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손가락
김00
원장님이 급하게 나를 찾는다. 영문을 모른 채 사무실로 달려가 전화를 건네받았다. 흐느끼는 소리만 수화기를 타고 들었다.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떡하면 좋으냐." 큰 언니가 울먹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느냐." 차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아기가 다쳐 y대학병원 응급실이다." 오지게 사고가 났을 것임을 직감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현기증이 났다.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감정을 다스리며 낮은 소리로 물었다. 왼쪽 손을 많이 다쳤다고 했다. 자세한 경위를 알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아기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 안절부절 못했다. 심장 박동이 한계치를 넘었으리라. 병원까지 어떻게 달려갔는지 몰랐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다. 아이 손은 커다란 수건으로 덮여 있었다. 아이는 울다 지쳐 목소리가 쉬었고, 부은 얼굴은 차마 볼 수 없었다. 생후 겨우 15개월인데.
아이가 태어나던 해에 IMF가 터졌다. 남편이 운영하던 작은 무역회사는 부도를 맞았다. 검은색 차림 사람들이 날마다 찾아와 남편이 어디 있는지 으름장을 놓았다. 무서웠지만 애써 태연한 척 했다. 나도 모르니 좀 찾아달라고 매몰차게 역공했다. 수입원이 떨어졌다. 마냥 안주할 수 없지 않는가. 겨우 돌 지난 아기를 시댁에 맡기고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취업한 곳은 유치부와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종합학원이었다. 그 시절에는 종합학원이 대세였다. 오전엔 유치부, 오후에는 초등부 저학년·고학년 한 타임을 맡았다. 말 그대로 중 노동이었다. 혹사한 목소리는 늘 잠겼고 감기는 달고 살았다. 안쓰러웠던지 시부모님은 직장을 그만 두고 아이나 잘 키우라고 했다. 현실에 맞지 않은 말씀에 서운했지만, 며느리에 대한 부모님 마음 씀씀이는 여태 잊을 수 없다. 어른들 뜻에 따라 아이를 데려 왔으나 직장은 그만 둘 수 없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것을.
놀이방에 보낸 아이는 병을 달고 살았다. 밤새 울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모자는 점점 지쳐갔다. 살이 쏙 빠졌다. 보다 못한 언니가 아이를 데리고 갔다. 아들은 거짓말처럼 건강하고 밝게 지냈다. 아이의 식성을 파악한 언니는 맞춤형 음식을 손수 만들었다. 날마다 토마토를 녹즙기에 갈아 먹였다. 사건이 터진 그날의 상황이다. 토마토주스를 만들고 한눈파는 순간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들이 녹즙기 속에 손을 넣고는 버튼을 누른 것이다. 손목을 녹즙기를 매단 채, 응급실에 실려 왔단다.
"괜찮아."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정형외과·신경외과·피부과·성형외과 여러 선생님의 연석회의 끝에 내린 결론은 왼손을 절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일단 수술하자. 아니면 차선책을 택하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처럼 절박했다. 인맥을 총동원했다. 언니의 부주의가 빚어낸 것이라 자책 하듯, 형부는 발 벗고 나섰다. 운 좋게 손 수술 권위자인 교수님을 만나 손가락 절단은 면할 수 있었다. 순간의 선택의 이렇게 중요한 것을.
네다섯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불안 초조했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말에 토해낸 안도의 한숨은 길고도 질겼다. 손가락 다섯 개가 붙어있다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그 후 6개월 넘게 병원 생활을 하면서 여러 차례 추가 수술을 거쳤다. 성인이 될 때까지 주기적으로 진료와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성장점에는 이상이 없었다. 울퉁불퉁 삐뚤삐뚤한 손가락은 오른손과 같은 크기로 자랐다.
아들은 그러한 손앞에서 철없을 유아일 때는 물리적 아픔이, 사춘기엔 심리적 트라우마가 오죽했을까. 잘 견뎌낸 아들이 대견스럽다. 손가락 모양은 다르지만, 이 세상 그 어느 손가락보다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