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레지오단원들의 쉼터 원문보기 글쓴이: 멜키세덱
(가톨릭 관련자료 계시번호 1203번 부터 1211번 까지 9개의 글을 삭제하고 한데 모아서 다시 올립니다.)
성모님 발현과 사적계시 (개요)
1928년부터 1975년 사이에 발생한 성모님 발현 사건만 232건이나 되며 그 이후 지금 까지 의 사건을 모두 합하면 386건이나 된다고 한다. 그중에서 교회가 공식인정한 사건으로는 1251년 갈멜산 수도원에서의 발현사건, 1531년 멕시코의 과달루페 발현한 사건,1858년 프랑스의 루르드 발현사건,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 발현사건 등이 있다.
이 발현사건들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함은 물론, 교회의 기념일로 정하여 교회 전례력에 싣고 있으며, 기념일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사건으로는 1830년 프랑스 파리의 뤼뒤박, 1846년 프랑스의 라살레트, 1871년 프랑스의 퐁맹마을,1879년 아일랜드의 노크, 1932년 벨기에의 보랭, 1933년 벨기에의 바뇌, 1973년 일본의 아키다 등이며, 이탈리아의 시실리섬 사라쿠제의 성모님눈물 사건, 등이 있으며 공식적인 인정도 하지 않고 있으나 또한 부정도 하지 않고 있는 사건으로는 유고슬로바키아의 메주고리예 발현사건이 있다.
이 외의 많은 발현사건들 중에는 환시나 환상 또는 허위사실 조작사건 등으로 판정한 사건이 상당수에 이르고 교회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사건도 있으며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도 있는데 교회가 거듭 확인하여 공식적으로 배척한 사건들로는 1970년대 미국 뉴욕 발현사건과 벳사이다사건, 한국 나주의 윤 율리아사건 등이 있다.
1. 과달루페에 발현하신 성모님
성모님께서는 죄와 고통, 전쟁 같은 현장에 찾아오시어 미래를 준비시키며 위로해 주시기 위해 발현하시는데, 1531년, 멕시코 원주민들이 스페인 정복자의 폭정에 시달리고 있을 때「테페약」이라는 멕시코시의 작은 언덕에서 4차례에 걸쳐 50대 후반의 개종한 인디언 농부 후안디에고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어려울 때 정성으로 나를 찾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비의 어머니이다.” 라고하시며, 당신의 자비를 증거 하기 위해 이곳에 성당을 세워주기를 바란다고 주교에게 전하라고 하셨다. 후안디에고는 여러 번 교구장에게 이 말씀을 전했지만, 번번이 증거만을 요구하며 믿으려하지 않고 거절만 당하고 만다. 그는 할 수없이 테페약 언덕으로 성모님을 찾아가서 그대로 고하고, 여러 가지 색깔의 장미꽃을 틸마(용설란 섬유로 짠 겉옷)에 싸서 주교에게 갖다 주면 그것이 증거가 될 것이라는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하였는데, 후안디에고가 주교 앞에서 틸마를 풀자 장미꽃을 싸고 있던 틸마 안쪽에 성모님의 형상이 그곳 원주민 처녀의 형상으로 아주 선명하고 뚜렷하게 그려져 있었고, 이를 본 주교님은 매우 놀라워하면서 그 그림이 바로 성모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믿고 그곳에 작은 성당을 세우고 그곳에 틸마를 보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틸마는 그로부터 450여년이 지난 1979년에 미국의 과학자들이 적외선을 이용하여 면밀한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 그림의 눈을 우주광학기술로 2500배 확대하여 보니, 장미꽃을 싼 틸마를 벗기는 당시의 순간과 거기에 함께 있던 몇몇 사람의 얼굴이 홍채와 동공에 선명하게 동시에 비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더욱더 면밀하게 조사를 해보았으나 “인간의 손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성모의 눈은 즉석카메라처럼 눈앞에 비친 순간의 형상을 그대로 포착하였다.” 라는 결론만을 내리고 중단하고 말았다. 성모님께서 틸마에 새겨 후안디에고에게 주신 성모형상그림의 염료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감으로써, 거친 천임에도 안으로 전혀 배어들지도 않았고, 오늘날까지 색의 바램도, 변질도 없이 아주 생생하기만 하며, 식물성도 동물성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현대과학으로는 풀 수없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후, 당시 살아 있는 여자와 아이들의 산 심장을 해마다 2만 명 이상씩 돌 뱀에게 제물로 바치던 풍속이 실제로 꼬리를 감추었으며, 이때부터 멕시코의 테페약에 발현하신 성모님을 과달루페의 성모님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과달루페라는 말은 어느 곳의 지명이 아니라「돌 뱀을 쳐부수다.」라는 원주민의 말이며, 발현 후 불과 7년 만에 800여만 명의 원주민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 사건이다. 성모님께서 매고 계시던 검은 띠가 멕시코인들 에게는 임신부의 표식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의미 때문에 교회는 이 과달루페의 성모님께 생명수호에 관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
2.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님
지식층들의 교회 이탈이 극에 달했던 1858년, 프랑스 루르드에서 14세 소녀 벨라뎃다에게 발현하시어 묵주기도를 통한 기도와 회개와 보속을 통해서 어두운 교회의 앞날을 준비하도록 촉구하셨다.
마사비엘 동굴에서 2월11일부터 3월25일 주님 탄생 예고 축일까지 18번 벨라뎃다에게 나타나시어 물이 솟는 자리에 작은 샘을 파고 거기에 작은 성당을 지어 줄 것을 사제들에게 청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을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기적차원의 요구에서 이름을 묻는 사제들에게 “나는 마리아 임마클라타(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그 말뜻도 모른 채 간신히 외워서 불완전한 발음으로 전하자, 이미 4년 전에 교황청으로부터 발표되었지만, 일반신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던「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교의를 벨라뎃다가 알고 있었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임마클라타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전혀 알지 못하였을 것임을 인정하고 모든 정황들을 보아 성모님의 발현과 그 전하는 말씀들을 믿고 인정하게 되었으며, 물이 솟는 자리는 작은 샘을 벨라뎃다가 직접 만들고 교회는 그 곳에 작은 성당을 세우게 되었다.
이후로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많은 치유의 기적들을 체험하고 있다고 한다.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발현하신지 24년 후이며, 교회가 루르드 발현을 공식인정한지 20년 후인 1882년에 발족한 루르드의 기적조사사무소는 루르드에서 일어난 기적이 4446건이라고 교황청에 보고서를 냈으나 당시의 교황 비오.10세는 그중 치유사실에 대한 합리적인 의학적, 종교적 판단과 함께 교회법적 근거에 합당한 것만을 선별하여 41건을 공식 인정하였으며, 그 후 1987년까지 74년간의 25건을 추가하여 현재 가톨릭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기적은 총 66건이다.
그중 1987년에 일어난 1건의 기적은 루르드의 한 의료 기관에서 1999년까지 12년 동안 치유의 완벽성과 지속성, 그리고 치유에 대한 자연적 또는 의학적 치유의 가능성여부 등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자연적으로나 의학적으로는 치유될 수 없었다는 결론을 얻게 되어, 그 사건이 성모님의 전구에 의한 기적임을 판단, 확인하고 1999년에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66번째로 교회가 공식인정한 루르드의 기적이 되었다.
3,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
1917년, 1차 세계대전의 현장인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5월부터 10월까지 다섯 달 동안 6번 세 소년소녀(10세의 루치아, 9세의 프란체스코, 7세의 히야친타)에게 발현하시어 자신은 묵주기도의 여왕이라고 하시며, 러시아의 회개와 전쟁의 종식을 통한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와 희생, 보속을 많이 하라는 권고를 주셨는데, 많은 신자들이 이 권고를 따라 묵주기도를 많이 바침으로써 결국 전쟁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와 히야친타는 얼마 후 하느님 품으로 갔으나 루치아는 그 후 수녀가 되었으며, 성모님의 지시대로 비밀에 붙여왔던 성모님예언 3가지 중 두 가지를 1930년대에 공개했는데 그 내용은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공산주의의 몰락에 관한 것이었고, 마지막 한 가지는 한참 훗날에 공개 되었는데 그 내용은, 1981년에 있었던 요한 바오로2세 전 교황님 저격사건에 대한 예언이었다고 한다.
4. 바뇌의 성모님
성모님께서는 1933년 1월15일부터 3월2일 사이에 벨기에의 동부 루베네의 산골마을 바뇌에서 매번 저녁 7시경에 흰옷에 파란 허리띠를 매고 왼쪽으로 고개를 약간 기울인 채 미소를 지으며 12세 소녀 마리에트의 집 정원 전나무 위에 나타나셔서, 자신이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소개하고 마리에트를 작은 샘터로 인도한 후, “모든 민족을 위해 병든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이 샘을 마련했다” 고 하시면서 그곳에 작은 경당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셨으며, 마지막 발현 시에는 “나는 구세주의 어머니요 하느님의 어머니다.” 라고 밝힘으로써 이 사건이 성모님의 발현사건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바뇌 성모님의 특징은 기도를 많이 할 것과, 가난한 이들이 샘물을 찾아와 머물며 기도할 수 있는 작은 경당을 지어 줄 것을 요청하고, 마리에트를 위해 기도하겠노라는 메시지를 남긴 것 외에는 종말이나 징벌 같은 것을 들어 극단적인 권고나 훈계 등의 메시지는 없다는 것이며, 성모님께서 마련 해주신 기적의 샘물에는 지금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 이 샘물을 통해서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고 한다.
벨기에 교구장 케르크홉스 주교는 처음에는 무관심하다가 2년이 지난 후에야 많은 순례객들과, 치유의 기적, 그리고 냉담자들의 회두를 확인하고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2년 이상 냉철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발현사실의 개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모든 조사서류를 꾸며서 교황청에 보냈고, 교황청에서는 5년여 동안 지켜보다가 1942년에 가서야 이 사건의 신빙성에 대한 결정을 당 교구장에게 위임하였으며, 교구장은 1942년 사목서한을 통해〈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에 대한 공식공경을 허락하고 아무 제한 없이 믿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고 발표함으로써 교회가 공식으로 인정한 성모 발현지가 되었다. 처음에 세웠던 작은 경당과 1947년에 세워진 대성당, 그리고「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의 집」도 세워졌고, 가난한 환자들을 위한 무료 숙박시설도 생겼다. 1958년에는 샘물을 새로 축성하였다
또 기도할 것을 요청한 성모님의 권고를 따르기 위해 성모님께서 발현했던 시각인 저녁7시에는 매일 함께 모여 묵주의 기도를 바치고 있다고 한다. 마리에트는 자신이 추앙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싫어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한다.
5.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1981년 6월25일, 성모님께서 아주 빛이 나는 모습으로 밀리아나와 이반코빅,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소년들에게 유고 슬로바키아 (보스니아)의 포드부루산에서 처음 발현하셨을 때는 6명의 소년들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장소를 옮겨가며 계속적으로 발현하시는 성모님을 결국은 믿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 나갔으며, 발현을 목격한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지금도 발현은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징벌을 피하기 위해 기도와 단식을 통한 회개를 하라, 그렇지 않으면 자연의 법칙을 중지시킬 수도 있는 징벌은 피할 수 없다”고 하시는 성모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이곳을 찾은 순례객은 10 여만 명의 성직자를 포함하여 수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며. 다른 지역의 발현과 다른 점은 장소를 옮겨 가며 연속적으로 발현하신다는 것과 지금도 발현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10 여 년간 지켜보며 조사를 하던 당시 그곳 관활 교구장은 1991년에 이르러 초자연적 발현이나 계시와 관련된다는 확인을 할 수 없다고 부정적 보고서를 교황청에 보냈다. 그러나 교황청은 관활 교구장의 보고서를 존중하면서도 발현이 계속되고 있다는 이 사건을 예의주시 하면서 공식적인 순례단 모집행위 만큼은 금해 달라는 요청서를 당 교구에 보냈으며 다시 5년여가 지난 1996년에 와서는 라칭거 추기경(현 교황 베네딕도 16세)이 그 교구장을 해임하고 기존의 조사위원들을 전면 교체하여 처음부터 다시 면밀하고 확실한 증거위주의 조사를 실시케 하였는데 그 결과, 교회의 사주를 받았을 것이라는 설은 유언비어로 밝혀졌으나 아직도 교회차원으로는 공식 인준되지 않고 있음으로 본당차원 등의 공식적인 순례나 신심행위는 허용되지 않고 있지만, 요한바오로2세 교황님의 격려도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머지않아 메주고리예의 성모님 발현사실이 공식 인준될 것임을 부인할 사람은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해당 교구의 교구장은 아직도 심사숙고만 하고 있는 중이다.
※참고
교황청은 최근에 보스니아 주교들의 공식승인 요청에 따라 메주고리예 성모님발현사건을 새롭게 연구하기 위한 국제 위원회를 설립하였는데 조사위원은 카밀로 루이니 로마의 은퇴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여, 주교, 신학자, 기타 여러 관련분야의 전문가 등 20여명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머지않아 공식 인정의 날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평화신문 2010년3월 28일자 1061호 7면 참조)
6. 19세기의 성모님 기적사건들
뤼뒤박의 성모님과 기적의 메달
1830년 7월 19일, 11월 27일 두차례 프랑스 파리의 뤼뒤박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딸회 소 성당에서 카타리나 라부레수녀에게 두 팔을 벌린 채 지구를 밟고 서계시는 모습의 환시로 발현한 사건으로써 기적의 메달로 유명하다.
성모님은 지구를 밟고 서있는 당신의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고 거기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여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라고 새긴 메달을 착용하고 지속적인 기도를 하는 사람은 아드님께서 풍부한 은총을 내리실 것이라고 마씀 하셨는데 실제로 이 메달을 착용한 사람들에게 많은 기적들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카타리나 수녀는 1876년에 주님 품으로 갔는데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후에 관을 열어보니 시체가 전혀 부패되지 않고 죽을 때의 모습 그대로 였다고 한다.
로마의 안드레아 성당에 발현하신 성모님
1842년 1월 20일 가톨릭을 매우 싫어하던 28세의 유다인 알퐁소 라티스본에게 발현한 사건인데 그 자료는 전해지는 것을 찾지 못했으나 라티스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예수회 회원이 되었고 얼마 후에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 이스라엘 땅으로 가서 성 요한공동체를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퐁맹의 성모님
1871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퐁맹에서 10대 초반의 외젠느와 요셉 발벳트 형제에게 푸른색 바탕에 황금빛 별들이 촘촘하게 박힌 긴 옷을 입고 황금 관을 쓰고 검은 두건을 매고 십자가를 두 손으로 가슴에 모신 모습으로 발현한 사건이다. 이 발현모습은 같이 있던 어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아이들의 눈에만 보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발현이 있은 불과 10여일 만에 침공국인 독일과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4년 후에 교황청의 인정을 받았다. 이후 외젠느는 교구의 사제가 되었고 발벳트는 수도회소속 사제가 되었다.
키에트 시바우두의 성모님
1877년 폴란드 키에트 시바우두마을에서 6월 28일부터 9월 16일까지 9차례에 걸쳐 사불린스카와 사물로 부스카 두 소녀에게 발현하셨는데 발현 할 때 마다 아기예수를 품에 않은 모습이었으며 원죄 없이 잉태 된 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병자들이 그 장소에 있는 샘물을 마시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치면 병이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후 그곳 샘물을 먹고 병을 고친 사례들이 종 종 보고되고 있다고 한다. 이 발현사건은 1977년에 와서야 교황청의 인정을 받은 사건이다
노크의 성모님
1879년 8월21일 아일렌드 노크마을 성당에서 마리아가 백의를 입고 황금빛 왕관을 쓴채 기도하는 모습으로 15명의 마을 주민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이 발현의 특징은 아무런 메시지도 남기지 않으셨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마을 주민들은 다음해인 1880년에 그 자리에 성모상을 세웠는데 이후 이 성당을 찾아 순례를 하는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치유현상이 잇따라 일어나게 되면서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1936년에 교황청의 인정을 받았고 지금도 연간 150만여 명의 순례객들이 찾고 있다고 한다.
보랭 황금빛 성심의 성모
1932년 11월 벨기에의 남부 보랠 마을에서 5명의 어린아이들에게 처음 발현하신 성모님은 다음해 1월까지 30여 차례나 발하셨는데 처음에는 미소만 짓다가 사라지고 하다가 12월 21일 발현 때 처음으로 자신이 원죄 없이 잉태된 마리아라고 밝히면서 순례자들이 찾아와 기도 할 수 있도록 경당을 세워줄 것을 요청했고 12월 29일 이후의 발현 때는 아름다운 황금빛 광채에 둘러싸인 마리아의 심장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마지막 발현 때는 그 경당에서 기도하는 이들의 정성의 힘으로 많은 사람들을 회개토록 하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이때부터 보랭의 성모님 발현사건을 황금빛 성심의 성모로 불리게 되었으며 1949년 교황청의 인정을 받았다.
7. 20세기의 성모님 기적사건들
시칠리 시라쿠제 성모상의 눈물
1953년8월29~9월1일 사이에 안토니아 야눈소와 남편 안젤로 부부의 침실에 있는 성모상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는데 당시 임신 중 혈독증으로 고생하던 안토니아가 이 눈물을 목격한 후 저절로 완치되어 건강한 아들을 낳았다.
당시 과학자들이 이 성모상에서 흘러내린 눈물을 과학적으로 면밀히 조사하였는데 그 성분이 인간의 눈물과 같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다음해에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정받은 사건이다.
아키다 목각성모상의 눈물
1973년 6월부터 일본의 아키다에 있는 성체 봉사회 소속 아녜스 사사키 수녀가 겪은 성모님 계시와, 목각 성모상의 성모님 눈에서 101번이나 눈물이 흘러내린 신비의 현상은 교회가 사적계시로 공식 인정한 사건이다.
사라고가사 기둥의 목각 성모상
12사도 중 하나인 대 야고보가 당시의 지명은 확인 한 바 없으나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지금의 가라고가사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중 자신의 선교활동이 뜻대로 잘 되지 않아 매우 실망하며 지내던 어느 날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청하며 깊은 기도에 빠져 있을 때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의 모습으로 제작된 작은 목각 상 하나와 옥으로 된 기둥 하나를 주면서 그 자리에 자신을 기리는 성당을 지으라고 하셨다. 1년쯤 후에 야고보는 그 자리에 성당을 지을 수 있었고 성당 안의 벽 옥기둥 위에 그 성모상을 모시는데 성공하게 되었고. 그 때의 그 벽 옥기둥 위에 그 때의 그 목각 성모상이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고 한다.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 모자상
검은 얼굴의 성모님이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은 한 폭의 그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루살렘을 순례했을 때 입수해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에게 준 것인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 그림을 보관하기 위한 성당을 콘스탄티노풀에 따로 지을 만큼 소중하게 생각했는데 이 그림은 복음사가인 루가가 직접 그린 것으로 전해 오는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은 그 후 세월을 거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폴란드 야스나고라로 옮겨졌다가 1382년 타타르족의 침공이 임박해 오자 당시 폴란드 왕자 (이름은 미확인)가 훼손이나 도난을 우려하여 쳉스토호바에 있는 작은 성당으로 몰래 빼돌렸는데 지금도 그 곳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데 이 그림은 숱한 기적을 일으켜 그 소문이 자자한 그림으로 전해지고 있다. 교회의 공식 인정을 받은 바는 없으나 요한 바오로2세교황이 교황이 된 후에 3차례나 이곳을 방문하여 순례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