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통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또는 우리가 흔히 어느 모임에 가서 서로의 의견이 상반되면 로마에 가면 로마에 법을 따라야 한다고 우겨대는 일들이 있는데 이것은 원래 종교에 귀의하라 즉 종교의식을 그곳의 법에 따라서 하라는 뜻이다 또한 로마로 통한다는 것은 방법은 다르더라도 도달하는 목적은 동일하다는 뜻으로 당시에 로마제국의 도로가 잘 정돈되어 있어서 로마인은 길을 만드는 사람이다 라고 할 정도로 도로정비가 잘 발달되어 그것을 빗대어 나온 말이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다
다시 말하여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기독교 초기에는 곳에 따라 풍습이 틀려 토요일에 단식하는 곳 일요일에 단식하는 곳이 있어 서로 방법이 모두 달라서 밀라노사람들이 당시에 고승(高僧)이던 아우구스티누스한테 물어 보았다 고승님! 우리 밀라노 사람들은 단식을 토요일에 하는데 로마에서는 단식을 토요일에 하지 않고 일요일에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그랬다
그러자 그도 정확한 답변을 내리지 못하고 다시 그의 선배인 안부로지우스 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나도 이곳(밀라노)에 있을 때는 토요일에 단식한다 그러나 로마에 있을 때는 로마 사람들처럼 그들의 법대로 단식을 따라서 한다 그러하니 로마에 가거든 로마사람들이 하는 대로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그때의 그 말이 후대에 내려오면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하듯 남에 나라에 가면 남에 나라 법을 따라야 하고 다른 가문(家門)에 가면 그 가문에 룰이 있어 그 룰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청주 화양동에 있는 만동묘(萬東廟)는 명나라 의종(毅宗)이 쓴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는 글씨와 임진란 때 우리를 도와준 신종(神宗)을 모신 사당으로 사당 안에 그 권위는 조선왕실보다 더 높았다 그런데 어느 날 대원군이 흥선군(興宣君)시절에 청주 화양동을 구경한 뒤 하인들의 겨드랑이 부축을 받으며 만동 묘의 돌계단을 걸어 묘 문에 들어섰다
이때 만동묘의 묘지기인 천민(賤民)이 달려나와 큰소리로 호통을 친다 만동묘는 내명(大明)황제를 모신 곳이라 임금이 행차하여도 부축을 받지 않고 올라오는 법인데 어느 누가 감히 부축을 받으며 올라오느냐면서 흥선군을 발로 차서 계단 밑으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뜨렸다
당시에는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엄격하던 때인데 왕실의 종친이 일개 천민으로부터 이렇게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이때 흥선군은 분통이 터져 하늘을 찌를 것 만 같은 화를 간신히 삭이며 만동 묘의 수장이요 사제(司祭)로 있던 관리 변장의 에게 전갈을 보내 묘지기를 처벌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변장의의 답변인즉 묘지기의 행위가 조금은 과한 듯 싶으나 사적인 예의가 당연하니 처벌 할 수가 없다는 답장을 받고 흥선군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쌕쌕거리며 죄 없는 이만 악물고 되돌아서야 했는데 그것은 로마에 가면 로마에 법을 따르듯 만동묘에 가면 만동묘의 의식(법)에 따라야 되는데 따르지 않아 그에 상응한 벌을 받은 것이다
하기야 나중에 흥선군이 집권하여 여기에 대한 복수를 하지만 우선은 창피와 수모를 당한 것은 그곳에 법도를 따르지 않아서이다 아무튼 이것을 계기로 흥선군이 집권하면서 첫 번째 행한 일이 서원철폐였다 유생들의 고리타분하고 고식적인 기풍이 나라에 백해 무익하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일전에 만동 묘에서 당한 수모를 잊지 못하여 만동묘를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만동묘를 없앴으며 또한 당시에 수장이던 변장의를 형살(刑殺)시켜 버린다
아무튼 로마에 가면 그곳의 법도대로 단식을 하듯 나에 주장을 한 걸음 접어두고 그쪽의 형편과 사정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 현명한 생활의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