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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상17:8
자녀를 부모라는 존재의 확장판으로 여기면, 자녀의 죽음은 자기 죽음을
직면하는 사건입니다.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우는 어미는 죄로 인해 죽음을
끌어안은 인간의 실존을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아벨의 시신을 안은 하와,
예수의 시신을 안은 마리아처럼 사르밧 과부도 시신을 안고 웁니다.
If you consider your child as an extension of the existence of parents, your
child's death is an event in which you face your own death. The mother who
cries while holding the body of her dead son reflects the existence of a
human being who embraces death from sin. Like Hawa holding Abel's body
and Mary holding Jesus' body, widow Sarbat cries with the b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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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한 사회를 지탱해줄 근간이자 터전이 되지 못할 때 이곳저곳에서
파열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바야흐로 위험 사회는 새 은혜의 다스림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8a)." 사르밧은 이세벨의 아버지인 시돈 왕 엣바알이
다스리던 지역입니다.
When the church is not the basis and base to support a society, there are
bound to be rupture sounds from place to place. A dangerous society awaits
with a thirst that rides on the reign of the new grace. "You rise up and go to
Sarbat, which belongs to Sidon, and stay there (8a)." Sarbat was ruled by
Ethbaal, King Sidon, the father of Jeze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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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아합의 칼을 피해 사르밧으로 간 엘리야는 이세벧의 고향 깊숙이 숨어버린
셈입니다. 등잔 불 밑이 어둡다고 이세벨은 자기 고향에 숨어있는 엘리야를 찾을
수 없었고 엘리야는 그곳에서 여러 날 얻어먹고 살았습니다. 그 당시 가뭄은 3년 6
개 월 간이나 지속되었는데, 그 기간에서 그릿 시냇가에 머문 시간을 빼더라도
적어도 2년 이상은 머물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In the end, Elijah, who went to Sarbat to avoid Ahab's sword, hid deep in Isseben's
hometown. Because it was dark under the lamp fire, Jezebel could not find Elijah
hiding in his hometown, and Elijah lived there for many days. At that time, the
drought lasted for three and a half years, and even if we subtract the amount of time
we stayed in the stream of Grit from that period, we can assume that we stayed for
at least two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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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처럼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옮기셨고 까마귀를 통해 먹이시더니 이번에는 극빈한 과부에게
선지자 대접을 맡기십니다. 마지막 양식을 다 먹으면 죽는 것밖에 다른 대책이 없는
여인에게 엘리야는 그 작은 떡을 자기 양식으로 달라고 요구합니다.
As you told Abraham, "Leave the house of your native relative's father and go to the
land I ordered," he moved Elijah to Sarbat, fed him through a crow, and this time he
treats the poorest widow as a prophet. Elijah demands that the little rice cake be
given in his own form to the woman who has no other choice but to die after eating
the last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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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박하고 매정한 요구로 들리지만 그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요구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떡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사람은 양식이 없을 때 육신이 죽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영혼이 죽는
이치입니다.
It sounds like a harsh and harsh demand, but it's a demand to risk your life and trust
God. It means to acknowledge that it is not up to the rice cake to live and die, but up to
God. Man dies when there is no food, but if he does not recognize the living God, his
soul 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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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했더니 엘리야도 과부도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에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왔냐?(18) “ 고 한탄합니다.
아무리 선지자라고 하더라도 과부 집에 거하는 것은 엄청 불편했을 것입니다. 엘리야 입장
에서 자기가 온 후에 그 집에 재앙이 닥쳤는데 민망했을지 모릅니다.
When I was obedient, neither Elijah nor the widow died. And one day, when the son of
the widow of Sarbat dies, he laments to Elijah, "Have you come to remind me of my sins
and to make my son die?" (18). No matter how much a visionary, it would have been very
inconvenient to live in a widow's house. From Elijah's point of view, a disaster hit the
house after he came, and it may have been embarrass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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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람이 왔는데, 그 집에 복이 들어오기는커녕 사망이 왔기 때문입니다.
‘죄를 생각나게 한다.’는 말은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으로, 모든 재난이나 질병이 다
자신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말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가 자기 집에
옴으로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 그 결과로 아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A man called "the man of God" came, because rather than bringing blessings into the house,
death came. "It reminds me of sin" is a common way of thinking of ancient people, and I
said it because I thought all disasters and diseases were caused by my own sins. When
Elijah came to his house, his sins were revealed before God, and as a result his son d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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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아들의 죽음을 자신의 죄 값으로 받아 들였던 것으로, 그 당시 사람들은 모든 불행을
자신의 죄와 결부시켜 보았습니다. 더구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가 자신의 집에 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죄에 대해 무척 예민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기도 밖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기도였습니다. 이미 숨이 멎은 아이를 살리기
위한 기도였기 때문입니다.
She accepted her son's death as a price for her sins, and people at that time tried to link
all the misfortunes to their sins. What's more, it's probably because a prophet like Elijah
is in her house, and she's become very sensitive about her sins. Elijah could do nothing
but pray. It was a reckless prayer. It was because it was a prayer to save the child who
was already out of br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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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기도해서 그 아이가 살아난다는 확신이 있었을까요? 아마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전에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자신에게 말씀을 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신을
그곳으로 보냈다는 것입니다.
Did Elijah pray and be sure that he would survive? I don't think so. Because it never
happened before.There was only one thing he believed in. The fact is that the God
who spoke to himself is a living God. That God sent him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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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자신이 경험한 그 하나님을 믿고 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이의 혼이
돌아왔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기적이 구약 역사상 최초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그림자였습니다. 기도를 응답 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Elijah believed in and prayed for the God he had experienced. Then the child's soul
returned. A miracle that a person died and survived occurred for the first time in Old
Testament history. It was a shadow of resurrection. It is Jehovah God who responds
to prayer. We just p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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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여부를 강요할 수도 재촉할 수도 없습니다. 응답을 하실 수도 있고,하시지 않을 수도
있고, 혹은 보류를 하시더라도 모두 그분의 주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경우에 따라
무모하게 간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능력이상의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엘리야처럼
갈급하기 때문입니다.
We cannot force or urge you to respond. You may or may not respond, or you may not,
because it is all his sovereignty. We can also seek recklessly in some cases.
Sometimes they ask for more than they can. Because it's desperate like Elij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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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그 음성을 하나님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혼이 돌아왔습니다.
응답 받는 아주 럭키 한 케이스입니다. 그 시대에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
에의 절규는 침묵 속에 묻혔던 것 입니다.
Elijah said that God heard the voice. So the child's soul came back. It's a very lucky
case to get a response. Because in that era, he must be established as a man of God.
But the prayers of the first church members were unanswered. The screams in the
Roman amphitheater were buried in si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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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에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같이 했는데 십자가에서는 외면되었습니다. 인류의 구원자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응답 받고 싶습니다. 바라는 것이 너무 크고, 결핍을
채우고 싶은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응답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Because it should be established as a glorious martyr in that era. The same goes for us
Jesus. He spent his whole life in the glory of God, but he was turned away from the cross.
Because it has to be established as the savior of mankind. But I'd like to get a response.
It's because the desire is so great, and there is a wish to fill the deficiency. If so, you'll
have to pray until you get a respo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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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응답에 대한 확신은 경험한 하나님만큼 일 것입니다. 체험한 하나님 이상을 저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이상을 확신할 수도,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후에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대결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경험했서
그랬고 제단을 아예 물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은 그 만큼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But the certainty of that response will be as much as the God experienced. Because I don't
know more than God who has experienced it. So you can't be sure or ask for more. Later,
Elijah was able to confront the prophets of Baal and Asherah on Mount Galmel because
he had experienced God so much, and he was able to fill the altar with water because he
had so much confidence in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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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되어도 좋고, 안 되어도 좋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는 우리 하나님과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알고 우리의 심정을 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만약 응답 받지 못해도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뜻은 최선일 것입니다. 우리를 잘 아는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소원은 불 병거를 받을 만큼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You can respond or you can't. We just pray. Because prayer is communication with our
God. If you know us and know how we feel, there's nothing more you want. Even if we
don't get a response, his will toward us will be the best. Because he knows us well.
However, our wish is to trust God enough to receive a firea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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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은 엘리야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신 분입니다. 우리가 처해진 것도 그곳일지
모릅니다. 오늘 내가 할 일은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께 무엇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한가? 나는 언제 아내에게 돌아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것인가?
He sent Elijah to widow Sarbat. It may be there that we're faced with. What I'm
going to do today has become more clear. What is reasonable to give to God?
When am I going to go back to my wife and kneel down and beg for forgiv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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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밧으로 가라고 명령하심(8-9)
사르밧 과부에게 먹을 것을 요청하는 엘리야(10-12)
사르밧 과부의 집에 기적을 베푸는 엘리야(13-16)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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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말씀이(8a)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8b)
너는 일어나(9a)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9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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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9c)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d)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10a)
성문에 이를 때에(10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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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10c)
이에 불러 이르되(10d)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10e)
내가 마시게 하라(10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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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지러 갈 때에(11a)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11b)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11c)
내게로 가져오라(1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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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르되(12a)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12b)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12c)
나는 떡이 없고(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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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12e)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12f)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12g)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12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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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는 죽으리라(12i)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13a)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13b)
먼저 그것으로(1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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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하여 (13d)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13e)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13f)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1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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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여호와가(14b)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14c)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14d)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1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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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15a)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15b)
여러 날 먹었으나(15c)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1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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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16b)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16c)
이 일 후에(17a)
그 집 주인 되는 여인의 아들이(17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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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17c)
숨이 끊어진지라(17d)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18a)
하나님의 사람이여(1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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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18c)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18d)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e)
엘리야가 그에게 그의 아들을 달라 하여(1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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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그 여인의 품에서 받아 안고(19b)
자기가 거처하는 다락에 올라가서(19c)
자기 침상에 누이고(19d)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2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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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하나님 여호와여(20b)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20c)
재앙을 내리사(20d)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하고(2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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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21a)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21b)
내 하나님 여호와여(21c)
원하건대 이 아이의 혼으로(21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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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에 돌아오게 하옵소서. 하니(21e)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22a)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22b)
살아난지라(22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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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가 그 아이를 안고(23a)
다락에서 방으로 내려가서(23b)
그의 어머니에게 주며(23c)
이르되 보라 네 아들이 살아났느니라(2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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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24a)
내가 이제야(24b)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24c)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24d)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2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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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점에 도달한 약자들_ underdogs reaching a critical point
긍휼과 자비의 실제_ the reality of compassion and mercy
죽음까지도 힘을 잃고_ I lost my strength to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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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신 주님,
성도는 약자가 존중받고 인간다운 삶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보살펴야
하는데 민폐만 기치고 산 지난날을 용서하옵소서. 과부에게 가서 얻어
먹으라는 말씀은 집으로 들어가 아내에게 용서를 빌라는 말씀입니까?
터무니없어 보이는 말씀에 순종한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순종을 제가
배우게 하옵소서. 아내의 고뇌와 고통을 분담하는 남편이 되게 하옵소서.
The Lord who told Elijah to go to Sarbat,
The saints should take care of the weak so that they can be respected
and guaranteed a human life, but forgive the past when they lived only
with the inconvenience. When you say to go and get it from a widow,
do you mean to go home and beg your wife for forgiveness?
Let me learn the obedience of Elijah and the widow Sarbat, who obeyed
the seemingly absurd word. Be a husband who shares his wife's agony
and suffering.
2023.10.17.tue.C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