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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8월 30일 금요일
[(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지만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1,17-25
형제 여러분,
17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8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9 사실 성경에도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
20 지혜로운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 학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의 논객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의 지혜를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21 사실 세상은 하느님의 지혜를 보면서도
자기의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복음 선포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믿는 이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22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24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25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의 복음에 대해서, 일반적인 해석은 아닌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해설을 소개하려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여기서 말하는 잠든 처녀들이 세상을 떠난 이들이고 등잔의 기름은 선행이라고 설명합니다. 등잔에 기름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들은 이 세상에서 재물을 쌓아 두기만 하고 자선을 베풀지 않은 이들입니다. 비유에서 열 명의 처녀들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동정의 가치를 인정하셨기 때문입니다(마태 19,12 참조).
동정은 계명으로 주어진 의무가 아니지만 사람들은 동정을 훌륭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동정 생활을 하면서 선행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은 그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처녀들”(25,3)이라고 일컫습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그들이 “몸에 대한 사랑을 극복하였지만 돈에 대한 사랑에는 굴복하였다.”라고 말합니다. 동정 생활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더라도, 가진 것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선행을 전혀 실천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등불에도 처음에는 기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관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면 관대함이 요구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가지고 있지만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이미 죽은 다음에는 선행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에게 기름을 사는 것은 이 세상에 살 때,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그때를 위하여 준비할 기름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겠지만,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한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등잔에 기름을 마련할 수 있는 귀한 시간입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이 하루는 주님께서 아직 우리에 대한 자비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표시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는 말씀 가운데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언젠가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의 날이겠지요. 우리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마주 뵙는 은혜로운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해 그분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날,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심판과 단죄의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목숨 걸었던 대상들, 넉넉한 은행 잔고, 탄탄한 주식들, 멋지게 쌓아 올린 지상 장막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슬픔의 날도 될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의 그 날과 그 시간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리 삶의 많은 날들이 베틀의 북에 남아 있는 실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가 주님 대전으로 나아가는 날, 결국 우리 각자의 종말, 즉 개인의 죽음도 그 날과 그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착각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을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지만 내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하루 새로운 시간은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선물이고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아직 우리를 사랑하시고 자비를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매일 매일 펼쳐지는 하루하루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이 하루를 어떻게 하면 보다 알차게, 복음적으로, 주님과 이웃과 공동선을 위해 잘 사용할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자기 등이 꺼지지 않게 태워야만 살 수 있는 인간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등불에 필요한 기름이 충분하여 혼인 잔치,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현명한 처녀들과 기름이 부족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미련한 처녀들에 관한 비유입니다.
성경에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의 불, 곧 사랑의 의지가 타오르는 이들만이 구원에 이른다는 내용입니다.
등불의 의미는 봉헌이다. 나를 태우는 것. 누군가의 길을 밝혀주기 위해. 나의 봉헌이 그리스도께 합당하기 위해 어때야 하는가가 오늘 복음의 핵심이다.
일단 사람은 자기를 봉헌하는 삶, 자기를 불태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한다는 것부터 알아야겠습니다. 나에게 불을 붙여 준 누군가를 위해 나 자신을 태우는 삶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본모습입니다.
한 사업가가 김창옥 교수의 강의 CD를 내고 싶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표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장님, 표정이 제가 한마디만 하면 울어버릴 것 같은 표정이시네요.”라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 남자 사장이 그 자리에서 진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습니다.
방금 함께 들어왔던 여자 실장은 자기 아내이고, 아내에게 회사를 맡기기 위해 나와서 일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고, 자녀들 교육보험도 다 들어놓고, 자신은 지금 자살을 준비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막내였는데 아주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집이 가난했는데, 게다가 어머니가 중풍이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는데 이미 결혼한 누나들의 집에 돌아가며 1년씩 얹혀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조카들이 “왜 냄새나는 할머니가 우리랑 살아야 해?”라고 하며 자신의 엄마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나니 조카들이 죽이고 싶도록 미웠고 자신도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니를 모시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기숙사와 장학금을 대 주는 곳에 합격하여 나중에는 원양어선을 타서 돈도 어느 정도 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모실만하게 성장했는데, 그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중풍 걸린 어머니가 창피하고 떠나고 싶었던 과거의 자기 모습이 너무도 마음이 아파 그다음부터는 어머니에게 하지 못한 효도를 다른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 주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고 수많은 사기를 당하여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이분의 삶은 어머니에게 받았던 사랑을 되돌려주는 것이었고 어머니가 안 되니 다른 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할 수 없으니 죽는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영화 ‘김 씨 표류기’에서 주인공은 아무도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한강에서 뛰어내렸는데 떠내려간 곳이 밤섬이었습니다. 밤섬은 자아를 상징합니다. 자기 자아에 갇혀서 짜파게티를 만들어 먹고 싶은 꿈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삶은 마치 불경에 나오는 칡넝쿨에 매달려 떨어지는 꿀이나 맛보며 고통을 잊는 미친 코끼리에게 쫓기던 나그네의 삶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김 씨는 한 여자가 보내는 신호에 응답하게 되고 조금씩 자기 섬에서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관계가 사람을 자아의 지옥으로부터 구원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와에게 선악과를 봉헌하라고 한 것입니다. 봉헌은 자기를 태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을 위해 십분의 일도 태울 수 없다면 세상에서 그 심장에 불을 놓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불을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젠 주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아브라함이 쪼개놓은 제물들에게 등불이 나타나 그 제물을 태운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위해 외아들까지 바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맛과 에너지가 생깁니다. 그러나 이 에너지는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사라집니다. 그래서 성체조배와 미사, 하.사.시., 7기도와 같은 것들로 그 불을 다시 지피려 합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지옥이고 나를 사랑한 이를 위해 나를 태우는 삶이 행복입니다. 이것을 알고 규칙적으로 감사의 마음을 되살리려고 하는 예배를 올리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기드온이 수많은 미디안과 아말렉 군사들 앞에서 300명의 자기 군사에게 준 것이 나팔과 항아리에 든 횟불이었습니다. 이 등불은 항아리가 깨질 때 손에 들리게 됩니다. 주님의 등불은 나에게서 자아의 항아리를 깨뜨립니다. 그렇더라도 그 횟불이 지속적으로 타려면 계속 기름을 보충해주어야 합니다.
오하이오주 해밀턴에 사는 남편 하버트 말리코트(99)와 아내 준 네이피어(100)는 80년간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매일 자기 전에 뽀뽀하는 것이었습니다. 서로 마음이 안 맞는 일이 있더라도 각자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여 삭힙니다. 뽀뽀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삭혀야 했고 또 키스하고 나면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두 부부가 매일을 연애하듯이 살게 된 방법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규칙적으로 주님을 묵상하고 성체를 영한다면 결코 우리 안의 등불은 꺼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궁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서 ChatGPT(챗지피티)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알려 주었습니다. “한국 전통에서 두 사람의 운명이나 성격이 얼마나 잘 맞는지 판단하기 위해 주로 결혼을 앞두고 서로의 사주팔자를 비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궁합은 상대방과의 조화를 보려는 목적으로 사용되며, 서로의 생년월일과 시간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 가지 요소들을 분석합니다. 이러한 분석은 서로의 성격, 운명, 건강, 재물운, 자녀운 등을 포함하여, 결혼 생활에서의 조화와 성공 가능성을 평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궁합은 특히 전통적인 결혼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은 이를 참고하여 결혼을 결정하는 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는 궁합뿐만 아니라 서로의 사랑과 이해, 상호 존중 등의 요소가 결혼 생활의 성공에 더욱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궁합에는 동양의 철학과 사상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인들은 궁합을 삶의 방향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궁합이 인간관계를 파악하는 동양적인 방법이라면 서양에는 Enneagram(애니어그램)과 MBTI(앰비티아이)가 있습니다. 2002년 사목국에 있을 때입니다. 신부님들의 성격이 다르고, 때로 서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당시 국장 신부님은 서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애니어그램, 앰비티아이 프로그램을 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애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9가지의 범주로 파악합니다. 앰비티아이는 사람의 성격을 16가지의 범주로 파악합니다. 저는 궁합을 본 적은 없지만 애니어그램과 앰비티아이 검사는 받아 보았습니다. 애니어그램 검사에서 저는 ‘협조자형이고, 감성적인 성격’으로 파악되었습니다. 앰비티아이 검사에서 저는 ‘동정심이 많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쏟으며, 나눔과 베풂을 중시하며, 타고난 협력자로서 동료애가 많고 친절하며 능동적인 구성원’이라고 파악되었습니다. 애니어그램, 앰비티아이를 믿는 건 아니지만, 저와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직관적인 사람과 논리적인 사람과 대화할 때면 어려움이 있습니다.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결혼의 조건은 궁합도 아니고, 애니어그램이나 앰비티아이도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유무’가 결혼의 조건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직업, 재물, 능력을 결혼의 조건으로 볼 수 있겠지만, 어르신들은 그것보다 먼저 ‘신앙’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형수님도 형님과 결혼하기 전에 먼저 세례를 받았습니다. 부득이하게 세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면 ‘관면혼배’를 하였습니다. 나중에라도 꼭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할 방향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성공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은 예수님께서 전해 주신 ‘복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복음이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보일지라도, 그 복음이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로 보일지라도 우리 신앙인들은 ‘복음과 십자가’를 삶의 방향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유다인들은 표징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잔에 담아야 할 ‘기름’을 말씀하십니다. 그 기름은 타인과 나눌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기름이 있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 기름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고,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지고가신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그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의 성인
성녀 요안나 유간(Jane Jugan)
신분 : 설립자
활동연도 : 1792-1879년
같은이름 : 요한나, 잔, 잔느, 쟌, 제인, 조반나, 조안, 조안나, 조한나, 주강, 쥬강, 지아나, 지안나, 지오바나, 지오반나, 후아나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Bretagne)의 브티트 크로와에서 1792년 10월 25일 태어난 성녀 요안나 유간(Joanna Jugan, 잔 주강)은 어린 나이에 바다로 고기잡이를 떠난 아버지가 실종된 후 다른 세 명의 형제들과 함께 일찍 가난과 고된 노동을 알게 되었다.
집 근처에 위치한 저택의 부엌일을 돕는 하녀로 시작하여 생-세르방의 로제 병원에서 간호사로, 가정부로 때로는 간병인으로 일을 하였다. 한 젊은 어부의 구혼을 받았을 때 그녀는 “하느님께서 저를 원하십니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어떤 사업, 알려지지 않은 그 사업을 위해 저를 쓰시고자 하십니다.” 하며 그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 후 그녀는 오직 하느님과 이웃, 특히 가장 불쌍하고 헐벗은 이들을 섬기고자 결심하였다. 그래서 25세에 탄복하올 어머니 3회에 입회하였다.
1839년 겨울 어느 날 갑자기 혼자가 된 수족을 못 쓰는 반신불수의 장님 할머니를 집에 모셔와 보살핀 것이 계기가 되어, 1843년 그녀를 중심으로 세 명의 젊은 동반자와 합세하여 40여명의 노인들을 보살피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세 젊은이들은 수도회의 기틀이 잡혀가는 이 작은 모임의 원장으로 잔 주강을 추대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그녀는 부당하게 원장 자리에서 밀러났지만, 오로지 침묵과 온순함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써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그녀는 잊혀졌고, 그녀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녀가 수도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수녀는 거의 없었다. 1879년 8월 29일 그녀가 사망한 후, 1902년에 이르러 그 동안 잊혀졌던 잔 주강 십자가의 마리아 수녀가 ‘가난한 이들의 작은 자매회’(경로 수녀회)의 창립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1982년 10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2009년 10월 11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 보노니오 (Bononius)
활동년도 : +1026년
신분 : 수도원장
지역 : 루체디오(Locedio)
같은 이름 : 보노니우스
이탈리아의 볼로냐(Bologna)에서 태어나 자신의 고향에서 성 스테파누스(Stephanus)의 베네딕토 수도원의 수도승이 된 성 보노니우스(또는 보노니오)는 성 로무알두스(Romualdus, 6월 19일)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시리아와 이집트에 복음을 선포한 후에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루체디오에서 카말돌리회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다.
성 피아크리오(Fiacrius)
활동년도 : +670년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지역 : 아일랜드(Ireland)
같은 이름 : 피아끄리오, 피아끄리우스, 피아커, 피아크라, 피아크르, 피아크리우스
성 피아크리우스(또는 피아크리오)는 7세기 학문의 보고였던 아일랜드 수도원에서 성장하였다.
그의 지식과 성덕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많은 이들로 인해 그가 찾은 거룩한 은둔의 삶을 깨뜨렸다. 그래서 프랑스로 피신한 그는 모(Meaux)의 주교 성 파로(Faro, 10월 28일)가 제공한 땅의 어느 샘물 근처 동굴에 은둔처를 세웠다.
성 피아크리우스는 주교에게 음식과 약초를 재배할 정원을 위한 땅을 요청했고, 성 파로 주교는 그가 원하는 만큼의 땅을 제공해주었다.
다음날 아침 성 피아크리우스는 자신이 원하는 땅의 둘레를 돌면서 가래질을 했다.
그의 가래가 닿는 곳마다 나무들이 쓰러지고 수풀이 뿌리 채 뽑히고 땅이 다져졌다.
그 지방의 한 여인이 이 이야기를 듣고 그가 마법을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나 주교는 그것을 기적으로 보았다.
이렇게 성 피아크리우스의 정원은 기적적으로 만들어졌고, 수세기 동안 치유를 얻고자 하는 이들의 순례의 장소가 되었다.
그는 정원사들의 수호성인이며, 그의 유해는 유럽의 여러 성당에 나눠져 모셔졌다.
그는 피아커(Fiacre, Fiaker) 또는 피아크라(Fiachra)로도 불린다.
성 펠릭스 (Felix)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신부, 순교자
지역 :
같은 이름 : 펠리체
성 펠릭스와 성 아다욱투스(Adauct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순교한 후 오스티아(Ostia) 가도의 콤모디야(Commodilla)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855년경에 쓰여진 "아도 순교록"(Matryrologium Adonis)에 의하면, 로마의 사제인 성 펠릭스는 이교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들 받고 신전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가 기도를 하자 우상들의 신상이 떨어져 부서져 버렸고, 그로 인해 그는 곧장 처형장으로 압송되었다.
그가 압송될 때, 길에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한 사람이 합류했는데 그 사람도 함께 처형되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에게 신자들은 '추가된 인물'이라는 의미의 '아다욱투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복녀 브로니슬라바 (Bronislava)
활동년도 : +1259년
신분 : 동정녀
지역 : 폴란드(Poland)
같은 이름 :
크라쿠프(Krakow)의 성 히야킨투스(Hyacinthus, 8월 17일)의 사촌인 브로니슬라바는 사촌이 운명하는 날 성모님이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환시를 보았다고 한다. 그녀는 크라쿠프의 노르베르투스 수녀원에서 조용히 수도생활에 전념하였으나 관상생활과 독수생활에 대한 큰 열망을 갖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수녀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움막을 짓고 살 수 있는 허가를 받고 은수자로 살다가 선종하였다. 폴란드 전 주민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브로니슬라바에 대한 공경은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