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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로 가는 길--울산 황룡사 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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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대학 스크랩 불교입문
황산스님 추천 1 조회 92 13.12.30 10:06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교입문

 

인사말

 

여기 불자가 되는 길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 삶의 길잡이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 이 험난한 세상을 맑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자의 지위를 떠나 무소유와 진리의 삶을 사셨습니다. 부처님의 삶과 깨달음, 그리고 그 가르침은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하여 줍니다. 우리도 부처님 같이 욕심을 버리고 가없는 믿음과 바른 공부를 통해 진리를 깨달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제시하신 깨달음의 가르침은 팔만대장경이 상징하듯이 워낙 뜻이 깊고 방대합니다. 그래서 절에 오래 다니신 분들도 막상  불교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면 자신 있게 대답하는 분이 드뭅니다. 때문에 부처님과 첫 인연을 맺는 분들이 불교가 무엇인지 알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잡한 미로라도 자상한 안내서가 있다면 길을 찾기가 한결 쉬운 법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많은 분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입문서를 만들어 보급하기를 갈망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여망에 힘입어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신도입문서인  불교입문 을 발간하게 됨을 매우 뜻 깊게 생각합니다.

 

종단에서 최초로 펴내게 된 이 불교입문서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불자가 알아야 할 기초 지식들을 간명하게 정리하였습니다.

불교의식(儀式)과 문화, 상식, 기초교리 등에 대한 설명이 번잡하지도 않고 난해하지도 않으므로 여러 사찰에서 신도교육 교재로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교학보다는 믿음과 행(行)을 강조하였습니다.

어려운 교리공부는 이후에 별도의 교리해설서에 담도록 하고 이 책에서는 부처님의 생애와 불자예절, 기도하는 법, 대인관계 등 믿음과 행으로 불교를 체득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습니다.

 

셋째, 시대적인 흐름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민족통일, 환경문제, 봉사활동, 성보(聖寶)의 이해와 보존 등은 이 시대 불자의 과제입니다. 불자라면 부처님의 사상을 통해 그 시대에 대한 여러 문제에 해답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입문서에서는 이러한 해답을 다소 부족하나마 불자 여러분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막상 이렇게 입문서를 내고 보니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권의 입문서로 모든 목마름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훌륭한 입문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여러 불자님들도 이 입문서에 대해 애정어린 격려와 질책, 충고를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

이 입문서가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삶을 살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불기 2540년8월31일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장 이 성 타

제1장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에 입문하려는 마음은 앞으로 여러분이 불교공부를 해 나가는데 매우 소중한 밑거름이다. 어려운 여건에서 불교공부를 하려는 여러분의 결단은 부처님이 될 매우 소중한 씨앗이다. 인생에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해답을 여러분의 삶에 받아들여 부처님 가르침대로 믿고 행하느냐, 아니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냥 그런 것으로 이해 하느냐는 순전히 여러분의 몫이다. 확실한 것은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2500여년간 수 많은 불자들이 이 가르침을 깨달아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 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길이 있지만, 권세와 부귀가 보장된 왕의 지위를 홀연히 떠나 영원한 진리를 깨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길은 그 무엇보다 훌륭한 길이다. 여기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자 불교에 첫 인연을 맺은 여러분에게 불교란 무엇이며, 다른 종교와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 보자.

 

종교란 무엇인가

 

오늘날 지구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민족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그 결과 민족과 문화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였다. 여기서 많은 종교를 모두 열거할 수는 없고, 종교의 일반적 정의와 불교에서 말하는 종교에 대해 알아 보자.  종교(宗敎) 란 말 그대로 최고의 가르침 즉, 궁극적인 가르침이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교주, 교리 그리고 교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라고 할 수 없다. 종교 중에서도 올바른 종교를 찾아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인간은 누구나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종교나 어떤 절대적인 힘에 의지하려 한다. 우리 주변에 잘못된 교주와 교리, 교도에 빠져 폐가망신 하는 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그것은 잘못된 종교를 믿고 따랐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어떤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여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산, 해, 달, 하늘 심지어는 태풍에도 신이 있다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인류 역사에 신이라는 개념이 생겨 났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신은 계시와 성령으로써 인류를 다스린다고 한다.

 

이처럼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가르침이 유신론(有神論)적 종교이다. 유신론적 종교에서 인간은 신의 종이기에 절대적인 복종을 통해서만 인간의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류 역사와 동시에 신을 절대적으로 믿는 종교를 부정하고  인간이 무엇이며 죽은 뒤 어디로 가는가  하는 인생과 우주의 궁극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있어 왔다. 그 결과 인류에게 크게 두 가지 흐름의 종교가 정립되었다. 하나는 신의 종교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신을 믿는 종교는 세계가 신의 창조물이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고 한다. 신의 종교는 대체로 서양의 종교관이다. 서양 종교는 절대적인 신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서양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다른 세계와 접하면서 자기 중심적인 틀에서 벗어나 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보이지 않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은 신을 통해서 만이 아니라 진리의 세계 그 자체에도 있음을 알게 되어, 생각의 편협성을 인정하고 마침내 다양한 종교를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이러한 서양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리를 믿고 행하는 종교는 인류 역사에 불교 하나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가치는 인류 역사에 더욱 빛나는 것이다. 진리를 모르고 사는 세상은 고달프지만 진리를 알고 행하는 삶은 자유롭고 편안하다. 불교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설사 어렵더라도 불교의 진리야말로 나를 바꾸고 세계를 변화 시키는 원동력임을 알고 열심히 정진해 나가면 마침내 참된 삶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진리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교주는 부처님이다.  불교 에서  불 이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 의 음사로  깨달은 사람 을 말한다. 무엇에 대한 깨달음인가? 바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가 과연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럴 경우 과연 신은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적합한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신만이 신앙의 대상이고 진리는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편협한 고집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진리를 깨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진리를 깨치면 신조차 초월할 수 있다. 절에 가면 입구에 사천왕상이 있는데 사천왕은 하늘에 산다고 한다. 이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부처님께 귀의하여 영원토록 정법을 보호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도량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의 진리는 하늘의 신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그 경지를 뛰어넘는 가장 수승한 가르침이다.

 

 

<사천왕상>

 

우리의 삶에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삶의 결과가 자뭇 다르다. 불교의 진리는 우리에게 당당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지혜를 준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완성하겠다고 하는 정신으로 굳게 결심하고 그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그 목표는 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난 안돼 하면서 소극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그만큼 멀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바른 진리를 알아야 한다. 또 그 진리를 알고 행하며 사는 것은 얼마나 자유롭고 행복한 인생이겠는가. 불교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한다.

 

모르고 사는 인생

 

우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인생을 궁금해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다 일생을 마친다. 한 평생을 살면서 목숨 걸고 그 해답을 찾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의 삶은 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일대사 인연을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말은 쉽게 할 수 있지만 태어난다는 일만 생각해도 얼마나 고생스럽고 힘든 일인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작은 상처 하나에도 사느니, 못사느니 한다. 그리고 큰 병고에 시달리든가 평생을 함께 의지하던 이의 이별과 죽음에 부딪쳤을 때 오는 고통과 마음의 아픔은 눈물로도 감당할 수 없다. 돌아보면 인생의 많은 시간은 즐거움보다 괴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나날이다. 환희의 시간은 기억에 없고 오늘도 정해진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왜 사는지, 이 길을 왜 가야하고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끝도 모를 인생을 그저 안개 낀 다리를 건너는 사람과 같이 어림 짐작으로 살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인생을 다 알고 있는 듯이 웃고 즐기며 산다. 이렇게 인생을 모르면서도 그저 살아오기만 하는 인생 역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닐 것이다. 그 누가 말했던가 인생은 모르면서 사는 것이라고. 모르고 사는 삶을 알고 살아가는 삶으로 바꾸어 주는 가르침이 바로 불교이다. 즉 죄를 지어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사람은 계속 그 행위를 한다. 하지만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고 그것이 나와 남에게 아픔을 준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해답을 주고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벌판을 걷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성난 코끼리가 달려왔다. 그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한참 달리다 보니, 몸을 피할 작은 우물이 있어 급한 나머지 그 속으로 들어갔다. 우물에는 마침 칡넝쿨이 있어 그것을 타고 밑으로 내려갔다. 한참 내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니 밑에는 다시 무서운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위를 쳐다보니 코끼리가 아직도 우물 밖에서 성난 표정으로서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칡넝쿨에만 매달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달그락 달그락 소리가 나서 주위를 살펴보니 위에서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가며 칡넝쿨을 갉아먹고있는 것이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우물중간에서는 작은 뱀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사람을 노리고 있지않은가. 온 몸에 땀이 날 정도로 두려움에 떨며 칡넝쿨을 잡고 위만 쳐다보고 있는데 마침 어디선가 벌 다섯 마리가 나타나 칡넝쿨에 집을 지었다. 그러면서 꿀을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는데 그는 꿀맛에 취해 왜 꿀을 더 많이 떨어뜨려 주지 않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자신의 위급한 상황을 잊고 말았다.

 

이 이야기에서 코끼리는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의미하고, 칡넝쿨은 생명, 검은 쥐와 흰 쥐는 밤과 낮을 의미한다. 작은 뱀들은 가끔씩 몸이 아픈 것이고, 독사는 죽음을 의미하며, 벌 다섯 마리는 인간의 오욕락(五欲樂)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에 대한욕망, 이성에 대한 애욕, 먹을 것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욕망, 편안함의 추구를 말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체 탐욕의 꿀맛에 취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인생이다. 혹자는 욕망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없지 않느냐고 할 것이다. 인생에서 욕망으로 인해 성취하는 것보다 욕망 때문에 잃은 것이 더 많다. 눈 앞의 이익에 집착하는 욕심은 지혜를 흐리게 한다. 이러한 장애를 없애고 참된 지혜를 발현토록 해야 한다.

 

자신이 변하면 세계가 변한다

 

우리는 때때로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 “왜 사람이 이렇게 많냐”고 짜증을 내는 사람을 본다. 그 사람은 자신이 그 곳에 있어 더 복잡해졌음을 간과한 것이다. 그러면 불교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옥 사람은 자신만을 위해 산다. 먹을 것이 있어도 자기만 먹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 길어 자기 것으로 제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그래서 지옥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를 원망하면서 굶주리고 산다. 눈 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말이다. 그러나 극락 사람은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먹을 때는 서로서로 옆 사람에게 먹여 주면서 산다고 한다. 이곳 사람은 지옥 사람과 다르게 서로 먹여주며 언제나 화합하고 배부르게 산다. 이것은 지옥과 천상에 대한 비유이지만 오늘날 우리 삶을 돌아볼 때 귀중한 교훈이 된다. 여기서 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가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우리가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이웃과 함께 하는 삶으로 전환할 때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뀌게 될 것이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이다. 즉 신이라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세계의 구성원인 인간 자신의 지혜와 힘으로 세계의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

 

불교 -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

 

불교가 어떤 종교인지 단적으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크게 믿음과 수행을 겸비한 종교라 말할 수 있다. 수행과 믿음을 겸비한 종교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수행체계를 통해 인간의 정신과 삶을 획기적으로 전환시키는 가르침이다. 우리가 살면서 잘못된 행동을 스스로 깨닫고 바꾸게 하는 종교이다.

 

어린시절 사소한 물건에 집착하여 그것만이 최고라 고집하던 것이 어른이 되어 그때를 회고하면 참으로 부끄럽고 부질 없는 짓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도 그 시절처럼  왜 그랬는지 에 대해 조금도 생각하지 않으며 또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집착하면서 살아간다. 이는 바로 우리의 탐욕과 어리석음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나쁜 습성을 고쳐나가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이란 혹독한 시련을 통해 자신을 단련하는 고행과는 다른 것이다. 수행은 진리를 깨치기 위해 탐욕에 찌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좋은 습성으로 바꾸어 마침내 깨닫는 과정이다. 즉 인도에서는 소승 대승, 중국에서는 다양한 종파와 선사상 등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 과정에서 사람의 근기에 따라 다양한 수행체계를 형성하면서 수많은 민간 신앙을 불교의 세계로 받아 들였다. 이는 불교가 그만큼 다양한 사상과 사람을 섭수하는 큰 사상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지혜의 길

 

바른 생각에서 지혜가 나온다. 즉 자기 중심의 생각에서 자신과 전체를 통찰할 때 지혜가 나온다. 자기중심의 생각에서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생각을 넓힐 때 지혜가 나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흔히 지혜의 종교라고도 하는데, 첫째, 무명(無明)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을 버려라는 말과 같다. 비록 원수사이라도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거나 욕심을 버리면 원수와 함께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다. 대립과 갈등의 원인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다. 화가 났을 때, 자기마음을 잘 관찰해 보면 온갖 다툼과 화의 원인이 다른 사람에게도 있지만,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게 된다. 즉 상대가 자신이 바라는 것만큼 해주질 않았거나 자기에게 불이익을 주었을 때 화가 나는데 그것 또한 자기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시간이 흘러 그것이 다 부질없는 것이 되었을 때 돌아보면 당시의 화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런 것이 욕심에 집착하여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막는 무명이다. 이 무명에서 벗어나 밝은 지혜를 구해야 한다. 둘째, 자신의 무지가 모든 불행과 비극의 시초임을 알았으면 남을 나처럼만 생각해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라면 뒤에 어떤 결과가 올지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행동하는 것을 자주 본다. 지혜로운 사람은 행동에 앞서 그 결과를 생각하고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에 앞서서 행동부터 한다. 그 잘못된 행동에서 고통과 아픔이 생긴다. 따라서 눈 앞의 이익에 급급한 행동과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면 지금까지 보지 못하였던 세계가 열린다. 불교는 바로 이러한 세계를 열어 보여주며 그 길을 함께 가는 가르침이다.

 

 

<금동미륵반가사유상>

 

참 나를 찾아서

 

어려운 처지에 처해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 그것을 구해 줄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기쁜가? 어두운 밤에 피곤한 몸으로 힘든 길을 갈 때 함께 갈 길동무를 만나면 얼마나 고마운가?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힘든 이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면서 진리를 가르쳐 주어 자유롭고 편안한 인생이 되게 이끌어 주신다. 인생의 새로운 가치에 눈뜰 때 삶이 변한다. 따라서 인생관과 가치관이 정립되었을 때 인생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잠 못 드는 사람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

길이 멀듯이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에겐

생사의 밤길은 길고도

멀어라.

<<법구경>>

 

사람이 전생의 업을

다하고

악도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려우며,

사람으로 태어나더라도

부처님 법을 만나기가 어려우며

부처님 법을 만났을지라도

수행자를 만나기 어렵고,

수행자를 만났다 하더라도

신심을 내기 어렵다.

<<사십이장경>>

 

우리의 삶은 올바른 진리의 길에 들어설 줄 모르고 감정과 욕망에 이끌려 마치 뱀의 꼬리가 앞장을 서서 길을 가려는 것과 같이 가시덩굴에 들어가고 불 속에도 들어가고 결국에는 낭떠러지에 떨어지게 되는 격이다. 즉, 우리들이 불타는 집에 윤회하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 탐욕을 버리지 못한 탓이다.

 

부처님께서 어느날 숲 속에 있는 한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하고 계셨다. 이때 젊은이들이 숲 속에서 여기저기 무엇인가를 찾아 다니고 있었다. 나무아래 조용히 앉아있는 부처님을 보고 그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한 여자가 도망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까?”

사연인즉, 그들은 이 근처에 사는 지체 있는 집안의 자제들인데, 오십 명이 저마다 자기 아내를 데리고 숲에 놀이를 왔었다. 그 가운데한 사람의 미혼자만은 기생을 데리고 왔었는데, 모두 노는데 만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기생은 여러 사람의 옷과 값진 물건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다. 그래서 그 여인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정을 듣고 부처님은 그들에게 물으셨다.

“젊은이들이여, 달아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놀이에만 팔려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고 여인을 찾아 헤매던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자기 자신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그럼, 다들 거기 앉아라. 내가 이제

그대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

이리하여 그 젊은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모두 부처님 제자가 되었다.

<<사분율 제32권>>

 

젊은이들은 자신이 더 중요함을 곧 깨달아 출가했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탐욕의 세계로 달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항상 탐욕을 버리라고 설하시며, 부처님께서도  왕자의 지위를 문틈에 비치는 먼지처럼 보고, 금이나 옥 따위의 보배를 깨어진 기왓장처럼 보며, 비단옷을 헌 누더기 같이 보고, 삼천대천세계를 한 알의 겨자씨 같이 보아 <<사십이장경>> 궁궐을 버리고 출가하여 위대한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세속의 탐욕을 벗어났음 몸소 보여주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늘 당신은  길을 가리키는 사람 이라 말씀하셨다. 부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 지혜와 평화의 길을 가르쳐 주셨다. 즉,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깨달음과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몸소 가시며 가르침을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고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고려시대 어느 스님은 당신의 수행을 살피는 글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많은 사람이 부처님

법 안에서 도를 이루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해에서 헤매고 있는가.

그대는 시작 없는

옛적부터 이 생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등지고 속진에

묻혀 어리석은 생각에 빠져있구나.

항상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고 착한 일을 하지 않으니

생사의 바다에

빠진 것이 아닌가.

<<자경문>>

 

진리를 향해 정진하는 삶

 

1 바른 믿음으로

 

일상적인 삶을 살다 불교에 입문하려고 첫 마음을 냈다면, 그 순간부터 바른 믿음을 가지고 사는 참다운 불자가 되어야 한다. 게으름이란 모든 허물의 바탕이다. 집에 있는 이가 게으르면 의식이 부족하고, 사업이 쇠퇴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게으르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좋은 일은 정진에 의하여 일어나나니, 집에 있는 이가 정진하면 의식이 풍족해지고 사업이 번창할 것이요, 출가한 이가 정진하면, 법을 모두 성취하여 마침내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나니, 모두가 정진에 의해 이루어지느니라. <<보살본행경>>

 

불교를 믿는 첫 결심을 한 것도 대단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처음에 발심한 그 마음을 가지고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가는 일이다. 어떤 믿음을 가지고 정진해야 하는가? <<대승기신론>>에는 믿음을 네 종류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는 근본을 믿음이니, 진여의 법을 즐기어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께 한량 없는 공덕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가까이 모시고 섬기기를 생각하는 것이다.

 

셋째는 부처님의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음이니, 항상 모든 바라밀을 닦으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넷째는 스님들은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을 바르게 닦는다는 것을 믿음이니, 모든 수행자들을 가까이 섬기면서 올바른 행을 배울 것을 항상 생각함이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부처님(佛)과 부처님의 가르침(法)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僧)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삼보(三寶)라 한다. 삼보는 불교의 같은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을 삼귀의(三歸依)라 하는데 모든 불교 행사를 거행할 때마다 항상 예를 올린다. 부처님께 귀의한다 함은 법신(法身)에 귀의함이니, 온갖 지혜를 갖추고 더 배울 것이 없으며 여러 공덕으로 이루어진 몸을 뜻한다. 법에 귀의한다고 함은 나와 남이 다한 곳에 귀의함이니, 즉 애욕을 끊고 애욕이 없어져서 적멸인 열반에 이르는 진리에 귀의함을 뜻한다. 스님들께 귀의한다는 함은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하고 가르치는 스님에게 귀의함이니, 즉 좋은 벗과 복 밭인 거룩한 스승에게 귀의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우리는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하루하루 나태하지 말고 불교인으로 바른 신행을 해야 한다. 원효스님은 첫 마음을 내어 부처님께 귀의한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신다.

 

오늘이라 할 때 벌써 늦은

 

것이니 아침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가 어느새

하루가 흐르고 한 달이 되며,

한 달 두 달이

문득 한 해가 되고,

한 해 두 해가 바뀌어

어느덧 죽음에 이르게 된다.

부서진 수레는 구르지

못하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누워서는 게으름만

피우고 앉으면 생각만 어지러워진다.

몇 생을 닦지

않고 세월만 보냈으며,

그 수많은 생을 헛되이

살았으면서도 한 평생을 닦지 않는가.

이 몸은 끝내 죽고야 말

것인데 다음 생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어찌 급하고 급하지

않는가.

<<발심수행장>>

 

2 자신을 낮추고

 

불교의 수행은 자신을 낮추는 공부이다. 사람은 언제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일 줄 알아야 한다. 수행하는 사람은 더더욱 그렇다. 이것을 하심(下心)이라 한다. 그 어느 누가 나를 보고 멸시하더라도 털끝만큼도 자신을 내세우지 말고 하심 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 속에 찌들어 있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업, 더러운 때를 닦아내고 맑은 성품을 발견하여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첫째도 둘째도 나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는 마음공부가 제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절에 다니는 횟수가 깊어질수록 나는 무엇을 했네, 나는 무엇을 보았네 하며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겸손한 마음을 잃고 스스로 아상(我相)만 높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최고라 우쭐대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며, 특히 불자에게 이런 태도는 수행에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점점 부처님의 법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불자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검소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세상의 모든 일에 있어서 교만심을 버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스님들이 탁발하여 생활을 하는 것도 다른 이로 하여금 복을 짓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낮추어 해탈을 위해 정진하고자 함이었다. 진정 자신을 낮출 때만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부처님의 법으로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이다.

 

3 생활을 반성하며

 

우리가 불교를 믿고 행하면서 잘못이 없을 수 없다. 매 순간 욕망이 싹트고 주위 사람에게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순간적으로 판단을 그르쳐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불자임을 명심하고 하루하루의 삶을 돌이켜 보고 반성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처음 공부하는

보살이 비록 신심이 두터우나

전생부터의 무거운

죄와 나쁜 업장이 많으므로

때로 삿된 마왕에게

홀리기도 하고, 세상 일에 끄달리기도 하고,

가지가지 병고에 시달리기도 하여

재난이 한 두 가지가

아니어서 불자들이 자칫 착한 법을

닦는 일을 멈추게 되나니,

반드시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하여

성심으로 참회하며

권청하고 수희(隨喜)하며

보리에 회향하기를 늘 쉬지 아니하면,

나쁜 업장이 차츰

소멸하고 선근이 늘어나리라.

<<대승기신론>>

 

참회(懺悔)는 수행의 길에 중요한 것이다.  참(懺) 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다. 전에 지은 악업인 어리석고 교만하고 허황하고 시기, 질투하는 죄를 다 뉘우쳐 다시 일어나지 않게 것이요.  회(悔) 란 다음에 지을 죄를 미리 깨닫고 아주 끊어 다시는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우리는 흔히 지나간 허물을 뉘우친다 하더라도 앞으로의 허물에 대해 살필 줄 모른다. 그래서 결국 지나간 죄도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허물이 잇따라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허물이 없겠는가? 중요한 것은 허물이 있다면 곧 뉘우쳐야 하는 것이다. 즉, 허물이 있거든 곧 참회하고 나쁜 짓 했거든 곧 부끄러워 하여,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면 그 죄업은 날로 없어지고 그리하여 마침내 반드시 도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그 자리에 아니룻다도 있었는데 그는 법회 중에 꾸벅꾸벅 졸았다. 부처님께서 설법회가 끝난 뒤 아니룻다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아니룻다야, 너는 어째서 집을 나와 도를 배우느냐?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의 괴로움이 싫어 그것을 버리려고 집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너는 설법을 하고 있는 자리에서 졸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아니룻다는 큰 허물을 뉘우치고 끓어 앉아 부처님께 대답하였다.

 이제부터는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부처님께서 설법 하실 때 졸지 않겠습니다. 

이때부터 아니룻다는 밤에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계속 정진하다가 마침내 눈병이 나고 말았다. 부처님은 아니룻다에게 타이르셨다.

 아니룻다야, 너무 애쓰면 조바심과 어울리고 너무 게으르면 번뇌와 어울리게 된다. 너는 그 중간을 취하도록 하여라. 

그러나 아니룻다는 전에 부처님 앞에서 다시는 졸지 않겠다고 맹세한 일을 상기하면서 부처님의 타이름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룻다의 눈병은 날로 심각해져 마침내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애써 정진한 끝에 마음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증일아함경 역품(力品)>>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정진해 나감에 있어 가져야 할 삶의 바른 자세 중 하나가 바로 자기 반성이다. 우리는 끊임없는 반성 속에 삶을 돌이켜 보고, 올바르게 부처님 곁에 가고 있는지 또는 처음 부처님께 귀의하였을 때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만약 스스로의 허물을 부처님 앞에 그 잘못을 말하고 가볍고 무거운 정도에 따라 3배, 108배, 1080배, 3000배를 하여 참회하는 것이 좋다.

 

지붕을 성글게 이어놓으면

비가 내릴 때 빗물이 새듯이

마음을 조심해 간직하지 않으면

탐욕은 곧 이것을 뚫고 만다.

<<법구경>>

 

4 끊임없이 정진하라

 

불교를 믿고자 하는 첫 마음을 간직하고 변함없이 정진해 가는 길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 처음 결심이 이런저런 이유로 인하여 변하기 쉽다.  차라리 다른 길이 낫지 않을까? ,  깨닫지도 못할 것, 차라리 다른 일이 낫지 않을까? 하는 성급한 마음에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적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더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더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 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게 하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여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되었다. <<잡아함경>>

 

소오나 비구의 생각처럼 우리들도 종종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속에서 정진해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쉼 없이 정진 해나가야 한다. 비록 힘들고 어렵지만 이것만 굳게 행하면 우리의 발원이 꼭 이루어 진다는 믿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가야 한다. 한편 비록 처음 발심 했을 때의 결심이 작은 것일지라도 하찮게 보지 말고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정진해 나갈 때, 낙숫물이 떨어져 돌을 뚫는 것과 같이 작고 작은 선업이 쌓여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

하여라. 방일하지 말라.

나는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정각(正覺)을 이루었다.

한량없는 온갖 착함도 또한 방일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장아함경 유행경>>

 

불교적인 삶

 

불교는 자기 완성만이 아니라 나와 남이 함께 깨달아 이 세상을 불국정토로 만드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이는 바른 믿음과 생활 속의 바른 행을 중시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로서 지켜야 할 실천덕목으로 오계(五戒)를 말씀하셨다.

 

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不殺生).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不偸盜).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不邪游).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不妄語).

다섯째, 음주를 하지 말라(不飮酒).

 

오계는 모든 악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지 말라 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이 전제되어 있다. 이를테면  산 목숨을 죽이지 마시오 의 경우, 모든 생명은 불성을 가진 고귀한 존재이니 본래 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의 뜻이다. 옛날 자비심이 지극한 왕이 매에게 쫓겨 피해온 비둘기 대신 자신의 살점을 뜯어 주었다는 자비심이야 말로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의 사회 생활을 하는 우리들이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를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삶의 터전을 이룩하려는 것이 이 오계의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도 계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가장 안온한 공덕이 계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청정한 계를 가지면 괴로움을 없애는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오계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에 실현하도록 해야 한다. 즉, 일상적인 삶 하나하나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여 다른 사람과 더불어 이 세상을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반가운 이, 그리운 이를 만나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禮)로써 그 뜻을 표시한다. 불교에서는 스님 또는 신도님을 서로 만나게 되면 합장으로 예를 표한다. 열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하고 양 손바닥을 맞대어 흩어진 생각과 마음을 집중한다. 이렇게 다소곳이 고개 숙여 합장하는 마음이 바로 믿음의 출발이다. 큰 절이 아니더라도 합장은 나의 마음을 뜻하며, 더 나아가 나와 너의 마음이 하나의 진리 위에 서로 만났음을 뜻하는 동시에 존경과 진실과 자비의 마음을 뜻한다. 그리고 절을 하고 합장을 하는 의식 속에는 자신을 낮추고 덕 높은 스님, 부처님께 귀의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다. 또한 수행의 방편으로 매일 백팔배를 하면, 항상 교만심을 버리고 하심(下心)을 하여 남에게 성내지 않고 좋은 태도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공양 전후에 언제나 합장하며  이 음식에 깃들인 모든 이의 공덕을 생각하며 감사히 먹겠습니다 라고 읊조릴 때 자신을 있게 해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어찌 감히 다른 이에게 해로운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불공을 할 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불공을 올림은 일체 중생을 고통으로부터 구제하시고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며 열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의 표시이다. 또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뜻도 담겨 있기에 모든 중생의 은혜를 갚는 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씨를 베품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기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림과 다름이 없으며 이 세상을 더욱 맑고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부처님 앞에 발원할 때도 자신의 욕망과 이익을 성취하기 위한 것 보다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하여야 한다. 아울러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하루 빨리 부처님 법을 익혀 깨닫도록 발원함이 참다운 불자의 발원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고통과 괴로움에 빠진 중생이 나를 부를 때는 반드시 그곳에 가서 구해내리라 는 관세음 보살님의 발원과  지옥에 있는 중생을 모두 구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 는 지장 보살님의 발원이야말로 참다운 발원인 것이다. 즉, 현실에서 중생의 아픔을 함께 하며, 고통을 덜어주고자 커다란 원을 세우고 자신을 아끼지 않고 실행해 가는 것이 참다운 불자의 모습이다.

 

이처럼 불자의 수행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만나는 이에게 머리를 숙이고 합장하는 자세, 공양을 하면서 이웃을 생각하는 자세, 불공이나 발원을 하면서도 자신보다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생각하는 자세, 주위 사람을 부처님이나 스님들을 공경하듯이 받드는 자세, 이러한 자세가 몸에 배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나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더불어 이런 자세를 간직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화합의 정신이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자세로 가족끼리 사랑하고 화목을 이루며 넓게는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며 살아갈 때, 마른 풀이 수미산 같이 쌓여 있더라도 겨자씨 만한 불똥 하나로 다 태울 수 있듯이 우리들의 조그마한 신행의 불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을 태우고 불국정토세계를 이 땅에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은

아무리 많이 외워도

실행하지 못하는 게으른

사람은

남의 소를

세는 목동과 같아

사문의 보람을 얻기 어렵네.

<<법구경>>

 

 

제2장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

 

1 부처님의 생애

 

불교는 말 그대로  부처님(佛)의 가르침(敎) 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누구나 깨달음을 통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이란 곧 불타(佛陀, Buddha) 즉, 깨달은 사람(覺者)을 말한다. 우리는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는 소질과 성품이 있는데, 이를 불성(佛性)이라 한다.

 

저마다 불성을 간직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 첫째, 부처님의 생애를 알고 그 삶대로 사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생애는 한 인간이 진리를 깨쳐 부처님이 되는 길을 보여준다. 우리가 불자로서 본받아야 할 삶의 모범은 바로 부처님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생애를 배우는 것은 불교에 입문하고 나서 그 교조의 삶을 알아야 한다는 당위가 아니라, 부처님이 된 삶을 따르기 위한 것이다.

 

중생이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부터 우리도 부처님 같이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될 것이다. 불교를 믿고 행한다는 것은 결국  부처님을 닮아 가는 것 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 같이 살고 싶은 이에게 부처님의 생애는 다시 없는 인생의 귀중한 나침판이다.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약2, 600여년 전, 인도의 북부지역에 위치한 카필라(Kapila)국 사캬(Sakya, 釋迦)족의 정반왕과 왕비 마야부인 사이에 태어났다. 성은 고타마(Gotama, 최상의 소라는 뜻)였고, 출가하기 전 이름은 싯달타(Siddh rtha)였다. 고타마 싯달타가 출가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자 사람들은 그를 석가모니(Sakyamuni) 즉,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고 불렀다.

 

발심과 서원 - 깨달음의 씨앗을 뿌리다

 

지금으로부터 한량없는 오랜 세월 전에 수메다(善慧)라는 한 수행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 양친을 잃고 7대조부터 내려오는 막대한 재산을 사람들에게 남김없이 보시한 후 출가하여 히말라야에 들어가 수행자가 되었다.

 

그때 연등(燃燈)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셨다. 수도인 디파바티(Dipavati)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연등부처님을 공양하고자 온갖 향과 꽃, 훌륭한 음식을 준비하고 연등부처님을 기다렸다. 마침 공양물을 구하기 위해 그곳에 들른 수행자 수메다는 연등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는 말을 듣자 기쁜 마음이 치솟았다.

 

 나는 여기에 깨달음의 씨앗을 뿌려야겠다.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이렇게 생각한 수메다는 부처님께 공양을 준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도시에는 왕의 지시로 모든 공양물이 부처님께 바쳐져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수메다는 아름다운 꽃 일곱 송이를 들고 가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에게 가서 그 꽃을 팔 것을 간청했다. 그녀는 팔지않을 마음으로 이 꽃 한 송이는 은1백냥이며, 또한 나와 결혼을 약속한다면 이 꽃을 팔겠다고 했다. 수메다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그 꽃을 부처님께 바칠 숭고한 마음으로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수행자의 진지한 마음에 감탄하여 나머지 두 송이 꽃마저 부처님께 공양하라고 주었다. 수메다는 그 꽃을 연등부처님께 바쳤다. 연등부처님께서는 뭇 중생을 가르치고, 젊은 구도자 수메다에게 기쁨을 주기위해 대중이 바친 꽃을 허공에 떠있게 하는 기적을 보이셨다. 마침 연등부처님과 제자들이 지나는 길에 진흙웅덩이가 있었다. 수메다는 부처님께서 발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기위해 진흙 위에 머리를 풀고 엎드렸다. 진흙 바닥에 엎드린 채 그는 다짐했다.

 

“아 ! 나도 언젠가는 지금의 세존(世尊)이신 연등부처님 같이 완전한 인격자가 되어 지기를 세존이신 연등부처님께서 지금 하셨듯이, 나도 이 최고 법의 수레(法輪)를 돌릴 수 있게 하여 주소서 ! 오직 세상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할 수 있고 또한 무수한 생명들의 이익과 행복이 될 수 있는 연등부처님과 같은 생명이 되게 하소서.”

 

이 광경을 본 연등부처님은 제자와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견디기 힘든 고행을 하고 있는 이 수행자를 보라. 그는 지금으로부터 무량한 겁이 지난 후 세상에 출현하여 부처님이 될 것이니라. 

 

견줄 사람 없는 대성인의 말씀을 듣고 천인과 인간들은 크게 기뻐하며 외쳤다.

 

 수행자 수메다는 분명 부처님이 될 씨앗이요, 부처님이 될 싹이로다. 

 

모든 이가 지나간 뒤 엎드려 있던 수메다는 몸을 일으켜 앉아 스스로 생각했다.

 

 내가 지금껏 쌓아온 수행을 생각해 보자. 

 

그때1만 큰 세계가 크게 진동하였고 그 진동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연등부처님은 현자 수메다가 부처님이 되기 위한 근본적인 덕목을 모두 깊이 사유하고 있는 까닭에 이 대지와1만 큰 세계가 진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연유를 말씀해 주셨다. 이때1만 큰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기필코 부처님이 되실 것이옵니다. 흔들림 없이 정진하여 주소서. 멈추시거나 물러 나서는 안되나이다. 저희들도 또한 당신이 기필코 깨닫게 될 것임을 잘 알고있나이다.”

 

수메다는 모든 부처님이 이루신 깨달음의 근본적인 덕목인 10바라밀의 수행을 남김없이 생각해 낸 후10만 아승지겁을 지내면서 10바라밀의 수행을 닦아 스물 네 분의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뒤 도솔천에 머물게 되었다. 그때 이름은 호명 보살이었다.

 

제1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도솔천에 계시다.

 

호명보살이 10바라밀 수행을 닦고 도솔천에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모든 하늘 세계의 천인들이 보살의 처소에 모여 들었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당신이 10바라밀을 행 하심은 제석천이나 마왕, 범천, 전륜왕의 영광을 위해 이룬 것이 아니옵고, 오직 세상의 중생을 제도하고자 일체자를 추구함으로써 이루신 것이나이다. 스승이시여, 바야흐로 부처님이 되기 위한 때가 왔나이다. 존귀하신 스승이시여, 부처님이 될 때이나이다.”

 

호명보살은 천인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때와 지방, 가계와 생모에 대해 살핀 뒤 석가족의 마을에 있는 마야부인의 태중에 드시리라 결정하셨다.

 

그리고 나서 호명보살은 바로 깊은 선정 속에서 마야부인의 태에 들었다. 정반왕과 결혼한지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던 마야부인은 그 때 흰 코끼리가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자를 잉태하였다.

 

제2비람강생상( 藍降生相) - 세상에 태어나시다

 

모든 백성의 기대 속에 따스한 봄이 되고 왕비의 산달이 다가왔다. 마야부인은 해산일이 다가오자 인도의 관습에 따라 친정인 데바다하로 향하였다. 친정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렀다. 동산에는 아름다운 사라나무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왕비는 상서로운 사라나무 숲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들어 꽃으로 가득한 숲길을 거닐었다. 왕비가 아름다운 사라나무 가지를 잡으려고 손을 뻗는 순간 갑자기 산기를 느꼈다. 일행은 급히 처소를 마련하였으나 그녀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선 채로 아무런 고통 없이 아들을 낳았다.

 

부처님은 태어나자 마자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 손으로 하늘을,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토했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다 고통 속에 잠겨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태자의 발자국마다 연꽃이 피어나고 아홉 마리 용이 나타나 오색의 감로수로 태자의 몸을 씻어 주었다. 땅이 은은히 진동하는 가운데 하늘에서는 꽃 비가 내리고 천신들이 내려와 차례로 예배 드리며 이 세상 가장 존귀한 분의 탄생을 축복하였다.

 

태자가 태어난 지 닷새가 되자 히말라야로부터 아시타 선인이 내려와 태자를 뵙고자 했다. 태자의 얼굴을 본 아시타는 슬피 우는 것이었다. 불길하게 생각한 정반왕이 연유를 묻자 아시타 선인은 대답하길  왕자는 출가하면 부처님이 될 것이오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될 것인데, 자신이 늙어 부처님의 출현을 뵐 수 없는 것이 한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것 이라 했다. 한편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싯달타가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나니 태자는 이모를 새어머니로 하여 자라게 되었다. 그리고 아시타 선인의 예언에 따라 아들이 출가할 지 모른다는 생각에 정반왕은 태자가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호화스러운 궁전을 지어 향락 속에 자라게 하였다.

 

제3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세상을 두루 살피다

 

싯달타 태자는 왕궁의 풍요 속에서 성장한다. 7세가 되자 태자는 학문과 무예를 익히기 시작하여 곧 모든 학문과 무예에 통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만한 스승이 없게 되었다. 아버지 정반왕은 그를 극진히 생각하여, 계절에 따라 생활하도록 궁전(三時殿)을 세 곳이나 지어주는 등 온갖 호사 속에 성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도성 밖 출입만은 언제나 금지시켰다. 태자가 현실세계의 고통을 모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12세 되던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과 함께 농경제의 파종식에 참가하였다. 그 때 태자는 들에서 농경제에 참가한 농부들의 마르고 고단한 모습과 쟁기를 끄는 소들이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는 것을 보았다. 또한 쟁기가 지나간 뒤 뒤집혀진 흙 사이로 나온 벌레들을 잡아먹기 위해 날아든 새들을 보며 큰 충격을 받는다.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세상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이에 싯달타는 염부나무 밑에서 그 고통의 해결을 찾기 위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이때 태자는 초선(初禪)의 경지에 들었다고 한다. 태자가 자비심으로 세상을 고통 속에서 구원할 길을 찾아 선정에 들어 있을 때, 이를 지켜 본 정반왕은 오히려 태자를 세상과 더욱 멀어지게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태자의 세상에 대한 고뇌는 더욱 깊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태자는 삶의 생생한 실상과 마주친다. 성년이 된 어느 봄날 태자는 부왕 몰래 성문 밖을 나선다. 그리고 동문, 남문, 서문에서 각각 늙고, 병들고, 죽은 사람을 보게 된다. 생명을 가진 어떤 것도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번민하던 싯달타가 북문에서 만난 사람은 바로 출가수행자 였다. 그리고 싯달타는 출가수행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것을 사문유관이라고 한다. 태자가 네 곳의 성문에 나가 세상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왕궁의 영화와 권세, 향락과 사치 그리고 어떤 학문과 종교에서도 생로병사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했던 태자는 출가수행자에게 그 길을 찾았던 것이다.

 

제4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출가하시다.

 

나는 하늘에 태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많은 중생이 삶과 죽음의 고통 속에

있지 아니한가.

나는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집을

나가는 것이니

위 없는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라.

<<오분율>>

 

수행자를 만난 후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로 결심한 싯달타 태자는 모든 사람이 잠든 밤에 백마를 타고 왕궁을 떠난다. 왕위의 자리도 버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라훌라 마저 뒤로 한 채 깨달음의 길로 나아간 이날이 태자의 나이 29세 되던 해 음력2월8일이었다.

 

애마 칸타카를 타고 마부 챤나를 따라 성을 나온 싯달타는 보검을 빼 들고 스스로 머리와 수염을 깎은 뒤, 과거의 모든 부처님 앞에 일체의 번뇌를 끊고 진리를 깨닫겠다고 굳게 서원한다. 그리고 자신의 비단옷을 거지의 누더기와 바꿔 입었다.

 

이렇게 하여 출가수행자가 된 싯달타는 남쪽의 신흥 국가인 마가다국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훌륭한 종교가들이 운집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높은 명성을 얻고 있던 알라라 칼라마의 문하에서 그가 가르치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라는 수행을 배웠는데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해 버렸다. 다시 그는 다른 스승인 웃다카 라마풋타에게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선정을 배웠다. 하지만 그 경지 역시 곧 도달해 버렸다. 싯달타는 스승에게 배운 선정을 통해서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 곁을 떠나 독자적인 수행을 시작하였다.

 

제5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시다.

 

여러 스승에게서 배웠으나, 곧 스승의 경지에 도달하여 더 이상 그를 가르칠 이가 없었을 때, 싯달타는 당시 다른 수행자들이 그러했듯이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싯달타의 고행은 실로 다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치열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일생을 찬탄한 <<불소행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실로 고행자 중에 최상의

고행자였다.

남들이 바치는 음식도 받지 않았으며

풀과 떨어진 과일만 주워 먹었다.

나는 무덤 사이에서

시체와 해골과 함께 지냈다.

그때 목동들은 내게 와서

침을 뱉고 오줌을 누기도 했으며

귀에 나무 꼬챙이를 쑤셔 넣기도 했다.

내 목에는 여러 해 동안

때가 끼어 저절로 살 가죽을 이루었으며

머리는 길어 새들이 찾아 들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더한 고독한

고행자였다.

나는 숲에서 숲으로, 밀림에서

밀림으로, 낮은 땅에서 낮은 땅으로,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홀로 지냈다.

그러면서도 나는 모든

생명을 가엾이 여기는 고행자였다.

나아가거나 물러 서거나 조심하여

한 방울의 물에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그 가운데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들 일지라도

죽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를 대추 한 알로도 보냈으며

멥쌀 한 알을 먹고도 지냈으며 하루에 한끼, 사흘에

한끼, 이윽고 이레에 한끼를 먹고 보름에 한끼를 먹었다.

그래서 내 몸은 무척

수척해졌다.

내 볼기는 마치 낙타의

발 같았고 내 갈비뼈는 마치

오래 묵은 집의 무너진 서까래 같았다.

내 뱃가죽은 등뼈에

들러붙었기 때문에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처박고 넘어졌다.

살갗은 오이가 말라

비틀어진 것 같고,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이 뽑혀 나갔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말했다.

 아 싯달타 태자는 이미 목숨을

마쳤구나, 이제 곧 목숨을 다할 것이다 라고.

 

이와 같이 부처님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고행을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과거의 어떤 수행자도, 미래의 어떤 수행자도 자신과 같은 고행을 할 수 없을 것이라 하실만큼 고행에 몰입하였다.

당시 인도 사람들은 고행을 함으로써 욕망을 억제하고 정신생활의 향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고행을 한 사람은 모종의 신비하고도 초인간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은6년에 걸친 극심한 고행을 통해서도 깨달을 수 없었고, 육체를 학대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고행을 포기하기도 하였다. 이때 싯달타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세상에서 수행자가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하나는 관능이 이끄는 대로 애욕에 탐닉하여 욕망과 쾌락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범부들이 찬탄하는 것이며,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에 무익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육체를 스스로 괴롭히는 것에 열중하여 고행에 빠지는 것이다. 이는 목적과 수단이 전도된 것으로 수행자의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는 무모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스스로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의 길을 찾았다.

 

중도는 곧 양 극단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결코 양 극단을 적당히 절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중이란 곧 바름이다(中者正也) 라고 하였듯이 중도란 곧 정도(正道)의 다른 말이다. 쾌락과 고행의 가운데가 아니라 진실로 바른 길을 뜻한다.

 

따라서 고행의 포기는 출가 수행자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나 관습까지도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수행자들로부터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부처님과 함께 수행하던 다섯 사람은 부처님을 타락하였다고 비난하며 떠났다. 그러나 부처님은 주저 없이 고행을 포기했다. 이것은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매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생애에는 위대한 포기가 몇 번이나 있다. 부귀와 영화가 보장된 왕위를 포기했고, 행복과 안락이 보장된 가정을 떠났으며, 모두가 믿는 당시 최고의 사상을 포기했다. 최고의 고행자라는 명예도 포기했다. 이것은 세상 전부가 자신을 외면할 지라도 참된 것이라면 주저 없이 결 단정을 내리는 참된 수행자의 길을 보여준 것이다.

 

제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마왕을 항복 시키시다.

 

수행자 싯달타는 고행을 포기한 뒤 수자타가 올리는 우유 죽 공양을 받아 기운을 회복하고 목동 스바스티카(吉祥)가 바친 부드럽고 향기로운 풀을 보리수 아래에 깔고 그 위에 앉아서 굳은 다짐을 하였다고 한다.

 

내 여기서 위 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이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침내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수행본기경>>

 

금강석보다 굳센 의지 때문인지 부처님은 그 자리에서 깨달으셨고, 깨달으신 그 자리는 훗날 금강보좌(金剛寶座)라 부른다.

 

바야흐로 싯달타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가장 다급해진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중생을 욕망에 사로잡히게 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마왕 파순이었다. 마왕 파순은, “사문 고타마가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려 한다. 그가 깨달음을 성취하면 일체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 그 깨달음의 경지는 나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그가 깨닫는 것을 막아야 한다.” 라 생각하여 먼저 자신의 세 딸을 보내 고타마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마왕의 세 딸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고타마는 수미산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너희들의 몸은 비록 아름 답지만 모든 악이

가득해 견고하지 않고 부정이 흘러 생로병사가 항상 따른다.

손에는 팔찌, 귀에는 귀고리를 흔들면서 교태 섞인 웃음으로

탐욕의 화살을 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그대들의 욕망을 독약으로 안다.

칼날에 발린 꿀은 혀를 상하게 하고 사악한 욕정은

독사의 머리와 같으니 내 이미 모든 유혹을 뛰어 넘었다.

너희들은 모두 본래 모습을 들어내고 물러가거라.

 

이렇게 말하자 마왕의 세 딸들은 모두 추한 노파로 변해 탄식하며 물러갔다. 그러자 마왕은 화가 나서 수행자 고타마를 향해 태풍, 폭우를 보내고 창칼, 불화살, 돌을 던지며 악귀를 동원하여 수행을 방해했다.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그것은 모두 꽃으로 변하여 흩날릴 뿐이었다. 유혹과 폭력으로도 수행을 막지 못한 마왕은 직접 싯달타 앞에 나타나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석가족의 아들 고타마여!

그대는 속히 일어나 이곳을 떠나라.

그대에게는 전륜성왕의 지위가

보장되어 있지 않는가?

이제 곧 가서 세간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되어 그들을

지배하고 오감의 쾌락이 주는 미묘한 맛을 마음껏 즐기라.

석가족의 아들이여! 그대가

추구하는 도는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피로만 더할

뿐임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그렇게 회유하자 수행자 고타마는 마왕을 향해 다음과 같은 준엄한 사자후를 한다.

 

게으른 자의 무리여, 사악한 자여,

그대가 여기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그대가 말하는 그 좋은 공덕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더 이상 쓸모가 없다.

그런 것은 그 것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해 주어라.

나는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묵묵히 감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은 어떤 욕망에도 끌려가지 않는다.

보라, 내 존재의 이 순수를. 그대의 제1군대는 욕망이며

제2군대는 혐오이며 제3군대는 기갈이며 제4군대는 집착이다.

그리고 그대의 제5군대는 피로와 수면이며 제6군대는

공포심이요 제7군대는 의혹이며 제8군대는 위선과 고집,

그리고 그릇된 방법으로 얻은 이익과

명성이며 자신을 칭찬하고 남을 경멸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의

전 병력이며 검은 마군이다.

그러므로 용감한 자가 아니면 너를 이겨낼 수 없으리

그러나 용감한 사람은 그대의 공격을 이렇게 잘 막아내고 있다.

악마여, 사람들도 저 신들 마저도 그대의 군대를 격파할 수

없지만 그러나 나는 지혜의 힘으로 그대의 군대를 쳐부수리라.

굽지 않은 질그릇을 돌로

쳐 깨뜨리듯이

<< 숫타니파타>>

 

그리고 부처님은 머나먼 과거세부터 한량없는 세월 선근공덕을 쌓아왔기에 악마의 군대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마왕 파순은 그것을 누가 증명할 수 있는지 말해보라고 외쳤다. 수행자 고타마는 오른손을 내밀어 땅을 가리키며  이 땅은 능히 일체의 물건을 내어 차별이 없이 평등한 행을 하도다. 원컨대 지금 진실을 말하라 고 했다. 이때 땅을 지키고 있던 지신(地神)이  가장 큰 대장부시여, 내 당신을 증명하리다. 제가 아나이다 라고 외치자 대지와 삼천대천세계의 국토는 두루 크게 진동하였다. 마왕은 이 우렁찬 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수행자 고타마는 마왕의 항복을 받고 아무런 방해도 없이 깊은 선정에 들었다. 일반적으로 절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신 대웅전 불상을 보면 왼손은 가부좌한 발 위에 올려놓고 오른 손은 무릎 위에서 아래로 땅을 향하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서 마왕에게 항복 받으신 장면을 나타낸 것이다.

 

이제 수행자 고타마에게 어떤 장애도 없게 되었다. 깨달음을 끝까지 가로막고 있던 악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모든 구속이 사라진 수행자 앞에 세상의 이치가 확연히 드러난 것이다. 그 이치는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일어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기에 저것도 멸하는 것이다  라는 연기(緣起)의 진리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바로 이 연기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한편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한 악마들의 면면을 다시 살펴보면, 이들이 수행자 고타마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한 세간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는 듯하다. 끝까지 그를 붙들고 있던 욕망 가운데 가장 먼저 끊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육체의 욕망 즉, 색욕이었다. 이 세 딸의 이름이 첫째는 은애(恩愛), 둘째는 상락(常樂), 셋째는 대락(大樂)이라는 것을 보아도 성적 쾌락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마왕의 공격은 마왕의 여덟 가지 군대라고 표현된 욕망, 혐오, 기갈, 집착 등 마음 속의 온갖 번뇌를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왕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은 전륜성왕의 자리였다. 이것은 곧 권력욕을 뜻한다. 이것은 색욕과 공포 보다도 더 질기고 뿌리가 깊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권력욕은 한 개인이나 한 가정을 파멸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한 국가와 민족,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욕망이다. 부처님은 마왕의 항복을 받은 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세상에선 무기를 써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나

나는 중생을 평등하게 여기는

까닭에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평등한

행과 인자한 마음으로 악마를 물리쳤나니

<<수행본기경>>

 

결국 이 세 가지 욕망을 극복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육체적, 정신적, 제도적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마왕의 온갖 유혹과 물리적 위협을 극복하는 이 장면은 우리가 가져야 할 불퇴전의 수행 자세가 어떠한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성도(成道)란 불도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곧 수행자 싯달타가 붓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신 것을 말한다. 이때가 부처님이 35세 되던 해 음력 12월8일이었다. 이날은 사실상 불교가 시작된 역사적인 날이며 불교에서는 성도절(成道節)이라 하여 뜻 깊은 날로 삼고 있다. 성도절은 수많은 마왕의 군대를 항복 받고 깨달은 날이며, 인간이 몸으로 신의 세계를 뛰어 넘어 대자유인의 시대를 연 날이다.

 

부처님은 우리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셨다. 온갖 번뇌와 고통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중생들도 사실은 모두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세상에 알려주신 것이다. 부처님의 성불 이후 새로운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때까지 인간은 고통과 혼돈, 무명 속에서 신과 제도와 욕망에 사로잡힌 포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성불하시므로 중생도 대자유, 대자재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제7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 - 진리를 설하시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후 한동안 보리수 아래 머물며 삼매에 들어 있었다. 삼매에 든 부처님은 깨달음의 내용이 매우 심오하고 난해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더라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며 설하기를 주저하셨다. 이 때 최고의 신인 범천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부처님께 귀의하고 중생을 위해 설법해 주실 것을 세 번이나 간청하였다고 한다. 당시 부처님의 심정은 전해진다.

 

고생 끝에

겨우 얻은 이것을

또 남들에게

어떻게 설해야 하는가?

오! 탐욕과

노여움에 불타는 사람들에게

이 법을

알리기란 쉽지 않아라

<< 상응부경전>>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에게 진리를 깨우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탐욕에 허덕이는 중생을 지혜의 길로 이끌기 위해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로 한다. 범천의 간청에 따라 부처님은 설법을 결심하고 이렇게 알린다.

 

감로(不死)의 문은 열렸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려라.

 

전도를 결심한 부처님은 깨달음의 진리를 알 수 있는 사람으로 한 때 스승이었던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라마풋타를 생각하였지만, 이미 그들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아시고, 전에 설산에서 함께 수행하던 다섯 수행자를 찾아 녹야원으로 갔다.

 

다섯 수행자는 부처님이 고행을 포기하자 타락한 사문이라 비난한 이들이지만,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당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첫 대상으로 삼으셨다. 최초로 설한 것은 중도, 사성제, 팔정도의 가르침이었다. 설법과 대화, 토론을 통해 다섯 수행자 가운데 교진여가 맨 먼저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고 곧 나머지 수행자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니 최초의 비구였다. 그 뒤 부처님께서는 야사를 비롯한 60명의 젊은이들에게 법을 설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았다. 부처님은 이들에게 각 지방으로 가서 진리의 가르침을 전할 것을 이렇게 권유하였다.

 

비구들이여,

자! 전도를 떠나라.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안락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인천(人天)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두 사람이

한 길을 가지 말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며,

조리와 표현을

갖춘 법(진리)을 설하라.

사람 중에는 마음의

더러움이 적은 이도 있거니와 법을

듣지 못한다면 그들도 악에 떨어지고 말리라.

들으면 법을

깨달을 것이 아닌가.

비구들이여! 나 또한

법을 설하기 위해 우루벨라로 가리라.

 

부처님께서는 우루벨라로 가서 당시 가장 이름있는 종교가였던 가섭 삼형제를 교화하여 그들과 제자1, 000명을 제자로 받아 들였다. 왕사성 종교가를 모두 교화한 이 사건은 국왕과 백성을 놀라게 하였고, 국왕인 빔비사라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게 되었다. 특히 빔비사라왕은 부처님께서 우기(雨期) 동안 머무시며 가르침을 펴실 수 있는 사원을 기증했으니 바로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10대 제자의 한 분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제자250인과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과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왕사성의 죽림정사는 사위성의 기원정사(祇園精舍)와 함께 전도의 양대 거점이 되었다. 부처님은 성도하신지 몇 년 후에 고향인 카필라국에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교화하고 역시 10대 제자의 하나인 아난과 라훌라, 아니룻다, 우바리 등의 제자를 출가 시켰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뒤부터 입멸할 때까지 45년 동안 중인도 지방을 유랑하면서 사람들에게 법을 설했다. 부처님은 수행자와 재가자, 귀족과 평민, 노예를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셨다. 진리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깨달음에는 빈부귀천이 없기 때문이다.

 

제8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육신을 버리고 열반에 드시다.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신지 45년, 그 동안 부처님께서는 한시도 중생 속에서 동고동락하셨다. 그러나 80세가 되신 해에 부처님은 아난 존자에게  나는 이미 모든 법을 설했고 내게 비밀은 없으며 육신은 이제 가죽 끈에 매여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낡은 수레와 같다 고 말씀하시고,  너희들은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정진하라 고 이르셨다. 이것이 유명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의 가르침이다. 그리고 생애 마지막 전법의 길을 떠나시어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의심 나는 것이 있는가를 세 번이나 물으신 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다.

 

모든 것이 변하니

부지런히 정진하라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시니 이 날이 음력2월15일 열반절이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 na)에서 온 말로  불어서 끈다 는 뜻이다. 무엇을 불어서 끄는 것인가? 바로 욕망과 번뇌의 불을 끄는 것이다. 지혜 제일이라 불리는 사리불은, 열반이란 탐욕과 성냄, 그리고 어리석음을 영원히 없애 모든 번뇌를 소멸시킨 것이며, 열반에 이르는 방법은 바로 팔정도(八正道)라 하였다.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성도를 이루신 그 순간부터 이미 열반에 드신 것이다. 세상에 인연으로 생긴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 무상의 진리를 스스로 따랐다. 원래 부처님은 업의 굴레에 매인 몸이 아니다. 깨달으신 부처님은 영원하여 태어난다거나 죽은 일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육신은 설사 죽더라도 제자들이 법과 계율을 잘 지키고 행하면 나의 법신(法身)은 영원히 상주하여 멸하지않으리라  말씀하셨다.

 

결국 부처님의 생애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말씀대로 믿고 수행하면 성불 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이신 길이다. 이는 모든 중생이 지닌 불성으로 가능하며 열반은 그 최고의 경지를 나타낸 것이다.

 

길에서 길로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 부처님은 단순히 이 세상에 한번 왔다 가신 분이 아니다. 모든 중생을 깨치고자 서원을 세우고 수억 겁을 거듭나며 수행을 닦은 분이다. 그러나 그 분의 이야기는 먼 옛날의 이야기만도 아니고 남의 이야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오늘을 사는 발심 수행자의 모습이다.

 

부처님은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고통 속에 허덕이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천상의 영화를 버리시고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그 분이 나신 곳은 호화찬란한 구중궁궐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길가의 동산 위였다. 그래서 길에서 나서 길에서 살다 길에서 가신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부처님의 탄생은 그 자체가 중생의 삶에서 함께 하시겠다는 뜻이다.

 

불자는 중생을 위해 일생동안 헌신하셨던 부처님을 기리고 그 삶을 본받아야 한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부처님의 삶을 본받아 쉼 없이 정진하는 것,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닮는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회의 그늘진 곳,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 곳에 동참하여 대비수고(大悲受苦)하는 것이 오늘을 사는 불자의 자세이다.

 

2 부처님의 깨달음

 

1 연기 - 불교의 세계관

 

일구월심

사유하던 성자에게

모든 존재가

밝혀진 그 날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연기의 도리를

깨달았으므로

<<자설경>>

 

싯달타 수행자는 진리를 깨달아 부처님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연기(緣起)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원인이 있으며 원인으로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지면 소멸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신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此有故彼有

이것이 태어남으로 저것이 태어난다.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이 사라진다. 此滅故彼滅

<<중아함경>>

 

연기는 인과법, 인연법, 연생연멸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부처님은 이 연기의 법칙이 당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없는 것으로,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요컨대 연기법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라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님을 본다 고 하였는데 여기서 부처님은 연기를 법이나 부처님과 동일하게 간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존재는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원인이 사라질 때 소멸하며, 세상 모든 것은 변하여 영원한 것이 없으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연기의 이치를 깨쳐야 한다.

 

2 삼법인 - 존재의 실상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이다.

 

삼법인(三法印)이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 어디서나 같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같음을 뜻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삼법인은 불교의 인감도장이 라할 수 있다. 삼법인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 세 가지를 말하며,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넣기도 하는데 이 네 가지 합하여 사법인(四法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제행무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바로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생각한다. 권세와 명예, 재산도 영속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죽음을 경험하거나 세도가와 재력가의 몰락을 경험하면서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 설 때 겸허하게 마음을 비우게 된다. 그리고 차분히 모든 사물을 살피면 지금까지 자신을 유지해 온 생각이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잘못된 생각이 바로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사물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것으로 보는 이 잘못된 생각을 버릴 때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고, 그 속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알게 된다.

 

둘째, 모든 변하는 것에 자아의 실체(實體)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며 이것은 그 조건에 말미암은 것이다. 즉,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정불변하는 실체란 없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 사고와 아집을 버릴 것을 요청한다. 자신을 포함한 어떤 존재도 영원한 것이 없기에 생각과 사물 역시 영원한 자기 것이 없는 법이다. 아집과 소유욕을 없애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세계의 화합과 평화가 먼 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셋째, 모든 변하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고(苦)라는 것이다. 세상사는 희노애락이 있어 괴로움만 있는 것이 아닌데, 왜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임에도 여기에 집착하여 고통을 낳는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변하여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생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습성에 길들여져 있어 기쁨과 즐거움을 지속하려고 별별 수단을 다 부리지만,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진시황이 죽지않는 약인 불로초(不老草)를 구해 아무리 발버둥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모든 영웅호걸과 미천한 신분의 사람도 항상 풍족하고 즐겁기를 바라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것은 없는 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이루지 못하는 이런 욕망을 간파하시고 일체가 괴로움이라 설파하신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자가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을 구할 수 있다.

 

마지막은 열반 적정이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구현하여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인 것이다. 열반은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 속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3 사성제와 팔정도 -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연기와 삼법인을 통해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 주는 길이 바로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최초의 설법이다. 사성제는 부처님께서 듣는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연기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 말하는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苦聖諦),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苦集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苦滅聖諦),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진리(苦滅道跡聖諦)이다.

<<잡아함경>>

 

사성제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방법(道)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 고, 집, 멸, 도의 사성제라고도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서로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삼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다. 인간의 현실은 이 네 가지 고통 이외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이 인간과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그러면 왜 고통은 발생하는가? 그것은 집착에서 비롯된다. 무상한 세계에서 영원한 것을 찾고 자기 것이 본래 없는데도 헛되이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낳는 것이다. 이를 설명한 것이 집성제이다.

 

이 세상에 고통이 있다면 고통 없는 세계도 있고 그기에 이르는 길도 있을 것이다. 고통이 사라진 해탈, 열반의 세계가 있음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멸성제이다.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여덟 가지 길이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로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부른다. 먼저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② 정사유(正思惟) : 바른 사유이다.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 바른 사유를 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이다. 말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거짓말, 이간시키는 말이나 욕과 비방하는 말은 그 사람의 비뚤어진 생각과 시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항상 바른 생각과 말을 하여 구업(口業)을 짓지 말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한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이다. 일체의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 바른 생각과 말에서 나아가 이치에 맞는 행동을 해야 한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이다. 옳은 일에 종사하고 몸과 마음과 말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청정히 하면서 바로 사는 것을 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바른 직업관을 가지고 생업에 임해야 한다.

 

⑥ 정정진(正精進) : 정정진은 깨달음을 향한 부단한 노력을 말한다. 아울러 옳은 일에는 물러섬 없이 밀고 나가는 정열과 용기를 뜻하기도 한다.

 

⑦ 정념(正念) : 몸과 말과 뜻이 바르면 생각이 바로 선다. 정념은 바른 생각을 말한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수행이다. 번뇌, 망상에서 바른 견해나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마음과 몸을 평안하게 하고 바로 수행해야 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참된 불자라면 항상 이것을 생각하고 잘 익혀 생활에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4 업과 인과 - 불자의 가치관

 

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가 유명했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하거나 쾌락과 향락을 쫓아 마음대로 살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이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초래할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행위도 반드시 결과를 낳는다. 착한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온다. 이를  선인선과(善因善果) 악인악과(惡因惡果) 의 인과응보(因果應報)라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業)이라 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어 까르마(karma)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 을 말한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설하셨다. 즉 스스로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모든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설령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처럼 보이는 출생계급이나 삶의 조건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의한 과보이다. 만일 악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장 악한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재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과보를 초래하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迷惑)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혹(惑)- 업(業)- 고(苦)의 삼도(三道)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게 된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菩提心)이라 한다. 일반적으로 업은 단지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 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이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로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身)과 말(口)과 뜻(意)으로 짓는 업의 과보는 엄정한 것이어서 한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율(因果律)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자신의 삶은 구속되고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나 선업을 쌓을수록 인생은 자유로우며 깨달음으로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스럽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3 불교의 역사

 

1 소승불교

 

부처님이 입멸하신 후 마하가섭을 비롯하여 500명의 제자들이 왕사성의 칠엽굴에 모여서 교법과 계율을 수집, 편찬하였다. 이를 제1결집(結集)이라 한다. 이 결집에 의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지금가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 때 교법은 25년간 부처님을 시봉하며 가장 많이 듣고 자세히 알고 있던 아난 존자가, 그리고 계율은 지계제일 우팔리 존자가 먼저 이야기하면 나머지 제자들이 확인을 거쳐 합송으로 경전을 결집했다고 한다.

 

이렇게 결집된 경전과 율법은 교단에 의해 전승되었는데 약100년 후 여기에 대하여 엇갈린 견해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수행 생활에는 종래의 계율을 지키기 어려운 점이 나타났고, 이것은 곧 교설에 대한 다른 해석으로 이어졌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700명의 수행자가 바이샬리에 모여 교설에 대한 결집을 하였는데 이를 제2결집이라고 한다. 이 결집은 야사를 중심으로 한 장로(長老)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결정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던 수행자들이 새로 모여 대중부(大衆部)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교단은 상좌부(上座部)와 대중부로 나누어졌다.

 

이 분열 전까지 제1결집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경전이 있었다. 이것을  아함의 교설 이라고 부른다. 아함(阿含)이란 산스크리트어 아가마(Agama)를 소리대로 옮겨 쓴 말로  전해 내려온 것 이라는 뜻이다. 이 시대 수행자들은 자기 견해의 옳음을 입증하려고 아함의 교설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는데 이를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 교학이라고 한다. 생존 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만나는 사람의 수준이나 처한 조건에 맞게 설해졌다. 이를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 하는데 사람의 그릇에 맞게 설법한다는 뜻이다. 까닭에 보기에 따라 산만하고 단편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이러한 교설을 분석하여 체계화한 것이 바로 아비달마인 것이다. 아비달마란  교법(dharma)에 대한(abhi) 연구라는 뜻으로  대법(對法)이라고도 번역된다.

 

2 대승불교

 

아비달마 교학은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화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지만, 다른 한편 문헌에 매인 해석과 이해의 어려움으로 불교를 대중들로부터 멀어지게 하였다. 또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무위열반(無爲涅槃)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이상적인 인간상은 이러한 열반을 증득하는 아라한(阿羅漢)으로 상정하였다. 따라서 이상적 인간상인 아라한은 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철저하게 수행하는 출가수행자가 아니고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출가자들은 전문적 학습을 위해 사원에 거주하며 대중과 멀어졌고, 난해한 교학은 대중에게 큰 장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의 불교는 자리(自利) 위주의 불교, 출가주의의 불교, 학문적인 불교가 된 것이다.

 

불교가 이렇게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을 때 교단한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 는 사상운동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자신만의 깨달음을 구하는 입장을 소승(小乘, Hinay na)이라 비판하고, 중생을 구제하면서 깨달음을 구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인간상으로 보살(菩薩, Bodhisattva)을 제시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대승(大乘, Mah y na)이라 불렀다.

 

 보살 은 원래 부처님의 전생과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불탑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생애를 설명하던 사람들에게 성불을 목적으로 수행하고 남을 위해 헌신한다면 그가 바로 보살이라는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이것은 획기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 수행자가 지향하는 최고의 경지는 아라한이었다. 성불이란 이룰 수 없는 것이라 여겨졌고 자신만을 위한수행이 주가 되었다. 그래서 대승은 자리 위주의 불교에서 자리와 이타행이 조화로운 불교로, 출가중심의 불교에서 출가와 재가가 함께하는 불교로 전환하였다.

 

한편 대승은  큰 수레 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양한 수행 방편을 제시하였다. 소승의 수행도 어려운 것이지만 세세생생 이타행을 서원하고 실천하는 것 역시 일반인에게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죽기 전에 부처님을 열번 부르는 것만으로 극락왕생을 약속하는 신앙이 출현하였으니 이것이 아미타불 신앙이다. 이것은 자력수행(自力修行)의 종교인 불교에 아미타불의 원력에 의지하여 구제되고자 하는 타력이행(他力易行)의 신앙이 등장하였음을 뜻한다. 불교를 어렵게 느끼던 대중에게 타력 신앙은 매우 반가운 소식으로 불교가 널리 확산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재가 수행자를 중심으로 일어난 대승사상은 중기로 접어들면서 다시 출가 수행자 중심으로 체계화되어 교단으로 발전하였다. 교학 연구도 심화되어 아비달마 교학에 못지않은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때의 교학 연구는 대중을 다양하게 섭수하는 방편 연구를 포함한 것이었다.

 

3 중국불교

 

불교는 인도에 탄생하여 동방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갔다. 인도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아쇼카왕이 전쟁에 염증을 느껴 불교에 귀의하고 전도사를 전세계로 파견하여 불교의 세계종교화를 이룩하였다.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하여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는 물론 이란과 그리스, 러시아까지 전도사들이 파견되었다. 그 가운데 특히 중국은 인류 문명의 발생지 가운데 하나로 주변 나라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었는데 불교사상과 자신의 전통 사상과 문화를 융합, 수용하면서 한국과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전래된 것은 불기 611(서기 67)년, 후한(後漢)시대 대월지국으로부터 가섭마등과 축법란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중국인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노자와 장자의 사상과 같은 성격의 사상으로 이해하였는데 이를 격의(格意)불교라 한다. 격의란 다른 사상의 개념을 빌어 풀이하는 것인데 반야 또는 공의 진리를 노장사상을 매개로 하여 이해한 것을 말한다. 이런 격의불교는 언어의 장벽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경전이 중국어로 번역되고 사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자 점차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작업은 대체로 경전 번역과정에서 나왔다. 이미 초기부터 안세고, 지루가참과 같은 역경승들이 있었지만 중국불교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 바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이다. 그는 수 많은 대승경전과 율장, 논서를 번역하였는데 그의 번역은 정확성과 문장의 미려함, 그리고 번역 자체가 불교를 강술 하는 성격을 띠어 중국불교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였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격의불교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구마라집 이후의 경전번역의 가장 큰 성과는 삼장법사 현장(玄濱, 600~664)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17년에 걸친 구법여행 끝에 인도로부터 범어경전 657부를 가지고 돌아와 무려 75부1, 335권의 경전을 번역 편찬하였다. 그의 번역을 구마라집의 번역과 비교하여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중국불교의 또 다른 특징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이다. 인도에서는 근본불교 시대를 거쳐 소승과 대승불교라는 불교의 역사를 거쳐왔다. 그러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성하던 때였다. 그리고 경전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대승경전과 소승경전의 구분 없이 번역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인들은 경전 가운데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는 것으로 다소 혼란스러웠다. 소승을 비판하는 대승경전 가운데 어느 것을 기준으로 체계를 세워야 하는가? 또한 천차만별의 중생을 위해 다양하게 설해진 방대한 경전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정리하고 체계화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각자 판단의 기준에 따라 부처님의 교설을 통일, 정리하여 이해하려는 경향이 일어나니 이것을 교상판석이라 하고 줄여서 교판이라고 한다. 이 기준에 따라 새로운 종지(宗旨)가 성립되고 이것이 발전하여 각각의 종(宗)을 형성하게 된다. 이에 따라 13개 종파가 생겨나니 교판에 따른 종파의 형성은 중국불교사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종파로는 구마라집의 제자 길장에 의해 확립된 삼론종(三論宗)과 천태지의에 의한 천태종(天台宗), 현장법사의 제자들이 세운 법상종(法相宗), 지엄의 화엄종(華嚴宗) 및 담란의 정토종(淨土宗) 등이다.

 

이 가운데 선종(禪宗)은 불교의 가장 중국적인 성립이라고 할 수 있다. 보리 달마대사를 개조로 하여 2조 혜가대사, 3조 승찬대사, 4조 도신대사, 5조 홍인대사로 이어지다가6조에 와서 남종의 혜능대사와 북종의 신수대사로 나뉘어지게 되는 선종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직접 대면하려는 직관직각(直觀直覺)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선종은 당대에 교학이 문자에 얽매여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참선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바로 나아가는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혜능대사는 이를 가리켜  가르침 외에 별도로 전한 교의이며 따로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敎外別傳 不立文字) 고 하였다. 문자에 의하지않고 곧바로 진심(眞心)에 계합하기에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 하였고 견성성불(見性成佛)을 목표로 하였다.

 

선종의 성립은 중국에서 불교가 이루어 낸 또 하나의 발전이다. 복잡한 교학 연구와 현학으로 인해 부처님의 참 뜻인 성불에서 멀어진 풍토를 일거에 혁신하고 성불을 지향하는 불교, 새로운 불교로 탈바꿈한 것이다. 복잡한 교학 공부를 거치지 않고도 참선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자각은 모든 이에게 깨달음의 길을 열어주었다. 이과 같이 선종은 역동적인 가르침이었다.

 

4 한국불교

 

우리 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공식 기록은 불기 915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이 중국 전진왕으로부터 불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인도 출신으로 가야국의 수로왕비가 된 허씨 부인이 인도로부터 직접 불교를 가져왔다고 일부 학자들이 강력하게 제기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서기 372년 이전에 이미 불교가 광범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받아들인 시기에 불교는 격의불교였다. 이후 인도의 중관사상을 계승한 삼론종에 대한 연구가 발달하였고 유식학과 중국의 천태종, 열반종이 유입되어 교학의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구려 말기에는 도교가 성행하고 고구려불교는 정치적 세력 투쟁에 휘말려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채 고구려의 패망을 맞았다.

 

백제는 불기 928(서기 384)년 침류왕 때에 동진의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되었다. 백제불교의 특징은 율종 중심의 교학에 있는데 그 밖에 열반종, 삼론종, 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하여 교학 연구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불교와 선진문물을 전해줌으로써 일본 고대사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신라에는 고구려의 묵호자에 의해 불기 961(서기 417)년에 불교가 전래되었으나, 불기 1071(서기 527)년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되었다. 신라불교의 고승대덕들은 <<삼국유사>> 등의 기록을 통해 그 행적이 전해지는데 원광-안함-자장-보덕-낭지-혜숙 -혜공-대안-원효-의상-태현 스님 등으로 이어지는 일대 사상가들이 배출되면서 7~8세기에 화려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원광법사는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도에 세속오계를 주어 정신적인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원효, 의상스님이 이루어낸 눈부신 교학 연구의 성과와 인재양성은 중국에서도 크게 영향을 주었고, 한국불교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

 

신라인들은 특히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신라 땅이 바로 불국토 라는 신념으로 가득차게 되는데 이를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이라 하며, 호국불교사상이라고도 한다. 이 신라인들의 불교를 매개로 한 정신적 통일과 힘의 결집이 작은 나라 신라가 삼국통일을 선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신라인들의 이런 사상이 투영된 것으로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도 불렀던 화랑과 불국사, 석굴암, 경주 남산 등의 불교성지를 들 수 있다. 용화향도란  미래불인 미륵부처님이 오시는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여는 무리 라는 뜻으로 신라 땅에 미래불의 국토인 용화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처럼 신라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문화적 걸작은 불교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으며,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적인 발전을 포괄한 삼국의 성취였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각 나라와 지역마다 독특한 특성을 지닌 채 발전하면서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로 깊이 뿌리 내렸다. 불교는 특유의 사상적 포괄성으로 민속 신앙을 섭수하여 큰 마찰 없이 우리민족의 전통사상과 문화로 자리잡았다. 특히 원효, 의상, 원광과 같은 고승들의 정신적인 역할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었고, 교학에 대한 독창적인 연구 성과는 불교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사의 근원이 되었다.

 

고려불교는 통일신라 말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선종의 흐름을 계승하여 신라 말에 개산한 일곱 산과 고려 초의 두 산을 합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성립되었다. 이 선종의 구산에 교종의 다섯 가르침을 합하여 오교구산(五敎九山)이라 한다. 오교구산이란 5개의 교종 종파와9개의 선종 종파를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선종과 교종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다양한 모습을 띤 것은 신라가 패망하던 시기 각 지역 호족세력의 발흥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지역의 호족 실력자들은 자신의 세력을 도모하기 위해 앞 다투어 불교의 정신적 지도자들을 모셨던 것이다.

 

고려시대 불교는 삼국시대에 이어 국교(國敎)의 지위를 확립하여 국가적인 지원 아래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오늘날 최고의 경전으로 받드는 고려대장경을 조판하였고 세계 최고의 인쇄술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도선국사의 영향으로 전국 방방곡곡에 사찰과 탑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건축술도 뛰어나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되는 봉정사 극락전과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때에 지어졌다. 아울러 불화(佛畵)가 발전하여 세계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국왕들은 대대로 당대 고승을 국사(國師)로 모시어 정신적인 지도를 받았다. 이에 따라 왕실의 후원으로 사찰이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스님들이 높은 권세를 누리게 되어 그 폐단도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뜻 있는 스님들 사이에 권세를 멀리하고 수행자의 본분으로 돌아가자는 사상운동이 일어났는데 보조스님의 정혜결사, 요세스님의 백련결사가 그러한 예이다.

 

조선시대 불교는 숭유억불 정책에 의해 억압과 수난의 시기였다. 양반 사대부들은 주자학과 성리학으로 통치이념을 정립하여 불교사상의 영향력을 의도적으로 비하하였다. 특히 고려시대 지대한 영향력을 주었던 사찰의 토지를 몰수하고 스님들을 백정과 같은 팔천민의 하나로 신분을 낮추고 서울 도성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뿐 아니라 불교는 셀 수도 없이 많았던 사찰을 몇 십 개만 남기고 강제로 폐찰 당했고, 각기 특성을 지니며 계승 발전하던 각 종단도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되는 등 세계종교사에서 드문 종교탄압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불교는 혹독한 억불정책 아래에서도 산중으로 깊이 들어가 명맥을 이어갔다. 비록 유교 성리학이 정치적인 지배권을 행사하였지만, 왕족과 양반가의 부녀자들은 대대로 믿어 온 불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특히 태조와 세종과 세조, 정조 등은 매우 독실한 불자였으며, 직간접적으로 불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시하면서 한문 경전을 민중들이 쉬이 알 수 있게 한글로 번역 시키기도 하였다. 서기 1592년 임진왜란 시기에 서산, 사명 대사가 구국을 위해 의승부대를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수 많은 스님들이 피를 흘린 대가로 불교에 대한 탄압을 얼마간 완화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혹독한 탄압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 들어 유교질서가 한계를 들어내고 조세제도의 문란으로 민중들의 삶이 어렵게 되자 사찰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특히 개혁적인 스님들은 유교지배 아래의 조선을 혁신하고자 민중과 더불어 여러 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각종 민란에 스님들의 참여도 나타나게 된다. 특히 19세기 말 안으로 빈발하는 봉건체제에 대한 민중들의 봉기와 밖으로 거대한 흐름으로 다가오던 서양열강의 침략 위협아래 불교사상으로 조선을 개혁하고자 이동인 스님, 유대치, 김옥균, 박영효 거사 등이 개화당을 결성하여 서기 1884년 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희생되기도 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아래 놓여있던 20세기 전반은 한국불교에도 암울한 시기였다. 국가의 강력한 통제 아래에서 다양한 종파로 나뉘어 있는 일본불교는 정부의 후원 아래 각기 경쟁적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포교 활동과 동시에 식민지지배의 정당화에 봉사하였다. 이것은 서양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군사적인 침략에 앞서 선교사를 파견하여 식민지배의 정보탐색과 지배 이념의 창출에 앞장섰던 것과 유사한 것이었다. 특히 1911년에 조선총독부가 제정하여 시행한 <사찰령>은 조선불교를 식민지 총독 통제아래 놓이게 한 법이었으며, 이것은 일본에 대한 예속을 촉진하였다. 일제는 사찰령과 여러 조치를 통해 조선불교의 훌륭한 전통을 유린하였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권장한 것이었다. 사실 일본불교는 오래 전부터 스님의 결혼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이점은 조선불교의 청정비구와 대비되는 약점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시대에 우리나라 스님들이 대부분 결혼하여 처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정신에 위배되었고 조선불교의 전통과도 어긋난 것이었다. 한편 식민지 시대에 불가피하게 일본에 협력하면서도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켜 나가기에 위해 본사 주지들을 중심으로 1941년 조선불교 조계종을 결성하여 총독부의 법인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용운, 백용성, 박한영 등 적지않은 스님과 재가불자들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끝까지 저항하며 조선불교청년회, 만당 등을 중심으로 민족 독립 운동을 벌였고, 일제의 불교정책을 거부하던 청정 비구승들도 선학원을 결성하여 자주적인 활동 거점을 유지하면서 조선불교의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한국불교에는 필연적으로 일제불교의 청산과 교단의 정화가 과제로 제기되었다. 해방의 혼돈기에 불교개혁과 교단혁신을 위한 여러 단체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나 좌우이념 대립의 와중에 휩싸여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전쟁 직후 일제시대 합법화 되었던 스님의 결혼제도에 반대하면서 교단 정화를 요청한 청정 비구들의 운동이 시작되면서 한바탕 홍역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급기야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몇 차례에 걸친 정화지지 유시문을 발표하여 정화운동이 본격화되었다. 여러 차례의 혼돈 끝에 정화운동은 성과를 보여 조계종은 청정비구 중심의 출가승려로 재편되었고 여기에 반대한 스님들은 독립하여 창종을 하였다. 이리하여 이유야 어떻든 한국불교는 나 여러 종단으로 나뉘어졌으나 오늘날 불교계 각 종단의 협력 기구인 <한국불교종단협의회>를 구성하여 전불교도의 총의를 대변하고 있다.

 

한편 한국불교의 장자 종단인 조계종은 1960~70년대 정화운동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분란이 있었으나 1970년대 후반 뜻 있는 불자들의 노력으로 포교, 역경, 도제양성이라는 종단의3대 과업이 정립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대중불교 운동과 민중불교 활동이 전개되어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1994년 봄, 총무원장의 독단적인 종단 운영에 반발하여 일어난 종단개혁 운동은 많은 종도의 동참 속에 개혁회의라는 초법적인 개혁기구를 탄생시켜 각종 {종헌}과 [종법]등 제도적 개혁을 단행하고 총무원과 더불어 도제양성과 포교를 전담하는 기구로 <교육원>, <포교원>을 독립시켜 종단 활성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여전히 고난과 시련에 놓여있다. 아직도 민족이 분열되어 대립하고 있으며, 급격한 산업화, 도시화, 서양화로 정신적인 혼돈, 물질 지향적인 가치관의 횡행, 민족문화 경시 풍조 등이 만연하고 있다. 특히 산업문명의 부산물인 환경오염은 심각하여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전지구적 차원에서 새로운 문명에 대한 갈망이 높아 가고있다. 이러한 어려운 시대에 한국불교는 민족통일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야 하며, 인간의 욕망을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살리는 새롭고 건강한 문명창조의 사상적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또한 물질과 경쟁 위주의 사회에서 지치거나 상처 입은 많은 대중을 동체대비(同體大悲)사상으로 포용하고 모두가 더불어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불국토를 이루어야 한다. 이 모든 과제가 우리 불자의 지혜와 노력에 달려있다.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공부하고 믿으며 실행해 나간다면 언젠가 찬란한 불국토가 우리 앞에 열리게 될 것이다.

 

 

제3장 수행과 깨달음

 

1 불교의 수행법

 

불교를 가리켜  수행의 종교 라고 한다. 절대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와 달리 불교는 수행을 중심으로 하면서 자력적 구제와 타력적 구제 원리의 조화를 추구한다. 불교는 각자 자신의 능력과 근기에 맞는 수행법을 택해 정진하여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는 다양한 수행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가지 수행법만 정해놓고 정진한다면 쉬울 텐데 왜 다양한 방법을 제시할까?  하고 의문을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저마다의 능력과 타고난 성품에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 각자의 근기에 맞추어 모두 함께 성불의 길로 나아가도록 하기위해서 다양한 수행법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에서 전통으로 전해지는 자력적 수행법인 참선과 타력적 수행법인 기도 등의 수행법을 알아 보자

 

1 참선이란?

 

불교의 수행법하면 누구나 참선을 떠올린다. 참선은 익숙하면서도 웬지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먼저 참선의 의미와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자. 참선이란 말에서  참(參) 은 생각함을 뜻하고  선(禪) 은 산스크리트어 디야나(dhy na)를 음사하면서 나온 말인데 뜻은 역시  사유함 이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는 사유수(思惟修)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참선이란  깊이 사유함 이라 정의할 수 있다. 참선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전해진다.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등 동남 아시아의 남방 불교권에서는 위빠사나(vipassana)라는 수행법이 전해지고,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북방 불교권에서는 선종의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의 의미를 추구하는 간화선과 조용히 자신의 본성을 비추어보는 묵조선(?照禪) 등의 수행법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의 깊은 수행법은 나중에 공부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한국불교의 정통 수행법인 참선의 자세에 대해 알아 보자.

 

2 참선의 자세

 

참선을 하는 데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 받지않아야 하겠지만,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환경이 조용한 곳이 좋겠다. 예를 들면 절에서는 부처님이 모셔진 법당이나 선방 등의 정해진 공간에서 하고,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히 참선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없기 때문에 일정한 곳을 선택해서 하면 될 것이다.

 

참선의 자세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動靜)에 걸림 없이 자세를 취해도 되겠지만 전통 수행법인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하는 것이 좋다. 결가부좌와 반가부좌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주위를 정리 정돈한 다음 방석을 깔고 그 자리에 편하게 앉는다.

② 앉는 자세는 먼저 왼쪽 다리를 오른쪽 다리의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③ 남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허벅지 위에 올려 놓으면 된다.

④ 허리와 양 어깨는 편한 상태로 쭉 펴고 두 손은 먼저 왼 손등을 오른손 위에 포개어 올려놓고 엄지와 엄지를 살짝 마주 닿게 하면 된다.

 

이 자세는 오랫동안 앉아서 수행하는데 적합하다. 그러나 초보자에게는 몸과 마음 그리고 다리에 쥐가 나는 등의 고통이 따를 수 있으므로 스스로 힘이 든다고 여길 때는 몸을 움직여서 굳은 자세를 유연하게 풀어줄 필요가 있다. 익숙해 질 때까지는 약30 - 50분 등으로 시간을 정해 놓고 단계적으로 그 시간을 늘여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가부좌>

 

또한 참선을 한다고 억지로 오래 앉아있다 보면 몸에 무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이때는 아쉬워 말고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법당이나 방안 또는 도량을 거닐면서 몸의 균형을 맞추어 조절해 주는 것이 좋다. 이것을 방선(放禪) 또는 경행(輕行)이라 한다. 이 때에도 화두를 잊고 잡된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참선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이다.

 

반가부좌는 결가부좌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으로 결가부좌 자세에서 다리를 한 쪽만 다른 다리의 허벅지에 올려 놓는 자세이다.

 

<반가부좌>

 

참선을 할 때 호흡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냥 마음대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참선할 때 호흡을 잘하면 정신이 집중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래서 참선할 때 호흡은 단전호흡법을 취하되 단전호흡법에 머무르면 안된다. 다음의 순서로 따라 해보자. 먼저 자세를 바르게 하고 거친 숨을 몇 번 몰아 쉰 다음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코로 숨을 들여 마셨다가 내 쉰다. 이때 주의해야 할 것은 코로 숨을 쉬되 콧구멍의 미세한 털도 움직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호흡은 아랫배 즉, 단전까지 내려보냈다가 천천히 내쉬는 방법으로 계속하면 된다.

 

어떤 사람은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수행법 아님이 없다고 해서 기존의 수행법과 선지식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각자 나름대로 독특한 수행법을 개발해서 공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본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법을 배우는 사람은 전래된 수행법과 선지식의 말씀을 의지해서 수행법을 익혀서 공부해야 할 것이다.

 

<참선>

 

3 수식관

 

참선을 하다 보면 여러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겼다가 소멸한다. 어느 때는 찰나 지간에 나의 생각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버리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때문에 초보자는 자기 생각을 붙잡을 수가 없다. 정말 한 생각에 몰두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호흡을 관찰하며 공부하는 법이 나왔는데 이를 수식관(數息觀)이라 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아나( na)는 들숨이고 아파나(ap na)는 내쉬는 숨이며, 사티(sati)는 의식의 집중을 말한다. 이 수행은 숨을 들이쉬면서 들숨을 관찰하고, 숨을 내쉬면서 나간 숨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다. 이때 호흡은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천천히 깊게 숨쉬기를 한다.

 

숨쉬기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행위이지만 숨에 깊이의식을 집중하고 살아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긴장하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을 때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쉴 때 마음의 긴장과 불안이 어느새 풀어진다. 이러한 긴장이완 효과 뿐만이 아니라 수식관은 분별심을 없애는 수행법이다. 경전에서는 수식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조용한 장소를 택한다. 그리고 결가부좌 한다. 마음에서 다른 생각을 없애고 눈을 코 끝에 둔다. 그리고는 호흡에 의식을 집중한다. 즉 긴 숨이 나가면 숨이 길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짧으면 숨이 짧다고 알고, 나가는 숨이 차면 숨이 차다고 알며, 들어오는 숨이 차면 또한 숨이 차다는 것을 알고,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면 들어오는 숨이 따뜻하다고 알며 나가는 숨이 따뜻하면 나가는 숨이 따뜻하다고 안다. 몸을 모두 관찰하여 들숨 날숨이 모두 이와 같음을 안다. 숨이 있으면 숨이 있다고 알고 숨이 없으면 숨이 없다고 안다.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나가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나간다고 알고, 만약 숨이 마음으로부터 들어오면 또한 마음으로부터 들어온다고 안다. 이와 같이 사유하여 욕심으로부터 해탈을 얻고 악함이 없으며 깨닫고 관찰함에 기쁨과 편안함을 얻으면 이를 초선(初禪)의 단계라고 한다.

 

이 수식관은 마음에 더 이상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단계를 최고의 경지로 삼는 수행법이다.

 

4 부정관

 

부정관(不淨觀)이란 말 그대로 우리 몸의 부정한 모습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 방법은 이렇다. 묘지로 가서 시체(해골)의 부정한 모습을 보고 거처로 돌아와서 발을 씻고 편안히 앉아 마음과 몸을 유연하게 가지고 모든 번뇌를 떠나 그 시체와 나의 몸을 비교하며 관한다. 즉 마음을 집중하여 발목, 정강이, 넓적다리뼈, 허리뼈, 등뼈, 옆 가슴뼈, 손뼈, 어깨뼈, 목뼈, 턱뼈, 이빨, 해골 등에 마음을 집중한다. 또는 마음을 미간(眉間)에 둔다. 그 다음에는 앉은 자리, 한 방안, 한 집안, 한 가람, 한 고을, 한 나라에 가득히 썩어가는 시체가 있는 것을 관한다. 이것을 부정관이라 한다.

 

이 부정관은 탐욕과 애욕이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상함을 깨우쳐 탐욕과 애욕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행법이다.

 

5 지관(止觀)과 삼매(三昧, samadhi)

 

지(止)는 산스크리트어 사마타( amatha)의 의역으로 마음이 적정하여 온갖 번뇌를 그침을 말한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이 여러 가지로 흔들려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혜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

 

따라서 마음에 왔다 갔다 하는 망상의 흔들림을 보고 이들이 모두 찰나에 변화하는 무상한 것임을 알고 멈추게 하는 작업이 지(止)라고 한다.

 

관(觀)은 산스크리트어 비파사나(vipassana)의 의역으로 마음이 지의 상태에 이르면 자신의 마음 속에 왔다 갔다 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게 되면 현상의 세계에서 쉽게 끌려가던 마음 씀씀이를 보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그 동안 무엇에 마음이 흔들리고 욕심을 부리고 조급해 했는지를 알게 된다. 이러한 앎은 자신을 지혜의 세계로 이끌고 간다.

 

삼매는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 dhi)의 음사어로 잘못 발음된 말이 널리 퍼진 것이다. 음사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삼매는 지관의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는 지혜가 깊어져서 외부의 어떠한 소리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집중하고자 한 대상에 마음이 몰입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참선하는 사람은 참선삼매,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삼매에 들었다고 말하고 또는 무아지경에 빠졌다고 한다. 흔히 독서에 몰입한 사람을 보고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말하는 예가 여기에 해당된다 하겠다. 이러한 경지에서 만이 최상의 지혜인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6 간화선(看話禪)

 

인도불교가 중국불교로 이어지면서 수행체계에서도 하나의 변화가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화두(話頭)나 공안(公案)인데 이는 하나의 문제를 깊이 참구하여 그것의 본래 의미를 확실히 깨닫는 간화선으로의 전개인 것이다. 이 수행법은 공안이나 화두를 통해서 수행자로 하여금 큰 의심을 일으키게 하고 스스로 그 의심을 해결하여 깨달음을 얻게 하는 수행법이다. 인도불교의 선정법은 4성제, 8정도, 12연기 등의 교리의 의미를 수행자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반해, 중국의 선종에서는 언어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근본내용의 정확한 의미를 곧바로 찾아 들어가 확인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참선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하여 경전의 가르침에 매이지 말고 그 밖에 길이 있음을 강조한다. 달마대사를 중국선종의 초조(初祖)로 삼아 6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선종은 중국에서 번창하였다. 초조 달마스님과 2조 혜가스님과의 만남 이야기는 극적이다. 마음이 괴로워 찾아온 혜가스님에게 달마스님은  아픈 마음을 가져오라. 그러면 내가 치료해 주겠다 고 일갈 한다. 특히 선종에서는 극단적인 모순으로 보이는 말도 서슴치 않고 한다. 중국의 조주스님은 어떤 스님이 와서 물어보기를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있다 고 하였고 다른 스님이 와서 물으면  없다 고 하여 앞뒤가 다른 대답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말이1, 700여 개나 정리되어 공안이나 화두로서 후대 수행자들이 풀어야 할 문제로 남아있다. 이처럼 간화선은 초심자들에게 매우 어렵게 여겨지지만 앞의 수식관 보다 훨씬 확실하고 호방한 수행법이어서 출가 수행자들이 주로 몰두하는 방법이다.

 

2 간경

 

불교에서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요, 교훈이요, 진리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경전은 부처님 열반 이후 정법을 전하는 보고(寶庫)로 여겨졌고, 따라서 경전을 신행의 지침으로 삼게 된 까닭이 여기 있다. <<법화경>> 보문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어디서든지 이 경을 설하거나 읽거나 외우거나 쓰거나 이 경전이 있는 곳에는 마땅히 칠보로써 탑을 쌓되 지극히 높고 넓고 장엄하게 꾸밀 것이요, 또다시 사리를 봉안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는 이미 여래의 전신(全身)이 있는 까닭이니라.

 

경전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다름 아님을 나타내는 경구라 하겠다. 이와 같이 불교경전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부처님의 진신사리로서, 불상이나 불탑과 같이 불교에서 신앙하는 예배의 대상이 된다. 뿐만 아니라 책이 귀하던 옛날에는 한 권의 경전이 갖는 의미가 각별했으며 경전을 통하여 모든 교육이 이루어졌으니 경전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우리 선인들이 경전을 통한 수행의 한 방법으로 간경이나 사경에 지극한 정성을 보인 까닭도 이 때문이다.

 

1 간경(看經)이란?

 

간경은 경전을 보고 읽는 것을 말한다. 경전은 삶의 바른길을 제시하는 지혜의 창고이다. 따라서 경전을 읽고 외우며 몸에 지님으로써 얻게 되는 공덕이 무한히 크기 때문에 간경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정착이 되었다.

 

원래 경전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을 널리 펴고자 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경전을 통해 깨달음의 의미와 내용을 이해하고 그와 같이 실천하기 위해 읽었던 것이나, 뒤에는 읽고 외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법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읽고 부처님의 덕을 찬탄하며 원하는 일이 속히 이루어지도록 발원하기도 하고 또는 죽은 자를 위해 독경해서 그 공덕으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명복을 빌기도 하였다.

 

간경은 뒤에 경전을 읽는 모든 행위를 일컫게 되었다. 풍경(諷經), 독경middot독송이라 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의미를 구별해 쓰는 경우도 있으나, 지금은 흔히 구별 없이 하나의 뜻으로 쓰고 있다. 또한 독경 예배 등을 부지런히 한다고 하여 근행(勤行)이라고도 한다.

 

2 간경 방법

 

옛부터 경전을 읽기에 앞서 먼저 몸을 깨끗이 하고 단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몸을 깨끗이 하는 과정을 통해 탐욕으로 일그러진 마음을 추스려 경전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다. 또한 목어(木魚), 음목(音木), 건추(建追), 태고(太鼓), 요령, 종 등의 불교악기를 사용하여 독경의 음조를 고르게 한 후 간경에 임했다고 한다.

 

경전을 읽을 때에는 마음 속으로 의미를 이해하면서 보아야 하는데 염불처럼 소리를 내어 읽기도 한다. 이때는 염불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소리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경전을 보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반드시 주위의 스님이나 선지식을 찾아서 그 뜻을 물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경전 읽기의 바른 방법이다.

 

3 염불(念佛)

 

불교는 중생의 능력과 근기에 맞는 다양한 수행법이 있다 염불이란 일반적으로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흔히 주위에서  나무관세음보살 ,  나무아미타불 ,  나무석가모니불  등 부처님을 부르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 귀의하고 모든 것을 부처님의 뜻에 따라 수행하는 것이 염불이다. 염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를 생각하는 법신염불과 부처님의 공덕이나 모습을 마음에 그려보는 관념(觀念) 염불,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稱名)염불이 있다.

 

<<아함경>>에서는 세 가지, 여섯 가지, 열 가지로 염불의 종류를 구분하고 있다.즉 염불을 지극 정성으로 하면 번뇌가 사라져 하늘에 태어나거나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대승경전에서는 삼매에 들어 염불하는 염불삼매를 설한다. 이에 따르면 염불은 죄를 없애고 삼매 중에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물론,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길 발원하면 반드시 태어난다(念佛往生)고 한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라도 임종할 때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열 번만 부르면 서방정토에 왕생한다고 하였다.

 

염불은 중국에 와서 그 방법과 내용이 더욱 발전하였다. 모든 부처님을 마음 속에 떠올리는  통(通) 염불 과 특정한 부처님만을 마음에 떠올리는  별(別) 염불 로 구별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구분보다 어떤 형태로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신앙하는 일이 일반인들이 실행하기가 쉬우므로 나중에는 아미타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을 염불이라 했던 것이다.

 

염불은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으로서 대중의 호응이 높았다. 어려운 교리를 선호하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생활에 바쁜 일반인들이 선호한다. 신라시대의 원효스님이 무애박을 두드리며  나무아미타불 을 지성으로 부르면 극락에 왕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 이래 염불은 지금까지 불교인의 수행법의 대명사가 되었다.

 

염불하는 방법은 부처님을 그리워하면서 명호를 지극히 부르는 것이다. 즉 언제나 부처님과 함께 하며 살기를 발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염불하는 마음에 집중하여 자신의 소리를 언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산란해져 입으로는 염불을 하면서 속으로는 외도, 마군, 잡생각을 하게 된다. 부처님을 부르는 동작 하나에도 정신을 모아 흐트러짐이 없는 상태가 진정한 염불의 시작이다. 이러한 수행의 결과로 부처님을 친견했다는 사람도 있고, 몸에서 빛을 발하는 방광(放光)을 얻었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보다 진심으로 부처님을 그리워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사심이나 탐욕이 사라지는 경지를 체험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1 정근(正勤)

 

정근은 선법(善法)을 더욱 자라게 하고 , 악법(惡法)을 멀리 여의려고 부지런히 쉬지 않고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는 염불과 같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불, 보살님의 지혜와 공덕을 찬탄하면서 그 명호를 부르며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산만한 마음을 안정시켜 편안하게 하며 어떤 환경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맑고 밝아지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정근을 할 때에는 다른 생각을 다 놓아 버리고 오직 평온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믿고 일념으로 정진해야 한다. 불middot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그 명호에 집착하거나, 무엇인가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정근에 장애가 된다. 항상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기운을 안정시켜 몸을 흔들거나 경거망동하게 하지 말아야 하며, 음성은 너무 크게도 작게도 하지 말고 기운을 적당하게 하여 고르게 해야 한다. 정근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는 방법도 있다. 그리고 정근은 대상과 일정한 시간을 정하여 할 수도 있다. 대개 아침과 저녁으로 예불을 모실 때에는 석가모니불 또는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하고,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서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할 때는 나무아미타불 또는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을 한다. 정근하는 방법은 이렇다.

 

석가모니불<정근>

 

<거불(擧佛)>

 

나무 불타부중 광림법회(절)

나무 달마부중 광림법회(절)

나무 승가부중 광림법회(절)

<1안> 시작 - 나무 영산 불멸 학수 쌍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반배)

<2안> 시작 - 나무 삼계 도사 사생 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반배)

마침 → 천상천하무여불 시방세계역무비 세간소유아진견 일체무유여불자(큰절)

 

(한글) 하늘 위나 하늘 아래 가장 존귀하시고 시방세계 우뚝하시어 이 세상 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온 누리에 으뜸이신 부처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돈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관세음보살<정근>

 

<거불(擧佛)>

 

나무 원통교주 관세음보살(절)

나무 도량교주 관세음보살(절)

나무 원통회상 불보살(절)

시작 → 나무 보문시현 원력홍심 대자대비 구고구난 관세음보살(반배)

 

(한글) 사바세계 두루하사 크고 깊은 원력으로 자비심을 펼치시어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시는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마침 → 관세음보살 멸업장진언 (관세음보살이 업장을 멸해주시는 진언) 옴 아로륵계 사바하 (3번)

 

구족신통력 광수지방편 신통한 힘 갖추시고 지혜 방편 널리 닦아 시방의 모든 세상 두루 시방제국토 무찰불현신 나타내신 관세음보살님께 지극한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마음으로 귀의하옵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 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돈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아미타불<정근>

 

<거불(擧佛)>

 

나무 극락도사 아미타불(절)

나무 좌보처 관세음보살(절)

나무 우보처 대세지보살(절)

 

시작 → <1안> 나무 서방 대교주 무량수 여래불 나무아미타불(반배)

 

(한글) 서방 대교주 무량수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2안> 나무 서방 정토 극락세계 나무아미타불(반배)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마침 → 아미타불 본심미묘진언 (아미타 부처님의 미묘하신 진언) 다냐타 옴 아리다라 사바하 (3번)

 

계수서방안락찰 접인중생대도사 서방정토 안락국에 중생을 인도 하는 아미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아금발원원왕생 유원자비애섭수 원하오니 왕생토록 하옵소서. 일심으로 바라오니 자비로써 거두소서.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돈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지장보살<정근>

 

<거불(擧佛)>

 

나무 유명교주 지장보살(절)

나무 남방화주 지장보살(절)

나무 대원본존 지장보살(절)

 

시작 → 나무 남방화주 대원본존 지장보살 (반배)

 

중생고통 건지시는 원력의 으뜸이신 지장보살님께 귀의합니다.

 

마침 → 지장보살 멸정업진언 (지장보살이 업장을 멸해주시는 진언) 옴 바라 마니다니 사바하 (3번)

 

지장대성 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지장보살 위신력은 말로 하기 어려웁고 잠깐 사이 보고 듣고 한 순간만 생각해도 견문첨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그 복덕은 무량하니 고아일심 귀명정례 (반배)

 

지극한 마음으로 절하옵니다. 원멸사생육도 법계유정 다겁생래 제업장 아금참회계수례 원제죄장실소제 세세상행보살도(절)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돈견무량수 개공성불도(절)

 

2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일반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 신이나 그 밖에 신비한 힘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비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기도는 권청(勸請) 즉, 일체 중생들이 어리석은 마음을 떨쳐버리고 하루 속히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부처님께 청하는 의식으로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력과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이웃들에게 기쁜 마음으로 회향하겠다는 서원의 뜻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즉 불교의 기도는 불 보살님의 위신력을 찬탄하고 다생에 지은 모든 업장을 참회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일체중생과 함께 하기를 발원하고 회향하는 것이다. 그 기도발원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의지하며 이 생명 다하도록 실천하겠다는 성스러운 마음에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통해서 나와 이웃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보살님의 공덕이 함께 하기를 서원하고 또한 자신의 편협 된 마음을 부처님 마음으로 되살리는 운동이다.

 

3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불자들이 가정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상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편한 시간과 공간을 정해 놓은 다음, 사찰에서 기도하는 방법과 같이 일정한 기도 절차에 의해 봉행하면 된다. 따라서 기도를 하는데도 몸과 마음의 자세와 호흡이 중요하다. 즉 기도와 참회를 하고자 할 때는 앉는 자세부터 바르게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앉는 자세는 두 무릎을 꿇고 앉는 방법을 취하며 그 밖에는 결가부좌(結跏趺坐)나 반가부좌(半跏趺坐)를 선택해서 앉으면 된다. 옷차림도 신체의 어느 부위가 너무 조이지 않는 편안한 복장이 좋을 것이다.

 

기도할 때에 앉는 법을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에서 올바른 호흡이 나오기 때문이다. 올바른 호흡이 중요한 것은 호흡이 안정되어 있을 때 자연히 정신도 안정되어 쉽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서 기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호흡은 그 흐름에 따라서 자연스레 안정이 되기 때문에 너무 호흡에 의식할 필요는 없다. 기도할 때 마음은 첫째 믿음이 중요하다. 즉 이 기도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나와 함께 함을 깊이 믿어야 하고 둘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평소 우리 자신의 잘못된 생활에 대해 반성하고 기도에 앞서 자신의 마음을 참회하고 비우는 것이요. 셋째로는 주변의 모든 이웃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의 모든 중생이 나와 한 몸임을 깨닫고 그들 모두에게 평화와 안락이 깃 들기를 바라며 누구에게도 원망이나 미움을 갖지 않는 마음이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기도에 임할 때 우리들의 기도는 참다운 공덕을 쌓게 된다.

 

기도할 때 독송하는 경전은 기도의 내용에 따라 각기 다르다. 먼저 경전을 독송하는 의미와 목적은 경전을 통해서 불보살님의 서원과 나의 정성이 하나가 되게 하는데 있다. 기도의 방법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다섯 가지 덕목이 있는데 그 첫째는 불 보살님께 귀의하여야 하고, 둘째는 향과 꽃으로 공양하고 보시하여야 하며, 셋째는3배 또는 108배 등으로 예배하고, 넷째는 업장을 소멸하고 복덕을 성취하기 위하여 참회 발원하여야 하며, 다섯째는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르며 정근하는 염송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기도하는 모습>

 

4 기도의 종류

 

관음기도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에 가장 뿌리 깊이 내린 것이 관음신앙이다. 이 관음신앙과 연관된 경전은 <<반야심경>>, <<천수경>>, <<법화경>> 등이다.

 

이 경전은 다른 경전보다 세상에 가장 많이 보급되어 구입하기가 쉽다. 관세음(觀世音)보살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떼스바라(Avarokite vara)를 뜻으로 옮긴 말이다. 관자재, 관세음, 관음 등으로 음역하기도 한다. 관세음이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관찰한다는 뜻이며, 사바세계의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일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청하면 32응신(應身)으로 몸을 나타내어 구원해주신다. 관음보살상은 어머니같이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며 후덕한 모습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연꽃은 중생이 본래부터 구비하고 있는 불성을 표현한 것이다. 중생이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하고 그의 명호를 부르거나 찬탄, 공양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한다.

 

불에도 타지 않고 물에도 떠내려 가지 않으며, 바람에도 날리지 않고 칼과 몽둥이에 잘리거나 다치지 않으며, 귀신에게 시달리지 않고 쇠고랑을 차지 않으며 도적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신다. 또 항상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공경하면 욕심 많은 사람은 욕심을 여의게 하고 아들을 원하면 아들을 낳고, 딸을 원하면 어여쁜 딸을 낳을 것이다. <<법화경>> 보문품

 

<관세음보살상>

 

지장기도

 

우리나라의 지장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매우 성행하였는데 신라의 김교각스님이 중국 안휘성에 있는 구화산에 가서 수도정진 하였는데, 그 지방 사람들로부터 지장보살로 추앙 된 것이 그 기원이라 한다. 지장보살님은 지혜와 자비를 구족하고 있으며 특히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신 분이다. 지장보살님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이 모두 성불하기 전에는 결코 깨달음을 이루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우신 대비원력의 보살이시다. 이 보살님은 항상 지옥에 계시면서 오늘도 육도(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를 윤회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고 계신다.

 

<<지장보살본원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을 예배하고 공경하면 이런 공덕이 있다고 한다. 풍년이 들며, 집안이 편안하고, 죽은 조상이 천상에 태어나고, 부모가 장수하며, 원하는 것을 얻으며, 수재나 화재가 없고, 헛되이 허비하는 것이 없으며, 나쁜 꿈이 없고, 출입 시 신장이 보호하며, 훌륭한 인연을 많이 만날 것이다.

 

지장 신앙은 우리나라를 비롯해서 중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봉행 되고 있다. 이 신앙이 널리 신봉되는 것은 <<지장보살 본원경>>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부모가 장수하고 ,  조상이 천상에 태어난다 는 효 사상의 영향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선망부모와 일가친척 그리고 제반 천도의식을 봉행할 때는 지장기도를 많이 봉행하고 있다.

 

<지장보살>

 

약사기도

 

우리 인간은 한평생을 살아가면서 몸이 아프고 병이 들고 늙고 죽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인간은 아픈 몸을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가지 처방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만가지 모든 병은 마음에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을 깨달으시고 모든 중생들에게 마음을 먼저 다스릴 것을 강조하셨다. 그것이 바로 병의 근원인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모습과 인종, 그리고 문화가 각기 다르듯이 탐심을 버리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아프고 병든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와 같이 병들어 아픈 사람들이 그 병을 다스리기 위해 약사여래 부처님께 기도 정진하는 것을 약사기도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약사전이 있는 사찰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이런 사찰은 아픈 사람이 기도 정진하여 치병의 효과를 보았다는 기록이나 설화가 많다.

 

약사여래는 정확하게 말한다면 약사유리광여래 또는 대의왕(大醫王) 부처님이다. 약사여래가 계시는 세계의 이름이 동방에 있는 정유리 세계이므로 동방정유리계의 교주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약사여래신앙의 모체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경>>에는 약사여래의 12가지 서원이 나온다. 그 중에서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서원이 정신적, 육체적 병고의 해결과 회복이다. 그 다음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을 설하고 12가지  원을 성취시켜주는 신령스러운 주문 을 들고 있다. 이러한 약사여래의 가피를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약사여래 기도이며, 5세기 무렵 수나라 시대부터 민간에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칠성기도

 

우리 민족은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산천과 태양(하늘)을 숭배했다. 즉 칠성은 하늘(태양), 산신은 대지, 용왕은 물의 상징이자 그 세계의 지배자를 뜻한다.

 

불교가 전래되자 산신과 칠성은 자연스럽게 사원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불교와 융합하여 계승되었다. 이것이 후대에는 도교나 민속신앙과 합쳐져 칠성이나산신, 용왕에 대한 예경으로까지 이어졌다.

 

옛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산신과 칠성에 대한 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특히 자손창성 부귀영화 수명장수를 기원할 때는 일반적으로 칠성기도를 올린다. 이것은 태양을 숭배하며 하늘의 자손이라 생각했던 조상들의 전통과 관례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처럼 칠성신앙은 바로 재래의 토착신앙과 불교가 엮어낸 문화형태인 것이다.

 

참회기도

 

참회기도는 진실하지 못한 마음으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업을 소멸하기 위해 부처님께 그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즉 참회기도에는 이참(理慘) 기도와 사참(事慘)기도가 있다.

 

이참기도는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업은 마음에서생긴 것이며, 마음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관찰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마음이본래 공적(空寂)한 줄을 알아서 모든 죄의 모습도 공적함을 보는 것을 말한다.

 

사참기도는 몸으로는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입으로는 부처님을 찬탄하며, 마음으로는 부처님의 성스러운 모습을 그리면서 과거와 현재에 지은 모든 죄를 참회하는 기도이다. 참회할 때 외우는 것을 참회문이라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화엄경>> 보현행원품의  지난 동안지은 모든 악업은 무시 이래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으로 지었사오니 제가 이제 그 모든것을 참회합니다  등의 예가 있고, 또 천수경에는  죄는 자성이 없으니 마음 따라 생길 뿐, 마음이 멸할 때 죄도 없어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없어져 모두 공하면, 이것이 바로 참다운 참회라 한다 고 하였고 신라 때의 원효스님은 <<대승육정참회문>>을 지어 참회의 본 면목을보여 주고 있다. 또 서산대사도 <선가귀감>에서 참회를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허물이 있으면 참회하고 잘못된 일이 있으면 부끄러워할 줄 아는데에 대장부의 기상이 있다. 그리고 허물을 고쳐 새롭게 되면 그 죄업도 마음 따라 없어질 것이다. 즉 참회란 먼저 지은 허물을 뉘우치고,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이다. 부끄러워 한다는 것은 안으로 자신을 꾸짖고 밖으로는 드러내는 일이다. 마음이 본래 비어 고요한 것이므로 죄업도 붙어 있을 곳이 없다.

 

 

제4장 인생과 불교

 

1 인연으로 받는 새로운 생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이 닿아야 이루어진다. 한 알의 곡식이 여물기 위해서도 뜨거운 태양과 때 맞춰 내리는 비, 그리고 결실기에는 마른 바람이 골고루 불어 주어야 한다. 여러 가지 인연요소 가운데 어느 한가지라도 갖춰지지 않는다면 곡식은 여물지 않을 것이다. 한 알의 곡식에도 이토록 천지자연의 조화의 인연이 있어야 하는데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불리 우는 사람이 이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있어야 할 많은 소중한 인연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인간은 끝없는 세월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지은 여러 가지 인연이 모여서 지금의 이 생을 받았다고 한다. 육도윤회의 여섯 갈래 가운데 다른 악취도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의 몸을 받은 것을 보면, 우리가 지은 인연들은 참으로 선근 공덕이 아니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이 자신이 과거세에 지은 과보를 이 생에 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하고, 또 남에게 빚 진 것을 갚고, 남에게 해 되는 일을 한 것을 참회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 지은 공덕이 많은 사람은 이 생에서 잘 살고, 좋은 공덕을 닦지 않아 전생에 잘못이 많은 사람은 이 생에 태어났어도 힘겹고 고달픈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이 말에 따르면 이 생은 견뎌내야 할 과보일 뿐, 향상도 극복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생을 이와 같이 소극적으로 바라보며 살아서 되겠는가. 부처님 말씀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그 중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기가 정말로 어렵다고 했는데, 하물며 그 어려운 단계를 다 지난 우리 불자들에게 설사 지은 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처님의 정법 속에 사는 지금 업의 소멸에 짓눌려 살아서 되겠는가? 오직 우리에게는 깨달음을 위한 수행과 정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한 만남과 깨닫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고 정의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지난 세월에 지은 업보를 갚기 위한 슬픈 삶이 아니라 깨달음의 원력을 실현하는 기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할 것이다.

 

2 불자의 신행 생활

 

안심입명(安心入命)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을 살아나가면서 부딪치는 갈등과 불안을 잠재우고 평화와 안락의 삶을 살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불자의 삶이란, 삶의 가치와 기준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에 의지해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 생에서 단 한번 뿐인 삶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소중하고 가치 있게 보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불교에 입문하신 분 가운데 불교집안에서 어릴 적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접해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를 믿지 않거나 다른 종교를 믿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교는 바른 사고와 실천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추구하는 것은 올바른 삶이며 불자가 되는 데는 특별한 절차나 과정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동안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고, 앞으로의 삶은 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살아가겠다는 다짐만 있으면 된다. 오래 믿은 사람과 지금 시작하는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앞으로 어떻게 신행생활을 하느냐에 따라서 현격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반복할 수 없는 소중한 인생에서 어느 한 순간도 소홀히 여길 수는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삶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시점이 있다. 그 시기는 이전의 삶을 종합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후의 삶을 규정한다. 남녀가 만나 가정을 이루는 혼례가 그렇고, 이 세상의 인연이 다하여 생을 마감하는 죽음이 그렇다. 그 과정을 불자로서 맞이하고 통과하기 위해서는 불교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에 대하여 알아야 한다. 그것이 불교인의 삶을 다른 삶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하겠다.

 

불교인이 되면 불교의 고유한 의례와 의식을 만나게 된다. 의례와 의식은 신앙의 외적 표현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 교의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 속에서 문화와 풍습으로 정립되어 온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는 다소 형식적일 수도 있지만, 의식에 깃들인 참된 의미를 알고 행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불교의식에는 가장 기본적인 정기법회가 있고, 입문의례로서 수계의식이 있다. 또한 개개인의 절실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 행하는 다양한 기도와 발원의식이 있고, 종교적 성취와 발전을 위한 수련의례가 있다. 그밖에 불교 나름의 의미가 부여된 특별한 시기에 치르는 명절의례가 있으며, 일반 삶 속에서 흔히 만나는 혼례, 상 장례 등의 평생의례가 있다. 또한 일반 신자들이 행하는 의례가 있는 반면 출가 수행자들만이 행하는 전문적인 의례도 있다.

 

우리 불자들은 불교의식에 의하여 참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면 자신은 물론 가정과 사회도 더욱 맑고 밝아질 것이다.

 

1 거룩한 생명

 

한 개인의 생명은 타인의 생명과 구별되는 독립된 인격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뗄래야 뗄 수 없는 여러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나를 낳아준 부모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세상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한 생명을 맞이하기 위해 많은 정성을 기울여 왔다. 후손을 바라는 마음에서 백일 치성을 드리거나, 정한수를 떠놓고 빌기도 하였다. 치성을 드릴 때에는 목욕재계 하고 깨끗한 흰 옷으로 갈아 입었으며, 오직 바라는 바를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정성을 다하였다. 어떤 사람은 하룻밤 사이에 찬물에 목욕을 열 두 번 하였다고도 하며, 어떤 사람은 옷을 열 두 번 갈아입어 몸에 서린 부정을 없애는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귀하게 생명이 얻어지면 태 속에 있을 적부터 거룩한 한 생명으로 대접하여 바른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태교에 정성을 다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요즘에는 성 개방 풍조로 말미암아 미혼모가 급증하고, 또한 남아선호 사상의 영향으로 태아 성감별 등을 통하여 인공중절을 쉽게 행하고 있다. 한 통계에 따르면 신생아의 두 배 이상이 인공중절을 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거룩한 인연으로 만난 생명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일이다. 이런 세태에 물들지 말고 생명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겠다.

 

즉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에는 가정과 사찰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축원해주고, 아이가 성장하여 유치원이나 어린이 법회에 나갈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때에는 부처님 전에 기원한 부모의 발원을 알려주며 신행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어릴 적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성장하면 나중에도 불교적 덕성을 지닌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사찰에 자주 가서 절 분위기에 친숙해지도록 해주고, 스님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도록 인도해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아이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가르침을 배우고 스님들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란다면 커서도 바른 인간 바른 신행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바른 사람, 바른 불교인으로 교육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나와 똑같은 성품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교육관은 인간 각자가 지극히 거룩한 가치와 덕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자기 자신을 참되게 존중하는 사람은 남을 업신여기지 않고, 자신이 거룩한 부처님의 성품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자신을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삶을 깨닫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 길러내는데 불교교육의 목적이 있는 것이다.

 

요즘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사회적, 법률적으로 성인으로 인정하지만, 가정에서는 결혼 여부를 성인으로 인정하는 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계를 받아 지키는 것이 성인의 가름이 될 수 있다. 수계는 자기 삶을 경건하고 바르게 유지하겠다는 다짐이다. 아직 판단력이 없는 어린 아이에게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스님들께 귀의하는 삼귀의례를 주는 것이 좋으며, 자라서 스스로의 의지력으로 계를 받아 지닐 수 있을 때에 오계를 받도록 하여야 한다.

 

<어린이 법회>

 

2 불교의 혼례

 

불교의 혼례 절차는 과거 구원겁 전에 선혜선인과 구리선녀가 혼인을 약속하고 각각 꽃 다섯 송이와 두 송이를 보광부처님께 바쳤다고 하는 전생담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혼례를 올릴 때 꽃을 바치는 헌화의식과 혼인을 고하는 고불식을 반드시 한다. 그리고 요즘에는 두 사람이 혼인하기 전에 부처님 전에 기도를 올리고 스님을 청하여 법문을 듣고 미래의 행복한 삶을 서로 약속하는 풍속도 생기고 있다. 이는 좋은 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혼인하는 두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행복한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장차 성불하겠노라 는 서원이 있을 때 완벽한 혼례라 하겠다.

 

그리고 혼례장소는 답답한 예식장보다 부처님께서 계시는 법당이나 절 마당 그리고 야외에서 혼례식을 올리는 것이 좋으며, 혼례복도 실용성이 없고 사치스러운 웨딩드레스 보다 우리 고유의 전통 한복 또는 개량 한복으로 준비해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3 법회

 

선남자여, 누가 가장 높고 착한 이인가.

먼저 부처님과 법을 믿어야 하며,

믿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절에 가야 하며,

절에 가서는 예배하여야 하며,

예배하되 법을 들어야 하며,

법을 들을 때는 지성으로 듣고 뜻을 생각하여야 하며,

배운 대로 행해야 하며,

자기만의 해탈을 구하지 말고 대승에 회향하여

일체 중생에 이익 되고 중생을 안락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이런 이가 가장 높고 착한 이니라.

≪대반열반경≫ 범행품

 

불자들의 신행생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법회 참석이다. 그러나 농경사회를 지배했던 태음력 위주의 생활양식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며 일주일 단위로 노동과 휴식이 반복되는 태양력 위주의 생활양식으로 바뀌어 전통적으로 전해오던 법회도 현대의 생활주기와는 맞지않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 사찰에서는 음력 위주의 법회와 양력 위주의 법회가 혼합하여 열리고 있다. 불자는 법회에 적극 동참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법회란 불교에서 가장 거룩한 만남의 장이며, 부처님이 가르치신 진리를 배우고 전파하는 자리이다. 즉 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리고 재를 마련하여 널리 베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설하여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이다.

 

지금 절에는 매달 같은 날이나 같은 요일에 정기법회가 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보름마다 포살일을 정해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 고백하고 참회하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정기법회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매달 10재일이 있는데, 1일은 정광(定光), 8일은 약사(藥師), 14일은 현겁(賢劫) , 15일은 미타(彌陀), 18일은 지장(地藏), 23일은 대세지(大勢至), 24일은 관음(觀音) , 28일은 노사나(盧舍那), 29일은 약왕(藥王), 30일은 석가(釋迦)재일이다. 이 중 일반 대중이 동참하여 기도하는 법회는 초하루, 보름, 그리고 지장재일, 관음재일이며 사찰에 따라 약사, 미타 등 한, 두 번의 법회를 더 진행하기도 한다. 지장, 관음재일이 특히 많이 지켜지는 이유는 지옥 중생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지장보살과 중생들의 모든 소원을 이루어주는 관세음보살이 대중들에게 친숙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지장재일에는 지장예문과 돌아가신 분을 위한 발원과 정근, 즉 돌아가신 영가의 왕생극락을 기원하고, 관음재일에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구하는 예불과 발원을 한다.

 

또 전통적으로3장6재일이라고 하여1월, 5월, 9월의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법회를 개최했으나, 요즘에는 현대인의 생활에 맞게 일요법회, 수요법회 등의 요일법회와 방학이나 휴가를 이용한 수련법회가 정기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보통 신도법회는 평일 오전이나 오후에 주로 봉행 되고 어린이, 청소년, 대학생, 청년 법회 등은 주로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정기법회일로 하고 있다.

 

이외에도 특별한 법회들이 있다. 우선 불상을 새로 모시는 점안법회(點眼法會)를 들 수 있다. 이는 부처님상을 모시는 법회로써 불교에서 부처님상을 모시는 것은 거룩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워 익히며 실천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불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는 것이다. 탑이나 법당을 건립할 때는 기공식과 낙성식의 법회를 하고, 불상이나 탱화를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하는 점안식을 봉행 한다. 아무리 훌륭한 불상이라 하더라도 점안식을 하지 않으면 작품으로는 인정 받을지는 모르지만,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다. 또한 이 의식은 일반신도가 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라 반드시 증명법 사님을 모시고 법식에 의하여 진행되어야 한다.

 

또 부처님이 제정한 계법을 받는 수계법회(受戒法會)가 있다. 재가신도나 출가수행자는 불교교단에 입문하기위해 오계, 십계, 보살계, 구족계 등을 받아야 한다. 집단적으로 계를 받는 행사를 수계식이라 하고 수계후에 주어지는 법호를 계명(스님은 법명, 신도는 불명)이라고 한다.

 

또 성지순례 법회가 있다. 이는 부처님의 사대성지를 불자 된 사람으로서 순례하며 참배하는 의식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유서 깊은 사찰과 우리 고유의 전통 문화인선조의 발자취를 찾아 순례하는 것도 성지순례 법회이다. 따라서 이 법회는 성지를 순례하며 신심을 북돋을 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의 찬란한 전통과 문화유산을 배우고 느끼는 소중한 기회로 활용하고 있다.

 

4 방생의 공덕

 

나의 생명이 소중하다면 다른 생명도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의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오늘날과 같이 생명경시 풍토 속에서는 방생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보다 넓은 마음에서 생명계를 사랑하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만 생명과 함께 사는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요, 방생(放生)의 공덕이 있을 것이다.

 

옛날부터 음력 정월 대보름, 3월3일, 8월 보름에 방생법회를 열어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특별한 시기를 정하지 않고 수시로 하고 있다. 방생은 죽게 된 생명을 살리는 운동이다. 비록 미물일지라도 그 생명을 소중히 여겨서 죽이지 않고 보호하는 의식이다. 작게는 사람의 손에 걸려 죽게 된 고기나 새 등을 사서 제 살던 곳으로 다시 놓아주는 것이지만, 본래적인 의미는 불살생계를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만 생명을 살리는 일을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살생을 하는 것은 전생의 부모형제를 죽이는 것이고 미래의 부처님을 죽이는 행위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살생의 반대인 방생의 공덕을 짓는 일은 결국 내 부모 형제를 살리는 일이며 나 자신의 거룩한 생명을 더욱 살리는 일이 된다 하겠다. 방생의 공덕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첫째 자식을 원하는 사람은 방생하라. 남을 살게 해 주는 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니 자식의 경사가 있게 된다.

 

둘째 임신을 하면 방생하라. 방생은 만물을 보호하는 것이니 산모도 반드시 보호 받게 된다.

 

셋째 기도할 때 방생하라. 기도함에 방생의 공덕이 크기 때문이다.

 

넷째 예수재를 지낼 때에도 방생부터 행하라. 방생으로 불보살님의 감동을 받으면 큰 복을 받기 때문이다. 다섯째 재계를 할 때, 여섯째 출세를 구하려 할 때, 일곱째 염불할 때도 방생을 하라고 하였다.

 

방생은 선근공덕을 짓고자 하는 여러 사람이 모여 행할 때도 있고, 재난을 만났거나 병 때문에 원을 세워 방생할 때도 있고,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그 전후로도 방생을 한다.

 

요즘은 방생이 단순히 물고기나 새를 놓아주는 일 말고도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을 방문하는 등 어렵고 소외된 이웃에게 부처님의 자비를 베푸는 사회 봉사적인 행사로 발전하고 있다.

 

5 불공

 

불공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불공은 단순히 물질을 공급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귀의, 참회, 공양, 발원, 회향이 여법하게 갖추어지는 의식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다.

 

불공은 우리의 삶이 뜻대로 되지 않아 괴로움과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이를 소멸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서 올리기도 하고, 혹은 원하는 일들이 뜻대로 되었을 때 부처님께 감사의 뜻으로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의 성패나 행운, 일상적 일에 관계없이 항상 진리 속에 살면서 삶의 눈을 뜨게 해준 고마움과 부처님의 크신 위신력을 믿고 존경하며 본받기 위한 수행의 일환으로 불공을 올려야 한다.

 

불공의 핵심은 베품이다. 공양은 음식이나 의복, 혹은 그 밖의 물건을 삼보님과 부모님, 스승과 망자에게 공급하는 것으로서, 특히 삼보님께 공양하는 것은 선업을 쌓는 일로 크게 장려하고 있다.

 

공양하는 물건이나 공양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세간의 재물이나 향, 꽃 혹은 생활용구를 공양할 수도 있고, 보리심을 일으켜 자리이타의 행을 닦는 공양도 있다.

 

몸(身)으로 하는 예배 공경과 입(口)으로 하는 찬탄과 뜻(意)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존중하는 삼업(三業)공양, 음식, 의복, 탕약, 방사(房舍) 등을 올리는 것을 사사(四事)공양이라고 한다. 또한 공양은 중생들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도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해 늘 법(法)공양을 베푸신다. 부처님께서는 공양 중에서도 법공양이 으뜸이라 하셨다.

 

3 불교의 명절의례

 

1 5대 명절

 

<부처님 오신 날>

 

음력4월8일은 부처님께서 탄생하신 날이다. 이 날은 전국의 사찰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며 법요식을 봉행 한다. 법요식 가운데는 욕불 의식이 있는데 부처님이 탄생하신 것을 축복하며 향탕수로 목욕시키는 의식이다.

 

이 의식은 아기 부처님이 탄생하셨을 때 아홉 마리 용이공중에서 향기로운 물을 솟아나게 하여 신체를 목욕시켰다는 데서 유래한다. 그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탄생불을 불단에 모시고 룸비니 동산의 화원을 상징하는 꽃바구니를 만들고 향탕수 즉, 감로다를 준비해서 비밀스럽게 목욕시킨다. 이 의식은 큰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비밀스럽게 행했던 것인데 요즘은 대중화 되어 스님과 신도가 함께 욕불식에 참석해서 정수리에 향탕수를 부으며 공덕을 쌓는 풍속으로 변하고있다.

 

또 연등회는 부처님 당시에 빔비사라왕이 불전에1만 등을 켜서 공양한 예가 있고, 가난한 여인이 한 등을 켜서1만 등을 능가하는 정성을 보이기도 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촛불이 자기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듯이 등을 켜는 이유도 가정과 사회, 세계를 밝히겠다는 서원의 발로인 것이다.

 

이 연등법회는 ≪삼국유사≫ 김현감호조에 초파일부터 보름까지 경주의 남녀가 다투어 탑돌이를 한 기록에서 전통문화행사로 치루어 졌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을 따라 염주를 들고 탑을 돌면서 염불을 하고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자신의 소원을 빌며 등을 밝히고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이 의식은 꼭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국태 민안과 개인의 평안을 바라는 뜻에서 일반 민속화 되었던 것이다.

 

<출가하신 날 - 출가절>

 

음력2월8일은 부처님께서 출가하신 날이다. 모든 중생을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건지시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왕궁을 떠나 출가하신 날로서, 불자들은 부처님을 본받아 상구보리하화 중생의 보살이 되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기념법회를 가진다.

 

<깨달음을 이루신 날 - 성도절>

 

음력 12월8일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날이다. 이날을 기념해 선방의 수행자들은 일주일간 철야 용맹정진을 하며, 일반 사찰에서도 발심 정진하는 철야법회를 갖는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행을 본받아 불자들은 부처님처럼 생사의 고해에서 벗어나 열반을 얻어 일체중생을 교화하고 불국정토를 건설하겠다는 서원을 세우며 기념법회를 가진다.

 

<열반에 드신 날 - 열반절>

 

음력2월15일은 부처님께서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열반에 드신 날이다. 부처님의 열반은 이 세상의 모든 번뇌를 확실히 끊었다는 점에서 반열반이라고도 한다. 즉 깨달음을 얻어 중생을 교화하시던 시기는 아직도 인연의 꺼풀인 육체를 지니신 단계이지만, 그 꺼풀조차 벗었다는 점에서 깨달음의 큰 완성으로 보는 것이다. 불자들 또한 몸을 바르게 하고 노여움을 참고 악심을 버리고 탐욕을 버리고 열반의 경지를 성취겠다 는 서원을 세우며 기념법회를 가진다.

 

<우란분절 - 백중>

 

음력7월15일은 여름안거 해제일이며 백중날이다. 백중은 과일과 음식 등 백 가지를 공양한 백종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선방에서는 하안거 동안 정진하면서 생긴 스스로의 허물을 대중 앞에 사뢰고 참회하는 자자(自恣)를 행하며, 불자들은 선망부모를 천도하는 우란분절 법회를 가진다.

 

이 우란분절 법회는 안거수행 대중에게 공양을 올린 공덕으로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한 목련존자의 효행에서 비롯되었다. 목련존자가 신통력을 얻은 후천안으로 어머니를 찾아보았더니 어머니가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구제할 방법을 부처님께 여쭈었더니 그때에 부처님은 지금 살아 있는 부모나7대의 선망부모를 위하여 하안거 해제일에 음식, 의복, 등촉, 평상 등을 갖추어 시방의 고승 대덕들에게 공양하면 그 공덕으로 지옥의 고통에서 구할 수 있다고 하여 그대로 행한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도 음력4월 초파일과 백중을 일년 중 가장 큰 행사로 여겼다.

 

민간에서는 이 날이 고된 농사를 끝내고, 벌이는 칠월의 세시명절이다. 세벌 김매기인 만두레를 끝낸 다음 벌이는 농민 및 머슴들의 대동 굿으로서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최대 축제일이었다. 불자들은 한여름의 풍성한 과일이나 햇곡식을 들고 절을 찾아 스님들께 공양하거나 조상천도를 위한 기도를 한다.

 

2 그 밖의 명절의례

 

불교가 이 땅에 전래된 지1, 600여년이 넘었다. 그 기간동안 불교는 민족과 영욕을 함께해 왔으며, 민속의 많은 부분을 불교의식 속에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전통민속과 불교행사가 서로 구별되지 않을 정도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민속명절을 하나의 의례로 정리하여 지켜가고 있다.

 

정월은 새해의 풍요와 안정을 희구하는 새로운 출발의 시기이면서 동시에 쉬면서 다가올 농사일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정월에 사찰에서는 마을 주민들과 더불어 여러 가지 행사를 했다. 즉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어온 장승이나 서낭당, 당산 거목, 국사당의 제사에 참여하거나, 절 입구의 서낭이나 장승 앞에서 원앙재(연말), 성황제(연초)를 지내 질병을 막고 절의 융성을 기원하기도 했다. 또는 신년 첫 법회를 사찰의 대중스님들과 불자들이 함께 지내며 일년의 평안을 발원하기도 한다. 이 법회를 통알(通謁) 혹은 세알(歲謁)이라고 하는데, 석가모니부처님을 비롯하여 삼보와 호법신중, 그리고 인연 있는 일체 대중에게 세배 드리는 의식이다.

 

2월에는 연등놀이가 유명했으나 요즘은4월 초파일 연등행사로 바뀌었다. 등은 각종 동식물의 형상을 본떠 만든 것 이외에도 일월등, 종등, 북등, 칠성등, 오행등 등의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이 연등행사를 보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 될 정도로 장엄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양력2월4일이나5일에 돌아오는 입춘에는 홍수, 태풍, 화재의 세 가지 재난인 삼재(三災)를 벗어나게 하는 삼재풀이를 하고 일년 내내 풍요로움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그 외에도 삼월 삼짇날 불공, 단오, 칠석 등 각종 민속절기마다 절에서는 불공과 기도를 올리며, 양력 12월22일이나 23일 돌아오는 동지에는 붉은 팥죽을 쑤어 먹으며 기원하기도 한다.

 

민족의 세시풍속을 불교가 받아들여 불교 명절화 된 것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민중들의 소망을 받아들여 고통을 함께 나누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불교가 민간신앙을 수용, 전승하며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중과 함께 가꾸어 나가는 민족종교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가정신행

 

가정은 우리들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인격이 성숙해가는 곳이고, 인류사회에 봉사하기 위한 기초적인 장소이다.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조건 없이 베풀고 돕는 기본적인 보살의 생활을 배우는 곳이며, 가족에서 출발하여 일가 친척과 이웃에게 연결되는 출발점으로 최상의 교육장이기도 하다. 사회생활을 위한 기능과 지식은 학교에서 얻을지라도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덕성과 지혜 품성은 가정교육에서 길러지게 된다. 진리의 가르침에 기초한 훌륭한 가정에서 재능과 인격의 원만한 성장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자의 가정은 항상 부처님의 크신 자비를 생각하는 곳이어야 한다. 자식은 부모님을 부처님처럼 받들고, 부모는 자녀들이 지극히 높은 덕성과 아름답고 밝은 지혜와 큰 복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믿으며 사랑하고 존중하며 키워야 한다.

 

그리고 가정은 수행 도량이 되어야 한다. 자기 생명을 참답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면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은 바로 수행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재가신자들이 오로지 수행만을 위해 출가한 스님들처럼 수행하기는 어렵다고 할지라도 하루 하루를 경건하게 보내고 수행자와 같은 정신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자질과 성품이 다르다. 상근기에게는 참선, 중근기에게는 경전을 읽는 간경, 하근기에게는 불보살의 명호를 지성으로 외우는 염불을 각기 적합한 수행으로 권한다. 수행법은 자신의 성품에 맞게 선택하여야 하며, 무엇보다 꾸준히 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 좋다. 혹은 기도와 절, 참회와 발원도 불자들이 가정에서 행할 수 있는 좋은 수행법이라 하겠다.

 

하루 중의 수행법으로는 단순하게 일정한 시간을 정해108배를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경전을 읽는다든지 하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수행 자체가 초심자에게는 맹목적, 의무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좋다 .

 

대략 집에서는 입정, 삼귀의, 독경, 기도발원, 사홍서원의 순서에 따라 진행하면 된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인 새벽의 수행은 그날 하루를 즐겁고 보람되게 하며, 하루를 정리하는 저녁의 수행은 하루를 돌이켜 반성하며 더 나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것이다.

 

또한 수행시간만이 아니라 평소의 모든 일, 모든 사람에 대해 언제나 육바라밀행을 실천하도록 자신의 생활을 가다듬는다면 매일매일의 생활은 복된 생활로 바뀔 것이다.

 

불자들의 가정신행은 항상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중생들은 지은 업장이 두텁고 복덕이 엷어 하는 일이 뜻대로 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온갖 장애와 역경을 당하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지혜와 복덕이 구족한 불 보살님께 의지해 가피력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일방적으로 어떤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만 하는 기원이 아니라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어떻게 하겠다는 서원적 발원이어야 한다. 기도는 찬탄과 참회, 감사와 발원을 구체화시키는 고도의 수행 방법인 것이다.

 

5 역경을 이겨내는 불자의 자세

 

세상을 살다 보면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그 때 중생은 어쩔 수 없이 불 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게 된다. 불 보살의 가피는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을 바탕으로 수많은 생을 두고 자신을 희생해온 공덕으로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중생들이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모두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 지옥중생조차 모두 구원하겠다는 지장보살의 서원이 있고, 자신의 이름을 한번이라도 부르면 모두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태어나게 하겠다는 아미타부처님의 서원도 있다.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으로 중생을 위로하는 관세음보살과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하는 약사여래도 있다. 이러한 제불 보살님의 가피력에 의지하여 중생 하나하나는 스스로가 처한 절망적인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에서 끝난다면 불교인이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그러므로 바른 불교인은 불 보살님의 본원 가피력에 힘입어 스스로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듯이 스스로 중생구제의 큰 서원을 세워 일체중생에게 그 공덕을 회향해야 한다.

 

또 세상 사람들은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자기 탓이 아닌 남의 탓으로 돌린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고 세상을 한탄한다. 그러나 불교인은 우리 몸에 나타나는 재난이나 환경이 모두 내 마음의 상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고난을 당하면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이 지은 허물임을 알고 깊이 참회해야 한다. 그 허물은 금생의 것일 수도 있고 전생의 것일 수도 있다.

 

또한 고난을 당해서도 절망에 빠질 필요가 없다. 역경은 과거에 지은 잘못의 과보가 현재에 나타남으로써 소멸되는 것이니 잠복 중에 있던 나쁜 원인이 소멸되면 다행스러운 일이며 새로운 희망이 싹틀 전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불자는 고난 앞에서도 오히려 감사하고 불평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잃지 않으며 극복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지은 바 원인이 있어서 고난이 나타나는 것처럼, 희망은 오늘 새롭게 씨를 뿌림으로써 커 가는 것이므로 고난을 당해서도 새 희망을 일으키고 용맹 정진하여 새로운 전환의 계기를 만드는 것이다. 불자들은 고난과 역경을 당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서 끊임없이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켜 운명 그 자체를 바꿔 나가야 한다. 왜냐하면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 보왕삼매론

 

불자의 마음 자세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공부하는데 마음에 장애 없기를 바라지 말라.

마음에 장애가 없으면 배우는 것이 넘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장애 속에서 해탈을 얻으라  하셨느니라.

 

수행하는데 마(魔) 없기를 바라지 말라.

수행하는데 마가 없으면 서원이 굳건해지지 못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모든 마군을 수행의 벗으로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을 도모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말라.

일이 쉽게 되면 뜻이 경솔해지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여러 겁을 겪어서 일을 성취하라  하셨느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말라.

내가 이롭고자 하면 의리를 상하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순결로써 사귐을 길게 하라  하셨느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 주면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 지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공덕을 베풀려면 과보를 바라지 말라.

과보를 바라면 도모하는 뜻을 가지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덕 베푸는 것을 헌신처럼 버리라  하셨느니라.

 

이익을 분에 넘치게 바라지 말라.

이익이 분에 넘치면 어리석은 마음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적은 이익으로써 부자가 되라  하셨느니라.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되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써 수행하는 문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것이요,

행함을 구하는 것이 도리어 막히는 것이니, 이래서

부처님께서는 저 장애 가운데서 보리도를 얻으셨느니라.

저 앙굴마라와 제바달다의 무리가 모두 반역의 짓을 했지만 우리 부처님께서는 모두 수기를 주셔서 성불하게 하셨으니, 어찌 저의 거슬리는 것이 나를 순종함이 아니며 제가 방해한 것이 오히려 나를 성취하게 함이 아니리요.

요즘 세상에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먼저 역경에서 견디어 보지 못하면 장애에 부딪칠 때 능히 이겨내지 못해서 법왕의 큰 보배를 잃어버리게 되나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2 병자를 위하여

 

구병시식(救病施食)

 

구병시식은 병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찰에서 행하는 일종의 재례의식이다. 시식이란 업력에 의하여 고통 받는 영가(영혼)들에게 법식을 베풀어 천도하는 의식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우리 몸에 발생하는 병의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는데, 하나는 현세실조병(現世失調病)이라 하여 음식이나 몸과 마음가짐을 조절하지 못해 생기는 병이고, 두 번째는 선세행업병(先世行業病)이라 하여 과거에 저지른 온갖 악업의 결과가 현세의 질병이라는 과보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특히 누군가를 몹시 괴롭히거나 미워할 경우 그 업의 힘이 잠복해 있다가 현세에 자기 몸의 병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 몸이 병들었을 때 육체적인 원인을 찾아 물리적으로 다스리는 현대의학적 처방도 당장은 중요하지만, 자신의 업에 대한 참회와 더불어 주변의 모든 원한관계를 해소하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 공덕으로 병고의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구병시식은 육체와 정신이 따로 떨어져 있는 별개의 실체가 아니라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 속에서 작용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연기론적 사고를 바탕으로 복덕을 지어 병고와 액운을 이겨내려는 데에 본래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아난존자에 의해 비롯된 불교의 시식은 배고픈 귀신들을 법식을 통해 굶주림을 채우고 불법에 귀의하여 법문을 듣고 하루 속히 안락국에 태어나라는 천도 의식이지, 굿이나 귀신을 겁주어 쫓아내려는 미신적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만족시켜 원한의 마음을 풀게 하는데 있다.

 

구병시식의 절차는 먼저 삼귀의를 하고,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께 귀의하여 그의 위신력으로 책주귀신영가를 천도한다.

 

≪천수경≫을 외우고 멸악취진언을 하여 악취로부터 아귀들을 불러내어 병자의 내력을 유치(由致)로 설명한다. 설단에는 말 마(馬)자 와 금은전(金銀錢)각 일곱 글자와 남귀여귀(男鬼女鬼) 2개를 써서 붙이고 책주귀신영가 위패를 모신 다음, 일곱 접시의 밥과 찬, 그리고 삼색 과일 등 제반 음식을 차려놓고 간절하게 시식을 베푼 다음 문 밖에 나가서 봉송한다

 

영혼에게 드리는 향화청가영(香花請歌詠)을 살펴보면,

 

빚진 사람 원수가 되어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 그치지 못해

지금 시식을 베풀어 법식을 제공하니

무릇 깨달아 원한을 푸소서

 

로 되어 있어 구병시식이 전생의 빚을 갚고 원한을 풀어 현재의 병고를 이겨내는 의식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불자들이 지켜야 할 것은 시식, 특히 구병시식은 일반 불자들이 행할 수 있는 의식이 아니다. 수행공덕이 높으신 스님에 의하여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6 이 세상의 인연이 다하여

 

사람을 육체로만 판단할 때 사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지수화풍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진 이 육체는 미혹한 중생의 마음 상태가 인연이 되어 이루어진 것으로 비록 인연이 다하여 육체는 없어진다고 해도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는 한 여전히 미혹한 상태는 남는 것이다. 그렇지만 미혹한 마음도 본래 없는 것이므로 절대적인 깨달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또한 없는 것이다. 중생은 미혹 상태에 집착하여 육체를 잃은 후에도 여전히 어리석게도 미혹의 세상을 헤매이다 미혹된 몸을 받는다. 이것이 윤회(輪廻)다. 생전이냐 생후냐 하는 것은 오직 육체를 보느냐 안 보느냐의 차이뿐이다.

 

윤회하는 영혼(識)을 중유(中有 또는 中陰)라고 부르는데, 아직 다음 생을 받지 못한 상태를 말하며, 부처님의 법을 설하여 극락으로 인도하는 천도의식은 바로 이 단계에서 행해진다.

 

1 불교의 장례

 

죽은 이를 위해 장례 전에 행하는 의식을 시다림(尸陀林)이라고 한다. 원래 인도의 시타림(sita-vana)에서 유래한 말로, 시체를 버리는 추운 숲(寒林)이라는 뜻이다.

 

이 말이 우리 나라에서는 망자를 위해 설법하는 것으로 뜻이 변했다. 시다림 법문은 신라시대 이후로 관습화 되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성행하였고 오늘날은 불교장례법으로 일반화되었다.

 

사람이 죽으면 망자에게 <무상게>를 일러주고 입관하기 전에 목욕의식을 행한다. 경은 보통<<아미타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을 독경하고 서방 극락세계에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을 부르며 발원한다. 발원의 대상은 동て서て남て북て중앙에 있는 화장세계 노사나불과 동방 만월세계 약사불,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 남방 환희세계 보승불, 북방 무우세계 부동존불이다. 목욕을 시키고 수의를 입히는매 단계마다 영가를 위한 법문이 있게 되는데, 이는 부처님께 귀의하여 좋은 곳으로 인도하여 천도하는 의미가 있다. 장례절차가 끝나면 발인을 하게 되는데, 임시로 단을 만들고 제물을 정돈한 후 영구를 모시고 나와 제단 앞에 모신다. 법주가 거불과 청혼을 한 다음제문을 낭독한다. 법주의 법문이 끝나면 대중이 다함께≪반야심경≫을 독송한 뒤 추도문을 낭독하고 동참자들이 순서대로 분향한다. 발인이 끝나면 인로왕번을 든 사람이 앞장서고 명정, 사진, 법주, 상제, 일가친척, 조문객의 순으로 진행한다.

 

불교의 전통적인 장례법은 화장이다. 이를 다비(茶毘)의식이라고도 한다. 나무와 숯, 가마니 등으로 화장장을 만들고 관을 올려놓은 후 거화편을 외우고 불을 붙인다. 불이 붙은 다음에는 미타단을 신설해서 불공을 올리고 영가를 일단 봉송한 뒤에 위패를 만들어 창의(唱衣)한다. 시신이 어느 정도 타면 뼈를 뒤집으며 기골편(起骨篇)을 하고 완전히 다 타서 불이 꺼지면 재 속에서 뼈를 수습하며 습골편(拾骨篇)을 한다. 뼈를 부수면서는 쇄골편(碎骨篇)을 하고, 마지막 재를 날리면서는 산골편(散骨篇)을 한다.

 

유교 풍습의 여파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화장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로부터 받은 사대(육체)는물질(흙, 물, 불, 바람)의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은 후에까지 육체에 집착하여 화장보다 매장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진정으로 고인을 위한다면 화장 후 납골을 수습해서 본처(본래 고향)로 흩어주고 절에 모셔서 천도재를 잘 지내드리면 좋을 것이다. 천도재를 올리고 난 다음에는 위패를 납골당에 모시든지 아니면 가까운 곳에 성스러운 가족탑을 세워서 모시는 것이 좋다.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여 병들어 아픈 사람도 다른 사람의 건강한 장기를 이식 받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 있게 되었다. 보살은 중생을 위해 피와 살을 모두 다 준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죽은 이후에 이 육신에 대해 무엇을 아끼고 소중히 여길 것인가. 살아 생전에 장기기증 서약을 하고 다른 이의 생명을 살리는데 나의 장기가 쓰여진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불자들은 자신과 남이 더불어 사는 윤리의식을 가져야 한다.

 

2 나와 남을 위한 공덕-재(齋)

 

재(齋)는 깨끗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며 공덕을 닦는 의식이다. 재의 어원은 산스크리트어인 우포사다(uposadha)에서 유래되었는데 스님들의 공양의식을 뜻한다. 대개 스님들에 대한 공양은 집안의 경사나 상사(喪事), 제사 때에 이루어졌으므로 나중에는 제사의식으로까지 전환되었다. ≪목련경≫에는 공양을 받는 스님들의 숫자에 따라 오백승재의 명칭이 나오고, 중국에서는 양 무제가 사람의 숫자에 제한하지 않고 누구나 자유로이 동참할 수 있는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었다고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반승(飯僧)이라는 명칭으로 행해졌다.

 

원래 이 재는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간단히 불전의식을 집행하고 공양에 임했으나 그것이 점차 큰 법회의식으로 되어 호국법회의 형식으로까지 발전했다. 나중에는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을 위해 베풀어지는 일체의 행사를 통칭하는 말로 되었다. 요즈음은 스님들에 대한 공양부터 기도, 불공, 시식, 제사, 낙성, 기타 법회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재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3 천도재

 

자손이 조상을 돌보는 것은 인간의 근본을 귀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풍습이다. 천도재는 망자의 영혼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한 의식으로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재를 지내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모든 업을 소멸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의식이다. 그 내용은 영가에게 <무상게>를 일러주어 죽음이라는 현실을 만물 변화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영가로 하여금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따라 원래의 청정한 마음을 되찾도록 인도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권하는 내용이다. 또한 영가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재에 참석하여 공덕을 짓는 이들에게도 생사의 슬픔을 승화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 재의 공덕은7분공덕이라고 하여 망자와 동시에 재를 올린 이에게도 회향된다.

 

재의 진행은 주로 도량장엄을 하고 시련 대령 관욕 불공시식 등으로 행해지며, 그 종류도 49재, 100일재, 기제(忌祭), 소상, 대상 등의 정기적인 천도재와 수륙재, 필요에 따라 시설하는 부정기적인 천도재 등이 있다. 정기적인 재의 경우 돌아가신 날부터 시작하여 매 7일마다 계속하여 49일 되는 날까지의7번과 100일재, 소상, 대상을 합하여 10번을 하는데, 이는 명부의 시왕(十王)에게 심판을 받는다는 명부신앙에 근거한 것이다.

 

의식을 행하는 절차에 따라 상주권공재(常住勸供齋), 각배재(各拜齋), 영산재(靈山齋) 등의 몇 가지로 나뉜다. 가장 일반적인 것이 상주권공재이고 여기에 명부신앙의례를 첨가한 것이 각배재이며, 법화신앙을 가미한 것이 영산재이다. 절차는 시련(侍輦)에서 영가를 맞아들이고, 대령(對靈)에서는 영가를 간단히 대접하여 예배케 한다. 관욕에서는 불보살님을 맞이하기 위하여영가를 목욕시키고 신중작법으로 모든 신중을 맞아들인다. 상단권공에서 불단에 공양 드리고 법식을 베풀어 받게 한다. 그리고 봉송편에서 불보살을 모시고 영가를 봉송하고 마치는데 불자는 망자를 위한 기도로서 최소한 49재만이라도 지내야 할 것이다.

 

4 수륙재

 

수륙재(水陸齋)란 물이나 육지에 있는 외로운 귀신이나 배고파 굶주리는 아귀에게 공양하는 법회이다. 양나라 무제의 꿈에 어떤 스님이 나타나서 말하기를  사생육도(四生六道)의 중생들이 한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데 어찌하여 수륙재를 베풀어 그들을 제도하지 않는가? 이들을 제도하는 것이 모든 공덕 중에서 으뜸이 된다 고 하자 지공선사에게 부탁하여 수륙재를 행한 것이 그 시초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광종 22년 수원 갈양사에서 혜거국사가 처음 시행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정책으로 불사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태조는 진관사(津寬寺)를 나라의 수륙재를 여는 사사(寺社)로 지정하고 견암사, 석왕사, 관음굴 등에서 고려 왕씨들을 위한 수륙재를 베풀었다. 이 수륙재는 많은 물자와 인원이 동원되는 행사로서 국행(國行)수륙대재라고 할 정도로 국가적인 지원으로 진행되었다.

 

5 영산재

 

영산재(靈山齋)란 영축산에서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의 모습을 이 세상에 재현한 의식이다. 즉 온 세계 모든 성현들과 온 세계 스님들을 청하여 봉양하며 법문을 듣고 시방의 외로운 혼령들을 천도하고 무주고혼 영가들에게 장엄한 법식을 베풀어 극락왕생하도록 하는 의식이다.

 

먼저 도량을 장엄하는데 영산회상을 상징화하여 법당밖에 괘불을 시설하고 의식 도중에 범패 등의 불교음악을 공양하여 장엄한다. 단의 구성은 법당과 같이 상단은 괘불 앞에 설치하고 향, 차, 꽃, 과일, 등불, 쌀 등을 공양하고, 중단은 신중단으로, 하단은 그날의 영혼에게 제사 드리는 영단으로 구성한다. 절차는 49재 때와 마찬가지로 시련에서 시작하여 의식단 앞에 이르고 잠시정좌한 다음 각단마다 권공예배를 하고 축원을 하고 영단에 이르러 시식을 하고 회향하게 되는데 의식을 맡은 스님들을 선두로 참가한 대중이 도량을 돌면서 회향한다. 이 의식은 자작자수(自作自修)라는 수행과 기원, 회향, 추선공양이라고 하는 교리적 발전과 함께 발전된 의식이며, 우리 나라 전통음악과 무용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또한 민간신앙까지 수용한 불교의식이자 국가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영산회상곡)이기도 하다.

 

6 예수재

 

예수재(豫修齋)란 살아 생전에 미리 수행과 공덕을 닦아두는 재의식로서, 속설에는 자신의 49재를 미리지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다른 말로는 역수(逆修)라고도 한다. 49재는 순수하게 죽은 이를 위한 재이나, 예수재는 살아 있는 이가 자신의 사후를 위해 미리 준비함으로써 살아서나 죽어 행복을 함께 추구하는 아름다운 의례이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참회의 공덕으로 업장을 소멸하고, 지계와 보시로써 스스로 내생의 복락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경전을 독송하여 해탈과 열반의 길에 들어서고자하는 것이며, 불보살님과 명부시왕을 비롯한 많은 성현들에게 공양을 올려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다.

 

불보살님과 호법신중의 가피력 아래 스스로의 참된 수행과 공덕으로 자신의 미래를 닦아나가는 의례인 예수재는 불교신앙의 전통을 대중과 함께 구현하고있다는 점에서 뜻 깊은 의례라 하겠다.

 

 

제5장 함께 사는 세상

 

1 공동체 생활

 

어리석게 살지 말라.

남의 흉내를 내면서

살지 말라.

잘못된 생각에 끌려

가지 말라.

그리고 물질에 너무

탐닉하지도 말라.

《법구경》

 

매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가정에서는 가족과 친척, 학교에서는 스승과 친구, 그리고 직장에서는 동료와 상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과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사람 사이의 갈등은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너 와  나 라는 입장에서 자기 것을 집착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된다. 함께 살아가면서도  너 와  나 로 나뉜 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에게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닌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무지에서 벗어나 진리를 발견하게 되면 결국  너 와  내 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라는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라는 공동체의 의식을 가질 때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층 가깝고 따뜻한 사이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수행이 필요하고, 자신보다 나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배우려는 자세로 나아가야 하며,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자신도 과거에 그러했음을 반성하며 친절하게 일러주는 태도로 나아가야 한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 행동은 어디서나 문제의 화근이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대는 사람은 물길을 바로잡고

활 만드는 사람은 화살을 바로잡고

저 목수는 나무를 다루고

현명한 이는 지혜롭게 자신을 다스린다.

《법구경》

 

1 수행과 화합의 공동체

 

거대한 댐이 작은 구멍 하나로 무너지듯이 사회라는 큰 틀도 개인의 변화에 크게 좌우된다. 특히 도시화 되고 문명의 이기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있어 개인의 깨달음과 바른 삶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개인의 변화는 이 시대 개혁의 출발점이자 완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도덕과 최소한의 규범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불자들이 지켜야 할 생활규범의 원칙으로 다음의 열 가지를 말씀하셨다. 이 열 가지 원칙들은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에 바탕을 둔 것으로, 몸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 입은 네 가지, 생각과 관련된 것이 세 가지이다.

 

첫째로 몸과 관련된 규칙으로는, 남의 것을 훔치기 보다는 남에게 베풀 것(不偸盜), 다른 사람과 삿된 관계를 갖지 말고 정숙한 생활을 할 것(不邪游), 술에 탐닉하지 말 것(不飮酒)을 강조하셨다. 이것은 자신에게도 해로울 뿐 아니라 다른 이를 고통에 빠뜨리는 근원이 된다.

 

둘째로 입으로는 먼저, 남에게 거짓말보다는 정직한 말을 해야 한다. 이것이 불망어(不妄語)이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자신의 조그마한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러나 그것은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당당한 사람이 되어 거짓말에 쏟는 정열과 노력을 돌려 정직하게 살아가야 함은 물론, 욕설보다는 부드러운 말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안온한 상태에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불악구(不惡口)이다. 남을 속이는 일은 나를 속이는 일이고 이런 행동이 점점 심해지면 나중에는 습관적으로 남을 속이는 행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자의식은 언제나 잠재하고 있어 나중에는 스스로 항상 누가 나를 속이지나 않나 의심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깊어지면 심리적 변화를 유발하기도 한다. 따라서 바른 말을 하여 신뢰의 바탕을 쌓아야 한다. 이것이 불기어(不綺語)이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못 봐주는 의식에서 나온 속담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될 경우 믿음보다는 불신이 심화될 것이다. 불자들은 진실한 말과 행동으로 남들을 이간시키거나 불신의 소지를 남겨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간질이 깊어지면 사회가 혼란스러워진다. 이것을 피하는 길이 불양설(不兩舌)이다.

 

셋째는 생각과 관련된 규칙들이다. 우리들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뿐이다. 사실 잘못된 행동을 돌아보면 탐욕이 그 근원이다. 따라서 탐욕을 버리는 정신수양이 필요하다. 부처님께서는 늘 무욕의 경지를 설하셨다. 한편, 잘못된 생각 한번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는 때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특히 성냄이 그 으뜸이다. 따라서 자신의 성격을 잘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며, 그것은 수행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성냄이 없는 경지를 무에(無 )라고 한다.

 

2 보시(布施)

 

인색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베풀 줄을 모른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은

베푸는 걸 좋아 하나니

그는 그 선행으로 인하여

보다 높은 세상에서 축복을 누리게 된다.

《법구경》

 

옛날 인도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든지 베풀어 주면 그 공덕으로 자신에게 좋은 과보가 돌아온다고 믿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과 수행자 등을 만나면 자신의 복을 짓게 해준다고 믿고 의지하며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주었다. 까닭에 도움을 받는 사람을 복전 또는 복밭이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보시라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신 후 고통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르셨다. 부처님께서 보이신 연민과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연민과 사랑의 마음인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보시이다. 보시에는 재물을 베풀어 주는 재시(財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법시(法施)가 있다.

 

자기 것을 다른 이에게 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과 욕심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보시는 자신의 것을 남에게 기쁜 마음으로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시는 우리의 집착과 그로 인해 생긴 모든 번뇌를 없애주는 길이기도 하다. 탐욕을 버리는 가장 좋은 길은 첫째, 지혜의 눈을 뜨는 것이요. 둘째, 행동으로 나의 것을 남에게 베풀어 주는 마음이라 한다.

 

어떤 마을에 두 거부가 있었다. 갑(甲)은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는 반면 을(乙)은 그렇지 못했다. 많은 보시와 좋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을은 존경을 받지 못하자 항상 그것을 궁금하게 여겨왔다. 그러던 어느 날, 을이 집 근처의 숲을 거닐고 있을 때 거지가 앉아 있었다. 을은 그에게 돈을 주고 돌아왔다. 다음날 을이 산책을 하고 있을 때 전날 보았던 거지가 또 그 자리에 앉아 있자, 을은 그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그에게 돈을 주었다. 그리고 을은 거지에게 갑도 돈을 주더냐고 물었다. 그러자 거지는 을을 바라보면서 갑 또한 자신에게 돈을 주지만 을처럼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적은 한번도 없다고 말했다. 그때에 을(乙)은 자신이 존경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처럼 보시를 행할 때에는 주는 이와 받는 이가 따로 있다는 생각을 내서는 안된다. 물질의 소유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불성을 지닌 평등한 존재이다. 부처님은 보시할 때 어떠한 보답을 바래서는 안되며 심지어 자신이 남에게 보시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3 지계(持戒)

 

부처님이 생존해 계실 때, 전생에 옷을 꿰매다가 이(옷이나 머리 속에 사는 벌레)의 등을 찔러 죽인 대가로 열반에 들기 전에 등창이 생겨 고생했다고 하는 내용이 전생담에 실려있다. 이것은 깨달음에 이른 사람조차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알게 모르게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결국 다시 본인에게로 되돌아 온다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행위를 하더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동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되지않겠느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없듯, 악한 행위에 좋은 결과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행동은 내일의 모습을 결정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행한 모든 행동은 결국 우리자신에게로 돌아온다고 하셨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큰 항아리를 채우는 것과 같이, 우리가  별거 아니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면서 저지른 악행이 결국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한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행에 물든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좋은 행위는 쉽게 몸에 배이지 않지만, 나쁜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항상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자신을 다스리는데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열반경에서 제자들에게 계를 스승 삼아 열심히 정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은

일체 보지 말라.

이미 저질렀거나 아직

저지르지 않았거나를 막론하고

그대 자신의 잘못은

반드시 되돌아 보라

《수타니파타》

 

4 인욕(忍辱)

 

불교를 흔히 수행의 종교라 한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참아가며 참사람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참는다는 것은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을 자제하는 것을 말하며, 탐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켜보는 것이 필요하고, 성내는 마음을 잘 참기 위해서는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물이나 조건 혹은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로 하여금 분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하는 상대방이 있을 때에는,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거나, 혹은 그가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그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도 생기고 저절로 참을성이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마치 초보 운전자가 길과 교통체계를 알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행동)을 보고 경멸할 것이 아니라 자신도 그런 시절이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살며시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와 이해하는 참을성을 길러야 하겠다.

 

5 정진(精進)

 

과거의 버릇이 얼마나 오래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주는 속담에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실천하는 삶을 살려고 해도 과거의 탐욕에 길들여진 버릇을 하루 아침에 털어버리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몸과 말과 마음의 수행이 어느 정도 되는가 싶다가도 금방 그것을 흔들고 허물어 버리는 삼독심이 솟구치곤 한다. 그러므로 보다 굳건한 마음으로 생활하면서 과거의 습관을 바꾸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투철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다시는 어제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그 길을 용감하게 가는 일이 중요하다. 반복하여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그 보다 더 끈질기게 다시 떨치고 일어나는 용맹한 정진심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깨달음을 이루고 못 이루는 것도 정진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행위의 결과를 미리 예측해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결과에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안다면 정진에 많은 장애를 극복하게 될 것이다. 더욱 열심히 깨달음의 길을 향해 정진해야만 어제와 다른 내일을 맞이할 수 있다

 

6 선정(禪定)

 

앞에서 본 것처럼 선정은 개인의 수행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내가 먼저 인욕하고 깊이 있는 생각으로 모든 행동을 차분하게 처리한다면 상대방도 다투려는 마음보다는 평온한 마음으로 상대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는 수행인 선정을 닦아야 한다.

 

선정은 지혜로 나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머리가 좋은 사람만이 가는 것도 아니고 학벌과 학위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어떤 것에 대한 관심을 갖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자신이 그 동안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전체의 모습과 나와 남으로 나눌 수 없는 하나로 연결된 삶의 전과정이 드러나고, 그 속에서 지킬 것과 얻을 것, 버릴 것 등을 바르게 판단하는 것이다.

 

7 지혜(智慧)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꽃피울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좋은 향기를 준다. 마치 언덕에 곱게 핀 꽃이 그윽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그 향기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듯이, 지혜로운 이를 곁에 사는 삶은 나와 이웃 그리고 자연의 세계를 정화시키는 감로의 물줄기가 될 것이다.

 

스스로 깨끗한 사람이

되고, 서로 동정심을

가지고

청정한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하라.

그곳에서 서로 사이 좋게

총명하게

그리고 고뇌를

없애도록 하라.

《수타니파타》

 

2 사람과 사람사이

 

부처님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길을 제시해 주셨다. 그 길을 가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부처님께서 밝혀 놓으신 길을 통해 우리들의 삶의 방식을 비추어 보도록 한다.

 

1 부모와 자식

 

바다와 같이 넓고 끝없는 사랑을 우리는 흔히 부모의 사랑이라 한다. 하나의 생명을 잉태하여 스스로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부모는 자식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존재이다. 자식은 부모에게 있어 분신과 같은 소중한 존재이며 활기와 희로애락의 원천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로부터 부모와 자식 사이는 인륜이 아니라 천륜, 즉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해야 할 일과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첫째,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자식이 악행을 멀리하고 착한 일을 하게 해야 한다.

 

셋째, 적절한 교육과 생계의 수단인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해 주어야 한다.

 

넷째, 결혼할 때가 되어 배우자가 정해지면 가정을 이루도록 해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시간이 흐르면 부모는 어느새 나이가 들어 자식들에게 의지하여 살게 된다. 이것은 자식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효도라고 하셨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어준 은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해야 할 일은

 

첫째, 늙으신 부모님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이 항상 보살펴 드려야 한다.

 

둘째, 부모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집안 일을 이어받아 바르게 처리해야 한다.

 

셋째, 조상님께 제사를 올리며 그 뜻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부모와 자식간의 세대차이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부모는 부모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자신들의 생각을 고집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느 세대나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기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다정 다감한 친구 같은 부모가 되고, 부모를 인생의 선배로서 존경할 줄 아는 자식이 되면, 소위 세대간의 벽도 허물 수 있게 될 것이다.

 

2 스승과 제자

 

서당에서 양쪽으로 댕기를 맨 아이가 종아리를 드러내고 스승 앞에 서있는 모습을 그린 옛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에 훈훈한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매를 맞으면서도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학동, 엄한 얼굴이지만 친근감이 느껴지는 스승의 모습에서 우리는 사제지간의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시대에서 이러한 모습을 요구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에게 있는 모든 지식을 제자에게 가르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제자를 격려하고 직접 좋은 본보기가 되어야 하고, 제자는 열심히 스승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며, 스승을 존경하고 받들면서 살아야 한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3 부부

 

불교에서는 전생부터 지금까지5백 생의 인연이 있어야만 부부가 된다고 한다. 그만큼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 남녀의 만남은 소중한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사이가 부부라고 했다. 부부는 흐르는 물과 공기처럼 늘 가까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을 잃게 된다면, 그 빈자리는 쉽게 채워지지 않는다. 하나의 가족이라는 사회를 형성한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며 의지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하지 않으면 자식들은 그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될 것이다. 문제 있는 부모로부터 문제아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부모에게 문제가 생겨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말한다. 부모의 불화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 것은 자식들이다. 순간의 기분에 이끌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내던져 버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 그러므로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부처님께서는 말씀 하셨다.

 

부모를 섬기는 것,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하지 않는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다.

《수타니파타》

 

4 친구

 

친구는 제2의  자신 이라 한다. 성실하게 살아가던 사람도 친구를 잘못 만나면 나쁜 길로 빠지는 경우를 본다. 친구를 사귈 때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신을 목숨처럼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친구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성공했다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친구가 있느냐?하는 양이 아니라 진정한 친구가 있느냐?하는 질이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사리불 존자와 목건련존자가 있었다. 이들은 한 스승 밑에서 함께 수행하던 친구였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서로 연락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살다가 어느날 부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은 함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가까이 하면 유익한 친구와 멀리 해야 할 친구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가까이할 친구>

 

첫째, 친구가 취했을 때 재산을 지켜주고 두려워할 때 보호자가 되어 주며, 필요한 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두 배 이상의 재산이라도 줄 수 있는 친구이다.

 

둘째, 즐거우나 괴로우나 항상 변하지 않는 벗이란 자기의 비밀을 말해주고 또한 나의 비밀을 지켜준다. 재산을 잃어 가난해졌을 때도 버리지 않고, 친구의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리는 친구이다.

 

셋째, 착한 말만 하는 친구는 악한 일을 멀리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한다. 새로운 정보를 말해주고 성인의 가르침을 말해주고 인도해 주는 친구이다.

 

넷째, 동정 있는 벗은 친구가 약해졌을 때 기뻐하지 않고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도 기뻐한다. 비난하고 험담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찬양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친구이다.

 

나의 결점을

일러주는 친구,

나의 결점을

꾸짖어 주는 친구,

이런 사람 만나거든

그를 따르라.

그는 나에게

보물이 감추어진 곳을 일러주는

사람 같나니

그를 따르면

많은 이익이 있다.

《법구경》

 

<멀리할 친구>

 

첫째, 무엇이나 눈에 띠는 것은 가져가고,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으려 한다. 자발적이 아닌 두려움에서 일을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일한다.

 

둘째, 교묘한 말로 우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고 필요 없는 애교를 부린다. 해야 할 일이 눈 앞에 닥치면 태도가 달라진다.

 

셋째, 감언이설로 상대방의 나쁜 일에만 보조를 맞추고 좋은 일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고 돌아서면 비웃고 험담한다.

 

넷째, 생활이 문란하고 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같이 즐길 때는 좋지만, 결국 무기력하고 사회에서 쓸모 없는 사람으로 몰아간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친구마저 파멸시키므로 멀리해야 한다.

 

의롭지 못한 것을 보고

그릇되고 굽은 것에 사로잡힌

나쁜 벗을 멀리하라.

탐욕에 빠져 게으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5 직장에서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절반 이상이 직장에서 받는 것이라고 한다. 과다한 업무와 직장 동료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받는 심리적 압박감은 대단히 심각하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에게 배려하는 마음을 조금씩 내기만 한다면 서서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내가 먼저 달라지면 전체 사회가 달라지게 될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과 격려, 그리고 이해를 통해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곳을 만들어 가야 한다. 상사는 부하 직원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일에 대한 흥미와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해 주어야 한다. 또 적당한 여가를 주어 생활의 활기를 찾도록 해주고, 잘못이 있을 경우엔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잘 타일러준다. 반대로 부하 직원은 직장과 인생의 선배인 상사를 존중해야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상사가 없는 곳에서 험담을 해서는 안된다. 직장은 가정 다음으로 중요한 삶의 터전이다. 직장을 통해 개인의 능력을 발휘하고 그에 따른 보수로 생활을 한다. 서로 존중하고, 선의의 경쟁을 통해 자기 성취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이다.

 

6 타종교인과의 관계

 

우리가 사는 사회는 여러 사람들이 다양한 문화와 더불어 사는 곳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종교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중에서 다른 종교에서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믿지 말라고 가르치고 만약 그 가르침을 믿지 않을 경우 끝내 구원을 받지 못하고 영생하지 못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타종교의 역사와 교리가 서로 다르다고 하여 타종교인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타종교인에게도 깨달음을 전해주어 함께 진리의 세계에 나아가 참다운 삶을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그들도 모두 청정한 삶의 세계인 불국토를 만들어갈 수 있는 동지적인 동시에 그 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한국문화에 살아 숨쉬는 불교의 사상은 다른 민족이 갖고 있는 사상과 문화를 섭수하여 우리민족의 문화로 승화시킨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따라서 타종교인에 대한 관계도 그들과 함께 우리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형성하고 보존 한다는 입장에서 상호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3 청정한 세상을 위하여

 

한때 우리나라는 삼천리 금수강산이라 하여 물 맑고 공기 깨끗하며 경치 좋기로 유명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난 뒤의 경제발전의 대가로 우리는 금수강산을 잃어버렸다. 그 대신에 공해, 폐수, 생태계 파괴 등의 용어에 익숙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주위에서 환경보호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것은 우리 모두가 환경문제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이 환경문제가 우리의 생활과 생존을 위협할 정도로 심해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최근의 몇 차례 물 파동을 겪으면서 우리들은 수돗물이 마음대로 마실 게 못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이름난 우리나라에서 이제는 마실 물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는 생수를 만들어 파는 업체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심지어 외국의 물을 수입 해다 팔기도 한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깨끗한 약수 물을 구하러 산에 오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그나마 약수 물도 믿지 못해서 전문 생수업체에서 생수를 사서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기는 또한 어떠한가? 도시 근방의 산에라도 올라 보면 탁 트인 풍경이 우리를 반기는 것이 아니라 희뿌연 먼지로 덮인 회색 도시만이 나타난다. 비라도 오면 이 비가 산성비는 아닐까?하는 걱정이 앞서고 그래서 함부로 비 맞을 엄두를 낼 수 없다. 자동차들이 내뿜는 매연 속의 도심을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는 누구라도 느껴보았을 것이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쉽게 실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만 오존층이 파괴되는 현상도 지구 전체로 본다면 인류 생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물과 공기의 문제만이 아니다. 쓰레기, 중금속, 방사능등등 이외에도 환경과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우리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오래 전 옛날에는 환경오염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자연 속에서 너무나 미미했으며 그나마 자연은 인간이 행하는 모든 행동들도 포용할 수 있는 순탄한 재생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자연의 재생력이 둔화되었고, 이제는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은 17~18세기 이후부터 서양의 과학문명이 발달하면서 산업화가 이루어진 시기부터 였으며 우리 나라로 한정해서 본다면 60~70년대의 경제개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에 대한 훼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들은 태양에너지로부터 에너지를 공급 받아 자라고 있으며 이 동식물들은 서로간에 다양한 먹이사슬을 유지하며 하나의 균형 있는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자연환경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베고 물을 끌어당기고 도시를 건설하고 전기를 만들어냈다. 각종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냈으며 여러 생활 용품들을 만들어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했다. 늘어나는 인구와 이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생산활동, 그리고 물질적 생활은 어느새 자연 생태계의 원활한 흐름을 위협하게 되었다. 과학문명과 경제개발만으로 이러한 상태가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과학문명과 결합된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욕심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생태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자연을 그저 개발하고 이용할 대상으로만 보았으며 자연이 인간과 하나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연을 개발하는 것이 우리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늘어가는 물질적 풍요가 자연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개발의 훌륭한 성과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 빠졌던 것이다. 일찍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식량은 산술 급수적으로 늘어난다고 말한 서양의 학자가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러한 인구증가가 일으키는 문제보다 사람의 욕심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점은 미처 생각치 못한 것 같다. 간디는 “자연의 자원은 인류가 생존하기에 충분한 양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한 인류의 탐욕으로 마침내 자연은 돌아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환경문제를 두고 우리 불자들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부처님의 연기의 가르침은 이러한 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자연과 우리는 원래 둘이 아니며 서로 의지하면서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동체대비라는 말이 있다. 이는 환경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각을 교정 시켜주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리라고 본다. 자신과 환경이 둘이 아니라면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망치는 일을 하지않듯이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활에서 기본적 요소는 아무래도 의식주 생활일 것이며 현대의 물질 문명 역시 의식주 생활을 중심으로 발전해 온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 당시의 의식주 생활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모범이 될 것이다. 만족을 아는 생활, 무소유와 근검절약이라는 생활원리는 환경을 살리는 길이며 자신을 살리는 길이다. 예를 들어 발우 공양을 하는 경우 음식쓰레기를 줄이고, 수질오염을 막을 수 있는 대안이 된다. 나 하나의 실천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소극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바뀌면 세계가 바뀐다는 적극적인 사명감으로 생활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사찰 주변은 그나마 청정한 지역에 속하며 이를 계속 지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즉 절에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만약 차를 가져갔을 경우에는 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가급적 걸어서 참배를 하도록 함이 좋겠다. 또한 계곡을 올라가면서 계곡 주변에서 취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지정된 장소에서 취사하도록 권유하고 청정구역을 보존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는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반드시 분리수거를 하고, 합성세제, 1회 용품 등 환경오염의 소지가 있는 제품의 사용은 자제하며, 절제된 소비로 지나친 자원낭비를 줄여가야 하겠다. 불자들이 생활에서 구현하는 이 실천은 개인적으로 다소 번거로운 점도 있을 것이지만 환경보호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명심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또한 개개인은 사회 속에서 환경보호의 파수꾼이 되어 환경을 지켜나가도록 해야 한다. 기업가는 자신의 상품생산이 자연을 파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과학자는 과학자대로 자신의 영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환경보호활동을 펼쳐야 한다. 환경보전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각종 노력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에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 전환이다. 인간과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여 자연을 개발의 대상으로만 보고 그래서 자연의 파괴를 부추기는 인간 중심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기에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자연이 파괴되면 인간 또한 그 삶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아픔이 곧 우리의 아픔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자연을 살리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다.

 

4 통일을 준비하는 불교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해방되어 그 기쁨을 누려 보기도전에 분단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으며 그 고통의 시간도 어언 50여 년에 이르게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단으로 인해 이산가족이 되는 고통을 겪었으며 그 아픈 사연들을 속으로만 갈무리해야 했다. 더욱 안타까웠던 것은 지난 시절 동안 국내외적인 여건이 통일에 대해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반세기 동안에 통일을 향한 진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불자들은 불자들 나름대로 통일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독일의 통일에서 보여지듯이 갑자기 통일이 실현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시대는 변한다. 탈냉전시대를 맞으면서 세계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이 붕괴되었으며 우리와 같은 분단국이었던 동서독은 통일의 감격을 이루게 되는 등 대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우리나라의 내부상황도 상당히 개선되어서 대내외적으로 남북간의 접촉이 빈번해지고 있는 등 우리민족은 다시 금 통일을 향한 꿈을 키울 수가 있게 되었다. 남북간에 쌀이 교환되고 기업인들과 과학자들이 교류하고 있는 등 이전 같지않은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아직도 통일을 향한 길은 그리 쉽지 만은 않아 보인다. 현재 이산가족의 상봉은 고사하고 생사 확인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고 보면 우리 불자들 아니 우리 국민 모두에게 통일은 여전히 민족의 커다란 소원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민족 분단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족의 동질성 회복은 자꾸만 어려워져 가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의 통일은 정치적으로 한 나라가 되는 것에 앞서 정신적으로 한 나라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독일 통일에서 보듯이 통일 후의 동서독 국민간의 사회적 괴리감과 정신적 갈등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음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민족의 통일에서는 그러한 장애가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민족의 통일은 정치적 측면만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의 전 영역에 걸친 모든 여건을 고려함으로써 독일 통일 후에 나타난 혼란을 겪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남북의 동질성회복과 연관되어 있으며 동질성의 회복은 정부 당국자 몇몇의 정책을 통해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온 국민이 담당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국민 모두가 사회 각 분야에서 통일에 대한 지속적이고 다양한 논의를 일으키고 관심을 가진다면 현재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통일정책과 어울리면서 민족통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민족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서 경제, 예술, 스포츠, 학술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의 노력이 시도되고 있으며 이러한 노력은 종교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교 역시 민족 동질성 회복과 통일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과 역할을 수행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불교계의 이러한 역할은 이미 삼국통일 시대부터 전통적으로 자리잡아 왔다. 일찍이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원효스님이 전쟁의 상처로 신음하는 민중에게 불교 사상으로 동질감을 회복시켰고, 화쟁 정신으로 갈등을 푸는 실마리를 제공한 역사가 있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 때에도 대장경을 조판하면서 꿋꿋이 국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도 역시 불교의 힘이 적지 않았다. 유교사상을 중심으로 하던 조선시대에서 조차도 임진왜란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민중과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 애쓴 사실은 불교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여 왔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통일을 준비하는 불자들은 우선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족의 동질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북한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을 풀어야 한다. 증오와 미움을 갖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미움을 간직한 채로는 다른 한쪽과 손을 맞잡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설사 그런 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미움으로 인한 또 다른 갈등이 생기게 된다. 미움과 증오를 버리는 것이 민족 화해의 첫걸음 이기도 하며 민족 동질성 회복의 초석이 된다. 불교계가 민족통일에 기여하기 위해선 남북간의 불교교류를 활발히 전개해야 할 것이다. 교류를 통한 남북간의 다양한 접촉이 서로의 이해를 도와주는 계기가 될 것이며 분단의 아픔을 어느 정도나마 해소 시킬 수 있는 자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 각 사찰에 대한 상호방문 및 서신교류,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 등 다채로운 교류의 길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한의 사찰을 복원하거나 신축하는데 같이 참여하거나 불교병원 등의 복지사업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은 불교도만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타 종단과의 통일을 위한 교류를 함께할 필요도 있다. 통일을 위한 다양한 노력에 불교가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통일 대안을 마련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민족에게 있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동질성의 회복이다. 더욱이 불교는 인간 내면적 심성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므로, 불교인들도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업에서 담당할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제6장 절을 찾아서

 

절은 불자의 귀의처이다. 절에서 속세의 때를 말끔히 씻고 삶에 대한 경건함과 무욕의 삶에 대한 가르침을 배워야 한다. 절에 참배하는 것만으로 불자라 하지 말고, 법회에 정기적으로 동참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참회와 발원을 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신행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삶의 시작은 불교의 예절을 잘 배워 행하는 것이다.

 

1 불자의 자세와 행동

 

불교에는 불교만의 예절과 의례가 있다.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불자들은 불교의 예절을 잘 알아 두면 편한 마음으로 불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 예절의 근본정신은 늘 부처님을 생각하고 가르침을 되새기며 행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예절을 아는 것은 깨달음의 첫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못을 반성하고 삶 속에서 다가오는 삿된 유혹을 물리치며, 우환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하거나 스님을 찾아 뵙고 상의하는 것이 좋다. 개인의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식사를 할 때에 먼저 합장한 뒤에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며, 맛에 탐닉하거나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쳤음을 부처님께 감사 드리고, 행여 언짢은 일 때문에 걱정하거나 원망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품은 채 잠들지 말아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하루를 참되게 살아가도록 기도하거나 수행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삼보에 귀의한 불자로서 평상시 모든 행이 겸허해야 하겠지만, 특히 수행 도량인 절에서는 더욱 정숙하고 경건한 자세가 기본이다.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몸가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행의 길에 수행자의 자세는 마음이 표현된 모습이므로 항상 경건하고 겸허한 자세가 기본이라 하겠다.

 

지금부터 불자들이 취해야 할 자세와 행동, 서있는 자세, 앉아있는 자세, 걷는 동작, 앉고 서는 동작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또한 손 모양의 기본 자세인 합장과 차수(叉手), 그리고 그 밖의 수행과 신행생활(信行生活)에 대하여 살펴보자.

 

1 차수(叉手)와 합장(合掌)

 

차수는 손을 교차한다는 말 그대로 도량에서 평상시 손을 쓰지 않을 때 하는 자세이다. 손에 힘을 주지 말고 자연스럽게 손가락 부분이 서로 교차되게 하여 왼손의 손가락 부분을 오른손으로 가볍게 잡고 단전 부분에 가볍게 대고 있는 자세이다.

 

<차수>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손을 바꾸어서 왼손으로 오른손을 잡아도 무관한데, 어느 손이 위로 가는가 하는 문제는 사람마다 편하게 느끼는 상태에 따라 하면 된다.

 

합장은 부처님이 태어나신 인도의 전통적인 인사 법으로서 인사 및 예불, 법회 등 불교생활 전반에 걸쳐 가장 많이 쓰이는 예법이다. 합장은 손바닥을 마주 합하는 자세인데 손바닥이 밀착하여 빈틈이 없어야 하며 손가락 사이가 벌어져서도 안된다. 두 손을 통해서 마음을 모으고, 나아가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의 진리 위에 합쳐진 한 생명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합장>

 

차수와 합장은 서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앉아 있을 때에도 같은 요령으로 자세를 취할 수가 있다. 다만 차수인 경우에는 마주잡은 두 손을 단정하게 무릎 위에 놓으면 된다. 동작의 측면에서 볼 때는 차수에서 합장, 또는 합장에서 차수로 동작이 연결되어야 부드러운 자세를 유지할 수 있다.

 

2 앉아 있는 자세

 

1 ① 좌선(坐禪)

 

불자의 자세는 불자가 아닌 사람과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다른 점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앉는 자세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 불자의 앉는 자세는 참선 할 때의 좌선자세를 기본으로 한다. 이는 부처님께서도 그렇게 앉으셨고, 역대의 위대한 스님들은 물론 오늘날의 수행자들도 그렇게 앉아 용맹 정진하는 자세인 것이다.

 

좌선의 대표적인 자세는 결가부좌(結跏趺坐)이다 (제3장의 참선 자세 참조).

 

2 ② 꿇어앉은 자세

 

독경이나 염불 시에는 꿇어앉는 자세가 좋다. 장시간 동안 지속하기 어려운 자세이나 예경, 축원을 할 때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반드시 취해야 할 자세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때의 눌린 발은 절할 때의 발과 같이 오른발을 밑에 두고 그 위에 왼발을  times 자로 교차 시켜서 앉는 것이 보통인데, 자세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본인의 습관대로 오른발과 왼발을 바꾸든지 또는 두발을 일자로 나란히 놓아 힘들지 않고 오래 앉아있기에 적합한 자세를 취해도 좋다. 꿇어앉는 경우에도 허리를 곧바로 세우고 몸의 평형을 유지하여야 한다.

 

3 절의 의미와 공덕

 

불교의식에는 절을 하는 경우가 많다. 절은 삼보에 대한 예경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의미하며, 자신에게는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절은 그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수행 방법이기도 한데, 참회나 기도의 방법으로 108배, 1080배, 3000배등이 활용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예로부터 불교에서는 절을 많이 하면 아름다움과 건강을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으며, 스스로 두려움이 없어지고, 부처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시며, 훌륭한 위엄을 갖추게 되고, 모든 사람에게 호감을 주며, 죽어서는 극락에 태어나고, 마침내는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고 한다.

 

1 ① 반배(半拜)

 

삼보에 예경을 올리는 절은 큰 절이 원칙이지만 사정으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반배를 한다. 반배는 이를 때 한다.

 

㉠ 절 입구에서 법당을 향하여 절할 때

 

㉡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났을 때

 

㉢ 옥외에서 불탑에 절을 할 때

 

<반배>

 

㉣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 옥내 법회라 하더라도 동참 대중이 많아서 큰 절을 올리기 적합치 않을 경우

 

㉥ 3배나 108배, 1080배, 3000배 등의 오체투지 하기 전과 마친 후

 

㉦ 부처님 앞에 헌화를 하거나, 향, 초 그 밖의 공양물을 올리기 직전과 올린 후

 

㉧ 법당에 들어가거나 나오기 전

 

㉨ 기타 필요 시

 

2 ② 오체투지(五體投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삼보님께 하는 절은 오체투지의 큰 절을 원칙으로 한다. 이때 오체란 몸의 다섯 부분인 왼쪽 팔꿈치, 오른쪽 팔꿈치(양 팔꿈치), 왼쪽 무릎, 오른쪽 무릎(양 무릎), 이마를 말한다. 이것은 인도(印度)의 예절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도록 납작하게 엎드려 하는 절인데 인도에서는 접족례(接足禮)라 하여 온몸을 땅에 던져 절을 하면서 공경하는 이의 발을 두 손으로 떠받들었다고 한다.

 

<오체투지1>

 

오체투지의 절은 우리나라 재래 예법인 큰절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되 반드시 몸의 다섯 부분이 땅에 닿아야 한다. 이와 같은 오체투지의 예는 자신을 무한히 낮추면서 상대방에게 최대의 존경을 표하는 몸의 동작으로서 가장 경건한 예법이다.

 

오체투지의 큰절을 할 때 두 팔꿈치와 두 무릎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동작의 절차상 땅에 닿는 것이 비교적 수월하나 반드시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여야 한다. 큰절하는 동작을 순서대로 구분하면 먼저 서 있는 자세에서 합장하고 공손히 머리를 숙여 합장 반배를 한다. 그런 다음 합장한 자세에서 그대로 두 무릎을 굽혀 반듯하게 앉는다.

 

<오체투지2>

 

왼손을 가슴에 가볍게 대고, 오른손을 뻗어 몸을 굽히면서 이마가 닿을 지점을 짚는다. 이어 왼손을 오른손과 나란히 놓고 윗몸을 숙여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완전히 엎드린다. 엎드린 상태에서 두 손을 가볍게 뒤집어서 무언가 받들어 올리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이때 왼발은 오른발의 발바닥 위에 가볍게 포개어 놓아야 한다.

 

<오체투지3>

 

일어설 때는 엎드릴 때와 정반대의 순서를 따르는데, 먼저 펼쳤던 손을 다시 뒤집어 왼손을 가슴 부근에 갖다 댄 다음 오른손을 거두어 합장하면서 다리를 풀고 본래의 자세로 일어선다.

 

<오체투지4>

 

3 ③ 고두배(叩頭拜

 

불자는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정화시키기 위해서 몸을 던져 절을 하는 것이므로 기본적으로3배를 올린다. 그러나 아무리 무수한 절을 한다 해도 부처님에 대한 지극한 예경의 뜻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다. 따라서 3번째 절을 하고 일어서기 전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생각하며 지극한 마음을 더욱 더 간절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예배의 마지막 끝에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고두(叩頭)를 한다. 이는 또 유원반배(惟願半拜)라고도 하는데, 무수히 예경하고픈 간절한 심정을 여기서 마치게 되는 아쉬움을 표하는 예법이라 할 수 있다. 고두배는 삼배 뿐 아니라 1배, 7배, 108배를 비롯 모든 절의 마지막째 절을 마치고 일어서기 전에 한다.

 

고두배하는 법은 마지막 절을 마치고 몸이 오체투지의 상태에서 두 손바닥이 부처님을 받들기 위하여 위로 향한 자세에서 팔 굽을 펴지 말고 머리와 어깨를 들고 손은 얼굴 아래서 합장을 하였다가 손을 풀고 이마를 땅에 댄다. 머리를 들었을 때에 시선은 그대로 땅에 두어야 하며 고개를 들고 전방을 주시해서는 안된다. 머리와 어깨만을 잠깐 들었다 다시 이마를 땅에 대는 단순한 동작으로 할 수도 있고 머리와 어깨를 약간 들고 팔 굽을 땅에서 떼지 않은 채 그대로 손으로 합장 자세를 취하였다가 즉시 손을 풀고 다시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대는 방법도 있다.

 

<고두배>

 

4 사찰 예절

 

사찰은 거룩한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신성하고도 장엄한 곳이다. 속세의 때를 씻어 마음을 깨끗이 하는 곳이며, 스스로의 잘못을 참회하고 올바른 삶을 다짐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스님들이 상주하면서 공부하는 수행 도량이기도 하다.

 

사찰에 가면 일반적으로 일주문(一柱門), 불이문(不二門), 천왕문(天王門), 금강문(金剛門), 해탈문(解脫門)을 지나게 되는 것이 통례이다. 이외에도 사찰의 중심인 큰 법당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정해진 출입문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일주문은 사찰 입구이다. 세속의 미혹에 젖어 자신의 참모습을 잠시 잊고 살았더라도 여기서부터는 부처님도량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에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곳 일주문에서 합장하고 법당 쪽을 향해 공손하게 반배를 올리면서 사찰 예절이 시작된다. 일주문에 들어서면 집에 돌아갈 때까지 계속 조심스럽게 행동하여야 하는데, 사찰에서의 행동은 이렇게 한다.

 

법당 문에 들어갈 때에는 가운데 문으로 다니지 말고, 왼쪽 혹은 오른쪽 옆 문으로 출입하여야 하며 볼일 없이 법당에 들어간다든지 탑에 올라가서는 아니된다. 법당 앞이나 탑에 침을 뱉지 못하며, 모자나 지팡이를 법당 벽에 걸거나 기대지 아니하여야 한다. 그리고 불상이나 탑을 돌 때 먼저 합장 반배를 한 다음 합장한 채 시계방향으로 돌면 된다.

 

사찰에서는 항상 가운데를 피하는 것이 좋다. 부처님을 믿고 수행하는 이는 자기를 가장 낮은 위치에 두어야 하며 모든 이를 공경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일주문에서 법당을 향하여 반배를 올리고 자세를 바로 한 다음에 뒷짐을 지거나 주머니에 손을 넣지 말고 신발이 끌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길 한쪽을 택하여 걷는데 일반적으로 보행자의 방향인 좌측 통행이 무난하다.

 

><일주문>

 

다음으로 천왕문에 들어서면 좌우에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사천왕은 불교의 가르침에 감동한 나머지 스스로 불교를 보호하는 신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기로 원을 세운 하늘 신이다. 따라서 불자들은 원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반배의 예를 올린다. 아직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께 예배를 드리지는 않았어도 경의를 표할 대상을 만나는 경우에는 반배를 한다. 법당에 이르기 전에 역대 조사 스님의 부도(浮屠)를 지나게 되면 합장 반배하며 길에서 스님이나 법우(法友)를 만나는 경우에도 합장하고 반배를 하여야 한다.

 

법당 앞의 탑은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신성한 곳이며, 실제로 사리가 모셔져 있지 않더라도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반배로 삼배를 올린다. 그리고 탑을 도는 경우가 있는데, 공경하는 대상인 탑을 가운데 두고 자기의 오른 쪽에 탑이 위치하도록 하고 그 주위를 돈다. 이것은 왼쪽보다 오른쪽을 중요시하는 인도의 전통예법을 따른 것이다.

 

<법당전경>

 

몸이 불편하여 지팡이를 소지하거나 비오는 날에 우산을 가지고 사찰에 갔을 때에는 우산을 법당 벽에 기대어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찰에 와서는 화급을 다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먼저 법당에 들어가서 부처님께 참배하여야 한다. 대개의 경우 일주문, 천왕문, 해탈문을 지나서 곧바로 올라가면 사찰의 대웅전 마당에 이르고 마당에 설치된 탑 전에 예배를 드리고 계단을 올라가서 법당에 이르게 된다. 법당에 올라가는 계단은 중앙계단과 좌우의 계단이 별개로 있는 경우도 있고 넓은 중앙계단 하나만 있는 경우도 있는데 중앙계단을 피하여 오른쪽 또는 왼쪽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가야 하며 계단이 하나만 있는 경우에는 중앙을 피하고 측면으로 올라가야 한다. 법당 문 앞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는데 이때 신발은 잘 정돈하여야 한다. 정갈한 마음의 표현이 신발 벗는 데서도 나타나야 한다.

 

5 법당 예절

 

법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여러 개가 있는데 법당의 정면에 중앙 문이 있고 양쪽 옆에 각기 하나씩 문이 있다. 그리고 법당 좌우의 측면에 또 문이 하나씩 있는 것이 우리나라 법당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법당 안을 보면 가운데 상단이 마련되어 불보살님을 모시고 그 좌우에 신중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상단의 주좌(主座)를 기준으로 가운데 통로를 어간(御間)이라 하고 법당의 정면으로 난 가운데 문을 어간 문이라고 한다. 법당에 출입할 때에는 어간 문을 이용해서는 안되며 측면으로 난 문이나 좌middot우측의 문을 이용하여야 한다.

 

법당은 부처님을 모시고 스님과 불자들이 정진하는 신성한 장소이므로 항상 정숙을 요한다. 문을 열 때에 요란한 소리를 내게 되면 다른 불자들의 기도 정진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소리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문을 조용히 여는 행동 하나에서도 절제하는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법당 문을 열 때는 왼손으로 오른손의 손목을 받쳐 잡고 오른손으로 문고리를 잡은 다음 약간 들어올려서 문을 열어야 한다. 법당의 왼쪽 문으로 들어 갈 때에는 왼쪽 발을 먼저 들여 놓아야 하고 오른쪽 문으로 들어갈 때에는 오른쪽 발을 먼저 들여 놓아야 하는데, 왼쪽이나 오른쪽의 방향은 부처님을 중심으로 하여 정하면 된다. 부처님의 오른쪽에 서 있을 경우 만일 부처님을 향하여 왼쪽 발을 먼저 내딛게 되면 신체의 구조상 자연히 부처님을 등지게 되므로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러나 오른발을 먼저 내딛게 되면 가슴 쪽이 부처님을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른발 또는 왼발을 먼저 들여 놓는다는 것은 결국 자세에 있어서 부처님을 등지지 않고 잘 모시고자 하는 불자의 자세이다.

 

법당에 들어서면 상단(上壇)의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반배 한다. 다음에는 법당에 들어간 목적에 맞는 행동을 하는데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불전으로 나아가거나 또는 예배를 하기 위하여 적당한 자리를 찾아간다. 이때는 합장한 자세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걸어서 가야 한다. 또 부처님께 절하고 있는 다른 불자의 머리맡을 지나지 않고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하고 또 상단을 중심으로 하여 가운데 통로인 어간은 사용해서는 안되며, 부득이 어간을 지나갈 때에는 합장한 자세로 허리를 굽히고 경건하게 통과 하여야 한다.

 

부처님께 향이나 초를 올리기 위하여 준비하였더라도 이미 촛불이 켜져 있거나 향이 피워져 있으면 준비한 향과 초를 그대로 부처님 전에 올려놓는 것으로 공양을 대신하여야 한다. 다른 사람이 켜 놓은 촛불을 끄고 자기가 준비한 초에 다시 불을 붙여 올린다든지 이미 촛불과 향불이 피워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옆에 다시 촛불과 향불을 켜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향을 올리는 방법은 합장한 자세 그대로 부처님 전으로 조용히 걸어서 나아간다. 부처님께서 계신 탁자 앞에 이르게 되면 그 자리에서 반배를 올린다. 그리고 향합에 있는 향이나 또는 준비한 향 한대를 오른손으로 집되, 향의 중심부를 오른 손으로 잡고 촛불에 향불을 붙인다. 향에 붙은 불을 입김으로 끄지 말고 손을 이용하거나 기타 다른 방법으로 경건하게 꺼야 한다. 불 붙은 쪽이 위로 가도록 두 손으로 받쳐 잡되 오른손은 향의 가운데를 잡고 왼손은 오른 손목을 받쳐 잡는다. 다음에는 향 든 손을 이마 높이로 올려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표한 다음 향로 중앙에 똑바로 꽂는다. 그리고 합장한 자세로 반배하고 제자리로 돌아가서 참배를 드리면 된다.

 

<향 올리는 법>

 

부처님께 향 공양을 올린 다음에는 신중단(神衆壇)에 나아가서 순서에 의하여 향을 올리고 참배한다. 혹 자리가 복잡할 때에는 자리를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방향만 틀어서 참배해도 된다.

 

법당에서 밖으로 나올 때에는 먼저 법당 안에 다른 법우님이 남아 있는지를 확인한다. 자기가 마지막으로 법당을 나오게 되는 경우에는 촛불을 끄고 각 기물들을 정돈한 후 나온다. 법당은 거의가 목조 건물이므로 불조심에 항상 유의하여야 한다. 따라서 촛불을 끌 때도 불전으로 나아가 반배 후 손으로 불을 끄거나 별도의 기구를 사용하여야 하며, 촛불을 끈 다음 다시 뒤로 물러서서 합장 반배하고 법당을 나온다. 나올 때에도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합장한 자세로 법당의 옆 문으로 와서 상단의 부처님 전에 합장 반배 한 후 뒷걸음으로 법당 문을 나온다. 법당을 나와서는 먼저 신발을 신고 뒷사람은 앞 사람이 신발을 다 신을 때까지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기다린다. 또한 자기 신발을 다 신은 후에는 다른 법우들의 신을 좋은 위치로 가져 다 주든가 흐트러진 신발이 있으면 가지런하게 놓는다.

 

6 법회와 예불에 동참할 때

 

법회는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자리로서, 생활을 점검하고 올바른 삶의 자세를 가다듬는 중요한 기회이다. 또한 예불은 아침 저녁으로 부처님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를 올리는 의식이다. 그러므로 불자들은 법회와 예불이 있을 때는 반드시 참석하여 부처님께 정성스런 마음으로 참배를 하고 법사의 설법에 귀 기울여야 한다.

 

법회장에 들어갈 때에는 법당 예절에 어긋남이 없도록 행동해야 하며, 특히 어간에 앉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법회장에서는 특정한 사람을 위하여 자리를 잡아놓고 다른 사람이 앉지 못하게 하거나, 좌복을 서로 먼저 차지하려는 행위, 풀썩거리며 던지듯 깔아놓는 행위, 좌복을 제자리에 갖다 놓을 때도 한 손으로 휙 갖다 놓는 행위, 깔아져 있는 좌복을 밟고 다니는 행위, 자기가 쓰던 좌복을 정리하지 않고 나가거나 또는 타인에게 미루는 행위 등이 있어서는 안된다.

 

법회는 일정한 의식에 의해 진행되므로 법문만을 듣기위해 의식진행을 귀찮게 여기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또 법문만 듣기 위해서 늦게 입장했다가 법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른 의식에는 동참치 않고 가는 일이 있어서도 안된다.

 

법문 시 설법의 내용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고 하여 가볍게 여기거나 너무 어렵다고 포기해서는 안되며, 아는 것은 다시 한번 새겨서 듣고 모르는 것은 더 공부해서 이해토록 해야 한다. 아울러 이렇게 공부하고 수행한 내용은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전해야 한다. 그리고 사찰에서 숙박하게 되는 경우 새벽에 도량석의 목탁소리와 종소리가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하고 자리를 정돈한 후에 법당에 나아가 예불에 참여해야 한다.

 

다음은 일반적으로 사찰에서 행하는 법회 식순이다. 그러나 법회 식순은 각 사찰의 전통과 특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① 삼귀의례 - 삼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는 노래.

 

② 찬불가 -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

 

③ 반야심경 봉독 - 모두 지혜의 완성을 염원하며

 

④ 청법가 - 법사님을 청하는 노래

 

⑤ 입정 - 법문 듣기에 앞서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는 의식

 

⑥ 법문 - 부처님의 교법을 간절히 들음

 

⑦ 발 원 문 -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수행 원력을 다지고 중생에게 회향하고자 원을 세움

 

⑧ 사홍서원 - 네 가지 큰 서원을 실천할 것을 다짐하며 부르는 노래.

 

⑨ 기 타 - 공지사항 등

 

7 스님에 대한 예절

 

스님은 스승님을 의미하며 재가불자들이 받들고 존경하며 항상 가까이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친근한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스님을 뵈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합장 배례해야 한다. 그리고 불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재적사찰의 주지스님이나 평소 존경하는 스님을 찾아가 법문을 듣고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

 

밖에서 스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 서서 합장 반배하고, 실내에서는 1배의 예를 올려야 한다(어떤 경우3배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스님께서 좌선할 때, 경행할 때, 공양하실 때, 경전에 대한 말씀을 하실 때, 양치질할 때, 목욕할 때, 누웠을 때에는 절하지 않아도 된다.

 

스님을 모실 때에는 스님과 마주서거나 스님보다 높은데 서면 안되고 작은 말소리도 잘 들리도록 가까이에서 모시되 스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또 스님이 앉으라고 하기 전에는 앉지 않으며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고, 스님께 절을 하고자 할 때에 스님이 그만 두라고 하면 그만 두면 된다. 큰스님을 찾아 뵙고 가르침을 받고자 할 때에는 먼저 시자(侍者)를 통하여 허락을 받고 해야 한다. 그리고 스님 방에 들어갈 때에는 법당에 들어갈 때와 똑 같이 행동해야 하며, 큰스님께는 부처님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합장하고 삼배를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스님은 재가불자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정진하고 계시기에 재가불자들은 수행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의복이나 음식, 약 등을 공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잘 모셨을 때 스님은 더욱 정진하여 참다운 스님이 될 것이고 불자는 참다운 불자가 될 것이다.

 

8 공양 예절

 

불교에서는 밥 먹는 것을  공양 이라 한다. 이는 불교에서 공양하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출가한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것은 단지 굶주림을 면하거나 맛을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보와 사중(四重:국가, 부모, 스승, 시주)의 은혜를 갚고 삼도(三途:지옥, 아귀, 축생) 중생의 고통을 건지기 위한 수행의 방편이다. 즉 안으로는 부처님의 진리를 체득하고 밖으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다

 

또한 재가불자도 공양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 알의 쌀이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는 무수한 사람들의 정성과 노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이 하나하나의 노력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며 기꺼이 먹는다.

 

불교의 공양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상공양과 발우공양이다. 상(床)공양은 일반 가정에서의 경우처럼 밥상 혹은 식탁에서 공양하는 것으로 공양인원이 소수일 때나 편의상 쓰여지고, 발우(鉢盂) 공양은 불교의 전통으로 많은 대중이 동시에 공양하거나 수련 및 수행 시에 쓰여진다. 대중이 함께 모여 정진하는 스님들은 공양 시에 발우 공양을 하는데 여러 사람이 함께 한다고 해서 이를 대중(大衆)공양이라고도 한다.

 

발우(鉢盂)란 스님들의 밥그릇인데  발(鉢) 은 범어로서 응량기(應量器)라 번역하고 수행자에 합당한 크기의 그릇이란 뜻이다.  우(盂) 는 중국말로 밥그릇이라는 뜻이다.

 

발우 공양의 절차를 살펴보면, 부처님과 음식의 은혜에 감사하며 중생의 고통을 생각하고, 음식과 물을 아끼며 공양을 통해 얻은 힘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한다는 생각을 한시도 놓지 않도록 하고 있다.

 

<발우>

 

발우 공양의 유래는 부처님께서 당시 인도의 수행 풍습대로 매일 사시(巳時 : 오전10시~12시)에 한끼 공양을 하셨는데 커다란 그릇 하나에 시주 받은 음식을 드신데서 연유한다. 발우 공양법은 현재의 음식쓰레기 문제 즉,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각광을 받고 있으므로 가정에서도 널리 실용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9 공양의 공덕

 

공양이란 향과 초, 공양미, 감로차 등의 시물(施物)을 부처님께 공양함으로써 목마르고 배고픈 중생에게 회향하며, 중생의 고통을 여의케 해주며, 참된 즐거움을 심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공양(供養)이란 자양분을 기른다는 뜻이며, 삼보님께 올리는 정성스러운 모든 것은 다 공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마음을 다해 바치는 정성스러운 공양은 삼륜(三輪)이 청정할 때, 즉 받는 자, 받는 물건, 주는 자가 청정할 때 크나큰 공덕이 뒤따른다고 한다.

 

10 재가불자의 예절

 

재가불자 사이의 호칭은 보살님, 거사님, 법우님 등으로 부르고, 법명이 있으면 꼭 법명을 불러줘야 한다. 그리고 마을이나 사찰에서 만났을 때는 반배로 정중히 인사하고, 법회 중일 때는 목례로 하면 된다. 가까운 불자가 경조사를 당했을 경우는 즉시 찾아 보아야 하며, 불자 사이에 상부상조하여 함께 돕는 마음을 길러야 한다.

 

재가불자 사이에 좋지 못한 시비거리가 있을 때는 잘 해결해야 하며, 또한 신심 있는 불자를 모함해서도 안된다. 그리고 불자를 사칭하여 불교를 비방하거나 삼보를 헐뜯는 사람을 보면 잘 타일러 구업(口業)을 짓지않고 정법의 세계에 동참하도록 다 함께 노력해야 한다.

 

2 사찰의 구조

 

1 사찰의 의미

 

사찰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도량이자 불법(佛法)을 널리 펴서 중생을 제도하는 전법(傳法)의 장이다. 스님들은 사찰에서 수행 정진하며 부처님을 대신해 중생을 교화 제도하며, 재가자들은 보시로 스님들을 외호하고 사찰을 보호함과 아울러 속진을 씻고 올바른 진리의 생활을 하게 된다.

 

사찰은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살며 집회를 하고 여러 행사를 하는 곳이라 하여 가람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부처님이 계시며 불법의 도를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이라 하여 도량(道場)이라 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흔히 절이라 부른다. 또한 깨끗한 집이라 하여 정사(精舍), 혹은 청정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하여 청정원(淸淨院)이라 부르기도 한다.

 

최초의 사찰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기거하며 수행하고 설법하시던 죽림정사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은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세운 이불란사와 초문사이다.

 

2 사찰의 구조

 

전체적인 사찰의 가람배치는 기본적으로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 일탑삼금당식,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式) 사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는 주로 백제의 사찰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 백제 사찰 중에는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에서 정연한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일탑삼금당식의 가람배치는 고구려 사찰에서 볼 수 있다. 현재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평양의 청암리사지(靑岩里寺址), 정릉사지(貞陵寺址) 등에서 그 유형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쌍탑일금당식은 신라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말한다. 대표적 사찰인 경주 불국사를 살펴보면 중문인 자하문을 지나 좌우에 석가탑과 다보탑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두 탑의 중앙 후편에는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는 쌍탑일금당식을 보여주고 있다.

 

위의 세 가지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에서 변형 발전한 것이 단불전형(單佛殿形) 또는 다불전형(多佛殿形) 사찰이다. 이는 삼국시대 사찰의 중심불전이 단일 건물이며, 명칭도 금 빛나는 불상을 봉안한 건물이라는 뜻에서 금당(金堂)으로 통칭되었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분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종파불교가 성행하면서 각각의 소의경전에 따라 주불전의 명칭이 분화되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단일신앙(單一信仰) 사찰의 성격을 유지해 단불전의 가람배치를 고수한 사찰들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비록 종파의 개념은 희박해져 통불교(通佛敎)적 성격을 띄었으나, 신앙체계의 법통은 희미하게 남아있어 다양한 형식의 불전이 한 사찰 내에 조성되었다. 즉 이전의 단불전형 사찰에서 다불전형 사찰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편 큰 가람이 갖추고 있는 일곱 종류의 당우(堂宇)를 칠당(七堂)이라 하고, 이 칠당을 모두 구비하고 있는 가람을 칠당가람이라 한다. 그러나 칠당의 명칭과 배치 등은 시대와 종파에 따라 다르다. 백제시대에는 칠당가람제가 유행하였다고 하며, 현존하는 유적지로는 익산의 미륵사지와 군수리사지가 대표적이다.

 

1) 전각(殿閣)

 

사찰의 건축물은 안에 모셔진 불상에 따라 그 이름이 다르다. 부처님이 모셔진 곳은 전(殿)이라 하며, 그 외는 각(閣)이라 한다.

 

1 ①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거룩한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란 뜻이다. 자연히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불상이 봉안의 주대상이 된다. 한편으로는 사바세계의 교주이신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 여러 불보살들이 함께 모셔지기도 하는데 그 모시는 상징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염화시중의 미소로 대변되는 가섭과 다문제일의 제자인 아난이 각각 선법과 교법을 상징하며 봉안된다.

 

둘째 부처님의 반야지(般若智)를 상징하는 문수보살과 수행과 행원이 원대함을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협시하여, 모든 구도자들이 지혜와 행원에 의지하여 해탈의 길로 나가야 함을 보여 준다.

 

셋째 과거의 연등불인 갈라보살, 현세의 석가모니 부처님, 미래의 미륵보살이 봉안되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통하여 시간을 달리하면서 불법으로 교화함을 나타낸다.

 

넷째 석가모니 부처님의 좌우에 조상의 극락왕생과 내생의 행복이 직결되는 아미타불과 고통 받는 병자나 가난한 사람을 구원하는 자비의 약사여래를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에는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대신 관세음보살 및 지장보살 또는 대세지보살을 협시보살로 봉안하는 경우도 있다.

 

<대웅전>

 

2 ② 대적광전(大寂光殿)

 

대적광전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연꽃으로 장엄 된 세계인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의 교주인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모신 건물이다. 주로 화엄종 계통의 사찰에서 대적광전을 본전으로 건립하며, 소의경전인 <<화엄경>>에 근거하여 화엄전, 비로자나불을 봉안한다는 의미에서 비로전, 연화장세계가 진리의 빛이 가득한 대적정의 세계란 의미에서 대적광전이라고도 부른다. 대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한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한다. 따라서 대적광전 내에는 비로자나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봉안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선종사찰에서는 선종의 삼신설에 따라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 화신 석가모니불의 삼신을 봉안하며 또한 해인사, 금산사 대적광전 등에는 삼신불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있다.

 

3 ③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한 나라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 비구로서, 여래의 덕을 칭송하고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닦아 중생을 제도하려는 원을 세웠으며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었다. 아미타불은 그 광명이 끝이 없어 백 천억 불국토를 비추고, 그 수명이 한량없어 백 천억 겁으로 셀 수 없다 하여 극락전을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한다. 한편 주불의 이름을 좇아 미타전(彌陀殿)이라고도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4 ④ 미륵전(彌勒殿)

 

미륵전은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을 모신 법당의 이름이다. 이 미륵전은 미륵불에 의해 정화되고 펼쳐지는 새로운 불국토  용화세계 를 상징한다고도 하여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한다. 또는  미륵 의 한문 의역인  자씨 를 취하여 자씨전(慈氏殿)이라고도 부른다. 미륵전의 대표적 건물로는 전북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을 들 수 있으며, 미륵불은 현재 오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대부분 옥외에 크게 조성하여 모시는 것이 우리나라의 관례이나 금산사 등에서는 법당 안에 모신 곳도 있다.

 

5 ⑤ 원통전(圓通殿)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이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한 사찰의 주불전일 경우에는 원통전이라 한다. 원통전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 주기 때문에 그 권능과 구제의 측면을 강조하여 원통전이라 한 것이다. 반면에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 부불전의 성격을 띌 경우에는 관음전(觀音殿)이라 한다. 중국에서는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강조하여 대비전(大悲殿)이라는 현판을 걸기도 한다.

 

6 ⑥ 약사전(藥師殿)

 

이 건물은 약사유리광여래의 불상을 모신 곳이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광 세계의 교주로서 대의왕불(大醫王佛)이며,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이라고도 한다. 약사여래 부처님은 현세중생의 모든 재난이나 질병을 없애고 고통을 구제하는 부처님이며,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은 약사여래 좌우에서 진리광명을 두루 비추어 중생의 모든 고통을 제거한다고 한다.

 

약사여래 불상의 형상은 큰 연화 위에 왼손에 약병을 들고,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맺고 있다. 약사여래의 좌우에는 각각 일광변조보살 및 월광변조보살이 협시해 있다. 불상 뒤에는 약사회상도가 탱화로서 걸려 있기도 한다.

 

7 ⑦ 팔상전(八相殿)

 

팔상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이다. 여덟 폭의 그림에서 연유하여 팔상전 혹은 부처님의 설법 회상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영산전(靈山殿)이란 명칭도 함께 사용하고 있다.

 

<팔상전>

 

팔상전이나 영상전에는 내부에 큰 불단을 조성하지 않고 벽에 팔상도를 봉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팔상전에는 주불을 석가모니부처님, 좌우협시로 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법주사 팔상전이 그 예다.

 

8 ⑧ 나한전(羅漢殿)

 

나한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로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 즉, 나한을 모신 건물이다. 부처님에게는 열 여섯의 뛰어난 제자들이 있었다. 나한은 아라한의 약칭으로 그 뜻은 성자를 의미한다. 영산회상의 모습을 재현했다 해서 영산전(靈山殿) 또는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주불로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 가섭과 아난이 봉안되어 있다. 그 좌우에 열 여섯분의 나한이 웃고, 졸고, 등을 긁기도 하는 자유자재한 형상이 배치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나한의 숫자가500명인 경우가 있다. 500이란 숫자는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마하가섭이 부처님 생전에 설법하신 내용을 모아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결집)했을 때 모인 비구가 500명인 데서 유래하였다.

 

9 ⑨ 명부전(冥府殿)

 

명부전 안에는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며, 지옥계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시왕은 지옥에서 죄의 경중을 정하는 10위의 왕으로 진관왕, 초강왕, 송제왕, 오관왕, 염라왕, 변성왕, 태산왕, 평등왕, 도시왕, 오도전륜왕을 말한다. 고려 말까지는 지장전과 시왕전이 독립된 전각으로 각각 분리 독립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0 ⑩ 대장전(大藏殿)

 

대장전은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전각을 말한다. 대장전이란 편액을 단 건물로는 경북 예천군 소재의 용문사 대장전과 전북 김제군 소재의 금산사 대장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예천의 용문사 대장전은 인도의 고승이 대장경을 용궁에 소장 하였다는 고사와 용이 나타났다는 창건설화 등에 의해 이곳에 대장전을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한 전각이다. 전각 내에는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한 용도로 쓰인 윤장대를 좌우에 각각1기씩 설치하고 있다.

 

11 ⑪ 적멸보궁(寂滅寶宮)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을 지칭하여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서 적멸의 낙을 누리고 있음을 상징하게 된다. 부처님 생존시는 인도 마가다국 가야성의 남쪽 보리수 아래로, <<화엄경>>을 설파한 적멸도량 임을 뜻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여기에는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 불상을 봉안하지 않고 불단만 있는 것이 다른 불전과의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에는5대 적멸보궁이라 하여 신앙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양산 통도사,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가 그곳이다.

 

12 ⑫ 조사당(祖師堂)

 

조사에 대한 존중의 방법으로는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탑을 세우고 행장을 남기기 위한 탑비를 건립하는 것 외에 사찰경내에 조사전을 짓고 조사의 영정을 봉안하여 제의(祭儀)를 받들기도 한다. 국사가 배출된 절에서는 조사전대신 국사전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전남 송광사의 국사전을 들 수 있다. 이 건물 내에는 고려의 보조국사 지눌을 비롯하여 송광사에 머물렀던 16분 국사들의 영정을 보관하고 있다. 조사전이 없는 사찰에서는 영각(影閣)이라는 이름으로 편액을 걸기도 한다.

 

13 ⑬ 삼성각(三聖閣)

 

법당의 뒤쪽 한켠에는 보통 사방 한 칸 혹은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전각이 있다. 이 전각 내에는 우리 민족고유의 토속신들을 불교적으로 수용해서 모시고 있다. 즉 산신 독성 칠성 등을 모신 곳이 삼성각이다. 그 신상을각기 다른 건물에 모실 때에는 그 전각의 이름도 신상에 따라 각기 달라 산신을 모시면 산신각이라고 부른다.

 

14 ⑭ 범종각(梵鐘閣)

 

일주문, 천왕문을 거쳐 불이문을 통과하여 사찰경내에 들어서면 불이문 근처에 범종각이 자리잡고 있다. 범종각은 범종을 달아 놓는 보호각 기능을 한다. 간혹 규모가 큰 사찰에서는 범종 외에 법고(法鼓) 운판(雲板)목어(木魚) 등의 불전사물(四物)을 함께 놓기도 한다.

 

15 ⑮ 누각(樓閣)

 

사찰의 주불전과 마주하는 곳에는 보통 누각이 세워져 있다. 누각의 좌우에는 마당을 둘러싸고 요사채가 배치되어 있다. 즉 뜨락을 중심으로 폐쇄적인 구조를 이루고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사찰의 배치는 원래부터 이러한 형식이 아니었다.

 

고대의 절터를 발굴하여 보면 금당이 사찰의 중심에 자리잡고, 뒤로는 강당이 앞에는 출입문인 중문(中門)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건물은 회랑으로 빙 둘러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의 가람배치와는 달라 주불전인 금당을 중심으로 회랑에 의해 폐쇄되어 있다. 고대 절터는 주로 평지에 위치해서 회랑으로 구획된 경역을 이루었다. 고대 절터에서의 중문은 구산선문(九山禪門)등의 개창을 시발로 절이 산속에 입지하면서 누각의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누각은 글자 그대로 이층의 다락집 형태이다. 누각의 기둥은 출입통로로서의 역할, 불전사물의 봉안장소, 수장고 및 대법회가 있을 경우 불전에서 행할 행사를 준비하게 된다.

 

2) 문(門)

 

1 ① 일주문(一柱門)

 

사찰에 들어서기 위해 첫번째로 통과하는 문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의 명칭은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4개의 기둥을 사방에 세우고 지붕을 얹는 일반 건축물의 형식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이다.

 

여러 개의 산문 중에서 유독 일주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은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마음을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 즉 일심(一心)을 의미함에서 연유한다. 바꾸어 말하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가는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일주문의 규모는 일주삼간(一柱三間)을 원칙으로 삼고있다. 일주삼간이 뜻하는 바는 <<법화경>>의 회삼귀일사상(會三歸一思想)과 연관된다. 즉 중생의 바탕과 능력에 따라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로 나뉘어진 불교의 수행자들을 오직 성불을 지향하는 일불승(一佛乘)의 길로 향하게 한다는 사상적 의미가 담겨있다.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俗界)라 하고 문안을 진계(眞界)라 하며, 일주문을 들어설 때 일심에 귀의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주문에는 사찰의 현판을 걸어 놓게 되는데  영축산 통도사 라는 식으로 산의 이름과 사찰의 명칭을 표기하고있다. 또 좌우의 기둥에는 불지종가(佛之宗家), 국지대찰(國之大刹) 등의 주련(柱聯)을 붙여서 사찰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2 ② 천왕문(天王門)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외호신(外護神)인 사천왕(四天王)을 모신 건물이다. 사천왕은 고대인도 종교에서 숭앙했던 신들의 왕이었으나, 석가모니부처님께 귀의하여 부처님과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사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서남북 4방향을 지키면서 불법을 수호한다고 한다.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不二門)과의 중간 위치에 천왕문이 자리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지닌 일심(一心)이 구도자 앞을 가로막는 숱한 역경에 의하여 한풀 꺾이게 되는 것이다. 이때에 수미산 중턱에 자리한 사천왕은 사찰을 청정도량(淸淨道場)으로 만들려는 목적 외에도 역경을 거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구도자에게 다시 한번 힘을 내서 수미산 정상에까지 오를 것을 독려하는 것이다.

 

사천왕을 모신 건물인 천왕문의 좌우에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키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일반적으로 천왕문 대문에 금강역사의 모습을 그려 놓는 경우가 많다. 천왕문은 보통 정면3칸 측면1칸의 평면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좌우1칸에는 천왕을2분씩 봉안하고 중앙에는 출입통로를 만든다.

 

사천왕 중에서 동쪽을 수호하는 왕은 지국천왕(持國天王)으로 온몸에 동방을 표방하는 오행색(五行色)인 청색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을 취하고 있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붉은 기운이 도는 적육색의 몸에 노한 눈을 가지고 있다. 오른손에는 용을 꽉 움켜쥐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들어 엄지와 중지로 여의주를 살짝 쥐고 있다.

 

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廣目天王)의 몸은 백색이며, 웅변을 통하여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쳐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뜨고 있다. 손에는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多聞天王)의 몸은 흑색이며, 비파(琵琶)를 잡고 비파줄을 튕기는 모습을 하고 있다.

 

3 ③ 불이문(不二門)

 

천왕문을 지나면 불이(不二)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이 서 있다. 불이문은 곧 해탈문(解脫門)이다.

 

불교적 우주관에 의하면 수미산 정상에는 제석천왕(帝釋天王)이 다스리는 도리천이 있고, 그곳에 불이문이 해탈의 경지를 상징하며 서 있다. 도리천은 불교의 28천(天)중 욕계(欲界) 6천의 제 2천에 해당된다. 그 위계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하늘 세계로는 아래에서 두 번째 되는 곳이다.

 

경주 불국사를 살펴보면 불이문의 조성과 이에 따른 사상적 투영을 극명하게 알 수 있다. 불국사의 불이문에 해당되는 자하문에 도달하려면 청운교와 백운교의 33계단을 거치게 되는데, 이 다리들은 도리천의 33천을 상징적으로 조형화 한 것이라고 한다.

 

3) 요사(寮舍)

 

요사는 사찰 내의 전각과 문 외에 스님들의 생활과 관련되는 건물을 총괄하는 명칭으로 통용된다. 흔히 요사채라 불린다. 그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큰방, 선방, 사무실, 후원(부엌), 창고 외에 수각(水閣)과 해우소(解優所-화장실)까지 포함된다.

 

요사는 그 기능에 따라 다양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의 풀을 벤다는 뜻으로 심검당(尋劍堂), 말없이 명상한다는 뜻에서 적묵당(寂?堂), 참선과 강설의 의미가 복합된 설선당(說禪堂), 올바른 행과 참선하는 장소라는 의미의 해행당 수선당(解行堂 修禪堂) 등이 대표적인 명칭이다. 또 공양간의 명칭은 불전에 올리는 공양미는 향나무를 때서 밥을 짓는다는 고사(古事)에 따라 향적전(香積殿), 그리고 조실스님이나 노장, 대덕스님의 처소는 염화실 또는 반야실(般若室) 등의 이름을 많이 붙였다.

 

4) 탑(塔)

 

탑은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Stupa), 또는 팔리어로 투파(Thupa)라 한다. 원래는 부처님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고 그 위에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 만들었던 것이 최초의 기원이며, 이것을 번역하면 무덤, 묘(廟), 영지(靈地)를 의미한다. 경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입멸하신 이후 여덟 나라 국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8등분하여 각기 자기 나라에 탑을 세우고 봉안했다고 하며, 이것이 불교에서의 탑의 기원이다. 후세에는 사리(舍利)가 들지 않은 경우에도 쌓아올려 탑이라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전탑(塼塔), 우리나라에서는 석탑(石塔), 일본에서는 목탑(木塔)이 특수하게 발달되었다.

 

탑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신앙대상의 중심이 되었으나 제한 된 사리 수와 유물, 유품의 한계로 탑의 건립이 어려워지자 예배의 대상으로 불상이 조성되었고, 그 불상으로 신앙대상의 중심이 바뀌었다. 하지만 여전히 탑은 부처님의 진신에 귀의하는 신앙의 위대한 대상으로서 도량을 장엄하고 있다. 탑은 양식상으로 3층, 5층, 9층, 13층 등으로 분류된다.

 

탑과 그 조성의 의미가 유사한 조형물은 다음과 같다.

 

1 ① 금강계단(金剛戒壇)

 

계단의 본래 목적은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장소로서, 수계자를 중앙에 앉히고 삼사(三師)와 칠증(七證)이 둘러앉아서 계법을 전수하는 곳이다. 따라서 단순한 묘탑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계단은 대승계단이라는 신앙표현의 한 조형물로 사부대중의 호계를 위해 조성되었다. 이러한 예로는 통도사, 개성의 불일사, 대구의 용연사, 금산사 등에 있었으나, 현재는 통도사의 금강계단과 금산사의 방등계단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2 ② 석등(石燈)

 

석등은 등불을 밝히는 시설물로서 연등의 의미를 상징화한 것인데, 후대에 이르러서는 불전 앞이나 탑 등에 설치하는 가람배치상의 기본 건축물로 변천하였다.

 

3 ③ 부도(浮屠)

 

고승의 사리를 모신 조형물로  붓다(Buddha) 가 어원이다. 가람배치 구조와는 별도로 건립되었으며, 조상숭배를 중시하는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성행하였다.

 

부도와 탑을 비교해 보면 양자가 사리를 봉안한다는 면에서는 같지만 그 형태는 매우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또 건립 위치도 탑이 사찰의 중심 위치인 법당 앞에 세워지는데 반해, 부도는 사찰 경내의 변두리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워지며 이를 부도전이라 일컫는다.

 

3 법당내의 구조

 

법당에는 통상 상단, 중단, 영단의 삼단구조로 되어있다. 부처님상과 보살상을 모신 상단,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선신들을 모신 중단, 그리고 영가를 모신 영단이 그것이다.

 

1 ① 상단(上壇)

 

법당의 어간문에서 바라볼 때 정면에 가장 높은 단상을 설치하고 그 중앙에 부처님상을 모시는데 이 단상을 상단이라 하며, 부처님과 보살상을 모셨기 때문에 불보살단(佛菩薩壇)이라고도 한다. 혹은 줄여서 불단(佛壇)이라 한다. 이 상단에는 그 절의 주존불 불상과 후불탱화를 모시는 것이 통례이다.

 

2 ② 중단(中壇)

 

호법을 발원한 선신들을 모신 신장단(神將壇)을 중단이라 한다. 여러 신장님들을 모신 단상이기 때문에 신중단(神中壇)이라고도 한다. 제석천이나 사천왕, 대범천 등의 천상 성중과 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긴나라, 가루마, 마후라 등 팔부신장 등을 모신 곳이다. 또한 우리의 민속신앙에 의해 칠성과 산신도 모셔져 있기도 하다.

 

3 ③ 영단(靈壇)

 

영가(靈駕)의 위패가 모셔진 단상이며, 후불탱화로서 아미타여래 래영도와 감로탱화가 통상 모셔져 있으며 이곳을 하단(下壇)이라고도 한다.

 

3 불상의 종류

 

한 종파나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예배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본존불이라 한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불, 아미타불(정토종), 비로자나불(화엄종), 미륵불, 대일여래(밀교계통), 약사여래 등을 들 수 있다.

 

1 불상의 구분

 

불상은 일반적으로 여래상, 보살상, 신장상, 나한 및 조사상으로 구분을 한다. 여래상은 나발형태를 하고 있으며, 보살상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지장보살은 예외), 천의(天依)와 목걸이, 귀걸이 등 장엄구를 지니고 있다. 또한 신장상은 주로 무장한 모습을 하고 있고, 조사상은 스님의 모습이다.

 

여래상은 부처님의 상이다. 역사적으로 인도의 북쪽 카필라국의 태자로 태어나 출가하여 35세에 부처님이 된 석가모니불을 말한다.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특히 대승불교시대가 되면 수많은 부처님이 등장하게 되고 따라서 다양한 불상이 조성된다. 이들 무수한 불상들은 비록 그 명칭은 다양하지만 그 모습은 손이나 세부 모습의 약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것은 불격(佛格)이 그 모습에 그대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불의 격은 착한 일을 한 공덕이며, 보통 32상(相) 80종호(種好)라는 기본 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즉 상이 원만해야 하고 육계와 백호가 있어야 하며, 옷은 법의(法依)를 입고 장엄구(莊嚴具)가 없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이것을 조각으로 나타내면 대좌(臺座)에 앉거나 서서 등뒤에는 광배(光背)를 두게 된다. 이것은 불교의3부 구성이라 할 수 있는데 불상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이다. 불신의 머리에는 머리칼, 라계 또는 소계의 육계가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白毫), 목에는 삼도(三道)가 표현되며, 옷은 삼의(三依)를 입고, 손은 여러 가지 인상(印相)을 짓고 있다.

 

이 불상들은 형식에 따라 단독상, 삼존상(三尊像), 병좌상(竝座像), 자세에 따라 입상, 좌상, 와상, 유행상(遊行像) 등으로 나누어지고, 좌상에서도 결가부좌, 반가부좌, 의좌(倚座) 등 다양하다.

 

불상은 무수하리 만치 많고, 매우 다양하게 분류된다.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불상(三身佛像)과 과거, 현재, 미래의 3세불(三世佛)이 있으며, 이것이 확대되어 각각 천불이 되어 모두3천불이 되기도 한다. 또는 사방불, 49불, 53불 등이 있다. 이러한 불상 중에 가장 유명하고 많이 조성된 것이 석가여래, 아미타, 미륵, 비로자나, 약사여래상 등이다

 

2 부처님상

 

부처님상은 수인과 가사 그리고 좌보처 우보처 협신보살에 의해서 구분하며 각 사찰의 법당 명칭에 의해서 구분하기도 한다.

 

1 ①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의 수인은 항마촉지인, 선정인, 전법륜인 등을 하고 있고, 또 가사를 걸친 우견 편단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보처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또는 가섭존자 아난존자로 되어 있다.

 

2 ② 아미타불

 

아미타불의 수인은 구품인을 하고 있으며 가사를 걸친 모습은 통견의 모습이고, 좌우보처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되어 있다.

 

3 ③ 비로자나불

 

비로자나불은 진리를 표현하는 법신불로서 지권인을 하고 있다. 좌우 보처로는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 또는 아미타불, 약사여래, 미륵불 등 삼존불과 함께 다섯 부처님을 협시로 하고 있으며 또는 문수, 보현보살을 보처로 모시기도 한다.

 

4 ④ 미륵불

 

미륵불은 미래불로 전각 밖에 따로 모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시무외인 또는 여원인 등의 수인을 취하고 있다.

 

5 ⑤ 약사여래

 

약사여래는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소멸, 의복과 음식 등을 구족 시키고자 하는 부처님으로서 왼손에는 약병 또는 약함,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하고 있으며, 신장을 거느리고 있다. 좌우 보처은 일광변조 소재보살과 월광변조 식재보살로 되어 있다.

 

3 보살상

 

보살상은 대체로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머리칼을 드리우며 몸에는 장신구를 갖고 옷은 천의를 걸친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보살은 부처님의 경지를 깨달은 분이지만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아직까지 부처님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 중생과 함께 있는 분이다.

 

보통 보살상에는 단독상도 있지만 거의 협시상이며 자세는 입상, 좌상 등이 있고 좌상 가운데도 가부좌상, 의상, 반가부좌상 등 그 형태도 다양하게 되어 있다. 보살은 여래상의 좌우 보처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래상을 보고 알 수 있으며, 손에 든 물건에 따라 구분하기도 하고 관(冠)의 형태에 따라서도 구분할 수 있다.

 

1 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보관의 정수리에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다니며, 연꽃, 감로수병 등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이다. 십일면 또는 천수천안의 모습도 있다.

 

2 ② 문수보살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로서 주로 왼손에 연꽃을 들고 사자를 탄 모습으로 되어 있다.

 

3 ③ 보현보살

 

보현보살은 실천 행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코끼리를 탄 모양이나 또는 연화대에 올라선 모습으로 되어 있다.

 

4 ④ 지장보살

 

지장보살은 대비원력을 상징하는 보살로서 스님과 같은 모습으로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둘렀으며, 육환장을 들고 있다. 이 육환장 정수리 부분에는 아미타불의 화현을 모시고 있다.

 

4 천부신장상(天部神將像)

 

인도 재래의 신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이나 불교를 지켜주는 호법신장(護法神將)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 의상은 귀족 또는 장군의 모습, 온화한 모습, 진노하는 모습 등 갖가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천부신장상 가운데 유명한 것으로는 인왕상(仁王像), 사천왕상(四天王像), 제석천상(帝釋天像) 등이 있고 각종명왕상(明王像)도 있다

 

5 나한상(羅漢像) 및 조사상(祖師像)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같이 훌륭한 분들의 상을 표현한 것이 나한상이고, 한 종파의 큰스님 같은 분을 조각한 것을 조사상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모두 스님상을 하고 있다. 나한상은 가섭존자 아난존자 등 십대제자를 중심으로5백 나한, 천2백 아라한 등 많은 나한상이 있고, 조사상은 용수, 무착, 세친, 현장, 원효, 의상, 자장 등 인도, 중국, 우리나라의 고승상이다.

 

6 수인(手印)의 종류

 

불상의 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부처님의 덕을 나타내기 위하여 열 손가락으로 여러 모양을 만들어 표현한 것이다.

 

인계(印契), 인상(印相), 밀인(密印), 계인(契印)이라고도 하며, 교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으므로 불상을 만들 때 함부로 형태를 바꾸거나 다른 부처님의 수인을 취해서도 안된다. 따라서 수인은 여러 종류의 불상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수인의 종류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5인에서부터 아미타 부처님의 구품인(九品印), 비로자나 부처님의 지권인(智拳印)등 매우 다양하다. 석가모니부처님의 근본5인을 간략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1 ① 선정인(禪定印)

 

결가부좌 상태로 참선 즉 선정에 들 때의 수인이다. 왼쪽 손의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고, 오른손도 손바닥을 위로 해서 그 위에 겹쳐 놓으면서 두 엄지손가락을 서로 맞대어 놓는 형식이다.

 

2 ②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부처님이 마귀를 항복시키고 성도한 뒤 자신의 깨달음을 지신(地神)에게 증명해 보라고 말하면서 지은 수인이다. 선정인에서 왼손은 그대로 두고 위에 얹은 오른손을 풀어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고 있는 모습이다.

 

3 ③ 전법륜인(轉法輪印)

 

부처님이 성도 후 다섯 비구에게 첫 설법을 하며 취한수인으로, 시대에 따라 약간씩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많지 않다.

 

4 ④ 여원인(與願印)

 

부처님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하는 덕을 표시한 수인이다. 손의 모습은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은 펴서 밑으로 향하며, 손 전체를 아래로 늘어뜨리는 모습이다.

 

5 ⑤ 시무외인(施無畏印)

 

중생에게 무외를 베풀어 우환과 고난을 해소 시키는 덕을 보이는 수인이다. 손의 모습은 다섯 손가락이 가지런히 위로 뻗치고 손바닥을 밖으로 하여 어깨 높이까지 올린 형태이다. 이 시무외인과 여원인은 부처님마다 두루 취하는 수인으로 통인(通印)이라고도 하며, 석가모니불 입상(立像)의 경우 오른손은 시무외인, 왼손은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6 ⑥ 광배(光背)와 대좌(臺座)

 

광배는 부처님의 몸에서 나는 신령스럽고 밝은 빛을 상징화한 불상의 한 구성요소로 불신의 뒤 쪽에 표현한 것을 일컫는다. 그 형태는 시대와 지역, 혹은 불보살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빛이 머리에만 비추는 두광(頭光, 圓光)과 몸 전체에 두루 비추는 거신광(擧身光, 全身光)이 있다.

 

대좌는 불보살상 및 조사상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대좌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사자좌(獅子座)와 연화좌(蓮花座)가 가장 보편적이다.

 

4 불교 회화

 

모든 그림이 다 그러하겠지만 특히 불화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선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며, 불교적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그리는 성스러운 예술이다. 따라서 좋은 불화는 기법이나 양식의 획기적인 업적보다 불교적인 이념이 얼마만큼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느냐가 중요하다. 가령 불교가 모든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이 주목적이라면 가장 성공적인 불화는 이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는 장면을 가장 멋지게 그린 그림이 가장 명작이라 할 수 있다.

 

1 탱화와 경화(經畵)

 

탱화는 비단 또는 베 바탕에 불보살의 모습이나 경전내용을 그려 벽 같은 데다 걸도록 그린 그림을 말한다. 흔히 일반 그림에서 족자로 불리는 양식을 말한다. 고려나 조선조 때는 가장 보편적이고 애용되었던 양식이다.

 

탱화의 종류는 그려진 주제의 내용에 따라서 상단, 중단, 하단탱화로 구분된다. 상단탱화는 전각의 상단, 즉 불전의 중앙에 모셔진 불보살상의 뒷면에 거는 탱화로서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비로자나불, 약사불탱화 등이 있다. 중단탱화는 불단의 좌우측에 있는 영가단(靈駕壇)에 모시는 탱화로서 주로 신중(神衆)이나 호법신(護法神) 등을 그린다. 하단탱화는 명부전의 지장보살, 시왕상 뒤에 모시는 탱화이다.

 

경화는 불경에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그 경에 설하고 있는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보통 변상도(變相圖)라고도 부른다. 이 경화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직접 그린 사경화(寫經畵)와 나무나 금속의 판으로 인쇄한 판화(版畵) 등이 있다.

 

2 심우도(尋牛圖)

 

수행자가 정진을 통해 본성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일에 비유해서 그린 선화(禪畵)로, 그 과정을 10단계로 구분하고 있어 십우도 또는 목우도(牧牛圖)라고도 한다.

 

3 감로도(甘露圖)

 

조상숭배 신앙이나 영혼숭배 신앙의 내용을 표현한 그림이다. ≪불설우란분경≫을 그 근본경전으로 삼기 때문에 우란분경 변상도 또는 하단인 영가단에 봉안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영가단탱화 혹은 감로탱화, 감로왕도라고도 한다.

 

4 괘불(卦佛)

 

법당 밖에서 불교의식을 행할 때 걸어 놓는 예배용 그림이다. 법당 바깥에 있는 당간지주 등에 내걸고 법회나 의식을 베푸는 것을 괘불재(卦佛齋)라고 하며, 괘불을 거는 것을 괘불이운(移運)이라고 한다.

 

큰 재를 올릴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그 법회의 성격에 맞는 내용의 괘불을 걸게 된다. 따라서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비는 영산재를 올릴 때는 영산회상도를, 그리고 예수재나 수륙재 때에는 지장회상도나 명부시왕도를 내걸게 된다.

 

5 변상도(變相圖)

 

부처님의 일대기 또는 불교설화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 변상도는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전생을 묘사한 본생도(本生圖)와 일대기를 나타낸 불전도(佛傳圖), 그리고 서방정토의 장엄도가 그 기본을 이루고 있다.

 

이들 변상도의 특징은 복잡한 경전의 내용이나 심오한 교리의 내용을 한 폭의 그림에 압축함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뜻을 이해하고 불심을 일으키는 중생교화의 한 방편으로 사용했다.

 

5 법구(法具)

 

법구는 즉 불구(佛具)라고도 하는데, 불법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의미하며, 또한 불전을 장엄하는 여러 가지 사물을 뜻하기도 한다. 이러한 법구는 법답게 다루어야 하며 필요할 때만 법식에 맞춰 사용해야 한다.

 

법구 중에서도 조석예불 때 치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이 있다. 이것을 불교의 사물(四物)이라고 한다.

 

법고(法鼓)는 법을 전하는 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법고는 보통 쇠가죽으로 만드는데 짐승을 비롯한 중생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하여 친다.

 

운판(雲板)은 청동 또는 철로 만든 넓은 판으로 원래 중국의 선종사찰에서 부엌이나 재당(齋堂)에 달아 놓고 대중에게 끼니 때를 알리기 위해 쳤다고 하나 차츰 불전사물로 바뀌었다. 운판이 울리면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며 떠도는 영혼을 제도하기 위하여 친다.

 

목어(木魚)는 나무를 깎아서 물고기 모양을 만들고 배 부분을 파내어 두 개의 나무막대기로 두드려 소리를 낸다. 목어를 치는 이유는 수중에 사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친다. 물고기는 언제나 눈을 뜨고 살기 때문에, 수행자는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 부지런히 정진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이다.

 

범종(梵鍾)은 일명 대종(大鍾), 경종(鯨鍾)이라고 하며 조석 예불과 사찰에 큰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한다. 아침에는 28번을, 저녁에는 33번을 친다. 범종을 치는 근본 뜻은 천상과 지옥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다. 그 밖의 법구는 다음과 같다.

 

1 목탁(木鐸)

 

목어와 같은 뜻으로 주로 깨우침의 의미가 있다. 목탁은 대중을 모으는데 사용하는 신호이기도 하며 모든 의식집행에 있어서 가장 많이 쓰이는 법구이다. 처음에는 쇠로 만들어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나무로 만든 것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 법구들은 거의 전부가 중국에 와서 선종이 왕성하여 선종 사찰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한다.

 

2 죽비

 

죽비란 중국 선원에서부터 대나무 통이나 뿌리로 만들어 쓴 것인데, 목탁과 같이 선방에서 앉고 일어서고 입선과 방선, 그리고 공양할 때 행동 통일을 알리는 도구로 쓴다. 선방에서는 언제나 정숙을 중요시 하기 때문에 목탁보다는 조용하고 간편한 법구를 사용하는 것이다.

 

3 발우(鉢盂)

 

발우는 부처님 당시부터 불가에서 공양할 때 쓰던 밥 그릇인데, 오늘날에도 스님들의 소중한 유물로 쓰이는 법구이다. 즉 불기(佛器)와 같이 소중한 그릇이다.

 

4 요령(搖鈴)

 

요령은 남방계통에서는 볼 수 없는 법구이다. 본래 밀교계통에서 사용하던 도구로서 북방계통의 사찰에 전해져서 지금은 모든 의식집전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법구이다.

 

5 염주(念珠)

 

염주는 부처님께 기도하거나 절을 하면서 참회할 때 그 수를 헤아리기 위해서 사용하는 법구인데 보통 108개로 되어 있다. 본래 부처님의 깨달음의 상징으로 신앙 되고있는 보리수 열매로 만들어서 사용했으나, 지역에 따라 독특한 나무나 그 밖의 재료(율무열매, 용안주, 금강주, 다양한 보석 등)로 만들어서 사용하고 있는 법구이다. 요즘 천주교에서 쓰고 있는 묵주도 원래 불교의 염주에서 파생한 것이다.

 

6 사리장엄과 복장물

 

사리장엄(舍利莊嚴)이란 부처님이나 스님의 법구(法身)를 다비하고 나온 사리를 봉안하는 갖가지 장엄으로, 사리를 담는 사리구와 이 사리구를 탑 속에 봉안하는 사리장치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리는 진신(眞身)사리와 법신(法身)사리로 구분된다. 진신사리는 부처님의 육신에서 나온 것을 말하고, 법신사리는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 즉 대 소승불교의 모든 경전을 말한다. 일반적인 사리장엄으로는 사리를 담는 사리병이 있고 다시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합(盒)이 있다. 사리병은 신라시대에는 유리와 수정으로 만들었으나 고려시대에 와서는 금속재가 많이 쓰여졌다.

 

복장물(腹藏物)이란 불상을 조성하면서 불상의 배 안에 사리, 불경 등을 넣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는 불상, 보살상, 나한상 등의 여러 존상 내부에 봉안되는 갖가지 불교적 상징물 또는 그것을 넣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사리는 처음에는 탑에만 봉안해 오다 불경이나 불화, 불상 안에도 봉안하게 되었다. 복장물은 사리함, 진신사리, 다섯 가지 보석, 오곡, 오약, 오색실, 의복 등이 있으며, 조상기(造像記)나 복장기(腹藏記) 등도 장치한다. 보통은 불상을 처음 조성할 때 복장을 넣지만, 후대에 와서는 불상을 수리하는 개비(改備) 때나 금칠을 다시 하는 개금 때에도 복장을 넣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복장 유물은 해당 불상 조성 또는 개비(개금) 당시 불교신앙의 경향, 사경미술, 불상조성의 유래, 그것을 만든 장인, 발원자의 신분 등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7 기타 불교 조형

 

1 당간지주(幢竿支柱)

 

당(幢)을 거는 장대인 당간을 지탱하며 세우기 위해 당간 좌우에 세우는 기둥이다. 대개는 사찰 입구에 세워진다. 재질은 금동 등의 금속재도 있지만 대부분 돌로 만들어졌다.

 

당간지주는 당간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이면서 아울러 그곳이 신성한 사찰이 있는 지역이라는 것을 나타내며 선사시대의  솟대 신앙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2 업경대(業鏡臺)

 

지옥의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는 거울로, 여기에 비추어보면 죽은 이가 생전에 지었던 선악의 행적이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보통 업경대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금속으로 된 것도 있다.

 

3 윤장대(輪藏臺)

 

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회전하도록 만든 나무로 된 책장이다. 이것을 돌리기만 하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예천 용문사에 윤장대2좌가 있으며, 고려 명종3년(1173)에 자엄대사가 세운 것이다.

 

8 불교 성보의 이해

 

1600여년이 넘는 한국불교의 역사와 전통은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마침내 민족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 나라의 어디를 가나 불교성지가 있고 문화재가 있다. 현재 국보와 보물,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대다수의 민족문화재가 불교의 성보(聖寶)이다.

 

1995년 유엔 기구인 유네스코(UNESCO)가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불국사 석굴암, 그리고 종묘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는데 이는 불교의 성보문화재를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인정 받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편 불교 문화재는 민족 문화유산이면서도 성보라는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부 국민들은 여기에 대하여 단지 민족 문화유산의 성격만을 보고 지금도 불자들이 신앙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불교 성보문화재의 본질을 모르는 경향이 있다. 일부 국민은 산자 수려한 사찰을 단순한 관광지로, 성보문화재를 관광 대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상기하여야 할 것은 불교 문화재는 민족문화 유산이기 전에 신심이 지극했던 조상들이 신심과 지혜와 기술을 융화하여 구현한 신앙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일부 국민의 사찰과 성보문화재에 대한 몰이해를 잘 깨우쳐 주고 이들이 민족 문화재이자 성보를 통해 불교 문화와 사상에 대한 이해를 드높여 나가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성보와 민족문화 유산에 대한 바른 이해와 보존은 바로 우리 민족의 전통과 역사 그리고 사상 문화 창달의 기초이다. 어느 민족이던 전통 문화와 사상을 잘 보존하지 못한 민족은 패망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세계화, 국제화시대에도 민족 고유의 전통과 문화에 바탕한 세계화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것, 가장 불교적인 것이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불국사 석굴암의 세계 문화유산 지정에서도 새삼 확인한 바가 있다.

 

민족의 전통 문화와 정수를 간직하고 있는 우리 한국불교는 세계화 시대에 발맞추어 민족문화를 잘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켜야 할 역사적 사명이 있다. 우리 불자들은 한국불교의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명심하면서 바른 신행생활을 통해 불교와 민족의 중흥을 위해 정진해 나가야 하겠다.

 

출처: (북교학당) http://cafe.daum.net/kbm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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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4.02.22 23:17

    첫댓글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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