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게 단 하나의 끼가 있다면 그것은 떠남을 향한 끼이다.
‘떠남’, 처음이 가진 힘처럼 신선한 설렘을 주는 단어. 사랑에 빠졌을 때가 아니라 시작할 때처럼 배가 간질간질하고 무릎에 힘이 빠지며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지구 적도를 7바퀴 감싸는 단어다.
하지만 ‘린자니산 갈래?’ 문자를 ‘닌자산 갈래?’로 본 나는 ‘산에서 표창 던지게?’ 싶어 시큰둥했으나 ‘산에서 2박3일 텐트 치고 야영이야’, ‘화산이야’, 두 문장에 출발 두어 달 전부터 마음의 배낭을 꾸리고 말았다.
8시간 가까이 지나자 구름 머금은 칼데라 출현
5월 31일, 강가딘투어의 강철원 대장을 따라 16명의 일행이 선명한 주황색 카고백을 들고 출발했다.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날아가면 호주가 나올 만큼 생각보다 먼 길이니 잠시 린자니의 간략한 신상명세를 살펴볼까?
린자니산은 인도네시아 롬복섬에 있는 3,726m 높이의 화산으로 칼데라호에 작은 기생 화산이 있는데 지금도 분화하고 있다. 화산 폭발로 인한 칼데라도 신기한데 그 안에 또 활화산이라니…. 그 역동성에 심장이 더 빨리 뛰고, 그러다 보니 피곤하고, 피곤하니 잠이 온다. 구름 위에서 흔들리는 잠을 자고 나니 롬복공항이다. 공항은 국제공항 치고는 단출하지만, 산으로 떠나기 전의 숙소는 단정하면서도 고급스럽게 우아하다.
두 사람의 산행 짐을 하나의 카고백에 정리하고 나니 메고 갈 배낭은 아기 배낭처럼 가볍고, 더욱 더 구체적으로 변한 설렘 탓에 잠이 달아난다.
이튿날 아침, 큰 버스가 갈 수 없는 길이라 작은 차에 나눠 탔다. 산행 기점인 슴바룬까지 세 시간 정도 달리는데 개인적으로 전 일정 가운데 이 시간이 가장 힘들었다. 에어컨이 설치된 차이건만 힘이 달리는 게 여실히 느껴져 틀어달라는 말을 못하겠다. 아침부터 햇볕 작렬이다. 허벅지를 드러낸 젊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고, 야자수가 늘씬하게 쭉쭉 뻗어 있는 풍경을 배경으로 열대 바다가 평온하게 펼쳐져 있는 해안도로를 달리는 기분은 상쾌하지만 덥다. 너무 덥다.
-
- ▲ 1 슴바룬에서 출발해 구릉을 지나는 모습. 어깨 짐을 진 포터들이 보인다. 2 첫날 야영지. 약해 보이는 텐트인데도 강풍에 잘 견디어 주었다.
-
포터들이 2박3일 동안의 먹거리, 텐트 등의 짐과 우리의 짐을 서로 분배한다. 이렇게 2박3일 포터로 일하고 나면 현지 공무원 한 달 월급의 3분의 1 정도를 받는다고 하지만 발가락 끼운 고무 슬리퍼 달랑 신고 얼마나 고된 일일지. 내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만큼 그들의 어깨는 무거워진다. 그들의 고충을 덜어주려는지 한참 구릉 지대를 걷다 보니 날씨가 흐려졌다. 다행이다 싶은 순간, 이제 점심시간이란다.
주위 돌을 모아 부뚜막을 만들고 나뭇가지 화력을 이용해 점심을 준비하려니 한참 걸린다. 느림의 미학이랄까, 이참에 쉬어가니 좋은 점도 있다. 나름 체계적인 포터들의 분업을 통해 탄생한 볶음밥이 환상의 맛을 자랑한다. ‘포터 하지 말고 한국 와서 볶음밥 집 차리면 성공할 텐데’ 생각하며 다시 길을 나섰다.
점심 이후로는 길이 가파르게 변했다. 내일 꼭두새벽부터 올라야 하는 정상이 구름 속에 숨어 까꿍 놀이를 한다. 해가 나타나면 덥고, 해가 숨으면 귀곡산장 분위기가 연출되며 금방 서늘해지는 것을 보니 제법 올라왔나 보다. 오전 9시30분부터 게으름 피우지 않고 차곡차곡 올랐더니 오후 5시경이 되어서야 구름을 머금은 칼데라가 보상으로 나타났다.
칼데라가 있어서 그런가? 칼칼한 바람이 세차다. 능선에 멋지게 자리 잡은 텐트를 보고 기뻐했더니 그건 먼저 온 ‘유럽인 동네’란다. 우리 동네는 정상을 향한 오르막이 시작되는 바로 아래! 우리 동네 옆에는 산자락 사이로 빠져나가지 못한 구름이 갇혀 있고, 칼데라에는 시린 초록 호숫물이 갇혀 있다.
산동네 경치에 넋 놓고 있는데 가멸찬 바람에 정신조차 외출해 멍멍하다. 바람 때문에 포터들이 텐트와 한참 씨름을 한다. 얇은 우모복이 들어 있는 우리 카고백을 멘 포터 체력이 약한 축에 속하는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쩐지 한참을 바들바들 떨어야 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콧물과 함께 줄줄 흘렀다.
2,400m 고지에서 부는 유별난 바람 속에서도 포터들이 저녁을, 그것도 국까지 준비했다. 강 대장께서 준비해 오신 반찬과 함께 먹으니 검은 화산 돌가루가 깨같이 송송 뿌려져도 호텔에서의 정찬보다 100만 배는 더 맛있다. 아쉬운 게 있다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바람인데, 귀마개를 해도 윙윙거리는 소리가 파고든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이 즐겁기만 하니 트레커의 기본 자질은 갖춘 거라 자신을 위로하며 잠을 청했다.
-
- ▲ 1 떠내려온 구름에 갑자기 귀곡산장이 연출됐다. 2 호숫가에 자리잡은 둘째 날 야영지. 물안개가 자욱하다.
-
산정은 구름과, 호수는 물안개와 까꿍 놀이
6월 2일. 새벽 2시30분. 기상을 알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 시간에 잠들어 본 적은 많아도 일어나보기는 처음이다. 정상에서의 일출을 보기 위해 비척비척 일어나니 간잽이가 소금을 척척 뿌린 것처럼 밤하늘에 별이 후둑후둑 박혀 있다. 하지만 저 별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는 세상과 안녕을 고할 수도 있다. 푸석푸석 발이 푹푹 빠지며 밀리기까지 하는 급경사를 헤드랜턴에 의지해 초특급 강풍을 맞으며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강 대장께서 오른쪽은 낭떠러지라고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는데 다행히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였다. 가뜩이나 바람 때문에 몸을 가누기도 힘든데 오른쪽의 낭떠러지가 보였다면 무서움에 발목이 잡혔을지도 모른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약봉지로 세 봉쯤의 돌가루를 먹은 것 같다. 나는 가쁜 숨을 헉헉 몰아쉴 때 들어오는 돌가루를 걸러낼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한 초보이기 때문이다. 그래, ‘이런 까칠한 매력이 있어야 맛이지.’ 초보는 또 이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한 걸음씩 걸었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일출만큼 멋진 여명의 짧은 찰나에 곁눈을 주다 보니 정상에 가기 전에 해가 불쑥 솟았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그 풍경, 산 그림자가 하늘에 피라미드를 드리우는 장면을 직접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꽉 차올랐다. 정상은 표시석 하나 없지만 사방으로 바다와 구름과 호수를 끼고 있어 휑하지 않다. 카메라가 불러일으키는 기억력보다 마음의 기억력을 더 믿기에 오래도록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다.
어제 잤던 야영지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수고에 비하면 거저먹는 길이다. 리듬만 잘 타면 그냥 쭉쭉 내려간다. 내려가는 방향의 오른쪽으로 치마 주름 같은 구릉이 저 아래 펼쳐져 있고, 왼쪽으로는 뚝 떨어지는 낭떠러지 분화구가 보인다. 어둠의 힘을 빌려 올라오는 게 최고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길이다.
이제 분화구 내벽 쪽을 내려간다. 첫날과 달리 숨지 않는 햇볕 때문에 꽤 덥지만 정상을 밟고 내려와서인지 발걸음이 가볍다. 멀리 보이던 호수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정오 무렵 호숫가에 도착했다. 하긴, 오늘 일정은 새벽 3시부터 시작됐었다.
-
- ▲ 1 해질녘의 린자니산. 구름이 산자락에 걸려 있다. 2 마지막 날 찾은 길리섬의 여유로운 풍경.
-
오늘의 우리 동네는 호수를 다섯 걸음 앞에 둔 물안개 동네다. 산정이 구름과 까꿍 놀이를 한 것처럼 호수는 물안개와 까꿍 놀이를 한다. 텐트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고 자연 노천 온천으로 향했다. 건기라 온천 크기가 대폭 줄긴 했지만 뜨거운 물에 입은 옷 그대로 몸을 담그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가신다. 지구 저 깊숙한 곳에서 올라온 열기로 데워진 물이라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호수 한쪽으로는 오후 햇살이 투영되며 흩어지고 있고, 또 한쪽으로는 수묵화 같은 흑백 장면이 펼쳐진다. 일찍 출근한 달이 아침에 오른 산정 옆에 걸렸다. 수고한 포터들과 린자니산 하나만을 보고 멀리서 온 트레커들이 함께 어울려 야영 마지막 밤에 멋진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날, 아쉽지만 하산이다. 하산이라서 내리막만 있을 줄 알았는데 한동안은 오르막이 펼쳐졌다. 역시, 린자니산은 끝까지 까칠했다. 하지만 두어 시간의 오르막으로 인해 칼데라호 안의 작은 바루화산이 잘 보인다. 아침에 보니 분화구 안으로 연기가 슝슝 나고 있었다.
호수를 뒤로하고 세나루로 내려가는 길에 호수로 가는 현지인을 많이 만났다. 일요일이어서 그런지 살아 있는 닭을 자루에 넣어 올라가는 가족을 본 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다녀와서 한동안 치킨을 먹지 못했다.
슴바룬에서의 오르막길과는 달리 세나루의 내리막길에는 열대 식생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고 린자니가 인도네시아 국립공원임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길이 좋다. 길이 좋다고, 정글 느낌 나는 큰 나무 때문에 그늘졌다고 해서 덥지 않은 건 아니어서 내려오자마자 입구에서 동네 고양이와 과자 안주를 나눠 먹으며 맥주 한 캔으로 산행 마무리를 간단히 자축했다.
지상으로 내려오니 쉐라톤호텔의 깔끔한 수영장이, 시원한 에어컨이, 바닷가에서의 근사한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코코넛 껍질을 숯불로 사용해 구워주는 해산물 요리가 해산물을 먹지 않는 나조차 흡입하게 할 정도로 맛있었다. 포터들도 가족이 준비한 맛있는 요리를 먹고 있겠지….
-
- ▲ 정상과 칼데라호 안에 솟은 기생화산. 아침이면 분화구에서 연기가 솟는다.
-
있는 그대로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산
아쉬운 마지막 날이 밝았다. 유럽인에게 낙원으로 불리는 길리섬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발리보다 좋다는 강 대장 말씀이 맞는 것 같다. 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맑고 발리처럼 사람들이 북적이지 않아 조용하다. 이국적인 휴양지의 느낌에 나는 이곳에 따로 시간을 내서 다시한번 찾아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해변에서 앞으로 누웠다, 뒤로 눕기를 반복하며 린자니산을 쳐다보는 거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는 본인의 느낌과 기억도 객관적으로 떠올릴 수 있으니까. 어쩌면 그것이 진짜 느낌일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밤 비행기에서 인도네시아 롬복섬에서 보낸 시간을 되짚어 보았다. 하루에도 4계절을 몇 번씩이나 보여주던 변화무쌍한 린자니산과 몰려다니던 구름 뭉치들, ‘바람 네까짓 것쯤이야’ 하고 무심히 피어 있던 에델바이스까지….
내 아무리 초보라 할지라도 익숙하고 편안한 환경을 떠나 낯설고 불편한,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만날 때의 전율과 비행기의 흔들림 정도는 구별할 수 있다. 린자니가 특별한 이유는 있는 그대로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표지판도, 화장실도, 아무것도 없다. 누가 하늘에 피라미드를 그릴 수 있을 것인가. 린자니뿐이다.
정정한다. 내가 가본 곳 중에서는 린자니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가진 유일한 끼는 또 다른 떠남을 꿈꾸는 것이다. 린자니가 진짜 유일한 곳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첫댓글 넘 재밌게 읽었읍니다
산행 멤버들도 매주 다져져서 큰산도 지방도 해외의 산행도 함께 즐기면 좋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