때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초상날 퍼붓던 장대비에서 착안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그날 그 기억만큼은 지천명인 지금도 너무나 또렷하다. 단말마의 비명은 상상력이다. 그러나 퀴퀴한 지린 냄새는 4년간 병마에 시달리다 숨 놓은 내 어머니의 상황 그대로이다. 좁은 골방에서 욕창의 살 썩는 냄새와 구린내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절벽으로 만든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 때 내 삶은 힘겨웠다. 마치 시「거짓말」를 위해 예비한 것처럼 그 모든 시적 정황이 그날 나의 머릿속에서 동시다발로 발아된 것이다. 시는 근본적으로 모든 유기체적 삶의 관계에서 생겨난다.
1연에서 단말마와 죽은 엄마의 손가락을 부러뜨림에서 생긴 손의 공포를 극대화 시켜내는 것이 이 시작(詩作)의 핵심이다. “흐늘흐늘 늘어진 엄마 손가락”을 바라보는 시적 화자의 눈을 통해 죽음의 실체를 재현하고자 했다. 릴케의 표현대로라면, 시는 곧 보는 것이다.
2연의 시적 공간은 송천(松川)과 관어대(觀漁臺)가 배경이다. 손경찬의 수필「거짓말」의 실재 무대이다. 오십천과 함께 송천은 영덕군의 대표 하천이다. 백두대간 태백산 낙동정맥의 한 지류인 송천은 창수면 백청 ․ 삼계리를 지나는 서천과 묘곡 ․ 원구리를 지나는 남천을 받아들여 영해 관어대를 통과해 동해바다에 안긴다. 관어대는 상대산의 별칭이기도 하다. 이곳에 올라서면 서쪽 등운산, 남쪽 장기곶, 동쪽 일망무제의 동해가 한눈에 그림처럼 들어온다. 목은 이색의 외가가 이곳이며, ‘고기 노는 모습을 바라본다.’ 는 뜻의 시「관어대부」는 이색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작에서 2연은 상당히 부담스런 장이다. 1연과 3연 사이 시적 긴장감을 최대한 팽팽하게 끌어당겨야 한다. 그래서 나는 2연에서 ‘음성 상징’에 주목했으며, 또한 시적 가락은 손경찬의 산문적 어조를 살리되 시의 내재율로 재구성했다.
정민의 지적처럼 시인은 분명 “천기를 누설하는 자이다. 시인이 전달하려는 의미는 문면에 있지 않고 글자와 글자의 사이, 행과 행의 사이, 혹은 아예 그것을 벗어난 공중에 매달려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거짓말」은 모든 시어의 뜻을 직접 드러내고자 했다. 그것은 체험이 시의 뜻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3연은 너무나 아팠다. 가장 오래 시마(詩魔)에 붙들였다. 시의 심장부로 곧장 치고 들고자 했다. 귀신이 붙든 말든 반쯤 불탄 제 어미를 바라본 순간의 열 한 살 어린 아들과 그 젊은 어미의 귀(鬼)에 접신되고자 했다. 오직 시의 정수리를 관통하고 싶었다. 어린 손경찬과 불탄 그 젊은 어미가 시를 통해 구원되길 간절히 간구(懇求)했다. 3연의 성공은 불에 반쪽 탄 젊은 어머니의 모습을 어떻게 실감나게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요체였다. 어쩌면 시작 과정을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비시(非詩)일지 모른다. 수필에선 불에 타 아랫도리가 없는 어머니의 앉아 있는 모습을 “동그마니”란 말로 표현했다. ‘외따로 오똑하게’ 앉아 있는 수동적 모습이다. 나는 “오도카니”란 시어로 바꿔보았다. 훨씬 동적 느낌이 강했다. 뭔가 살아서 보고 있다는 느낌이 확 끼쳤다. 근육이 불에 오그라들어 발딱 일어난 그 모습의 전율이 느껴졌다. 나는 시인으로서 이 시를 통해 다시금 ‘통곡’의 진정한 카타르시스를 배웠다. 언어의 절벽을 건너 뛸 수 있는 힘이 상상력임을 새삼 체감했다. 비극이 예술과 만날 때, 그 자체가 한 편의 명시다.
푸른 말
박종승
나뭇잎은 푸른 말을 하네
만상이 귀 쫑긋 세울 즈음,
보이지는 않아도 바람은
작은 우주 하나씩 흔들고 있네
어둠이 잠시 비켜 서 있네
열린 창밖 내다 보노라면
청솔가지 흔드는 서늘한 가을 곁에
달빛은 수화手話를 하네
한줌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
어디 드러난 몸뿐이냐고,
길섶 여린 잡초의 질긴 삶뿐이냐고,
나뭇잎은 푸른 말을 하네
그대로 듣고 보고 받아들이면 되는
모든 게 마음의 일인 것을
푸른 나뭇잎은 푸른 말을 하네
바다와 시니피앙
김동원
숨을 깊이 들이쉬고, 그는 계속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아래로 아래로 헤엄쳐 내려간다. 물은 물의 은유다. 바다는 문門이 없고, 있다. 바다의 깊이는 질문이다. 오, 지우는 방식으로 채우는 바다여! 바다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바다는 생각을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는 노을을 버리고 주체가 된다. 바다는 바다일 때만 나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