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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8일에 순천에 가서 발표할 원고입니다. 각주를 생략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읽어보아주시기 바랍니다.
한·중·일의 사료로 본 왜교성 전투의 주역들
정구복(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1. 머리말
순천의 왜교성 전투는 1598년 9월 2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치러진 임진왜란의 최후전투였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조원래 교수의 연구에 의하여 소상히 밝혀져 있다. 이에서는 이미 한·중·일의 사료를 종횡으로 이용하여 살펴본 바 있다. 이에 의하여 왜교성이란 명칭은 임진왜란 이전에 왜교라는 명칭이 이미 사용되었음과 왜교라는 용어는 예교(曳橋)라고도 칭하게 된 유래 그리고 왜교성을 기획, 완공한 축성 책임자가 고니시유끼나까(小西行長)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전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 전투이다.
첫째 이 전투는 임진왜란의 침략군의 주역인 고니시유끼나까(1555?-1610)과 명의 유명한 육군 장수 유정(劉綎 1558-1619), 수군 장수 진린(陳璘 1543-1607), 도원수 권율(1537-1599), 그리고 이순신(1545-1598)등 3국의 최고급 명장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이 전투는 임진왜란을 마치는 최후 전투로서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에 주둔한 가등청정 군대와 사천성에 주둔하고 있는 시마쯔요시히로(島津義弘)을 격파하기 위한 전투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진행된 공성전(攻城戰)이었으면서도 다른 두 성의 공격과는 달리 유독 이 전투에는 수륙군이 합동으로 공격을 했다는 점이다. 세 전투 모두 견고한 왜성을 공략함에 명군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셋째 이 전투는 공성과 화의가 함께 진행된 전투였다는 점이다. 장수간의 화의의 교섭은 전략의 일부로 이해해야할 측면이 있으며, 한편으로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략이었고, 그리고 뇌물을 주거나 받는 장수 개인의 성품 등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필요한 사안이다.
넷째 이 전투는 위의 두 전투와 달리 비교적 상세한 자료가 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 측의 자료 중 당시 이 전투에 참여했던 진경문(陳景文)의 전투일기인 “예교진병일록(曳橋進兵日錄), 조경남의 “난중잡록 亂中雜錄”, 이순신의 “난중일기 亂中日記” 자료는 이 전투를 상세히 재구성할 수 있는 자료로 현전한다는 점이다.
‘한·중·일의 사료’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당시의 자료 중 현전하는 사료라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명 측의 자료는 이 전투의 결과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 실제로 본 전투를 이해함에 보조적인 자료일 뿐이다. 그리고 일본측의 자료는 일본이 패배한 전투였다는 이유와 그리고 소서행장이 귀국 후 덕천막부에 의하여 처형된 관계로 그에 관한 자료가 거의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투의 主役에 대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일본 측의 자료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조선 측의 선조실록도 보조 자료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이들 자료를 통해서 전쟁의 주역인 주장인 유정, 진린, 소서행장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살펴보고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도원수 권율 등이 본 전투에서의 역할과 활동도 간략히 평가해보고자 한다.
2. 명 측의 자료에 의한 명군의 지원형태와 전략
2.1 명나라 자료
임진왜란의 초기 사료로 명나라의 경략 송응창이 편찬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篇”은 당시의 문서를 편찬해 놓은 것으로 사료적 신빙성이 높지만 이는 1592년부터 1594년 3월까지를 다룬 자료이다. 따라서 이에는 정유재란에 대한 기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명나라 원군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부 인용했다. 임진왜란 전체를 다룬 자료집으로는 제갈원성(諸葛元聲)이 편찬한 “양조평양록 兩朝平攘錄”과 모서징(茅瑞徵)이 편찬한 “만력삼대정고萬曆三大征考” 등 「일본」, 「왜」라는 제목으로 서술한 자료가 있다. 이들 자료는 “명사 明史” 조선전에 실린 전쟁의 개황을 서술한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이다.
“양조평양록”은 융경, 만력 즉 명나라 목종(1567-1572)과 신종(1573-1619) 두 왕 대의 군사작전을 한 기록이라는 뜻이다. 이 자료집은 기사본말체로 써졌다고 하나 이는 ‘일본’이란 제하에 썼을 뿐 소제목을 붙이지 않았음으로 편년체라고 해야할 것이다. 본고에서 참조한 책이 조선관련 자료집이므로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다. 평양성 공략에 대한 기사와 울산 도산성 전투에 관한 서술이 상세한 편이다.
“만력삼대정고”를 편찬한 모서징은 사수현 사람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병부직방사 주사를 지낸 사람이다. 이 책 중 조선관련 자료가 「왜」 상.하편에 서술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정유재란 중 명나라 원군의 파견과 중요 전투에 대한 상황 서술이 참고될 뿐이다.
“신종실록”은 편년체로 서술된 자료집이다. 관직의 임용 기사가 보이고 있으나 거의 대부분의 자료는 황제에게 올린 문서의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어 사건에 대한 서술은 거의 보이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신종실록”에 임진왜란의 전황에 대한 기록은 극히 소략하다고 할 수 있다. 장수의 임용의 관직명과 연월일을 파악함에 도움을 주었다.
“명사”는 기전체로 편찬된 역사로서 청나라에서 편찬된 것이다. 이에 임진왜란에 관한 자료는 외국열전 ‘조선’ 전에 대체의 임진왜란에 대한 대략적인 상황이 서술되어 있고, ‘신종본기’의 원군 파병에 대한 기사가 약간 있다, 이는 “선조실록”이 월일의 파악에 문제점이 있는 것과는 달리 비교적 연대는 신빙성이 있다. 그리고 “명사”의 외국열전 3 ‘일본’ 전에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집권과정과 조선 침략이 간략히 서술되어 있다.
“명사” 개인 열전에는 조선에 파병된 장수들에 대한 구체적 기록이 실려 있다. 열전에 임진왜란 중에 있었던 구체적인 상황은 그리 많지 않다. 이에는 조선에 출전했던 장수로 열전에 수록된 장군은 이여송, 이여백, 이여매, 마귀(이상 권 238), 동일원(권 239), 유정, 진린, 등자룡. 오광(이상 권247), 양호 등이다. 이 열전 자료에는 그의 개인적 특징이 서술되어 있다.
2.2. 명나라 원군의 파견 경위
임진왜란 중에 명나라 원군은 크게 두 차례 파견되었다. 1차 원군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강화회담으로 전쟁의 상태가 종식할 때까지 파견된 군대이고, 2차 원군은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파견되어 1598년 말까지 잔류한 군대를 말한다. 1차 원군은 두 차례 파견되었으니 선발대로 요동에 있던 군사 3,000명이 1592년 8월에 파견되었다. 이는 사유史儒와 조승훈祖承訓이 인솔했는데 평양성을 무모하게 공략하다가 조승훈 만이 겨우 살아서 돌아갔다.
다음의 원군은 1592년 10월에 이여송의 군대 35,000명이 참전하였고 그 후 8,000명이 추가 파견되어 총 46,000명이 파견된 셈이다. 이후 강화회담이 진전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1594년 10월에 완전 철군했다.
1596의 강화회담이 8월에 결렬되었으나 명나라에서 그 실상에 대한 파악은 이해 10월에 들어 파악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정부의 보고를 통해서 그 진상을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유재란은 일본에서는 1597년 1월초부터 시작되었고, 조선 정부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에서는 즉각 2월에 파병이 결정되어 경략 형개, 경리인 양호, 제독 마귀 등의 증원군 45,000여명이 파견되고 이후 유정군 5,000명과 진린 군 8,000명, 등자룡 등의 수군 3,000명이 추가 파병되어 총 61,000명이 파병되었으니 이것이 2차 파병이었다.
1차의 원병 이여송의 군대가 파견될 때에 그 조처는 경략 송응창의 견해가 크게 반영되었다. 명나라에서 파견된 군대는 정규군도 포함되었지만 돈을 지급하고 모은 용병이 다수 있었으니 가정 家丁을 동원할 경우 가급전家給錢으로 은 6량 또는 5량을 지급하였으며 기병에게는 마가 10량을 지급했다. 당시 서장지방에서 출정했던 이여송을 1592년 10월 임인(16일)에 군사 작전을 통괄하는 ‘제독’이란 직책으로 맡겼으며 이에 협수부총병 2원, 유격 약간원, 수비 약간원을 마련하고 용병으로 모집한 군대는 남북병 1만5천명을 모집하고 북병 1만2천명을 추가 모집하였으며 남병 2천명을 추가 모집하였다. 북병은 기병중심이고 남병은 보병중심이었다. 모집한 군대 2만5천명에 정규군을 포함해 3만5천명을 원군으로 파견하였으며 이에는 총책임자인 이여송은 3군 체제로 중군, 좌군, 우군의 편성을 하였다. 뒤이어 8000명이 추가 파견되어 총 43,000명과 조승훈의 파병 3,000명 도합 46,000명이 1차 원군으로 파견되었다.
1차 원군 중 먼저 들어온 군대는 중군은 양원, 좌군은 이여백, 우군은 장세작이 통솔하였다. 이들에 의하여 관할된 군대가 1592년 12월 16일에 압록강을 건너 와 왔다. 이 때 명나라 군대에게는 3개월의 식량은 자체 준비하였고 이후의 식량은 조선이 담당하도록 했다. 이 때 경략 송응창은 조선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고 엄한 군령을 각 장수에게 시달했다. 3개월 이후의 군량을 조달할 것이 조선의 큰 문제였다. 이런 군량에 대한 조처는 유성룡이 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명군의 후속부대가 1만여 명이 이여송의 통솔 하에 12월 22일 요양을 출발하여 1593년 1월8일 대군이 평양에 도달하여 평양성 공략에 동참하였다.
명나라에서는 평양을 점령한 일본군대가 중국을 침략할가 봐 요동성, 산동성, 북경 근처의 해안 경비에도 주력하면서 일본군의 침략에 시간을 벌기 위해 병부판서 석성은 심유경을 보내 평양에 있는 소서행장과 화의를 진행시켰다. 심유경은 상인 출신으로 음모와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었다. 이여송은 1593년 1월 8일 평양에 도착하여 1월 6일부터 9일까지 우수한 화포와 다방면으로 동시에 공격하였다. 소서행장의 퇴각로를 열어주어 평양성을 수복하였고, 1월 18일 개성을 탈환하였다.
그러나 이여송이 1000명의 기병을 인솔하고 계속 진격하다가 벽제관에서 복병의 습격을 당하여 겨우 목숨을 건지는 참패를 당하자 놀랜 이여송은 평양으로 가서 이후 좀처럼 공격을 취하지 않았다. 함경도의 가등청정 군대도 서울로 퇴각을 했다. 1593년 2월 초에는 일본군 2만여 명이 행주성의 6,000명의 군대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일본군이 평양과 함경도에서 퇴각한 주요원인은 명군의 공격도 있었지만 혹심한 추위와 후방으로부터 공급지원이 의병의 활동과 조선 수군의 선방에 의해 끊겼기 때문이었다. 1593년 년 말까지 명군은 일본군을 동해안과 남해안 끝으로 밀어냈고, 서생포 작전에서 가등청정 군대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때 경상도에서는 의병들에 의해 영천, 경주 성주 등이 탈환하여 일본군은 해안가로 밀려나고 명군이 경주, 대구, 상주 남원 등에 머무르고 있었다.
1594년 3월에 경략 송응창은 연노와 피로로 인하여 사표를 제출하면서 명군의 전원 철수를 반대하고 1만5천명의 유둔군을 남겨두자고 주장했다. 경략은 송응창이 고양겸으로 교체되고 제독 이여송도 1593년 8월에 귀환하였다. 이여송이 벽제관 전투 이후 전의를 상실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공격을 요청했으나 듣지 않자 총병 유정에게 거는 기대가 컸고, 그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요구했다. 이후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은 유정 총독에 의해 지휘되었다. 강화교섭이 진행됨에 따라 이후 1594년 8월 경에는 낙상지, 오유충의 군대가 이미 철군하고 마지막으로 유정의 군대가 완전 철군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는 군사교관 5000명을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해왔으나 조선에서 군량의 문제를 들어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595년 명나라는 책봉정사 李宗成, 부사 楊方亨, 심유경 등을 일본에 보내 풍신수길을 일본국왕에 책봉하려고 했다. 정사 이종성은 부산에서 가등청정을 만나보고 강화회담에 속임수가 있음을 알고 일본 군영에서 탈출하여 일본행을 포기하자 이미 일본에 들어가 있는 부사 양방형楊方亨을 정사로 서장관 심유경을 부사로 임시 조처하여 풍신수길을 접견하였고, 강화회담을 반대해오던 조선정부도 포로로 잡힌 두 왕자가 송환되자 奉貢의 강화회담에 동의하여 전라병사 황신을 통신사로 현소의 인도하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강화회담의 내용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아 이를 파기하고 조선에 왕자를 송환했는데 왕자들이 사은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면서 강화회담은 결렬되었다. 이 때 풍신수길은 강화조건 7개항을 제시했다. 이 조건은 명과 조선이 다 같이 수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봉공책봉의 강화회담이 본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심유경과 소서행장 사이에 비밀리에 추진되었음이 들어났다. 이런 사기적인 교섭이었음은 소서행장이 명나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小西非를 보내 항복조서를 가지고 요양에 파견한 것과 심유경이 私物을 사서 양국의 조공품, 하사품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 그 구체적 예이다.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명군에 밀려 남족으로 내려간 일본군은 전군 4만명을 동원하여 1593년 6월에 일본은 전년 10월의 진주성(牧使城이라고 칭함) 패배를 복수하기 위하여 진주성을 공략하였으나 명군은 지원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근 관군과 의병들에게도 참여를 중지시킨 가운데 6,000명의 군사와 6만명의 시민이 무참히 죽음을 당하였다.
이후 지지부진한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전쟁은 소강상태로 들어갔고, 일본군의 경상도 남해안 가에 성을 쌓고 일부 병력을 잔류시키고 있었다.
명나라 측에서는 경상도는 문호이고 전라도는 식량의 보고라 여겨 경상도와 전라도는 어느 도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인식했다. 1593년 9월 잔류병 중 1,000명은 유격 척금의 휘하에 서울에 주둔하였고 15,000명이 지방에 주둔했는데 지방군의 군사적 총지휘는 유정이 맡았다. 당시 유정의 5,000명 군대는 1594년 10월말 철군 귀국했다.
유정의 군대는 ‘川兵’이라고 명나라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그는 사천성에서 가정 3000명을 인솔하고 있었음에서 사천성의 병력이라는 뜻이다. 나머지 군사는 만족, 묘족猫族 등 그가 포로로 잡은 서남부 이족 夷族이었다. 당시 명나라의 전략은 전쟁보다 지킴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 조령, 추풍령 등 요새의 파악과 대책 마련에 힘썼다.
1596년 8월에 오사카에 갔던 강화사신의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재침을 준비했고, 1597(정유)년 1월부터 일본군의 출정이 추진되었다. 조선에서는 1596년 11월 12일 급함을 고하고 청병하는 사신 정기원을 보냈다. 1597년 1월에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의 선발대가 부산에 상륙하여 141,500명의 군대가 동원되었다. 이들은 호왈 100만 군대라고 칭하면서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명나라에서는 엄청나게 당황하였고, 조선 정부도 크게 공포에 쌓였다. 일본군은 7월 15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의 수군을 거제의 칠천량에서 격파하고 전라도로 진군하였다.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원병을 청하는 사신을 여러 차례 파견했고, 명나라에서는 즉각적으로 원군을 파견했다. 1597년 2월 11일(壬申)에 조선에 원병을 보내자는 병부좌시랑 이정의 논의에 따라 원병 7,000명을 보내되 요진병 3천명과 절강성에서 3,700명을 응모하여 보내서 조령을 지켜 경상도와 전라도를 지키게 하자고 건의하였으며, 이부로 하여금 유격의 장수를 선임하도록 하여 2월에 즉각 파병을 했으니 2차 원군이었다. 이후 명나라는 병부상서 형개를 계요총독, 양호를 경리, 마귀를 제독으로 삼아 2차 원군은 총 5만여 명 육군과 5,000명의 수군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2차 원병 중 선발대로 요동지방의 통령정왜부총병 양원이 3000명을 이끌고 3월 25일 경 압록강을 건너 4월말에 서울에 도착하였고 후속부대로 오유충이 남병 南兵 3,80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양원은 마병이 전투하기 좋은 남원에 가기로 하고 오유충은 조령을 지키게 하여 충주에 주둔하였다. 부총병 양원은 5월 13일에 남원에 도착했다.
1597년 7월에 마귀는 서울에서 지휘하였다. 요동군을 맡고 있던 양원이 3,000명을 거느리고 남원성에 주둔하고 있었고, 전주에는 남원성을 지원하기 위해서 진우충의 군대 2,000명을 주둔시켰다. 양원의 군대는 8월 13일부터 시작된 남원성의 수성전에서 16일 패배하고 양원은 겨우 단신으로 도망을 쳤다. 전주를 지키고 있던 진우충 휘하의 2,000명도 남원성 수성에 협조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이 오자 성을 버리고 도망을 쳤다.
일본군은 공주를 거쳐 북상하다가 1597년 9월 5일 직산에서 명나라 부총병 해생解生에 의하여 격파됨으로서 왜군은 다시 퇴각하기 시작하여 그 해 연말에는 일본군은 해안가로 퇴각하였다. 경리 양호와 마귀 대장군은 12월 20일 경주에서 울산의 가등청정 군을 격파하기로 작전회의를 했다. 이 전투가 1차 도산 전투이다. 울산 전투에서 소서행장의 구원으로 명군이 패배하자 1598년 1월 3일 명군이 후퇴하여 경주로 물러났다가 서울로 철수했다. 명나라에서는 경리 양호를 울산전투의 허위보고로 파면시키고, 천진의 순무도어사 만세덕으로 교체하고 수군과 육군을 더 투입하기로 하여 1598년 4월에 진린의 광동성 수군과 사천성의 유정군대, 등자룡과, 남방위의 절직병節直兵이 추가로 투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만세덕은 서울에 오지 않고 요동에 주재하다가 1598년 10월말에 서울에 왔고, 그 동안의 군사지휘권은 계요총독 형개가 가지고 있었는데 조선측 자료에는 그를 군문軍門이라고 칭했다. 형개는 부하 장수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의 지리가 산악이 많기 때문에 서로 연락이 어려우므로 지휘관에게 각자 독자적으로 전투수행을 맡기기로 하고 부대를 3협으로 나누어 수륙 4로로 편성하고 4로 대장군을 임명했다. 중로에 이여매, 동로에 마귀, 서로에 유정, 그리고 수로水路에 진린이었다. 동로군의 공격 목표는 울산에 거하면서 부산을 근본으로 삼고 있는 가등청정군, 중로군은 사천에 주둔하고 있는 석만자石曼子(島津義弘을 칭함)군, 서로군과 수로군은 순천 예교성에 있는 소서행장 군의 공략이었다. 곧바로 중로군을 지휘할 대장군은 이여매에서 요동군사를 거느린 동일원으로 교체되었다.
8월 중에 4로제독이 서울에 모여 작전회의를 하였고, 이에서 9월 20일 진시(오전 7-9시)에 각자 동시에 3성을 공격을 하기로 하였다. 8월 18일 풍신수길이 죽고 전군의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이 사실은 10월 말에 조선 군대에 알려졌다. 울산 도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가등청정군을 공격하던 마귀의 군대가 실패하고 10월 2일 경주로 후퇴하였으며, 사천성을 공략하던 동일원도 공성에 실패하여 6-7000명의 군대를 잃고 9월 26일 성주로 후퇴하였다.
또한 순천 왜교성 전투를 벌리던 유정의 군대 또한 기습을 받아 10월2일에 패배하자 10월 7일 부유창으로 후퇴하여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1598년 10월에 서울에 도착한 경략 만세덕은 새로이 군대를 개혁하지는 못했지만 각 제독에게 왜병을 타일러 철수시키라는 격문을 발송했다. 이는 무고한 병사를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정유재란 때에 일본군이 전라도를 집중적으로 침략한 것은 풍신수길의 작전방침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는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점령을 중시하였기 때문이었다. 수군을 제압한 후 공격 목표는 서울의 장악이었다. 전라도를 점령한 일본군이 바다로 북경을 침입해올 것을 염려한 것이 명나라에서 수군을 추가 파견한 원인의 하나라고 추측한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 전라도를 통한 진격을 명한 것은 명군과 조선 군대가 조령과 추풍령을 요새화하여 방어 전략을 세운 데에도 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정유재란 때의 일본군이 전라도 지방에서 저지른 만행은 더욱 악랄해지고 참혹했음이 밝혀졌다.
2.3. 명군의 전략
명나라 원군의 전략은 조선의 구원과 동시에 명나라 북경, 요동 산동 지방을 함께 방어한다는 전략을 폈다. 이는 송응창의 관직명이 경략 계요산동보정등처 방해어왜 군무”이었고 그는 요동에 머물면서 조선의 원군을 통제하였고 때로는 잠간 조선에 온 적도 있지만 왜병을 막는 일을 조선에서의 격퇴와 여차한 경우 요동 산동지방, 북경 주위가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작전을 구사했다. 또한 이여송의 직명이 “제독 계요보정산동군무 충방해비왜총병”이란 직함으로 조선을 구원하게 하였음에서 입증된다.
1593년 이후 전쟁이 소강상태로 전환되고 강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의 명군 전략은 ‘貴守 不貴戰’이란 작전을 폈다.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요새를 방어할 지점으로 확보함을 뜻한다. 명나라 군대가 공격적인 전투를 벌리지 않자 조선 정부에서는 지휘관의 개별 접촉을 통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조선 정부는 경략 송응창의 의도를 파악하려 하는 한편, 이여송에게 여러 번 공격을 요청했으나 응하지 않자, 유정에게 조선이 오직 믿는 것은 그 대뿐이라고 설득을 했다. 이에 유정은 자신의 전투력을 과시하였을 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특히 서생포 전투 등 적극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은 현지 지휘관의 협의와 결단에 따른 것이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군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전라도와 경상도의 방어가 조선을 지키는 두 개의 중요 지방임을 유의하고 요새를 지켜야 하며 군사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명나라에서는 1597년 12월에 있었던 1차 島山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가 수군이 없었기 때문에 수군을 파견하기로 했다고 하나 실은 조선 수군이 패배할 경우 곧바로 북경이 위협을 받기 때문에 정유재란 때에 수군을 추가 파견한 것으로 추정된다. 2차 원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북상하는 일본군을 1597년 9월 초7일 부총병 해생, 마귀에 의해 직산에서 왜병을 격파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이후 명군은 남하하여 왜군을 해안가로 밀어붙이고 마지막으로 명군은 가등청정, 도진의홍, 소서행장 등을 동시에 공격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는 일본군이 상호 협력을 막으려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고 대마도까지 정벌하겠다는 것을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견고한 왜성을 쌓은 울산성, 사천성, 순천 왜교성 공격이 쉽지 않았고, 세 곳의 공성전은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이는 전략의 부족과 지리이용의 미숙, 왜성의 공고함 등에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명나라 사료에 의하면 명군의 전략은 군대의 훈련이나 적의 정보 입수, 적의 전략 분석, 무기의 개선 등에 소홀하고 군대의 동원과 그 최고 지휘관 물색에 고심을 한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적의 작전에 대한 분석이 없이 지휘관의 개인적인 호언장담이 많았으니 이는 명나라 군대의 총체적 약점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명나라 군대의 취약점은 명나라 군대가 그 후 청나라 군대에 패배하게 된 이유를 이해함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군대의 동원에는 모병 정책을 사용한 점도 군대가 전의가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외국에 나와 싸우는 군대가 훈련이 부족하고 적의 장점과 단점 등을 분석하지 않는 상황에서 지휘관에게 군대를 맡기니 그 군사력이 취약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명나라 군대의 전략은 화전 양면작전을 동시에 구사했다. 조선 측 자료에 나오지 않는 일본군과의 교섭이 “명사” 조선전에 실려 있다. 총독 형개는 1598년 2차 도산전투에서 ‘陽戰陰和, 陽剿陰撫’가 당국의 전략이라고 했다. 그리고 가등청정에게 화의를 청하기도 했다. 이는 겉으로는 싸우는 척하면서 몰래 교섭하고, 겉으로는 공격하면서 뒤로는 용서한다는 것이다. 이는 왜교성 전투에서 유정과 진린이 취한 것으로 명백히 입증된다.
명나라 원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음에 대한 조선정부의 불만의 표시는 실록 자료에 엄청나게 많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명군의 구성이 정규군이 아니라 가병을 모병한 군대가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남병과 북병의 갈등, 주장이 한번 큰 곤경에 처한 것이 이후 적극적인 전투를 벌리는 데 소홀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종결지으면 된다고 생각한 점에서 조선 측의 복수를 위한 전쟁을 원했던 전략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유정의 왜교성 전투 참여
유정(1558-1619)은 13세부터 아버지 장군 유현을 따라 전장에서 자란 군인이었다. 유현은 원래 남창 고전高田씨이었는데 사천지방을 유람하면서 위사 유민의 상객이 되어 친하게 지냈고, 부자처럼 지내면서 이에 성을 유씨로 바꾸었다. 유정이 촉지방에서 여러 차례 군공을 세우게 된 데에는 순무도어사 증성오曾省吾의 지지에 힘은 바 컸다. 그래서 유정은 호를 성오라 하여 후손들이 증공을 기억하기 바란다고 했다.
유정은 용감하기가 아버지 풍도를 닮았으며, 아버지의 공음으로 지휘사가 되어 만력 초에 아버지를 따라 남쪽의 구사족九絲族을 토벌할 때에 먼저 앞에 서서 그 추장을 잡은 공로로 운남 이동 ‘수비’라는 관직을 받아 장수로서의 명성을 떨쳤고, 만력 10년(1582)에 지금의 미얀마 지역(緬甸)에서 만족이 침략해오자 유정은 유격장군으로 강세를 떨치던 추장세력을 격파하여 운남성 일대를 안정시켜 부총병으로 승진되고 그 아들을 음서할 수 있는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휘하 군대의 건아가 많아 이를 인솔하고 미얀마를 정벌할 때 막중한 뇌물을 받았으며. 성질이 탐욕스럽고, 아랫사람을 부림에 법도가 없어 백성 집을 마구 불질러 백성들의 원성이 중앙정부에 알려져 유격직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즉 사단장에서 연대장으로 강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그는 남방 전투에 참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재물을 사취했다는 논의가 있어 공이 포상되지 못하자 순무 유세증이 변무하여 광서 참장이 되어 사천으로 옮겼다. 그는 대도를 잘 다루어 ‘유대도劉大刀’라고 칭해졌다고 하며 그는 유학교육을 받았고, 문장에도 능하며, 불교에 심취하였고, 병법에 정통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가 사천성 병력 5천을 거느리고 참여를 자원했다고 그의 열전에는 서술되어 있으나 다른 자료에는 남병의 대표적 지휘관으로 그를 천거했다고 한다. 그는 부총병으로 1593년 4월에 1차 원군의 후발대로 조선에 와서 조령을 넘어 대구에 주둔했다. 이여송의 대군이 환국 철수하였을 때 유정은 오유충과 함께 7,600명을 거느리고 있다가 경략 고양겸의 완전 철군 주장에 따라 1594년 10월 경에 오유충의 뒤를 이어 조선에서 철수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사천 부총병으로 있다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어왜총병관으로 다시 임용되어 1598년 2월에 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2차 원정군으로 재차 조선에 왔다. 그는 수원에 주둔하다가 총독 형개의 명에 의해 서로군西路軍을 담당하여 13,000명을 거느리고 순천에 있는 소서행장 군의 공격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남원에 1598년 7월에 도착했다. 9월 4일 순천에 와서 9월 19일 예교에 도착했다. “명사” 그의 열전에 이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소)서행장은 순천을 거점으로 삼았는데 참호와 성채가 깊고 견고했다. 유정이 유인하여 사로잡고자 하여 使者를 보내 서로 만나기를 청했다. 사자가 세 번 돌아올 때 유정은 매번 말을 타고 혼자 길에서 기다렸다. 행장이 이를 엿보고 믿었다. 8월 초1일(9월 20일) 약속을 정하였는데 그 때에 이르러 유정의 부하졸병이 이 모략을 누설하여 행장이 크게 놀라 도망을 쳤다.(A) 유정이 진격하여 공격을 했으나 이득을 얻지 못했다. 군대 감독관 參政 王士琦가 노하여 그 中軍을 포박하니 유정이 두려워하여 힘껏 싸워 파하니 적이 물러나 다시 나오지 못했다. (B) 여러 장수가 세 길로 진격하여 유정이 도전하여 파했다. 적을 몰아 큰 성에 들어갔다.(C) 이미 적이 평수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장차 도망치려하였는데 유정이 밤에 栗林 曳橋를 공격하여 빼앗고, 목베고 포로로 잡음이 많았다. 석만자가 배를 이끌고 구원하자 진린이 해중에서 맞아 공격하니 행장이 드디어 순천을 버리고,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위에 인용한 명사 유정전의 왜교성 전투에 관한 서술은 크게 왜곡되었다. (A)의 강화회담의 유인을 위한 행장과의 약속 날자를 8월 초하루라는 것은 분명 잘못된 오기이다. 이에 대하여는 “예교진병일록”에서도 9월 20일로 기록하고 있다. 4로 제독이 9월 20일 진시(오전 7시~9시)에 공격하기로 약속했다고 기술하고 있고, “난중잡록”에서는 8월 4로 제독을 서울에 올라오게 하여 모월 모일 모시에 동시 공략하기로 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수군제독 진린은 자신이 직접 이날 공격을 한 것 같지 않고 이순신을 시켜 공격하게 한 듯하다. 즉 이순신의 난중일기 9월 20일 자에 진린이 출동했다는 기록은 없고, 이순신이 오시(11시-오후1시)에 유도柚島에 이르니 명나라 제독 유정이 벌써 진격을 했고, 수륙으로 협공하니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두려워하는 모양이 많았다고 쓰고 있다.
행장을 생포하려는 작전은 유정만이 한 것이 아니라 평양성 전투에서도 이여송도 시도한 바 있다. 이는 군사작전의 하나였다. 그런데 이 작전은 기패관 왕세현을 제독으로 위장하고, 백한남과 변홍달을 배신과 도원수로 위장했으며, 명나라 군대를 인근에 매복을 시켜 놓았는데 소서행장은 미리 강화회담의 제의에 대하여 사천성에 온 도진의홍과 의논했다고 한다. 그들이 명군의 간계를 논의하고 대처방안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小西行長은 명군이 매복한 군대를 의심하였을 것이 예상된다. 그런데 「예교진병일록」에 명나라 군대가 먼저 上石岾(상석점) 동봉에서 조총을 쏘고 땔 섶을 태워 20리에 안개가 자욱하게 하였다는 내용은 당시 깃발로 작전 명령을 내리는 것을 방해하려는 치밀한 사전 조처인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유정의 부하가 이 기밀을 누설하여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은 왜곡된 서술이다. 유정과의 교섭을 위해 파견된 우의정 이덕형이 9월 26일자의 “선조실록”에 실린 “명군이 먼저 대포를 쏘아 회담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보고문도 허위 보고임을 확인할 수 있다.
위 인용문 중 (B)의 유정이 패배하여 감군관이 중군을 포박한 이유가 서술되지 않았다. 이는 감찰어사의 보고문이 조작되어 보고되었거나 애매하게 보고되었음을 의미한다고 추정된다. 즉 유정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부유창으로 철수하여 전쟁을 회피한 내용이 빠져 있다.
위 인용문 (C)의 부분도 애매한 서술이다. 유정이 세 부대로 나누어 공격했다는 것이 뒷 문장으로 보면 왜교성에 이르기까지 3협으로 나누어 진군하였음을 뜻하나 그렇다면 유정이 섬진강에 주둔하여 사천성의 도진의홍 군의 지원을 막으려는 기술이 빠져 있다. 이는 공성의 구체적 전투를 묘사한 것 같지는 않다. 전투의 구체적 보고는 울산 도산성의 경우나 사천성의 경우는 상세한 점과는 구별된다. 이는 “양조평양록”이나 “만력삼대정고”에도 왜교성 전투에 대한 언급만이 없는 점과 일치한다.
마지막으로 지적하여야 할 점은 유정이 최후 승리한 것으로 서술한 것이 가장 큰 곡필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은 기록이나 많은 군사를 잃은 것은 전혀 서술하지 않고, 왜교성을 점령한 것이 오직 그의 공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곡필은 군대가 철수한 후에 명나라 군사들이 보고문을 이렇게 써서 바쳤음을 뜻한다. 1598년 11월 초에 유정은 진린에게 소서행장이 돌아가게 길을 열어주자고 통보하자 진린이 수륙군은 각자 알아서 하자고 하여 그의 뜻을 따르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명나라에서는 이에 근거하여 전공을 포상함에 진린을 최고로, 다음 유정, 다음 마귀, 그리고 엄청난 패배를 한 동일원 까지를 포상하였다. 진린과 유정에게는 도독동지직을 내리고, 한 아들을 지휘첨사로 음서를 허용하고 천호千戶의 조세를 받도록 하는 특상을 내렸다.
유정은 남원에 내려와 지휘한 군사가 13,600명이었고, 도원수 권율, 전라병사 이광악의 1만 조선군이 참여했다.
유정은 9월 20일부터 10월 2일까지 전투를 적극적으로 벌였으나 패배이후 싸우지 않다가 10월 7일 순천 부유창으로 퇴거하여 공격에 소극적이었다. 이런 적극적 공세를 포기한 것은 사천성을 공격하던 동일원이 패배를 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도 한 이유가 되었고, 풍신수길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머지않아 일본군이 철수하리라는 것을 예견했을 것이며, 또한 명나라 군사들이 조선 측 관군에게 공성의 한 면을 담당하라고 요청하자 도원수 권율은 조선군대가 훈련이 되지 않았다고 하여 명군에 배속 협조하는 체제로 하겠다고 한 것도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전쟁에서 자국인이 적극적이지 않은데 대한 명군 측의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참정 왕 감찰어사가 와서 독전을 요하자 부유창으로 퇴거했던 유정은 다시 군대를 전진 배치하였고, 도원수도 조선군을 전진 배치하였다.
또한 10월 16일부터 행장측은 유정에게 군대 철수를 통보하여 화의가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소서행장은 유정에게 화의를 통해 철수의 길을 모색하려고 했다. 11월 초 유정은 小西行長으로 하여금 철수하게 하였다는 사실을 진린에게 통보하였으나 진린은 육군과 수군은 각자 알아서 하자고 하여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떻든 소서행장은 11월 10일에 귀환하겠다고 한 점으로 보아 유정과 합의가 있었다.
또한 진린과의 수륙 공격을 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지키지 않았다고 진린이 유정의 장수깃발을 찢었다는 “난중잡록”의 기록은 유정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에 대한 항의였다고 할 수 있다. 유정과 진린의 위계에는 차이가 있어도 각자 지휘를 받는 상하관계가 아니라 동급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떻든 유정은 전쟁의 종결에 더 큰 희생을 치르고 싶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병법에 정통했다고는 하나 갇혀 있는 소서행장이 가지고 있는 탄약은 한계가 있을 터인데 이를 모두 소모하도록 좀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유도하거나 야간에 화전을 통한 화공등을 시도하지 못하고 무리한 성의 함락을 위해 직공한 것은 그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즉 그는 공성술을 깊이 있게 착안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는 소서행장에게 오광등 40명의 군사를 보내 그의 철수를 인도해주려고 하였고, 그 길이 어렵게 되자 진린에게 교섭하라고 하여 소서행장이 은 100량과 보검 50수를 진린에게 주어 탈출을 허락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11월 18-19일의 노량해전으로 사천성에 머물고 있던 도진의홍 군이 소서행장의 포위를 풀어주려고 하자 이를 수군이 노량에서 대 격전을 하는 전투로 종결되고 소서행장은 11월 20일 도망을 치게 되었으며 빈 성을 점령한 것을 큰 공로로 보고했다.
유정에 대한 평가는 명나라에서는 왜군을 막을 수 있는 장수로서 진린과 함께 1차원정 때에도 천거되었듯이 그의 용맹을 높이 사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조선측의 자료에는 “선조실록”과 “난중잡록”에는 순천성 전투의 마직막 과정에서 그의 결점을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즉 실록에서는 그가 첩을 뺐어 즐겼다는 것을 비난하고 있고, 뇌물을 받고 그의 철수를 허용했다고 하지만 전쟁에서 기필할 수 없는 전투를 감행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은 최고지휘관의 판단에 달린 것임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4. 진린의 왜교성 전투
진린은 광동성 출신으로 모략이 있고 장병을 잘 다루었으나 가는 곳마다 뇌물을 탐독해서 여러 차례 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정과 함께 천거되어 1594년 봄에 부총병으로 계薊, 요遼,보정保定 산동山東,군을 통제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 조선에 파견이 결정되어 1598년 4월 27일에 요동에 도착하였다. 그가 직접 거느리고 온 8.000명 중 육병 5천이고, 수병 3천이었다. 그리고 그가 수로군으로 통솔함에는 등자룡 등이 거느린 수군 3,000명이 더 포함되었다.
명나라에서 수군을 특별히 동원한 것은 1597년 11월 울산성 전투에서 성을 공략하지 못한 이유가 수륙의 요충지인데 수군이 없었기 때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이유는 전라도가 점령되어 북경이 해상의 위협을 심각하게 우려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조선 정부에서는 그가 성질이 포악하여 이순신의 말을 잘 듣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유정의 지휘를 받는 육군으로 편입하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고 이순신에게 이를 통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수군장으로서 이순신의 극진한 예에 탄복하여 끝까지 협조를 했다. 그는 “난중잡록”과 “예교진병일록”에는 유정과 예교성 전투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나 “난중일기”에는 그의 출전에 대한 기록은 대단히 소략한 점으로 보아 전투에 적극적이었다고 보기 어렴다. 조선 측 자료에 그가 열심히 싸운 것으로 보는 것은 그의 예하 군사들이 이순신과 함께 공동전략을 편 것을 이렇게 표현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는 이순신이 주도권을 가지고 철저히 싸움으로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음도 생각할 수 있다.
“명사” 그의 열전에는 “그의 휘하에 부장 진잠, 등자룡. 유격 마문환, 계금가 장양상이 속했는데 그들이 거느린 군대가 3,000명이었고, . 전함 수백척을 이끌고 왜교성 전투에 참여하였고, 도진의홍의 수군 500척을 격파하기 위해 노량 전투에 참여하여 대승을 거뒀다.”다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귀국 후 임란의 최고 공을 세운 자로 포상되었다. 그가 불태운 배가 100여척, 죽인 자가 30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진린의 부장 등자룡, 진잠과 도명재도 전사했다.
진린의 부장 등자룡은 광동성 출신이다. 노량전투에 참여했을 때에 70세의 노인이었으나 조선 수군의 배에 올라 일본군을 척살함에 혼신을 다했다. 그러므로 조선에서 그의 사당을 세우 제사지낸다고 기술했다.
5. 소서행장의 왜교성 전투와 전략
순천 왜교성에 주둔하고 있던 소서행장은 유정의 육군의 공격과 이순신, 진린이 이끄는 수군의 양면 공격을 받아 철수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쌓인 것이 1598년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3개월간이다. 전후 수륙 양면 공격을 받는 불안한 상황에서 3개월을 보냈다. 더구나 퇴로가 수군에 차단되어 엄청난 밤낮으로 불안에 싸였을 것이다.
소서행장과 그 군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는 그가 조선 침략에서 돌아간 후 덕천막부와의 스케 전투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 순천 전투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는 자료로는 “송포법인정한일기松浦法印征韓日記”에서 다루고 있지만 이 자료는 명치 27년(1894)에 원 자료의 일기를 다시 정리된 것으로서 7개년의 전쟁일기이다. 그러나 연월일에서 사실과 다른 점이 많아 사료적 신빙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그러나 순천성 전투에 왜장으로 죽은 사람과 사람 수를 알 수 있어 이를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 일기에는 유정의 꾀임에 빠질 번한 처음 회동의 전말을 비교적 소상히 기술하고 있다.
소서행장은 아버지 소서수덕 대에 사까이(堺) 지방에서 약종상으로 상권을 쥐고 있던 거부였고, 풍신수길과도 연계되어 임진왜란 때에는 군수품을 조달하는 일과 식사를 준비하는 봉행직을 수행하였고, 이런 것이 풍신수길의 일본 국내를 통일하는 전쟁에 소서행장이 장수가 되는 인연을 마련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소서행장의 집안은 천주교 신앙을 가진 자이고 소서행장은 또한 대마도 도주의 사위이기도 했다. 소서행장은 임진왜란에서 가등청정과 함께 선봉장으로 맹활약을 떨친 인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서울 점령과 평양점령을 주도하였고, 또한 강화회담을 주선한 임무를 부여받아 심유경과 화의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는 육군의 장수만이 아니라 수군을 통솔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육전과 수전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력을 가진 그가 수륙 양면의 요지인 순천 왜교성을 선택하여 견고한 성을 쌓은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소서행장이 강화회담을 주도한 것을 들어 그가 가톨릭 신자로서 평화주의자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전쟁에 임하여 평화보다는 철저한 기만과 사기, 살육을 자행한 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순천의 왜교성에는 소서행장이 거느린 왜군 15,0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왜교성은 1597년 9월부터 소서행장이 짓기 시작하여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군사는 1597년 9월에는 7,000여명이었는데 1년 뒤 15,000명으로 증가했다. 7.000명은 그가 원래 데리고 온 휘하병력이었고, 이 증가한 숫자는 누가 거느린 군대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전라도 지역에 진출했던 병력이 추가된 듯하다.
그는 지금까지 공격의 선봉에 서서 거침없이 침략행위를 한 것과는 달리 이제 수비의 입장에서 포로가 되느냐 무사히 귀환하느냐의 갈림길에서 3개월 간 감금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왜교성 전투에서 쓴 전략은 생존을 위한 수비전략과 탈출 전략이었다. 그도 和戰의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 유정과의 만나자는 제안을 받자 사천에 있는 도진의홍을 불러 그에 대한 대책을 상의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으로는 명군의 공성군을 급습하여 무기를 태우고 다시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극적 공세도 취하였고, 수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하기도 했으며 유정과 진린에게 뇌물을 바쳐 탈출의 협조를 구하는 전략을 쓰기도 했다.
또한 사천에 주둔하고 있던 도진의홍에게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가 결과적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강인한 무사정신, 그리고 갖은 지혜를 짜내는 능력, 부하를 통솔하는 능력,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을 가지고 있었다. 원래 성을 공격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유정이 2차 원정군으로 왔을 때에 소서행장을 한번 밤에 만났다고 하는데 눈빛이 횃불처럼 번쩍였다. 그가 떠난 후에 유정은 “하늘이 저런 인물을 해외에 낳게 하여 중국이 편안치 못하다”고 했다고 한다.
6. 도원수 권율과 이순신
권율이 도원수직을 맡은 것은 2차 진주성 전투가 벌어지던 1593년 6윌 7일이었다. 이미 며칠 전에 도원수 김명원을 권율로 대치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유보하다가 전라관찰사에서 도원수로 발탁했다. 그는 용렬한 인물이라는 사신의 평이 전하고 있다. 그가 현지에서 발령 통보를 받은 것은 6월 21일 경이었으며, 이 때는 4만여 일본군대가 진주성을 공격하던 때였다. 그러나 도원수 휘하에 직접 거느린 군사는 전무한 형편이어서 도원수로서 조처할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었다. 그는 1596년 도원수에서 파면되었다가 다시 도원수에 임명되어 왜교성 전투에 참여한 조선군을 총지휘하였다. 도원수의 직책을 가졌지만 독자적인 군령을 내린바가 거의 없다. 그 동안 대간으로부터 파면하라는 여러 차례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왜교성 전투에 참여한 조선 군대는 1만여명이었다. 이들은 명군과 구별하기 위해 등뒤에 ‘려병 麗兵’이라고 휘장을 붙였다. 이는 중국인이 우리나라를 고려로 칭했으며, 이는 왕건의 고려가 아니라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는 장수왕대 이후의 개칭된 고구려의 국호였다. 유정이 도원수 권율에게 공성의 한 책임을 담당하라고 하였으나 훈련이 부족해서 할 수 없다고 거절해서 명군의 부대편성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가 군사훈련을 시키지 않은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사대를 조직해서라도 독립적인 부대 운영을 했어야 했다. 도원수의 뚜렷한 직책이 주어진 것도 아니지만 그가 치계한 내용이 사소한 행정적 처분 등이라는 점에서 육군과 수군을 통괄하는 원수로서의 임무를 충실히 다했다고는 판단되지 않는다. 그의 군주에 대한 충성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고했다. 그러나 국가방위를 위해서 군사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칭찬할 만한 것이 거의 없다. 당시의 정치 사회구조 속에서 그런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큰 구조적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예교성 전투에서 주역임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오만한 진린을 마음속으로 친하게 하기 위해 예를 갖추어 영접했으며, 자신의 전공을 넘겨주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의 전공을 모두 독차지하여 비밀 장계를 보내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중국측 기록에 그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독자적인 부대를 인솔하였기 때문이다. “명사”에 그의 이름이 등자룡전과 진린전 두 곳에 실려 있다. 또한 “만력삼대정고”에도 그의 사망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비통한 마음과 일본군이 자기의 생가를 불태우고 아들을 살해한 점에서도 그들에 대한 복수를 철저히 한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중시해야할 것은 조선 정부가 추구하는 복수를 위한 전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 장수들과는 달리 생명을 바쳐가며 복수 전쟁을 치려야 했다.
그가 일생을 통해 전승을 거두게 된 점은 첩보를 통한 적정에 대한 정확한 판단, 지휘관 회의를 통한 작전에 대한 사전 교육, 군대훈련과 사전 준비, 지형지물의 적절한 이용, 군법의 공평한 적용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 기록에 전하는 그의 죽음은 등자룡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기술하고 있다.
7. 맺음말
정유재란을 당하여 이를 종결하는 마직막 최대의 전투가 순천 왜교성 전투였다. 이 전투는1598년 9월 20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진행된 3개월의 전투였다. 이 전투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앞에서 장황한 서술을 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삼국의 장수는 명나라, 조선, 일본에서 대표적인 최고급의 명장인 유정, 진린, 권율, 이순신, 그리고 소서행장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조선 정부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 보고 있던 전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에 대한 기록은 일본 측이나 명 측의 자료는 부실하기 짝이 없고, 조선측의 자료에 의해 소상히 파악할 수 있다. 즉 진경문의 「예교진병일록」, 조경남의 난중잡록, 이순신의 난중일기는 왜교성 전투의 실상을 알려주는 가장 소중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명나라 측 자료는 이 부분에 대하여 거의 서술되지 않은 점을 밝혔다. 명나라 측 자료에 1598년 9월 20 동시에 실시된 울산의 도산전투나 사천성 전투에 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히 전하면서도 최대 전투인 순천의 예교성 전투에 대해서는 거의 실상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또한 이 전투에서 전쟁의 주역에 대한 평가가 한·중·일 3국의 사료에 달리 기록된 것은 삼국의 입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명사”나 중국 측 기록에는 왜교성 전투를 율림栗林의 예교曳橋라고 기술하고 있다. 왜교성 전투에 나오는 지명연구가 진행되어 현재의 지도에 표기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지방의 역사가들이 앞으로 해야할 과제이다. 우리가 이런 상세한 기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 비록 무력에서는 약했지만 고도로 발달한 문치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의 최후의 전투인 순천 왜교성 전투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 유적이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앞으로 더 좋은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삼국의 자료가 서로 상충하는 부분이 많다. 이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료비판을 통해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