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경인가? 소경의 길잡이인가?”(루가 6:39-49)
임내규(요나) 신부 / 여수교회
예수님의 말씀을 읽다보면 대상에 따라 선포하는 말씀이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의 말씀을 하시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독사의 자식들’이라며 꾸짖기도 합니다. 구분해 보자면, 소경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소경의 길잡이에게는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는 듯합니다.
선포된 복음이 어느 쪽에 비중이 많은가 라고 찾아본다면 의외로 잘 살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더 바른 삶을 요구한다는 말씀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모든 걸 용서해 주시고, 감싸 안아주시고,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행적과 말씀이 많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과 더불어 한 단락 이전의 말씀들(6:31-38)도 그런 종류에 속하는데,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너에게 잘하는 사람에게만 잘해주지 말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도 잘해주라는 교훈적이고 실천적인 말씀들입니다.
이런 말씀이 더 많은 이유는 자신이 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보다 난 그런대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거라 여겨집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대부분은 자기 자신을 소경이라 여기진 않을 테니까요.
자기 자신을 소경의 무리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아야 할 메시지는 위로와 용서의 말씀이 아니라 교훈적인 메시지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기초를 튼튼히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초를 튼튼히 하는 첫걸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입니다. 내가 소경인지? 소경을 인도하는 사람인지? 내가 죄인인지? 죄인을 정죄하고 있는 사람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무슨 소경이야? 내가 무슨 죄를 지었어?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남을 비판하기도 하고, 정죄하기도 하고, 가르치려 듭니다. 과연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이 누가 더 성공했는지, 누가 죄를 덜 지었는지를 따지는 그런 시합은 아닐 것입니다. 살다보면 누군가는 행복을 일구기도 하고, 누군가는 죄를 짓기도 하며, 누군가는 쓰러지기도 합니다. 그런 각각의 사람들에게 이웃이란, 직장의 동료란 어떤 의미일까요? 나를 비판하는 사람보다는 격려해주는 사람이, 지쳐 쓰러져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을까요?
엊그제 끝난 동계올림픽 경기에서 컬링 경기를 꽤 재밌게 봤습니다. 메달권 순위에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모습은 너무나 보기에 좋았습니다. 멤버 중 누군가는 잘하고 누군가는 못하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그들을 탓하고 질책만 한다면 아마 그들의 얼굴엔 더 이상 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멋진 팀이었고 훌륭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신앙인들도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길 예수님께서도 기대하실 것입니다.
다가오는 사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좋은 나무로 자라고 있는지, 선한 것을 마음에 잘 쌓고 있는지... 그래서 코로나로 지치고 힘든 세상에 여러분들이 세상의 위로가 되는 멋진 신앙인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