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전쟁 :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의 <위그노교도들>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Giacomo Meyerbeer 위그노교도들 Les Huguenots은 프랑스 종교 전쟁 중 가장 끔찍한 학살 사건인 ‘바르텔르미 축일의 대학살 St. Bartholomew's Day massacre을 배경으로 한다.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Giacomo Meyerbeer 작곡이며 유진 스크리브와 에밀 드샹 Eugène Scribe and Émile Deschamps이 대본을 썼다. 1836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성 바르텔르미 대학살은 1572년 프랑스 왕실의 실권자 모후 카트린 드 메디치 Catherine de Médicis의 승인 하에 가톨릭 세력이 위그노(개신교) 세력을 일제히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프랑스 종교 내전 역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사건이다.
1.역사적 배경
루터와 칼뱅의 종교 개혁 이후 유럽은 종교전쟁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수장령 이후 국교회와 청교도 그리고 가톨릭이 대립하였고, 프랑스에서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대립하였다.
성 바르텔르미 축일 대학살은 흔히 프랑스 모후(母后) 카트린 드 메디치 Catherine de Médicis의 결정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카트린 드 메디치는 원래 가톨릭과 위그노의 화해와 공존을 추구했던 여인이었다. 카트린은 이탈리아 교황 가문 출신으로 가톨릭 신도였으나 극렬 가톨릭은 아니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부군인 앙리 2세 Henry II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면서 이후 프랑스의 진로를 책임질 위치에 서게 된다. 카트린은 10명의 자녀 가운데 4명의 아들을 두었다. 프랑스와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그리고 알랑송 공작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앞 3명의 아들들이 차례로 프랑스 국왕의 지위에 올랐다. 프랑스 내전의 한복판 위태로운 시대 카트린은 자식들의 국왕으로서의 지위 보전과 왕국의 유지에 부심하였다.
프랑수아 2세가 왕위에 오른 1559년 위그노의 세력은 최고조에 달했다. 궁정의 실세였던 기즈(Guise) 가문과 로렌 추기경은 위그노의 척결을 주창하였다. 위그노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세를 계속 확산하였다. 프랑수아 2세는 병약하여 곧 세상을 뜨고, 그의 아우인 샤를 9세가 왕위를 이었다. 샤를 9세는 10세에 불과하였고, 카트린 드 메디치가 섭정을 실시하였다.
카트린은 관용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인문주의자 재상 로피탈(Michel de l'Hôpital)을 중용하여 투옥된 위그노를 석방하고, 처형을 중단시켰다. 그리고 구교와 신교를 함께 소집하여 프와시(Poissy)에서 토론회를 열었다. 1562년 마침내 위그노들이 시내가 아닌 별도의 장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생 제르맹 칙령(Edict of Saint-Germain)’을 반포하였다.
또한 카트린은 그의 딸 마르그리트를 나바르 왕 앙리(King of Navarre; 후에 프랑스 앙리 4세 Henry IV)와 혼인시키고자 하였다. 신교와 구교의 왕가들을 결합함으로써 종교 분쟁을 잠재우고자 하였던 것이다. 나바르의 앙리는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이면서 신교도의 영수였다.
그러나 준비가 안된 화해는 오히려 분쟁을 격화시키게 되었다. 생 제르맹 칙령으로 신교도들이 궁정출입이 가능해지면서 신교도의 지도자 해군 제독 콜리니 Gaspard de Coligny는 샤를 9세에 대한 영향력을 넓혀 갔다. 콜리니는 나바르의 앙리와 마르그리트의 결혼 소식에 위그노의 승리를 확신하였다. 제독의 포부는 유럽 무대를 향하였다.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플랑드르(네덜란드) 신교도들을 무력 지원하고자 하였다.
카트린은 콜리니 제독의 독주에 경악하였다. 대다수가 가톨릭 교도인 프랑스 국민들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반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기 아들 샤를 9세가 콜리니 제독의 ‘소유물’이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절치부심하던 기즈 가문도 결단을 내렸다. 기즈 가 일당은 콜리니 제독 살해에 대한 카트린의 승인을 받았다. 콜리니 제독 암살을 승인함으로써 카트린은 그 동안 추구해 온 화해 정책이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자인한 셈이었다.
콜리니 제독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 샤를 9세는 공개 수사를 명하였다. 카트린은 막다란 골목에 몰리게 되었다. 연루 사실이 드러나면 본인은 물론 샤를 9세의 보위도 온전치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카트린은 아들 샤를 9세에게 읍소하였고, 샤를은 모친의 편에 서서 콜리니 제독의 제거를 용인하였다. 나바르의 앙리와 마르그리트 결혼의 축제 기간은 이어지고 있었으며 유력 위그노들은 여전히 파리에 체류하고 있었다.
성 바르텔르미 축일 새벽에 국왕의 근위대와 기즈 가문 및 가톨릭 영주들의 병사들이 행동을 개시하였다. 콜리니 제독이 먼저 살해되었다. 삽시간에 200여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파리는 살육으로 물들었다. 가톨릭 민중들은 그들의 억하심정을 위그노들에게 분출하였다. 파리에서 3일간 무시무시한 학살이 계속되었고, 부유한 위그노들이 약탈되었다. 광포하고 잔혹한 분위기는 지방으로 퍼져나가 약 3달 동안에만 1-2만 명이 학살되었다.
카트린의 바르텔르미 대학살 결정은 아들인 샤를 9세를 보호하고 프랑스가 대외 전쟁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종교 분쟁은 거의 대부분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있고, 정치적 생사 투쟁이 종교적 생사 투쟁을 격화시킨다.
2. 오페라 내용
마이어베어의 오페라 <위그노교도들>은 위 바르텔르미 축일의 학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가톨릭과 위그노의 적의에 찬 대립 그리고 화해의 시도 등 프랑스 종교 내전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다. 나바르의 여왕 마르게리트는 신구교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해 양 가문의 혼인을 추진한다. 구교도 생 브리 가문의 발렌틴과 신교도 라울의 혼인을 주선한다. 그러나 발렌틴의 부친은 전투적인 가톨릭 교도로서 신교와의 혼인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발렌틴과 라울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데. 바야흐로 가톨릭에 의한 대학살이 시작된다. 발렌틴은 라울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정을 청원하지만, 라울은 고심 끝에 자신의 종교를 지킨다. 발렌틴이 마침내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라울과 운명을 같이하기로 결심한다.
이 오페라에는 앞서 루터 편에서 보았던 루터의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곳곳에서 차용하고 있다. 제1막에서 라울의 하인이자 경건한 위그노 마르셀은 가톨릭 교도들이 여흥을 즐기는 자리에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른다. 제5막에서 대학살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위그노들이 교회에서 농성하며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장면에서 이 노래 합창 소리들이 들린다.
여기서는 제1막에서 마르셀의 노래를 올린다.
https://youtu.be/QAYPXBW3bWg
3. 이후의 전개
대학살 이후에도 신구 세력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콜리니 제독에 의지했다가 마침내 그의 살해를 승인하게 된 샤를 9세는 병을 얻었고 2년 후 사망하였다. 카트린의 3번 째 아들 앙리 3세가 왕위를 이었다. 앙리 3세는 종교 내전을 완화시키고자 신교도들의 권익을 일부 인정해 주고자 하였다. 카트린의 넷째 아들 알랑송이 사망함에 따라 다음 왕위 계승자는 나바르의 앙리가 될 참이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나바르의 앙리는 개신교의 최고 지도자였다. 가톨릭 세력은 더욱 전투적이 되었다. 위그노 국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소위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여 파리를 점령하였다. 기즈 가문은 아예 왕위를 가져오고자 하였다. 스페인은 가톨릭 동맹을 후원하였다.
그런데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가톨릭 세력은 주춤하였다. 앙리 3세는 가톨릭 동맹의 영수인 기즈 공작을 암살하였다. 그러나 이는 다시 앙리 3세에 대한 암살을 불러왔다. 앙리 3세는 임종 시 나바르의 왕 앙리의 왕위계승을 인정하고, 그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권유하였다. 프랑스 가톨릭 교도들은 신교도 국왕을 인정할 수 없었다. 가톨릭 동맹은 파리 농성을 풀지 않았다. 앙리 4세의 포위 공격에도 4개월을 버텼다. 앙리 4세가 결단을 내렸다.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선포하였다. 왕의 군대와 가톨릭 동맹은 휴전을 하였다. 파리 시민들이 환호하였다. 앙리 4세는 샤르트르(Chartres)에서 대관식을 거행 한 후, 파리로 진군하여 잔존 ‘극렬’ 가톨릭 세력을 제압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598년 낭트 칙령(Edict of Nantes)이 반포되었다. 개신교 종파가 허용되었고, 신교도들도 가톨릭 교도와 같이 시민적 권리를 누리고, 동일한 직책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집회와 교육의 자유도 누릴 수 있었다. 국왕은 신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150여 군데 지역에 안전지대를 조성하였다. 이 낭트 칙령은 유럽 근대에 ‘관용’의 원리를 최초로 제도화한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국가 종교로서의 지위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후 루이 14세는 다시 위그노 교도들을 억압하였고, 낭트 칙령을 폐지하였다. 프랑스에서 개신교의 자유는 프랑스 혁명 때를 기다려야 했으며, 정교분리의 원칙이 공식 확정된 때는 1905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