⑴ 면류관(冕旒冠, 冕冠):고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즉위식, 결혼식 등에 입는 대례복인 면복에 쓰는 관모로 곤복(袞服)과 함께 착용하였다. 면관의 기원은 중국 고대의 관모인 작변(爵弁)이 변하여 여러 장식이 더해진 것이다. 면관이란 명칭은 원래 앞이 뒤보다 1치[寸] 정도 앞으로 굽어 기울어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대체로 폭이 7치, 길이 1자[尺] 2치의 전원후방(前圓後方)의 평천판(平天板)에 앞 4치, 뒤 3치의 수류(垂旒)를 달고 면관의 좌우 양옆 귀쪽에 주광()과 옥진(玉)을 늘어뜨리고 굉(紘)과 담()으로 장식되어 있다.
한국의 왕은 중국의 친왕례(親王禮)에 따라 구류면(九旒冕)이었고, 왕세자는 팔류면(八旒冕)이었으나 광무 원년(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십이류면(十二旒冕)이 되었고 황태자관은 구류면이 되었다.
⑵ 원유관(遠遊冠):중국에서 들어온 관으로 고려 ·조선시대 왕의 조복(朝服)에 쓴 관모이며 중국의 친왕례에 준하여 사용했다. 이것은 회색의 나로 만든 구량(九梁)이며, 고려시대 공민왕 때 명(明)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것은 칠량(七梁)에 서잠도(犀簪導)를 꼽는 것이었다. 금잠(金簪)을 꽂았고, 황(黃) ·창(蒼) ·백(白) ·주(朱) ·흑(黑)의 차례로 5가지 색의 옥(玉)으로써 전후 9개씩 18개의 옥을 장식하였고 양 옆에 있는 2줄의 붉은색 끈[朱組]를 턱밑에서 매고 나머지는 늘어뜨렸다.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중국의 천자가 사용한 통천관(通天冠)으로 바꾸어 썼다.
⑶ 통천관:통천관은 고종이 황제가 되면서 왕이 조하(朝賀)를 받을 때 입는 강사포와 함께 썼다. 오사모(烏紗帽)의 앞뒤에 각각 12량이 있고 청 ·황 ·홍 ·흑 ·백색의 오색 구슬 12개를 꿰었고 옥으로 된 비녀와 홍색 조영(組纓)을 달았다. 고종이 황제가 되기 전까지 조선의 왕은 9량의 원유관을 썼지만 광무 원년부터 통천관으로 바뀌었다.
⑷ 익선관(翼善冠):조선시대 왕 ·왕세자의 상복(常服)에 곤룡포(袞龍袍)와 함께 쓰는 관이다. 익선관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복두에서 유래한다. 면류관의 평천판의 옷감과 같은 검은 사로 덮혀 있고 관 뒤에는 양각(兩角)이 위로 향하여 솟아 있다.
⑸ 양관(梁冠)과 금관:양관은 백관(百官)의 제복(祭服) ·조복(朝服)의 관모이다. 이것은 앞면 윗쪽에서 꼭대기까지 있는 세로줄을 양(梁)이라고 하여 양관이란 명칭이 붙었다. 양관은 신분과 계급에 따라 양의 수가 달랐다. 제복에 쓰는 양관은 경건한 의미로 검정색이지만, 조복에 쓰는 양관은 당초문양과 목잠(木箴)이라는 비녀가 도금되어 있어 일명 금관이라고 한다. 여기서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는 말이 생겼다.
⑹ 동파관(東坡冠) ·정자관(程子冠):동파관은 중국 북송(北宋)의 문인 소식(蘇軾)이 쓴 건이며, 명나라 때에도 널리 사인계층에서 사용한 것으로, 중국에서는 동파건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중국에서 들어와 동파관이라고 부르며 사대부들이 집안에서 썼다. 동파관은 주로 말총으로 짜지만 간혹 죽사(竹絲)를 곁들여 흑칠을 하였다. 정자관은 중국에서 정자건이라 하는 것으로 북송의 유학자인 정호(程顥) ·정이(程) 형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관은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전후좌우봉우리의 기복이 심하고 위는 터져 있다. 조선 중종 ·명종시대에 중국에서 들어와 한말까지 사대부와 유생들이 도포(道袍) ·창의(衣)와 함께 집안에서 착용하였다.
⑺ 사모(紗帽):사모는 복두에서 생겨난 것으로 복두와 형태가 유사하나 대우가 복두는 모지고, 사모는 곡선으로 둥글렸다. 사모는 백관의 상복(常服)에 쓰는 관으로 고려말 우왕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 태종 때 상복의 관모가 되어 한말까지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는 전통혼례식에서 신랑의 사모로 사용된다. 사모의 형태는, 조선 전기에는 대우가 낮고 좌우 무각(無角)이며 흑각(黑脚)을 내려뜨렸고, 중기에는 대우가 높아지고 양각(兩脚)의 폭이 넓어지면서 평직(平直)으로 되었고, 후기에는 대우가 다시 낮아지면서 양각(兩脚)의 폭은 넓으나 길이가 짧아지고 앞으로 굽었다.
⑻ 건:조선시대의 건은 한국 고유의 고깔 모양과 사대부 및 유가(儒家)에서 사용한 중국의 건의 2종류로 대별된다.
① 방건(方巾):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야인이나 사인들이 외출할 때나 집에서 쓴 사각형의 두건 형태이다.
② 복건:송 ·명나라 때 유학자들 사이에 유행한 것으로 한국에 들어와 유생들이 썼다. 《경국대전》에 치포건(緇布巾)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이 복건이다. 복건은 검은색 증(繒) 6자를 사용하여 키 모양으로 만들며 머리에 쓰고 뒤로 보내어 내려뜨린 다음 옷단으로 머리를 동이고 그 뒤쪽의 끈으로 귀를 걸쳐 뒤통수에 잡아 매어 썼다.
③ 유건(儒巾):유생이 평상시나 향교, 서원에 참배할 때, 제사드릴 때, 과거시험을 볼 때 쓴 관모이다. 이것은 검은색 베를 자루 모양으로 만들어 양 옆을 깊숙하게 접어 넣은 후 위솔기 부분을 뒤쪽으로 5 cm 정도 눕히면서 양귀를 자연스럽게 잡아 빼어 쓴다. ‘士’자 모양이다.
④ 망건(網巾):상투를 틀고 머리를 가다듬기 위하여 이마에서 뒤통수에 걸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것으로 그 위에 정식 관을 쓴다.
⑤ 탕건(宕巾):사대부들이 망건의 덮개 및 관모의 밑바침으로 쓴 것으로 말총으로 엮어 만들며 양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턱이 져 있다. 기타 조선 후기부터 한말까지 하졸들은 자건(紫巾) ·청건(靑巾) ·조건(巾)을 썼는데 한국 고유의 고깔 모양이었다.
⑼ 입(笠):조선시대 입에는 평량자(平凉子)형의 평량자(패랭이) ·초립(草笠) ·흑립 ·옥로립(玉鷺笠) ·전립(氈笠, 戰笠) ·백립과 방립형의 방갓 ·삿갓 등이 있었다. 평량자는 대우와 양태가 있는 모자로 평량자(패랭이)는 후일 초립을 거쳐 흑립으로 이행한다. 초립은 평량자와 비슷하나 대우와 차양이 더욱 분명하여 대우도 평평해져 평량자보다 흑립과 더 비슷한 형태이다. 그러나 평량자와 흑립은 차양이 아래로 약간 처친 데 비해 초립은 위로 불룩하게 올라갔다.
초립동(草笠童)이란 양반계급의 새로 관례한 소년이 흑립을 쓸 때까지 이 초립을 썼기 때문에 초립동이란 말이 나왔다. 초립은 흑립이 생기면서 평량자와 함께 상민(常民)의 쓰개가 되었고 별감의 주황초립을 비롯해, 창우(倡優), 궁정의 세악수(細樂手) 등이 조선 후기까지 사용하였다. 흑립은 평량자 ·초립을 거쳐 정착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모로, 갓이라 하면 곧 흑립을 가리킨다. 주로 양반계급에서 평상시에 쓴 모자로 조선 후기에는 귀천없이 남자가 썼다.
기본 형태는 대우와 양태가 있고, 양태는 약간 곡선을 이루며 대우는 원통이지만 위가 좁아지고 모정(帽頂)이 평평하였다. 광해군 때는 양태가 컸고 인조와 효종 때는 모체가 높았으며, 숙종 때는 한때 작아졌지만 대체로 양태는 크고 모체는 높았다. 흥선대원군 때 이르러 의관제도의 간소화로 큰 갓은 소립(小笠)으로 변하였다. 주립(朱笠)은 융복(戎服)을 입을 때 쓴 것으로 철릭을 입고 썼다. 융복도 문무백관이 몸을 경첩하기 위한 복장으로 왕이 행차시에 수행하거나 외국에 사신으로 갈 때, 국난을 당할 때 입는 것이다.
주립은 입에 주칠한 것으로 호수(虎鬚)를 꼽고 옥로(玉鷺)를 장식했다. 전립은 조선시대 하례(下隷) ·여정(輿丁)이 쓴 속칭 ‘벙거지’를 말한다. 전립은 원래 호복계통의 것으로 한국 고유의 입과는 계통이 다르다. 조선시대 군복은 구군복(具軍服)이라고 하는데 이 군복에는 협수(狹袖:동다리)와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을 썼다. 높은 무관이 쓰는 전립은 품질이 좋은 모제품으로 만든 것으로 ‘안올림벙거지’라고 하였는데, 공작미(孔雀尾) ·상모(象毛) ·정자(頂子)를 달고 양태 안쪽에는 감색운문단(籃色雲文緞)으로 꾸미고 밀화영(密花纓)을 달았다.
방립은 한국 관모의 기본 형태의 하나로 삿갓(農笠 ·雨笠 ·野笠 ·蘆笠)을 말하며 백제의 나제립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썼다. 이것은 햇빛이나 비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방랑객이나 서민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내외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 쓰기도 했다. 갈대를 쪼개서 만든 ‘삿’으로 만들었다. 방립은 삿갓에서 변형된 형태로 끝은 가늘게 오린 댓가비로 되어 있고 안은 왕골속을 넣어 ‘삿갓’처럼 만들었으며 앞의 가장자리는 4개의 꽃잎형(四花瓣形)으로 되어 있다.
⑽ 여자관모:적관 ·화관 ·족두리는 예장용이고 각종 난모(暖帽)는 방한용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내외가 심한 조선시대에 외출시에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사용한 것으로 입모(笠帽) ·너울 ·쓰개치마 ·장옷 ·천의가 있었다. 너울은 서아시아에서 들어와 고려시대 부녀자들이 쓴 몽수, 즉 개두의 조선시대 명칭이다. 이것은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여성의 관모로 궁중 및 일부 귀족계급에서 사용했다.
형태는 자루처럼 생겼으며 얼굴에 위치하는 부분은 망사같은 것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이것을 쓴 사람은 밖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입모에는 너울 안에 쓴 너울립과 유지(油紙)로 만든 하류층의 쓰개인 전모(氈帽)라는 것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