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한 그리스도인의 자유
갈라디아서 5:1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에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라고 두 번 ‘자유’를 언급하셨는데, 첫 번째에서의 ‘자유’는 어떤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의 자유이고, 두 번째에서의 ‘자유’는 또 어떤 것에서 말씀해 주시는 자유인지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는 원문에 의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 자유 안에”입니다. 여기에서 첫 번째로 말씀하신 “자유롭게 하셨으니”의 ‘자유’는 ‘자유롭게 되다’, ‘해방되다’, ‘면제되다’를 뜻하고 있는 것으로 ‘그분(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셨다’를 의미합니다. 이는 자유자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성령으로 난 자에게서는 이전에 그를 족쇄로 채우고 있었던 율법의 구속(拘束)에 있게 한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자가 되게 해 주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서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해방은 죄값인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며, 또한 악한 영 마귀로부터의 지배로부터의 벗어남에 있는 해방을 가져다 준 것이기도 합니다. 이 자유한 자의 자유에 있는 것에서 대개의 영어성경은 여기서의 ‘자유’를 ‘프리’(free)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말씀하신 “그 자유 안에”서의 ‘자유’는 영어성경은 대체로는 ‘프리덤 또는 프리’(freedom or free)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자유는 4장에서의 여종 하갈과 자유자인 사라를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는 율법에 전혀 구애 – 속박 - 받지 않는 자유자인 여자에게서 낳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에 있는 자유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서입니다. 이 자유는 달리 표현하면 첫 번째로 언급하신 ‘자유’에서 보는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해방’에 있어 ‘구속’(속박) 당함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 받았으므로 죄의 결박에서 풀려나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죄의 구속(拘束)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다시는 정죄 받음이 없습니다. 죽음에서 구원 받았으므로 죽음에서 해방되어 다시는 죽음 아래 놓이지 않습니다. 그에게 있는 생명이 죽음을 삼켰으므로 다시는 죽음이 왕노릇 하지 못합니다. 또한 마귀로부터 구원 받았으므로 마귀의 권세에서 놓여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마귀의 종(노예)가 아닙니다. 따라서 마귀가 다시는 주인의 행세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한 까닭에 율법의 계명이 구속(拘束)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모든 계명이 정죄의 기능에 있지 못하는 까닭에 죄값인 사망의 형벌을 주지 못하며 마귀가 그를 종으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의 해방은 곧 율법의 구속을 받지 않는 자유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여, 할례를 비롯하여서 율법의 의식법(儀式法)으로부터 자유합니다. 따라서 할례를 행하는 것을 비롯하여 율법의 온갖 법을 행하는 자가 그것들을 행하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지 못하며 준수할 것을 요구할 권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 자유 안에 확고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그것으로 시험 받지 말고 참으로 견고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며 그로 인한 믿음으로 강하여질 것을 권면합니다. 그러한 것에서 이 ‘자유’를 몇 몇 영어성경(KJV, NKJV, HCSB)에서는 ‘리버티’(liberty)로 사용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서 4장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난 자들은 율법의 구속을 받는 노예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자유자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림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TV에 한 손주를 보는 할아버지의 기쁨이 광고되고 있습니다. 짜장면을 먹느라 온 얼굴이 짜장으로 범벅이 되어 있어도 맛있어하고 좋아하며 그 짜장면을 할아버지에게 묻히고 장난을 치며 까르르 웃는 것을 보는 할아버지는 마냥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놀이터의 모래판에서 온 몸에 모래흙을 묻히고 뛰어 놀아도 마냥 좋아하고 기뻐합니다. 한 예로 들었습니다만, 이게 율법의 구속을 받는 노예의 자녀와 어떤 차이를 갖는지요. 자유자의 자녀는 자유자의 자녀인 그 자체가 기쁨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노예의 자녀는 자유자(주인)의 자녀와는 달리 주인이 지시하는 율법의 계명대로 따름으로써 주인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죄와 죽음과 마귀로부터 자유한 자가 되어 율법에 구속(속박)되지 않으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자유자에게 율법의 구속(拘束)을 받는 종의 멍에를 메게 하는 일이 있을 시에는 단호히 거부하고 싸워 자유를 수호하여야 합니다. 자유자는 종의 멍에를 메고 살 것이 아니라, 그래서 율법에 구속되어서 살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 주신 그 자유에 의하여 자유한 자로 살아감에 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그러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이 행동한 것이 율법의 계명에서 합격점을 얻는 것인지, 그리스도께로부터 만점을 얻을 수는 있는 것인지를 염려하며 그렇지 못할 것에 고민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인지를 궁리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17-26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나”(갈 5:13-14)라고 하셨으며,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육체의 소욕으로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하라)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이 모든 것에서 보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라)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니 이제는 육체를 위하여 살지 말고 성령으로 살라. 그렇게 성령으로 행할 수 있는 자유에 있다. 그 자유를 억제하지 말고 자유한 마음에 소원하고 있는 바대로 힘껏 살라. 하나님이 이를 기뻐하시리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유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요, 참으로 자유한 대로 자유롭게 사는 자입니다. (*)
*갈라디아서 5:17-26에서 ( )안의 내용은 임의로 표현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