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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포에서 바라본 아침해
가을은 깊어서 모든 사물이 결실을 맺는 계절로 특히 올해는 열매라는 농작물은 모두 대풍으로 어느 해보다 풍성한 계절이다. 이제 긴긴 겨울을 나기 위해서 나무는 옷을 벗기 시작하고 온갖 사물들이 일제히 월동준비에 들어가는 즈음. 오색으로 물든 산하가 제각기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만추의 계절에 남도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하고 멋지고 의미 있는 여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암휴게소에 잠깐 쉬고, 다음은 함양의 천지휴게소에 쉬었다. 몇 년 전 청산도 갈 때 쉬었는데 두 번째인 것 같다. 쉼 없이 달린 버스가 예정된 12시 경에 목적지에 도착하여 바로 점심을 먹었다. 병영이라는 소박하고 아담한 지역에 제법 멋진 수임관이라는 음식점의 깔끔한 식사는 역시 전라도 음식의 진미를 느끼게 하는 것 같아서 입맛이 개운하였다.
식사를 마친 후에 바로 근처에 있는 하멜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원형의 기념관은 작은 시골의 분위기와는 조금 안 맞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멜의 고향은 머나먼 유럽의 작은 나라 네델란드. 육지가 바다보다 낮아서 풍차로 물을 퍼내는 풍차로 널리 알려진 나라다. 비록 나라는 작지만 일찍이 문명의 꽃을 피워서 해양을 누비며 선진문화의 길을 걸으며 특히 꽃으로도 유명한 네델란드. 그의 고향은 호르큼이라는 도시로 천여 년 전에 어부와 농부들이 세운 도시로 전략적 요충지라고 한다. 라인강 지류인 왈강이 흐르고, 운하로 연결되어 있다. 그는 동인도 회사의 상선인 스테르베르호를 타고 대만에서 일본을 가던 중에 폭풍을 만나서 제주 앞바다에서 난파하여 깜깜한 한 밤중에 제주 해안에 포착하여 13년간 조선이라는 이름도, 풍습도 알지 못하는 낯선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생활한 이야기를 쓴 책이 하멜표류기다. 동인도 회사는 자카르타 바타비아를 중심으로 아시아 30여 개 국에 상점을 설치하고 아프리카의 희망봉에서부터 타이완과 일본에까지 무역의 거점을 확보하고 정향과 커피 등 향신료를 판매하였다고 한다. 하멜 일행이 태풍을 만나서 제주도에 포착한 이후 13년간의 생활을 보고서 형식으로 쓴 이야기다. 병영이라는 작은 지역에 성이 있고 하멜 기념관을 세웠는데 지역의 정서와는 조금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원형의 건물이었다. 넓지는 않았지만 하멜에 대한 기록이 대체로 상세하게 전시가 되어있어서 알지 못하던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하멜은 바타비아에서 출발하여 신임 총통을 대만에 내려주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서 난파하는 바람에 생각하지도 않았던 전혀 엉뚱한 낯선 이국 땅 조선의 제주도에 포착하여 기병과 보병의 호위를 받으며 출발하여 그날 밤 다정이라는 마을에서 묵었는데, 숙소가 꼭 마굿간과 다름없는 곳이라고 한다. 배가 파선될 정도의 심한 풍랑을 만나서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시골에서 마굿간 같은 데서 잔다는 것이 얼마나 낯설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제주에서 10개월은 매일 쌀을 1kg씩 배급을 받았지만 부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 고생을 하였고, 먹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었다고 하겠다. 그런 어려운 상황과 극한 속에서도 제주 목사 이원진의 배려로 매일 여섯 명씩 교대로 외출할 수 있도록 허락도 받았고, 그 외에도 병자를 간호하고 가끔 연회를 베풀어 주었으며 언젠가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말을 가르쳐서 마침내 어설픈 대로나마 몇 마디씩 의사를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두 달쯤 후 10월 29일에 하멜 일행은 붉은 수염을 기른 박연이라는 자국의 사람을 만나는데 처음에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손짓 발짓을 하며 어렵게 대화를 하여 어디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를 물었다고 한다. 본명은 얀 얀스 벨테브레라고 하는 박연이라는 사람은 26년 전에 조선에 정착한 사람이었다. 식수를 구하기 위해서 해안에 배를 댔다가 동료 2명과 함께 남게 된 사람으로 다른 2명은 병자호란 때 조선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전사를 하였다. 박연에게 자기들을 일본으로 가게 해 달라고 탄원을 하였으나 조선의 법은 표류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본국의 동포를 만난 기쁨도 잠시, 다시 슬픔에 빠졌다고 한다. 그 처절한 심정을 이해할 것 같다. 박연의 권유와 이원진의 동의로 서울로 올라온 그들, 풍랑 속에서 살아남은 36명은 결국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로 올라온 하멜 일행은 궁중의 호위병에 배속되어 하루에 1,5kg의 쌀을 배급받으며 살았다고 한다. 하멜은 이원진으로부터 기독교인 못지않은 대접을 받았다고 기록하였다. 이원진은 성호 이익의 부친 이하진과는 4촌간으로 성호의 개방적 사고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한다. 하멜의 일행 중에 청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나타나서 말고삐를 붙들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달라고 손짓, 몸짓을 하다가 관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서 고생을 하다가 고국으로 돌아가는 꿈을 이루지도 못하고 결국은 옥사를 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네델란드에서 보내온 백자
3년간의 서울의 생활을 마치고 전라도 땅 강진의 병영으로 내려와서 7년을 살았는데, 당시에 병영성이 있었고, 병영에서의 생활이 엄청난 고생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소금물에 밥을 말아 먹었다고 하니, 그들의 고충을 짐작하고 남는다. 그런 이국에서의 고된 생활 중에서도 유일하게 위로와 힘을 주었던 곳이 수인사라는 사찰의 스님들이다. 그들은 틈이 나면 약 1시간 4~50분을 올라가야하는 수인산 산속의 수인사를 찾아갔다. 그들이 수인사로 가면 스님들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먹을 것도 주었다고 한다.
병영성의 일부 모습
병영성은 조선 태종 때 설치하여 갑오경장까지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포함한 53주 6진을 총괄하던 육군의 총 지휘부이던 곳인데 하멜이 7년간 유배되어 노동을 하였던 성으로 그를 기념하여 바로 옆에 기념관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동학운동 때 방화로 소실된 것을 지금 다시 복원하고 있으며 성 안의 발굴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하멜이 쉬었던 800년 된 을행나무
근처에 있는 800년 된 은행나무는 몸통 곳곳에 상처를 치료한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 외관상으로도 연륜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낯선 이국에서의 삶과 죽음을 예측할 수 없는 삶에 대한 회의 속에서 유일하게 위로해주던 수인사를 오고가는 길에 잠시 쉬어서 땀을 식히며, 두고 온 고향의 가족과 연인을 그렸을 일을 생각하니 연민의 정이 물씬 가슴으로 와 닿았다. 수인사를 드나들면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내용 중에 ‘스님은 머리를 깎았고 종교보다 권력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고, 풍치가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노동을 구걸하고 어린이가 구걸한 것을 나이가 든 사람이 가지는데 그래도 나이 든 사람이 죽으면 장사를 지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 든다’고 기록하였다. 그들이 보기에는 스님의 시주와 열반식의 예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하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절에서 한지를 만들어 쓰고 스님이 술을 좋아하며 지위가 높은 스님을 존경한다고 하였으며 주지는 원님이 임명을 하고 봉급을 받는다고 기록하였다. 스님은 하고 싶으면 하기 싫으면 그만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근처의 빗살무늬 담장은 병마절도사가 수인산성을 순시하던 길이었는데 말을 타고 지나가는 중에 담 안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서 담장이 높고 길이 넓게 되어있다. 이를 하멜의 돌담이라고 하며 하멜의 유적을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관계수로는 문명이 앞서간 하멜 일행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홍교와 석장승을 둘러보았는데 홍교는 유한계(1688~1794년)의 금의환향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무지개다리라고 한다. 다리 밑에는 용이 여의주을 물고 있는 조각이 아래를 향하여 있는데 둑에서는 자세히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지방문화재 제129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다리 위의 양쪽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의 두 개의 석상이 서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약간 서양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홍교
병영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한 시간 가량 달려서 어둡기 전에 보성 녹차밭을 구경하고 율포해수욕장의 중앙에 자리 잡은 보성녹차다비치 콘도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412호에 짐을 푼 다음 저녁강의를 들었다. 한형조 교수의 강의는 주제 외에도 많은 철학과 불교를 망라한 종합선물세트처럼 다방면의 강의를 제법 긴 시간하였다. 9시경에 강의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니 룸메이트는 지난번에도 같이 하였던 박종세, 이광세, 조성효, 최상민 4명인데 방이 제법 넓고 깨끗하여서 불편함이 없이 하루 밤을 지낼 수 있었다. 10시가 조금 못되어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은 7시에 아침을 먹고 준비를 하여 8시 30분경에 출발하여 보성 차밭의 고개를 넘으면서 전망이 좋은 고개에서 아침 안개가 드리워진 차밭과 산세를 감상한 후에 다시 한 시간 정도 이동을 하여 낙안읍성으로 갔다.
낙안읍성에는 여러 번 와 본 곳으로 수년 전에 처음 왔을 때는 비교적 조용하고 주변에 장사들도 별로 없이 몇 몇 할머니들이 주차장 마당에서 지역 농산물을 팔았는데 고사리를 한 바구니 사서 오래 동안 맛있게 먹었던 생각이 나서 살펴보았지만 그 때와 같은 분위기도 고사리도 없고 양도 비교가 되지 않은 것 같아서 물건 사는 것은 포기하고 말았다. 이 읍성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계획도시인 읍성으로 지금도 주민들이 살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여러 민속마을 중에서 가장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민속마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을 한 바퀴 돌고 역시 한 시간가량을 달려 여수로 가서 바로 점심을 먹고 거북대교 아래에 있는 하멜 기념관과 하멜 등대를 둘러보았다. 병영에 있는 전시된 내용은 병영의 기념관과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지역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기념관의 규모뿐이었다. 바닷가에 우뚝 서서 뱃길을 안내하는 색깔도 선명하게 붉은 하멜 등대가 눈길을 끌었다.
병영에서 지내던 하멜일행은 남원과 순천, 여수로 각 5명씩 나누어 분산되었다. 하멜은 여수에서의 3년 6개월을 지냈는데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풀 뽑고 새끼를 꼬게 하는데 꼭 죽을 지경이었다고 기록을 하였다니 그 상황과 심정을 알 것 같다. 당시에 전라좌수가 이도빈은 하멜에게 나타난 구세주 같은 분이었다. 부역을 면제해 주고 한 달에 두 번씩 점호도 면제해 주었으며 도망갈 수 있는데 왜 안 가느냐?고 오히려 도망을 암시하기도 하고 부추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그들은 가지고 있던 물건을 팔기도 하고 틈틈이 탈출 준비를 위해서 돈을 모아서 어느 어부에게 어선을 구입하였다. 그 어부가 훗날 피해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배 값을 두 배로 주고 샀다고 한다. 그렇게 준비를 한 그들은 마침내 1666년 9월 4일에 2년간의 여수에서의 생활을 마감하고 탈출을 하여 일본으로 가는데 성공을 하였던 것이다. 일본으로 탈출한 그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일일이 일본 당국에 보고를 하여 일본으로부터 송환요청이 있어서 결국 하멜 일행을 일본으로 보내게 되었다. 당시에 한 사람은 죽어서 15명만이 일본을 거쳐서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 한 명은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정을 가지게 되어 돌아가지 않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축도 한다고 한다. 하멜은 36살쯤에 네델란드로 돌아가서 결혼도 하지 않고 살았다니 하멜을 비롯한 그들의 인생이 본의 아니게 바뀐 사연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이 남쪽에서 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과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병영 남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남만인, 남이산, 남이안 등, 그 중에 남이산과 남이안 두 사람이 바로 청나라 사신 앞에 나타났던 사람들이다. 병영 남씨는 임진왜란 이후에 의령 남씨로 편입이 되었다고 한다.
진남관 뒤 뜰의 우물
여수의 바닷가 식당에서 조기 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마지막 목적지인 진남관을 둘러보았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무전여행을 왔다가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진남관을 구경하면서 이렇게 큰 집도 있구나. 도대체 어디에 쓰는 무슨 집인지도 모르고 그냥 집의 크기에 놀랐던 생각이 난다. 아름드리 기둥이 124개나 서 있는, 앞뒤에 복도가 있는 것 같은 복식 건물로 통영의 세병관과 거의 흡사한 규모와 모양을 갖춘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 건물로 통영의 세병관이 국보305호요 진남관은 그보다 한 칸 앞선 국보 304호로 지정되었다. 진남관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으로 삼았던 진해루가 있던 자리에 1599년 충무공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가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것을 75칸의 대규모 객사로 세우고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진남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설명을 듣고 나니 아무것도 모르고 보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나기도 하지만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건물 뒤 쪽에는 우물이 말 그대로 우물정가 형의 돌을 쌓아서 누가 보아도 우물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주변에 많은 건물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진남관 하나만 크게 자리를 잡고 여수 앞바다를 굽어보며 임진왜란의 그 때를 추억하는 것 같았다.
하멜 일행을 맞은 우리 관에서는 그가 선진 문화의 나라에서 왔다는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게 생각된다. 다만 피부가 다르고 머리카락의 색깔이 다른 외국 사람을 보고 적대시 하거나 외계인 취급을 하여 감옥에 가두고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고민하며 대개는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들은 죽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진남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2시에 출발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만추의 아름다움 계절에 여행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길은 온통 자동차 물결이라 밀릴 것을 염려하였지만 예상외로 잘 빠져서 예정된 시간에 서울에 도착하여 몇 사람이 같이 뒤풀이 모임을 가지고 길위의 인문학의 미래에 대해서 작은 의견을 나누었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