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장군 유적지 ~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산65-5
동해안으로 난 길중에 7번국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길 옆에
멀리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유적지가 조성되 있다.
신돌석장군에 대한 각종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수집, 보전,
전시하여 장군의 넋을 기리고 항일정신을 되새겨보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1999년 11월 18일 개관하게 되었다. 이 유적지에는
충의사, 동재, 서재, 외삼문, 내삼문, 기념관, 관리사무소, 주차장,
화장실 등의 주요시설이 있다.

7 번 국도에서 바라본 유적지

신돌석장군의 사당인 충의사 와 주변

기념관 쪽으로 올라서 외삼문 쪽으로 바라본 전경


의병대장신공유허비 는 그의 동생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복두산 기슭에
세운것을 유적지 성역화 작업시 이전하였다한다.

사당 충의사로 들어가는 내삼문이다.
관리사무소에서 아주 깨끗이 정비를 한 모습을 볼수가 있었다.

충의사 사당에서 밖을 내다본 모습 아무리 좋은 곳에 좋은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를 해도 관리가 소홀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신돌석장군의 위패와 인영이 모셔진 사당 충의사.

신돌석 : * 신돌석 장군 약력
본관은 평산(平山), 자(字)는 순경(蕣卿)이고, 호(號)는 장산(壯山) 본명은 태호(泰鎬)이다.
이명(異名)은 돌석(乭石), 태홍(泰洪), 태을(泰乙), 대호(大浩)이며, 태백산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878년(고종 5년) 11월 3일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당시는 영해군 남면 복평리)에서 출생하여 퇴계(退係)의 방계인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에게 학문을 배웠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0여명의 동지를 규합하여 영해 의병진을 창군, 활약하다 1896년
고종황제의 명으로 해산했다. 1905년 11월 을사5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체결되어,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3월 장군도 영릉의병진(暎陵義兵陳)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다시 창군하니 각처에서 모여든 동지가 300명이 넘었다 한다.
그 때 장군의 나이 29세였다. 장군은 최고 30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에 걸친 넓은 지역에서 항쟁한 의병장이기도 했으나, 일월산, 백암산,
대둔산 등지에 요새를 두고 소수정예로 적을 섬멸하는 게릴라전에도 능했다.
* 1907년 이인영(李麟榮) 13도창의총대장으로부터 경상남북도를 합친 교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어 서울 공략전에 참여했으나 평민이란 이유로 배제되었다. 1908년 11월 18일
엄동설한을 앞두고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무참히 살해되어 31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으며, 1971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었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과 기념관이 세워졌다.
( 참고자료 : 한국관관공사 홈에서)

유적지내 동제와 서제


신돌석 장군이 쓴 시 "우국"

우국이라는 한시를 돌에 새겨 양쪽으로 풀어쓴 내용

루에 오른 나그네 갈 길을 잊은채, 단군의 옛 터가 쇠퇴함을 한탄하네.
남아 스물 일곱 이룬 것이 무엇인가, 추풍에 의지하니 감개만 솟는구나.


신돌석장군의 생가


이 생가는 신돌석장군의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 20100429 )
첫댓글 고개숙여 묵념 드리면서 마음이 뭉쿨하네요 좋은글 올려주셨어 감사드리면서 좋은밤되십시요
아이구 이렇게 늦은 시간에

하여간 자주 찾아주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