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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圓의 세계를 위한 변주곡
김해빈 시집 『저녁을 하역하다』 (2012 시문학사) 작품론
김정범(시인)
플로로그
21세기는 복제의 시대다. 발달한 과학과 A.I 기술은 많은 것을 복제할 수 있다. 복제 양, 복제 개, 복제 인체 기관, 복제 정보, 복제 예술, 복제 소설, 복제 시까지 모든 것을 복제할 수 있다. 이전까지 인간이 복제했던 것은 자연과 선조들의 지식이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양상은 현격히 바뀌었다. 게다가 그 속도까지 빨라지고 있다.
문학과 시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적 제재 즉, 복제의 대상이 현실적인 자연이나 인간이 아니라 허구적 세계의 자연과 인간으로 바뀌고 있다. 예컨대 해리포터 같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의 주인공들이 시의 제재가 된다면, 시는 소설이나 영화의 복제판이 되는 것이다. 급속한 변화의 양상 속에서 시인은 당혹감을 느낀다. 아날로그의 시대가 디지털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현상을 감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시인의 선택은 셋 중 하나다. 변화를 선택하거나. 선택하지 않거나, 혹은 양자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어찌 보면 헤겔 변증법의 정반합(正反合)과 같다. 서두에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김해빈의 시에서 이러한 갈등 구조가 두드러지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회현상에 대하여 첨예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매우 날카롭고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시적 주제나 제재의 선택은 시인의 자율이다. 고전이 된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란 시인이 취사 선택한 오브제의 결합이다. 그리고 그것은 압도적으로 <시인 정신의 자유>에서 비롯된다. 기질적으로 김해빈의 시적 정신은 자신이 지키거나 추구해야 할 대상과 사물의 관찰에서 완고한 태도를 보인다. 시대에 반하는 이러한 자신의 선택에 대하여 시인은 시집의 자서에서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발언을 한다.
흔들리다 어지러움에 지쳐/ 대립으로 치닫는 두통이 올지라도/ 초인종 소리 과감히 뿌리치고/ 완벽한 자유를 찾아가는/바람이고 싶다
<시집, 『저녁을 하역하다』 시인 자서 / 고딕-필자>
매우 강렬하게 쓰인 위의 문장은 자서의 마지막 부분에 쓰인 글이다. 짧지만, 이 글은 김해빈의 시 세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시인은 자유로워지고 싶다. 하지만 사물과 대상 혹은 관계에 묶여있는 시인의 정신은 대부분 자유롭지 못하다. 그 부자유는 시인 스스로 선택했거나, 혹은 벗어나지 못하는 정신의 부자유일 수도 있고, 정치나 사회제도, 문화적 억압으로 만들어진 부자유일 수도 있다. 개개인 시인들의 사상과 철학 혹은 시공간의 연대를 무시하고 평면적으로만 이야기하자면, 모든 시인이 느끼는 자유 또는 부자유는 아마 같을 것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부자유라는 것은 시인을 얽어매고 있는 억압의 결과물이고, 거기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가 <자유>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대기를 구성하는 바람은 유동적이다. 바람은 한곳에 머물지 않으며 언제나 흘러간다. 그 역동성은 세계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흐름을 만든다. 파도를 뒤흔들고, 나무의 가지를 흔들며, 씨앗을 퍼뜨리고 암석을 깎아 흙으로 만들고 그 흙을 또 다른 대지로 이동시킨다. 그 황홀한 자연의 유동성으로 인해 대지의 모든 것은 새로운 곳으로 흘러가서 무엇인가를 창조해내고 변형시키고 소멸시킨다. 세계에 대하여 늘 깨어있음을 느끼고 싶은 시인은, 그러한 자유 지향에 대한 운동성을 <바람>에서 찾는다. 자신을 바람으로 명명하고 싶은 시인은 바람의 운동성을 시에서 표출하고 싶어 한다. 그 바람이 지향하는 점은 <완벽한 자유>의 달성이고, 시는 그 추구의 결과물이다. 시인을 억압하는 세계는 어떤 것일까. 자유 추구의 결과물로서 시인이 얻게 된 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글은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의 흐름 속에서, 시인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빚은 시적 편력과 흐름, 시 세계에 관하여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비평적 성격의 글은 아니며, 시집을 본 독자의 감상을 적은 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2. 인공에 갇힌 시대와 자유의지
자유를 그리워하는 시인은 자유 자체를 노래하는 것일까. 우주 속에서 자유로운 영혼과 거기에 대한 내면의 반응을 시로 적은 것일까. 아니다, 시인은 갇힌 세계를 노래한다. 그것은 자유로움을 이야기하기 이전의 속박, 끝내 시인을 묶어버리는 어떤 환경이며, 존재에 대한 억압이다.
열목어는 짧은 지느러미 더욱 흔들어야 했습니다
생을 헛딛지 않으려고
긴장의 끈 비늘 밑에 감추고 급류를 거슬러 올랐습니다
한 칸 한 칸 햇살 밟아 오를 때는
거슬러 오르던 길을 잊기도 했지만, 어떤 미로나 블랙홀도 그곳엔 없었습니다
돌다리도 두들겨보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물살을 거슬러 오를 때는 늘 조심하라는
떠날 때의 당부 깜빡 잊어버리고
흐름을 돌려놓은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지요
쉬어가기 너무나 적합해서
마음놓고 지느러미 흔들어도 된다는 암시의 방울소리 들렸어요
어항의 보호색은 투명하여 감쪽같았지요
환청의 방울소리는
천연기념물의 등줄기보다 더욱 확실한 보호색을 띠고
질긴 생의 목덜미를 낚아챘습니다
침몰의 시간
부유물 가득한 3급수에 사는 우렁이가 몹시 부러웠습니다
어항 밖으로 은비늘이 마구 튀는 찰나
- 「은비늘이 튀는 찰라」 전문
이 시는 자연상태에서 충실한 자기 삶을 살아가던 열목어가 어항에 갇힌 상태를 담고 있다. 자연상태의 삶은 늘 약육강식의 위험성과 긴장을 내포하고 있지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삶이다. 하지만 천연기념물인 멸종 위기의 열목어는 인간의 손에 의해 어항에 갇히고, 보호의 대상이 된다. 인공적인 세계는 얼핏 보기에는 아름답다. 동물이나 인간이 살기 알맞게 꾸며진 환경은 현대 사회가 지향하는 것이다. 가공의 안락한 세계는 늘 인간을 유혹하고 인간 역시 그 속에 들어가서 평안한 생활을 꿈꾼다. 하지만 가공된 평안은 또 다른 형태의 속박을 가져온다.
위 시에서의 억압은 <투명하여 감쪽같은> <어항의 보호색>이며, 시인에게 <환청의 방울소리>를 내는 현실 세계이다. 열목어가 접한 아름다운 세계는 결국 갇힌 <어항>의 세계일 뿐이며, 그러한 인식은 더러운 물인 <3급수에 사는 우렁이가 몹시 부러>울 정도의 속박감을 유발한다. 그리하여 물고기는 은비늘을 튀기며 그 인공의 세계로부터 탈출을 꾀한다.
어항은 자연적 자아가 현실에서 수없이 부딪치고 만나는 <갇힌 세계> 중의 하나이다. 자신의 결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개입이 필요한 세계, 프로그램 속의 세계에서 시인은 <하지만 어쩌죠 저는 사각의 링에 갇혔거든요> (배팅의 문) 라고 외친다. 그러나 그러한 절규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말은 <지구를 몇 바퀴 돌아온 말>일 뿐이며 실제적인 <너와 나의 말은 곰팡내 풍기며 지하에 갇혀>(지하에 갇힌 말)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의 세계는 허구적인 세계이면서 동시에 매일 만나고 부딪치는 실재하는 현실이다.
이렇듯 시인은 무수한 현실 속에서 억압된 세계를 경험하는데, 그 억압의 근원은 잃어버린 자연적 원형이며, 시대의 급격한 변화에 따른 현실의 부조화와 절망감이다. 시인은 다양한 군상이 겪는 현실의 황폐함으로 억압의 기제를 드러내 보인다.
군화끈 단단히 묶은 포클레인 군단이 성큼성큼 다가온다는 소식에 왕십리 곱창골목 따라 소주잔 부딪치는 소리 더욱 요란하다
가시 말라버린 장미는 허물어진 담장 밖으로 무력감을 토해내고
희미한 달빛만 굽은 등 쓸어내리며 쓰린 속을 달래준다
- 「달동네가 헐겁다」 5,6연
출렁이던 거리는 서럽게 눈이 쏟아진 만큼
막장으로 가는 길 하얗다
바위 밑으로 맥 짚어가던 그 길엔
어떤 무지개가 떠올랐을까
못다 캐낸 까만 황금
카나리아 노래 들리지 않는 문턱에서
단추 없는 옷을 벗는다
- 「기침 소리」 4,5,6연
위의 두 시가 보여주는 황폐한 세계는 시인 자아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과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 그러나 이미 시인의 자아가 된 현실의 모습이다. 도시의 재개발 구역인 달동네나 태백의 폐광촌 같은 사회적 현실에서 시인은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타자>를 발견하며, 거기에서 동일성을 느낀다. 이 황폐한 세계는 시인이 잃어버린 아날로그 시대이며 <3급수의 물>이 있던 시대이다. 디지털화되어가는 인공적인 세계에 대한 두려움, 그 세계를 움직이는 자본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잃어버린 것에 대한 상실감은 시인의 억압으로 작용한다.
아날로그 시대의 판자촌은 이제 성냥갑 같은 아파트촌으로 변했고, 많은 사람의 삶을 가능하게 했었던 탄광은 폐광되고 에너지는 LNG 가스, 핵에너지, 열에너지의 사용으로 바뀌었다. 사람 간의 만남도 사라지고, 손편지 역시 사라졌으며, 이제 스마트폰으로 대화하고, 세계의 사람들을 만나며, 모든 것이 인터넷으로 이루어지는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연과학 및 기술의 발전은 정보 산업 시대로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이에 따라 세대 간의 단절과 인문학과 예술의 정체 및 발전을 막는 요인이 되었다. 인문학과 철학, 예술이 이제 쓸모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위험에 처한 것이다.
공단지대를 소재로 한 <코스모스의 질감>에서 시인은 산업자본 시대에 자신을 억압하고 있는 또 다른 고리의 연쇄성을 찾는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무대를 채우는 금속성 음악이 깔리면
가느다란 다리를 세워 다시 채색을 입힌다
투명으로 팔다리가 살아난다
일용직이면 어때
낡은 토시나 슈즈, 악성의 음악이라도 좋다
그녀에겐 그저 남은 공연을 무사히 마치는 일 그리고 뛰어다닐 무대가 있다는 것
살아있다는 그 간절한 질감을 느끼는 일이다
- 「코스모스의 질감」 4.5연
공단의 노동자 모습을 코스모스/발레리나로 빗대어 표현한 시다.
<공장 옆 자재 더미>에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코스모스의 꽃잎은 발레리나의 치마, 가는 줄기는 다리이다. 그 모습은 공단 노동자의 모습처럼 연약하다. 시인의 연상 속에서 세 개의 대상은 하나로 동일시된다. 코스모스 = 발레리나 = 노동자라는 입체적 연상 속에 시인은 음악과 춤을 가미하고, 영화적 미장센을 연출하여 이미지를 움직인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 춤추는 발레리나 =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 이 세 개의 이미지는 동시에 오버랩된다. 거기서 시인이 찾아낸 것은 삶의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아날로그적 생명력이다. 노동자는 작업을 알리는 <금속성 음악>이 깔리면 코스모스 같은 <가느다란 다리에 채색>을 하고 일어서야 한다. 그러나 그 다리는 여전히 힘이 없는 <투명한> 다리이다. 하지만 노동자는 <일용직>이지만 일할 곳이 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며, 다시 일어나 남은 일을 무사히 끝마친다. 살아야 한다는 <간절한 질감>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과 불가피한 관계를 맺고 있는 노동의 생명력은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같은 울림으로 나타난다.
밀림 같은 그의 얼굴이/ 검은 대륙이다// 찬바람 불어 매서운 거리/ 과식의 불판 아래/ 숯이 되어 타들어가는 아슬아슬한 날들/ 식당 후미진 곳에서 팔다리 간신히 뻗고 있다// 그는 폭풍우에도 가지 꺾이지 않는/ 여유로운 보루네오다// 봄·여름·가을·겨울// 그의 눈이/ 은하수 속에서 반짝인다// 물처럼 유연하게/ 올곧게 일어서서 가지 펴며/ 지루한 장마에도 짓무르지 않고/ 은은한 향기로 해를 기다리며 웃음짓고 있다// 깨어있는 모두를 가까이 다가서게 하는/ 뿌리 깊은 생명이다
- 「코리안드림」 전문
한국에 일하러 온 동남아 노동자(보르네오란 지명으로 보아서 아마도 인도네시아 출신인)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이 잘 드러나 있는 시이다. 이방인인 그에게 낯선 땅에서의 삶은 <숯이 되어 타들어가는 아슬아슬한 날들>이지만 <그는 폭풍우에도 가지 꺾이지 않는>다. 검은 피부의 얼굴에서 빛나는 그의 눈을 시인은 <은하수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으로 표현한다. 은하수 속의 별, 그것은 우주의 근원적 생명력이다. <은은한 향기로 해를 기다리며 웃음 짓는 뿌리 깊은 생명>을 보며, 시인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노동과 삶의 관계를 표현한 이러한 작품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자본의 참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현대 시대에 들어서면서 순수한 노동의 가치는 사라졌다. 기계가 인간을 대신하면서 인간은 기계에 밀리게 되었고, 인간은 노동 가치는 자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순익에 이바지하는가 하는 판단기준이 되고 말았다. 인간이 이익을 창출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저렴한 인건비를 찾아서 다국적 기업들은 전 세계로 이동하고 이러한 현상은 노동의 이동 및 유휴현상을 만들어낸다. 점점 좁아지는 세계는 정보와 물자, 노동 인력의 빠른 이동 속도와 맞물리며 투입된 자본에 대한 이익의 극대화를 향해 달리고 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인간을 지배하는 효율 중심의 시대가 온 것이다. 사회 구조의 디지털화와 함께 변화한 것은 인간의 정서적 변화이다. 한국적인 고유의 정서였던 정과 사랑, 나눔과 베품의 문화는 사라지고 세계는 무한경쟁과 소유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힘없는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급속도로 변하는 현실 세계는 시인에게 <뿔을 가진 세계>로 보인다. 수없이 많은 뿔을 가진 괴물 같은 세계, 그리고 시인은 그 속에서 안주하고 살아가려면 인간 스스로 변화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처절함을 느낀다.
3. 현실 세계의 각과 원의 대립과 화해
두꺼운 껍데기를 깨고
세모 네모 동그라미 찾으려 버스에 올라타는 남자
하루의 시작을 지갑 째 해킹당하고 의자 외각에 몸을 맡긴다
삼각김밥으로 지각을 면한 남자
집과 사무실 안팎의 일상을 짊어지고
날마다 역삼각형으로 살아야 한다는 아내의 내각에 갇힌다
회전문에 휩쓸려 황급해진 발걸음
그 안에 기다리고 있는 조립해야 할 조각들
대리는 사각형, 팀장은 오각형, 후배는 다각형이 좋겠단다
하루를 일년으로 굴리는 남자
해와 달처럼 살자는 여자를 위해 뾰족한 각을 감추고
만원버스에 오르고 또 내린다
집에서 사무실, 사무실에서 집, 간극을 지우는 자동차 바퀴
네모도 세모도 아닌 동그라미로 쉴새없이 돌고
여자는 동그라미에서 기댈 각을 찾는다
- 「각覺찾기」 전문, 고딕-필자
위 시는 샐러리맨인 듯한 남자의 평범한 일상적인 삶과 그것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각을 그리고 있다. 이 시는 매우 재미있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시의 제목에 사용된 각(覺)은 깨닫는다는 뜻이다. 한글로 풀어쓴다면 <깨달음 찾기>가 제목이 될 것이다. 시에서는 도형적인 이미지가 충실하게 사용되고 있고, 심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각>이란 어휘를 중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본문에 사용한 각을 한자로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角 覺 刻 各 閣 脚 殼’ 여기서 삼각, 사각, 오각, 다각, 역삼각, 내각, 외각, 조각 등으로 배치되어 시어로 사용되고 있는 각은 현실적인 억압이다. 따라서 각은, 각=현실=외압으로서 극복할 대상이다. 동시에 그러한 현실과 외압의 부딪침 속에서 그것이 삶의 불가피한 조건이며 동시에 이행해야 할 명제라는 <깨달음>을 주는 각(覺)인 것이다.
마지막 행을 보자. <여자는 동그라미에서 기댈 각을 찾는다>는 표현은 표면적으로 읽으면 여자는 남자의 능력에 기대어 편하게 산다는 의미로 보인다. 하지만 각(覺)을 대입하면 의미구조가 달라진다. 여자는 동그라미에서 <생의 새로운 깨달음>을 찾는다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상처 혹은 외압 등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각은 내부적으로는 깨달음을 준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고, 이러한 생각의 발전은 동그라미를 찾는 것에서 갈등의 해소를 갖는다.
갈등 속의 여자는 남자에게 매일 도는 쳇바퀴 같은 원형의 삶을 이해시킨다. 가정적으로 보았을 때 이는 여자의 당연한 역할인 듯이 보이며, 각진 삶을 살아가는 남자에게 크나큰 위안일 뿐만 아니라, 삶을 이끌어나가는 정신적인 힘일 것이다. 힘들어도 참으며 <역삼각형으로 살아야 한다는 아내>와 <해와 달처럼 살자는 여자를 위해> 동그라미를 도는 남자 그리고 그 동그라미에서 기댈 각을 찾는 여자. 현명한 여자는 남자에게 동그라미를 가르쳐주고 그 동그라미에 기댄다. 그것은 남자에게 종속된 여자의 모습은 아니다. 상호보완적인 관계의 질서 속에 놓여 있는 부부의 참모습인 것이다. 실제로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부부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러한 조화로운 세계는 뿔(角)이 사라진 세계이며, 동시에 깨달음(覺)이 있는 세계이다. 시인은 고난 고통으로 상징되는 각을 통해서 지혜로운 삶과 인생의 깨달음인 각(覺)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시의 놀라운 점은 시적 화자의 발화가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시를 읽는 동안 시인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이러한 장치의 틀이 매끄럽게 읽힌다는 것과 기표와 기의 사이에 놓인 발화의 간격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장 좋은 시의 유형인 쉬운 시, 읽은 후에 다시 그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열린 결말>의 시인 셈이다.
시인은 둥근 원의 관계성, 마찰하지 않고 구르며, 어디든 갈 수 있는 원의 완전성에서 화해와 관용, 그리고 삶의 원천적인 힘을 찾는다. 이러한 원(圓)에 대한 추구는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흔들리는 시간을 붙잡은 벽에서
빠진 손톱 조각이 툭툭 튀어나간다
동굴에 살던 여자는
꽃피면 숯검정으로 입술 모양을, 눈이 날리면 짐승 뼈다귀로 활촉을
부뚜막에 그려놓고
날마다 사냥 나간 남자의 크기와 하늘의 크기를 잰다
꽃이 억만 번 피었다 지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벽을 세운 여자
하늘과 바람과 빗물은 남자의 꿈을 여자의 머릿속에 옮겨놓았다
맨발로 사냥터 나갔던 남자가 자동차 타고 돌아올 무렵
벽속의 여자는
동굴을 박차고 나와 입술꽃으로 붉게 피어난다
꽃그림에서 해와 달을 세던 여자
검게 그을린 시간을 웃음으로 찍어낸다
- 「벽화 속의 여자」 전문
여성성의 시간적인 흐름을 동굴벽화를 통해 잡아내고 있는 위 시는 시집 가운데서도 수작으로 뽑을 수 있는 작품 중의 하나다. 이 시는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위 시는 페미니즘의 시는 아니다.
표면상으로 동굴 속의 원시 여자와 현대의 여자는 같은 여자이다. 둘 다 <남자의 꿈>을 머릿속에 담고 있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즉 남자의 종속물로서 여자, 남자의 권위와 위압에 굴종하고, 자녀의 출산과 양육과 가정생활을 지켜나가며, 가정에 헌신하는 전통적인 여자. 이것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다. 즉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모했으나, 변모하지 않은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시다. 하지만 이 시의 본질은 이러한 여성성 / 남성성의 대립 관계가 아니다. 그 이유는 그 <남자의 꿈>을 여자의 머릿속에 옮겨놓은 것이 남성이 아니라 <하늘과 바람과 빗물>이기 때문이다. 즉, 남성의 폭압적인 힘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 여성의 머릿속에 각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 = 본성 = 우주적인 질서의 체계로 이 시는 이해된다.
시간적인 흐름을 단 한 줄의 행으로 표현하고 있는 4연의 비약적 구절을 보면, 벽 속에 갇혀있던 여자는 적극적으로 화장을 하고 동굴을 박차고 뛰어나와 사냥터에서 돌아오는 남자를 웃으며 맞는다. 따라서 이 시를 여자의 <저항>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수동적으로 남자와의 관계성을 유지했던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남자와의 관계를 리드하고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해와 달>로 명명된,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세계이다. 시인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세계를 그리고 싶은 것이 아니라 수평적이고 대등적인 관계 속에서 조화롭고 평화로운 원형의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이러한 힘의 원천은 <해와 달>로 상징되는 원(圓)의 세계이다. 원은 우주를 지배하는 기본원리이며 철학이다. 원천적인 우주인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의 신체구조, 알에서 깨어나는 동물의 생명, 식물의 씨앗, 우리를 둘러싼 해와 달, 별들의 구조는 인간의 원형(原型)이고 그것은 영속되는 생명의 완전성과 영원성을 나타낸다. 둥근 원형의 구조에서 인간은 안락함을 느낄 뿐 아니라 평안함과 기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둥근 원형의 구조 속에는 아니무스(Animus)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 무기력해진 남성의 아니마(Anima)를 끌어가는, 긍정적인 아니무스(Animus)의 힘. 사회적으로 억눌린 자, 연약한 자, 뿌리뽑힌 자의 처지를 대변하는 김해빈의 여러 시편에서 이러한 아니무스의 힘이 나타난다. 그것은 낮은 계층과 사라지는 것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시인의 공감력이기도 하고, 사회적인 자아와 인간으로서 따뜻한 시선이기도 하다.
1) 한줌 재로 산등성이 타고 오르는 항해사 류씨/ 하이얀 미소만 남았다 - 「묘비명」
2) 지워지는 포구의 시간에 쫓기며 고층 아파트 사이에서 여러 번 옷 바꿔 입고도 소래바다는 뿌리 가 자꾸 흔들린다 - 「소금창고」
3) 무릎관절 꺾인 어머니/ 휠체어에 태우고/ 앞서간 날 곱씹으려 가나안덕에 들어선 늙은 아들 - 「오리집 참새」
시인의 아니무스(Animus)가 투영된 세계는 위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시에서 나타나며 사회적 시각으로 확장되어 간다. 또한, 아니무스의 발현은 남성적인 세계를 직접 표현하거나, 남성적인 어휘의 사용을 즐겨 쓰는 것으로 나타난다.
도끼, 전기톱, 군화끈, 포클레인, 경비실, 헬기, 바리케이트, 항해사, LNG, 하역선, 핵폭탄, 비행단 철조망, 굴착기, 배트맨, 바카족 남자, 인력 센타, 배관, 탈레반, 데모대, DMZ
위와 같은 명사들은 여성성보다는 남성성을 대표하는 어휘들이다. 이러한 다양한 남성적인 어휘를 통해 시인은 남성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억압, 그것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드러낸다. 사회적인 억압을 받는 자들에 대한 시인의 연민은 시인의 고통이 되며, 내면화된 그 고통은 시인에게 사회적인 <속박>의 굴레를 씌운다. 그러므로 시인이 원하는 자유는 개인적인 자유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자유를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표현하지 않는다. 시인은 강렬한 저항보다는 화해를 꿈꾸는 원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원에는 아니무스의 강력한 힘, 원형(圓形)의 모성성이 자리하고 있다. 결국, 시인이 기대하고 바라는 현실의 세계는 갇힌 세계가 아니라 열린 세계, 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꿈을 키워나가고 삶을 살아나가는 자유로운 세계가 아닐까 여겨지며, 시인은 이 세계를 향해 끝없는 모색과 항해를 해나갈 것으로 생각된다.
4. 언어적 새로움과 숨김과 열림의 미학
현대시가 가진 주요 특질 중의 하나는 모호성일 것이다. 그 모호성은 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가져오고, 그것은 난해성 혹은 불가해성으로 치부되어 좋지 않은 시작의 한 형태로 지적받기도 한다. 모호성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시인의 의도적인 내용과 형식의 파괴, 시적 진술의 지나친 비약, 개인적인 은유나 상징의 과다한 도입, 문법이나 어법의 자의적, 타의적 파괴 등이 주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논의할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전위적인 혹은 위험한 시에 대하여 필자는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편이고, 다양한 언어적 실험을 통하여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김해빈의 시는 비교적 쉽게 읽히지만, 많은 시에서 새로운 이미지의 발현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나타난다.
표절시비로 물속에 뛰어들었나
수반 위에 떨어진 동백꽃
창틀 앞에 작은 콘솔 앞에 당당하던 그녀
거울에 비친 그림자 지우려다 비집고 들어온 한줌 시린 달빛에 무너지고 말았다
바람 불어온다는 소리에 낙화 거리 좁혔나
보폭 없는 거리
일어설 동선조차 욕심부리지 않았던 그녀
파도를 잠재우지 못해 산산이 부서져 붉은빛으로 가는 밤길 지우고
달빛과 떨어진 꽃
소리 없이 내려앉은 달빛 놓아버린 순간
바다는 멈추었다
바다를 비운다
수반에서 떨어져 나가는 그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물위에 찍은 발자국
10월 하늘에서 파랗게 질린 달이 쏟아진다
-「달을 삼킨 바다」 전문
시를 읽다가 바로 멈추는 경우가 있다. 시적 표현의 극적인 긴장감 때문이거나 혹은 돌발적인 시적 화자의 발화 때문이다. 이 시는 첫 문장부터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표절 시비>라는 어휘 때문이다. 이 돌발적인 어휘가 품고 있는 내용은 그러나, 무엇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인지 마지막 연에 이를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시를 읽으면서 묘한 의식의 혼란이 느껴지는 것은 시적으로 매우 아름답지만, 그것의 의미구조가 쉽게 파악되지 않는 데 있다. 하지만 이 시는 난해시가 아니다. 표절 시비는 무엇이며 왜 10월 하늘의 달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어지는가. 구체적인 어떤 사건이 숨어있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지만, 역으로 이 시의 신비한 아름다움은 그 의미를 숨긴 데에 있다. 위 시의 이미지는 교란과 확장을 하고 있으며, 그 울림은 한 폭의 풍경화나 정물화처럼 조용히 파동친다.
위 시의 중요한 시어는 수반과 동백꽃이다. 수반은 水盤을 의미하기도 하고, 水畔을 의미하기도 하며, 隨伴을 의미하기도 한다. 빨간 이미지를 가진 동백꽃 역시 달의 이미지와 부딪치면서 노란 생강나무꽃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강원도 지방에서는 생강나무꽃을 동백꽃으로 부르며, 이전에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논의된 적이 있었다)
1) 수반 = 물담는 그릇 = 바다를 담고 있는 지구 = 동백꽃과 달을 담고 있는 거울이란 등식으로 수반의 이미지는 확장된 동일성을 가지며,
2) 떨어지는 붉은 동백꽃 = 떨어지는 노란 달빛 = 낙화한 그녀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직접적인 표현을 피하면서 동백꽃으로 명명된 그녀의 죽음과 슬픔을 이야기한다. 아마 그 죽음은 물리적인 죽음과는 별개인 사회적인 죽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표절 시비로 인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 이후에 그녀의 흔적은 모두 비워진다. 바다는 인간이 움직일 수 없는 사물이지만 수반은 움직일 수 있는 사물이고, 그것은 인간의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반 속의 바다를 버리는 순간 그녀가 만든 <물 위에 찍었던 허상의 발자국>은 사라진다. 시는 시인이 카메라를 들고 앵글을 맞추고 어떤 사건을 찍고 인화한 느낌을 준다.
이 시는 어떤 <사회적인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녀의 정체는 밝히지 않는다. 그러한 숨김은 시적 긴장감과 함께 시적인 아름다움을 준다.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만일 위 시에서 현실의 구체적 사건을 묘사하였다면 시적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된 적 있는 몇 개의 사건들을 연상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자적 상상력을 유발하게 하는 시를 읽으면 즐겁다. 아마 좋은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즉. 이 시는 결말이 열려있는 영화나 소설처럼 내용적인 면에서 숨김과 열림의 미학을 추구한 시라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위의 한 작품을 이야기했지만 김해빈의 시에서는 새로운 이미지 표현, 구체적 진술의 숨김, 시적인 비약(이를테면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이 두드러진 시가 여러 편 나타난다. 과감한 남성적 어휘의 도입 역시 이러한 시적 사유의 확장을 위해 시인이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대상이나, 사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5. 에필로그
김해빈의 시세계는 실재와 허구 사이의 경계에 놓여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실적인 세계가 주는 이미지는 그의 시 속에서 가공되기도 하고 실재를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계에서 시인의 의식이 머뭇거리기도 한다. 시인의 이러한 주저함은 현실 속으로 강력하게 뛰어들지 않고 (이를테면 민중 시인들이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 현실 타개를 외치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그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거나 하는 것이 아닌) 시인 고유의 내면적인 세계에서 그것을 제련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4권의 시집을 모두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앞서 살펴본 세 번째 시집의 움직임은 그래서 흥미롭다. 시인 사유의 비틀림은 어디로 향할까, 그대로 한곳에 머무를까 혹은 다른 자유를 향하여 돛을 올릴까. 시집을 보면서 시인의 부드러운 원의 세계가 확장되기를 기대해본다. 그것이 사실주의가 되든 혹은 시인 고유의 상징과 은유로 뒤섞인 내면적 그림이 될지는 시인의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의 역동성에 의하여 좌우될 것이다. 시인이 추구하는 완전성인 원의 세계가 시인의 사회적인 시각과 더불어 어떻게 확장되어 갈지 궁금하다.
디지털 시대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않고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사라지지 않는 자연의 원형, 참된 인간성일 것이다. 그것을 모두 잃어버린 물질의 시대가 돌아온다면 인간은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의 부속물로 존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해빈의 자유로운 시적 세계는 인간성을 점점 잃어가는 이 시대의 정신을 다시 여는 변주곡이 될 것이다. 그의 시는 LNG처럼 <냄새조차 없는> 문명에 대항하며, <타오르는 저녁놀을 악물고>,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자연의 <저녁을 하역> 해줄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