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사려니 숲길
이미 내렸던 눈들이 차곡차곡 무게를 더하고 있다.
잘가꾸어진 숲길을 따라 말없이 걷다 천미천 표지판이 나타나면
천미천을 따라 찬바람을 맞으며 또 걷는다.
겨울나무 만큼이나 앙상한 그는 늘 혼자다.
사십을 사뿐히 넘긴 그는 깃털처럼 가벼워 요만한 바람에도 흔들린다.
외로움이 친구가 되어버린 그는 이미 외롭지도 않다.
외롭지도 않는 내가 '넌 외롭지도 않니?'라고 쓸데없이 괴롭힌다.
잊어버렸다. 그는. 외로움이 뭔지.
온몸을 노오란 물감으로 칠한 나무들이 길을 이어준다.
바람도 함께.
다시 얼어붙은 천미천을 건너 경사진 조릿대 길을 오른다.
켜켜이 얼고 눈내린 길이라 오히려 여름 길 보다 훨씬 걷기엔 편하다.
한라산 조릿대, 산죽이라고도 부른다, 는 지리산 조릿대 보다 낮고 잎은 넓다.
바람 탓이리라 마냥 그렇게 생각해버린다.
바람. 제주의 바람.
제주에 살려면, 제주를 알려면 우선 제주의 바람과 친해져야 한다.
맞서지 않고 그 결을 따르는 법을 익혀야 한다.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견디는 법을 택해야 한다.
조릿대 언덕을 오르면 이 산중에 느닷없이 넉넉한 터가 턱 나타난다.
오래된 배롱나무가 지켜선 오래된 산담 하나.
알몸으로 선 배롱나무도 동자석이 지키고 선 산담도 이 산중 최고의 예술품이다.
'간지럼 타는 낭' '조금타는 낭' 제주에선 배롱나무를 그렇게 부른다.
가지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살살 긁으면 나무가 환하게 웃는다. 간지럼 타는 나무다.
산담과 배롱나무는 아마도 오래된 벗일 것이다.
서로 바라다 보고 말붙이고 함께 바람 맞는 아마 그러다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아름답게 빛날 수 없을 것이다.
누군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면 그가 나에게 말걸어 올 것이다. 배롱나무에게 그랬던 것 처럼.
주의깊게 산담 주위를 둘러보면 왼켠으로 산길이 이어지고 작은 리본들이 달려있다.
이제부턴 노오란 물감은 잊고 리본들을 따라 오른다.
이 깊은 산중에 4.3이 나부낀다.
재능교육 노동조합도 나부낀다.
깃발이 깨끗한 걸 보니 다녀 간지 얼마되지 않은 모양이다.
'산행 시 리본 사진을 트읫@jeiout 홈페이지 eduwork.org자유게시판에 올려주세요' 라고 적혀 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이덕구 산전'이라 부른다.
4.3항쟁 당시 유격대사령관이었던 이덕구와 대원들이 이곳에서 생활을 했다.
기록에는 그도 이곳에서 삶을 마감한다. 1949년 6월 7일 이었다.
그 날의 일을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3>에선 이렇게 전한다.
"한라산 유격대 총사령이었던 이덕구는 1949년 6월 7일 교래리 근처 오름에서 경찰의 총에 사살되었다.
6월 8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에는 십자형 틀에 묶인 시체가 전시됐다.
때묻은 군 작업복에 고무신을 신고 웃도리 주머니에는 수저가 꽂혀 있었다.
입가에는 피를 흘리고헝클어진 머리에 둥근형의 얽은 얼굴, 형틀 옆에 내걸린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는
글이 그가 누구인지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자는 공비의 수괴 이덕구로서 대한민국 국시를 범한 반역자이다"는포고가 걸려있었다.
'제주 4.3항쟁'의 인민유격대 사령관 이덕구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의 장두가 효수돼 내걸렸던
바로 그곳에 전시됨으로써장두의 운명을 따랐다."
"이덕구는 1920년 조천읍에서 태어났다.
1943년 일본 입명관대학 경제학과 4학년 재학중 학병으로 관동군에 입대했다가
1945년 귀향하여 1946년 조천중학원 에서 역사와 지리를 가르쳤다.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 제주도대회' 시위와 관련하여 체포되었다가 풀려난 뒤
한라산으로 입산해 '4.3' 발발 직후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해 조직된 인민유격대의 '3.1지대장'을 맡았다.
48년 7-8월 사이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장이자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이
8월 21일 해주에서 열리는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을 맡기고
제주도를 빠져나감으로서 그가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경찰쪽은 "사살했다"고 밝혔으나 자살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일족도 비극적인 길을 걸어, 부인 양후상과 5살짜리 아들 진우, 2살짜리 딸도 죽었다.
주민들은 당시 진우가 울며 살려달라고 하자 경찰이 "아버지 있는 산으로 달아나라"고 해
산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뒤에서 쏘아 쓰러뜨렸다고 전하기도 한다.
큰형 호구의 부인과 아들 딸, 둘째형 좌구의 부인과 아들, 사촌동생 신구.성구 등도 경찰에 의해 죽었다.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 현대사 인물 3).
이 곳은 괴평이오름의 북쪽 등성이에 해당하며, Y자형의 '안새왓내'와 '밧새왓내'가 합수되는
위쪽의 밋밋한 분지이다. 북쪽에는 지그리오름, 남쪽에는 거문오름이 있다.
산중에 있는 넓은 분지에다 주변에 물이 좋고 뒷편에는 높은 봉우리가 있어
중산간 마을을 비롯 조천 일대의 마을을 관망할 수 있으며, 계곡은 천연적인 성 역활을 하고 있어
토벌대가 찾기도 힘들지만 찾아도 쉽게 공격할 수 없는 곳이었을 것이다.
작년에 탐미협에서 동으로 만든 밥상과 그릇과 수저를 가져다 놓았다.
얼어 죽고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임들에게 예술가들이 바치는 헌사다.
눈 아래엔 김경훈시인의 '이덕구산전'이 새겨져 있었다.
울울창창 헐벗은 숲 사이
휘돌아 감기는 바람소리 사이
까마귀 소리 사이
나무들아 돌들아 풀꽃들아
말해다오 메아리가 되어
돌틈새 나무뿌리 사이로
복수초 그 끓는 피가
눈 속을 뚫고 일어서리라
"어떵 살코, 저들지 맙서, 촘앙 살민 살아집니다."
잠시 길을 잃었다.
산짐승의 발자국을 따라 배설물을 따라 따라 걷다가 방향을 놓쳤다.
잠시 숨을 고르며 왜 어디서부터 인지 생각했다.
애초부터 길은 없었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따라 왔을 뿐이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발자국이 되면 그것이 길이었다.
발자국을 놓친 덕에 산수국을 만났다.
지리에서도 자주 만나는 산수국이지만 한라산수국은 또 다른 모습이다.
세찬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그를 비껴간다.
겨울 산에서 만나는 것들은 모두가 벗이다.
동병상련의 동지들이다.
날이 어두워 제주시 어딘가에서 소주를 마셨다.
미끄러지고 엎어져도 다시 강정으로 돌아왔다. 이미 새벽이었다.
오는 길 내내 바람과 눈이 지겹게 따라왔다.
내가 그렇게 좋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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