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平真詮是沈孝瞻的筆記嗎?-《耕寸集》提要
자평진전은 심효첨의 필기책(필사본)인가?- '경촌집'의 개요를 제시한 것이다.
耕寸集一冊、不分卷、國立台灣中央圖書館藏善本、子部術數類命相之屬、題明不著撰人、清敬一堂鈔本、版框長二十一點八寬十五點五公分。每半頁八行、行二十字。單魚尾、第一第二頁版心處有子平真詮四字、耕寸集當即明版子平真詮也。
경촌집은 단권으로 낱권이며, 국립 대만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귀중한 책이다.
자부 술수류의 '명과 상'의 부류에 속하는데, 제목은 분명하지만 저자의 이름이 없다.
잘 보존된 초본 판의 크기는, 길이 21.8 센치에 너비가 15.5 센치이다.
페이지 마다 여덟줄에 20자로 되어 있다.
단어미(單魚尾)로 되어 있으며, 제1,제2항의 판본 중간에는 자평진전이라는 네 글자가 들어 있으니,
경촌집은 곧 명대에 출판된 자평진전에 해당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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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미--고서 판본들은 한자체로 세로 쓰기를 하므로
글제를 쓰는 겉장의 페이지에서 상,중,하의 간격을 두어
(오늘날의 머리글 달기에 해당하는) 위쪽 부분을 상어미라 하고
(아래쪽 꼬리글 달기에 해당하는) 아랫 부분을 하어미라 하는데,
일반적으로 상어미에는 책명을 적고, 하어미에는 별호를 적으며,
가운데에는 권수를 적습니다.
또 상어미만 있는 것을 단어미, 상하어미가 다 있는 것을 쌍어미라 하는데,
위의 경촌집은 저자의 이름과 권수가 적힌 부분이 없으니,
제목만 있는 상어미의 단어미로 되어 있다는 뜻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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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核對、是書命例多摘錄自子平三命通變淵源、三命通會二書。子平三命通變淵源成書於南宋末、三命通會成書於明萬曆六年(西元一五七八年)。據此可知是書成於明萬曆六年之後的明晚期、作者生平及籍貫均不可考。檢其目錄得四十七篇、與民國十二年(西元一九二三年)紹興育新書局印本子平真詮編次相同、可補育新本之缺漏及訛誤。
대조하여 확인해 보면, 그 책에는 예시 명조가 다수 실려 있는데,
자평삼명통변연원과 삼명통회 두 책을 따르고 있다.
자평삼명통변연원은 남송말기에 지어졌으며,
삼명통회는 명대 만력6년(1578년)에 지어졌다.
이를 보면, 이 책(경촌집)은 명대 만력 6년이후인, 명대 말기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지만,
작가의 생애 및 본관은 모두 고증할 수 없다.
그 목록은 47편인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민국12년(1923년)의 소흥 육신서국 인쇄본인 자평진전과 동일한 순서로 편찬되어 있어,
육신본(자평진전)의 결함과 누락을 보충할 수 있다.
世傳子平真詮為乾隆己未進士沈孝瞻先賢命學筆記。乾隆四十一年(西元一七七六年)、胡焜(字倬雲)為子平真詮作序、云已而三年期滿、僦居宛平沈明府署、得山陰沈孝瞻先生所著子平手錄三十九篇。考沈孝瞻先賢生於康熙三十五年(西元一六九六年、沈氏生平詳見附錄)、子平真詮之前身耕寸集當非出自沈氏之手。耕寸集即子平真詮雖非出自沈氏之手、然其於耕寸集亦有傳播之功。一如造化玄鑰、成書於明末、清初由日官之手而經陳溥(字永叔、號南陔、天台人。康熙五十二年西元一七一三年進士、補內閣中書、參與修編萬壽盛典。任湖南攸縣知縣、後辭官歸田)增刪成書、甄松年(乾隆五十四年西元一七八九年已酉科進士)著欄江網全集、於造化玄鑰有傳承之力而非原著作者。
세상에 전해지는 자평진전은 건륭 기미년에, 진사였던 심효첨 선현이 명학을 필기(필사)한 것이다.
건륭 41년(1776년) 호곤(자 탁운)이 자평진전의 서문을 썼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후에, 완평심명부서에서 근무하면서,
산음 심효첨 선생이 지은 자평수록 39편을 얻었다.
심효첨 선현은 강희35년(1696년-심씨 생애를 부록에서 상세히 볼 것)에 태어났기 때문에,
자평진전의 전신인 경촌집은 심씨 자신의 손으로 쓴 것이 당연히 아니다.
비록 경촌집, 곧 자평진전이 비록 심효첨의 손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그 책(자평진전)으로써 경촌집을 전파한 공은 있다.
(경촌집과)마찬가지로 조화현약도 명대 말기서 부터 청대 초기까지 쓰여 졌는데,
(조화현약은)일관인 경진부(자 영숙, 호 남해, 저장성 사람)의 손으로 쓰여졌다.
(경진부는) 강희52년(1713년)진사가 되어 내각 중서에 보해졌으며,
만수성전의 책을 수정하고 편집하는 일에 참여했다.
호남성 유현의 지현으로 부임한 뒤 사임하고 시골로 내려가 책을 증편하여 냈고,
와송년(건륭54년, 1789년 이유과 진사)에는 난강망 전집을 저술했는데,
조화현약(이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조화현약이)원작서는 아니다.
明崇禎十三年(西元一五七八年)、意大利籍耶穌會傳教士潘國光來到上海、徐光啟孫女潘瑪爾蒂納資助他購得原四川布政使潘允端在家鄉上海縣城內安仁里興建的宅邸世春堂、將世春堂改為教堂、名為敬一堂、奉耶穌救世主為主保、同時在院內建造了觀星台。清雍正九年(西元一七三一年)、雍正帝宣佈查禁天主教、沒收各地天主教堂、上海敬一堂改為關帝廟。肖清和明清基督宗教漢語文獻總書目漢語基督教文獻總書目(明末清初部分)收錄多部敬一堂刊刻或手寫以基督教義為主的書籍、證明敬一堂是有公開出版書籍、時間當在明崇禎十三年至清雍正九年。以此推測、耕寸集手抄本傳抄時間當在雍正九年之前。
명 숭정 3년(1578년), 이태리 출신 예수회 선교사 반국광이 상해에 도착하여
서광기의 손녀 판마르티나는 돈을 대어 원래 사천 포정사 반윤단이 살던 집을 사 주었고,
고향인 상해현의 성안에 있던 안인 리흥건의 저택인 세춘당을 교회로 개조하여
경일당이라고 이름하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들며 동시에 원내에 관성대를 세웠다.
청 옹정9년(1731년), 옹정제는 사찰을 선포하여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고,
각지의 천주교당을 몰수했으며, 상해의 경일당을 관제조(황제의 사당)으로 바꾸었다.
초 청화 명청시대 기독교 중국어 문헌 총서목록(명말청초 부분)의 여러 부분에 수록되어 있고,
경일당에서는 기독교 의의 위주의 서적을 필사본으로 새겼다.
시간적으로는 명 숭정 13년에서 청 옹정9년까지에 해당한다.
이로 미루어 볼때, 경촌집 필사본은 시간상 옹정 9년 이전에 전해진 걸로 추측할 수 있다.
乾隆四十一年胡焜為子平真詮作序、云先生諱燡燔、成乾隆己未進士、天資穎悟、學業淵邃、其於造化精微、固神而明之、變化從心者矣。觀其論用神之成敗得失、又用神之因成得敗、因敗得成、用神之必兼看於忌神、與用神先後生尅之別、並用神之透與全、有情無情、有力無力之辨、疑似毫芒、至詳且悉。是先生一生心血、生注於是、是安可以淹沒哉。胡焜給予子平真詮的評杆樣適用於耕寸集。
건륭41년 호곤이 자평진전 서문을 작성했을 때 선생이,
돌아가신 역번(심효첨의 이름)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건륭 기미년에 진사가 되시었고, 하늘의 뜻을 깨달았으며, 학업이 깊고 심오하시어
그것으로 조화를 정미롭게 하셨다. 확실히 신이 밝아 변화를 마음대로 하신 분이다. 라고 했다.
그 이론을 보면 용신의 성패와 득실, 용신이 성이 되었다가 패가 되고, 패가 되었다가 성이 되는 것,
용신과 기신을 반드시 겸하여 보는 것, 용신의 선후생극에 따른 차이, 병용(겸용)의 빼어남과 온전함,
유정과 무정, 유력과 무력에 대한 설명, 극히 의심스러운 것과 아주 상세한 것 모두 알 수 있다.
선생님은 이것에 평생 심혈을 기울이셨고, 이것에 파묻혀 평안하실 수 있었다.
호곤은 말하기를 자평진전의 간본평은 경촌집에 적용된다고 했다.
自先賢徐子平以來、子平命學多以秘傳形式薪火傳承。南宋徐大升得其大成、著子平三命通變淵源、子平命學得以光大。從早期子平命學的理論來看、原始子平命學實即格局法論命。耕寸集一書深入挖掘原始子平命學的用神含義、大量借鑒子平三命通變淵源中的富貴命例、將用神與格局的成敗、變化的道理闡發無遺、而對具體的流年及涉及的事項較少提及、是古代命學專論富貴的集中體現。
子平真詮一書、經民國徐樂吾評注而成談命家之圭臬。民國二十五年、徐樂吾子平真詮評註刊行、方重審序云所余子平一派、尚有線索可尋。此中舊籍、首推滴天髓與子平真詮二書、為最完備精審。後之言命學者、千言萬語、不能越其範圍、如江河日月、不可廢者。耕寸集的重新發現及校訂出版、于祿命文化史、祿命文獻學等均將產生深遠影響。
癸巳年初、寧波李鏘濤兄慨然贈閱耕寸集一書影本。我始計劃校訂出版。文本錄入和校對期間、得到師兄王化斌大力相助、謹以致謝。為最大限度保留耕寸集原貌、以仿刻本形式出版、異體字、俗體字一仍原本。
서자평 선현 이래, 자평명학은 비전형식의 불씨로 전수되어 왔다.
남송의 서대승이 대성했는데, 자평삼명통변연원을 지어 자평명학은 크게 빛나게 되었다.
일찍 자평명학의 이론을 따르는 것이 (운명을) 미리 보는 것인데,
원래 처음의 자평명학은 격국법론 명학이다.
경촌집 한권을 읽어서 원시 자평명학의 용신의 함의를 캐낼 수 있는데,
아주 많은 본보기를 자평삼명통변연원 중의 부귀명조의 예시에서 빌렸고,
또 용신과 격국의 성패, 변화의 이치를 남김없이 밝혔으며,
구체적인 유년(세운)에 관해서는 언급을 줄이고,
고대명학 논리만으로 부귀를 탐구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자평진전 책 한권이, 민국의 서락오의 평주를 거쳐 운명상담가의 규얼(규범,기준)이 되었다.
민국 25년 서락오의 자평진전평주가 간행되었는데, 방중삼이 서문에서 서자평 일파에 대해 말하기를
아직도 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명학 중의 옛 책에서는, 먼저 적천수와 자평진전 두 책을 권한다고 했는데,
가장 완비되고 정밀하게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의 명학을 말하는 자는,
온갖 말을 하더라도 이 말의 범위를 넘기 불가능하며,
강물이나 일월과 같이 사라질 수 없는 불변의 말이 된다.
경촌집의 새로운 발견은 교정출판과 관련되어 중요한데,
녹명문화사에서 부터 녹명문헌학 등에 까지, 모두 심원한 영향을 만들어 낼 것이다.
계사년 초에, 영파 이장도 형이 경촌집 영인본 한권을 흔쾌히 내게 증정하여
나는 드디어 교정출판을 계획했다
텍스트 입력 및 교정기간에 사형(선배)인 왕화빈의 큰 도움을 받아 삼가 사의를 표한다.
경촌집의 원형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복제본 형태로 출판하고,
이체자, 속체자를 원본에 있는 그대로 따랐다.
有人问《耕寸集》和《子平真诠》有什么区别。简单讲,《耕寸集》是目前能看到的《子平真诠》最早的版本,后者很多命例没有名姓,前者基本都有。其次,经逐字比对,《子平真诠》很多字错误,有些段落脱落,《耕寸集》更加完整
경촌집과 자평진전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묻는 사람들이 있다.
요약하자면, 경촌집은 현재 볼 수 있는 자평진전의 최초 판본이며,
후자(자평진전)는 많은 명조의 예시가 있지만 명주의 성명이 없으며,
전자(경촌집)은 기본적으로 모두 갖추어져 있다.
둘째, 자평진전이 많은 오자들이 있으며 일부 단락이 누락되었지만, 경촌집은 더 완전하다.
http://weibo.com/1230204202/Bsjriihza?s=6cm7D0&type=comment#_rnd147964498570
더러 서툰 번역의 문맥이 있는데, 지적해 주시면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첫댓글 대조하여 확인해 보면, 그 책에는 예시 명조가 다수 실려 있는데,
자평삼명통변연원과 삼명통회 두 책을 따르고 있다.
자평삼명통변연원은 남송말기에 지어졌으며,
삼명통회는 명대 만력6년(1578년)에 지어졌다.
이를 보면, 이 책(경촌집)은 명대 만력 6년이후인, 명대 말기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지만,
작가의 생애 및 본관은 모두 고증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