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자는 집안 항렬이었다. 제일 큰형인 이극배(李克培)는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이극감(李克堪)은 형조판서, 셋째인 이극증(李克增)은 병조판서, 넷째인 이극돈(李克墩)은 병조·호조판서, 다섯째인 이극균(李克均)은 이조판서를 지냈다. 여기까지가 ‘오극(五克)’이고, 나머지 삼극(三克)은 사촌형제들이 차지하였다. 사촌형제인 이극규(李克圭)는 이조참판, 이극기(李克基)는 공조참판, 이극견(李克堅)은 좌통례를 지내고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렇게 해서 8명이다.
이 ‘팔극조정’은 보학(譜學)을 연구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광주이씨들의 성세(盛世)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회자되고 있다. 이 집안은 이후에 벌어지는 몇 차례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완전히 몰락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나온 인물이 둘째인 이극감의 후손인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1499~ 1572)이다. 흔히 ‘동고 대감’으로 불리는 이준경은 인재를 판별하는 지인지감(知人之鑑)이 발달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수원대 이사장인 이종욱씨가 동고 대감의 후손이다. 서울대 총장을 지냈고,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왔던 이수성씨는 이극견의 후손이다.
현재 사법부의 수장인 이용훈(李容勳) 대법원장도 ‘팔극’가운데 한 명인 이극돈의 16대 후손이다. 이용훈 대법원장의 고향인 전남 보성군 득량면 강골(江洞)마을은 16세기 후반부터 광주이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광주고검장을 지낸 이용식(李容植) 검사도 같은 ‘용(容)’자 항렬이다. 민주당 5선 의원을 지낸 이중재(李重載) 의원은 용자 다음의 ‘재(載)’자 항렬로서 강골 출신이다. 이중재의 장남인 이종구(李鍾九)는 현재 한나라당 서울 강남갑구 국회의원이고, 둘째인 이종욱(李鍾旭)은 외국어대 학장을 지냈고, 셋째인 이종호(李鍾鎬)는 광주지법 부장판사로 있다.
보학을 연구하다 보면 이처럼 ‘왕대밭에서 왕대 나오고 쑥대밭에서 쑥대 나오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
연산군과 이극균
연산군(燕山君, 1476~1506)은 조선 제10대 왕(재위 1494∼1506)이다. 휘가 융인 그는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폐비 윤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사간원을 폐지하는 등 실정을 계속하다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됐다. 묘소는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사적 제3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산군은 즉위 3년 동안은 별 탈 없이 보냈다. 그러나 1498년 훈구파 이극돈 ·유자광(柳子光) 등의 계략에 빠져,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김종직 등 많은 신진 사류(士類)를 죽이는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키게 하였다.
1504년에는 생모인 폐비 윤씨가 성종의 후궁인 정씨(鄭氏) ·엄씨(嚴氏)의 모함으로 내쫓겨 사사(賜死)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렸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仁粹大妃)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했다.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 하는 갑자사화(甲子士禍)도 일어났다.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採紅使) ·채청사(採靑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다. 경연(經筵)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司諫院)을 폐지해서 언로(言路)를 막는 등 그 비정(秕政)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 ·박원종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교동(강화)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그해에 병으로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50년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난다.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만다. 결국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한편 광주이씨(廣州李氏)의 후손 이극균(李克均)은 연산군 때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양식을 지킨 인물이다. 150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 그는 연산군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인동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는 사약을 받을 때 형관에게 “내 나이 곧 70이고 몸에 백병이 얽혀 있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서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아뢰지 않으면 내 죽은 넋이 꼭 너를 벌하고 말리라”고 말했다. 형관이 돌아가 그의 말을 연산에게 전하니 연산은 더욱 노하여 이극균 시신의 뼈를 부수라고 했다.
이 사화에서 광주이씨는 이극균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세준(남양부사), 조카 이세좌(극감의 아들) 등 30여 명의 일족이 참화를 입었다. 1503년 예조판서에 오른 이세좌는 이 때 거제도로 유배 도중 왕명에 따라 목매어 자살했다.
광주이씨는 고려 말의 생원 이당(李唐)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로 고려 말에 판전교사사를 지낸 둔촌 이집(遁村 李集)을 1세조로 하는 성씨다.
이집(李集)의 초명은 원래 이인령, 이원령, 이희령, 이자령, 이천령의 5형제 중 차남 이원령이었다. 이당을 중시조로 하는 이집의 후손들은 이당을 1세조로 하고 있다.
한편 이당 의 후손들과는 파를 달리하는 계통이 있다. 이익비의 현손 이록생을 중흥 시조로 하는 율정공 이관의의 후손과, 이익강을 중흥 시조로 하는 석탄공 이양중과 엄탄공 이양몽의 후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율정공파와 석탄공파, 엄탄공파는 소수이고 둔촌공파가 대다수다. 따라서 조선조에 광주이씨의 번영을 가져온 것은 둔촌공파라고 볼 수 있다.
둔촌공 이전의 광주이씨 선조는 광주에 토착해 온 향리 집안이다. 이집이 충목왕 3년 문과에 올라 문명을 떨치고 당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포은, 목은, 도은 등과 사귀며 가문의 이름을 높이게 된다. 그의 자손 대에서 고관대작이 연이어 나와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집 의 세 아들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가 모두 문과에 오른 것을 비롯 광주이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188명으로 이씨 가운데서는 전주. 연안. 한산이씨에 이어 4위를 차지한다. 무과 급제자도 274명을 내었다.
그중에서 상신(영. 좌. 우의정) 5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세종 이후 5조에 걸친 명신 이극배(영의정), 폭군 연산의 폭정에 서릿발 같은 기개로 항거하다 숨진 이극균(좌의정), 선조조 서정쇄신의 기수로 역사에 남은 이준경(영의정),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 외교관. 명 전략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음 이덕형(영의정) 등 기라성 같은 역사의 인물들이 광주이씨 문중에서 나왔다.
이인손은 극배(영의정), 극감(이.형판), 극증(이.호.병판.좌참찬), 극돈(이.병.호판.좌찬성), 극균(좌의정) 등 5형제를 두었다. 이들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세칭 < 5군집(五君집) > 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집안이 성세를 누리자 세조 때 영의정 이극배는 이를 염려해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겸손할겸)과 공(恭-공손할공)이라 짓고 항상 겸손하고 공손하게 세상을 살도록 훈계했다.
이인손은 세조 때 북방 변경지방에 침입한 야인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우는 등 다섯 임금에 걸쳐 문무를 겸한 출장입상(出將入相-문무겸비)의 명신으로 우의정을 지냈다.
이인손의 다섯 아들 가운데 연산군 때 화를 입은 인물은 좌의정에 오른 이극균이다. 연산군 때 잠시 주춤했던 광주이씨는 명종-선조대에 두 명의 영의정(이준경. 이덕형)과 병조판서 이윤경 등을 배출하며 다시 융성을 회복한다.
이준경은 명종 20년 영의정에 오르고 선조 즉위 후 명종의 교지를 받들어 국정을 총괄했던 당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사림간의 알력을 조정키 위해 억울하게 숨진 신진 사람파의 기수 조광조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한편 고려 충신 정몽주의 후손을 관직에 기용했다. 재해 때 백성들의 세공을 덜게 해주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는 죽을 때 붕당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소를 올려 3사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일어난 동서분당은 그의 선견지명을 입증했다.
선조조에 오성 이항복과 나란히 문장과 벼슬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한음 이덕형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임명된다. 그는 덕망이 있었던 재상으로 더욱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38세에 우의정을 거쳐 42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 전략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 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전란 중에는 병.이조판서가 되어 구국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 즉위 후 폐모론에 반대하다 영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덕형과 이항복(경주이씨)의 아름다운 우정, 기지와 익살로 수놓인 오성과 한음의 많은 일화들은 지금도 역사의 향기로 전해온다. 이 두 사람은 동문수학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 다 같이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덕형은 왕의 명을 받고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가게 된다. 이 때 그가 이항복에게 “길을 곱이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말이 없어 한”이라고 하자 이항복은 자기의 말을 선뜻 내주었다.
이덕형은 “만약 원병이 오지 않으면 나는 뼈를 버리고 압록강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말했다. 눈물을 뿌리며 오성과 작별한 한음은 명에서 5만 병력을 끄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조선은 이 대군의 도움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서울을 수복했다.
한음은 오성보다 나이는 다섯 살이니 아래였지만 벼슬길은 늘 오성보다 조금씩 앞섰다. 한음은 31세에 대제학을 지내고 그 자리를 오성에게 물려준다. 38세에는 우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좌의정이 되니 이해에 오성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또 한음이 42세에 영의정이 되자 오성은 좌의정이 되었다가 한음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연산군과 광주이씨
광주이씨(廣州李氏)의 후손 이극균(李克均)은 연산군 때의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양식을 지킨 인물이다. 1503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오른 그는 연산군의 실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쓴 것이 화근이 되어 갑자사화 때 인동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다.
그는 사약을 받을 때 형관에게 “내 나이 곧 70이고 몸에 백병이 얽혀 있으니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만 나라를 위한 공로가 있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네가 돌아가서 반드시 임금께 아뢰라. 만약 아뢰지 않으면 내 죽은 넋이 꼭 너를 벌하고 말리라”고 말했다. 형관이 돌아가 그의 말을 연산에게 전하니 연산은 더욱 노하여 이극균 시신의 뼈를 부수라고 했다.
이 사화에서 광주이씨는 이극균 뿐 아니라 그의 아들 세준(남양부사), 조카 이세좌(극감의 아들) 등 30여 명의 일족이 참화를 입었다.
1503년 예조판서에 오른 이세좌는 이 때 거제도로 유배 도중 왕명에 따라 목매어 자살했다.
광주이씨는 고려 말의 생원 이당(李唐)을 시조로 한다. 그의 아들로 고려 말에 판전교사사를 지낸 둔촌 이집(遁村 李集)을 1세조로 하는 성씨다.
이집(李集)의 초명은 원래 이인령, 이원령, 이희령, 이자령, 이천령의 5형제 중 차남 이원령이었다. 이당을 중시조로 하는 이집의 후손들은 이당을 1세조로 하고 있다.
한편 이당의 후손들과는 파를 달리하는 계통이 있다. 이익비의 현손 이록생을 중흥 시조로 하는 율정공 이관의의 후손과, 이익강을 중흥 시조로 하는 석탄공 이양중과 엄탄공 이양몽의 후손이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율정공파와 석탄공파, 엄탄공파는 소수이고 둔촌공파가 대다수다. 따라서 조선조에 광주이씨의 번영을 가져온 것은 둔촌공파라고 볼 수 있다.
둔촌공 이전의 광주이씨 선조는 광주에 토착해 온 향리 집안이다. 이집이 충목왕 3년 문과에 올라 문명을 떨치고 당대의 대표적 유학자인 포은, 목은, 도은 등과 사귀며 가문의 이름을 높이게 된다. 그의 자손대에서 고관대작이 연이어 나와 대표적인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집의 세 아들 이지직, 이지강, 이지유가 모두 문과에 오른 것을 비롯 광주이씨는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가 188명으로 이씨 가운데서는 전주. 연안. 한산이씨에 이어 4위를 차지한다. 무과 급제자도 274명을 내었다.
그중에서 상신(영. 좌. 우의정) 5명, 대제학 2명, 청백리 5명, 공신 11명을 배출했다. 세종 이후 5조에 걸친 명신 이극배(영의정), 폭군 연산의 폭정에 서릿발 같은 기개로 항거하다 숨진 이극균(좌의정), 선조조 서정쇄신의 기수로 역사에 남은 이준경(영의정), 임진왜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명외교관. 명전략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한음 이덕형(영의정) 등 기라성 같은 역사의 인물들이 광주이씨 문중에서 나왔다.
이인손은 극배(영의정), 극감(이.형판), 극증(이.호.병판.좌참찬), 극돈(이.병.호판.좌찬성), 극균(좌의정) 등 5형제를 두었다. 이들 모두 높은 벼슬에 올라 세칭 < 5군집(五君집) >으로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이렇게 집안이 성세를 누리자 세조 때 영의정 이극배는 이를 염려해 두 손자의 이름을 겸(謙-겸손할겸)과 공(恭-공손할공)이라 짓고 항상 겸손하고 공손하게 세상을 살도록 훈계했다.
이인손은 세조 때 북방 변경지방에 침입한 야인을 정벌하는데 공을 세우는 등 다섯 임금에 걸쳐 문무를 겸한 출장입상(出將入相-문무겸비)의 명신으로 우의정을 지냈다.
이인손의 다섯 아들 가운데 연산군 때 화를 입은 인물은 좌의정에 오른 이극균이다.
연산군 때 잠시 주춤했던 광주이씨는 명종-선조대에 두 명의 영의정(이준경. 이덕형)과 병조판서 이윤경 등을 배출하며 다시 융성을 회복한다.
이준경은 명종 20년 영의정에 오르고 선조 즉위 후 명종의 교지를 받들어 국정을 총괄했던 당대의 거목이었다.
그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사림간의 알력을 조정키 위해 억울하게 숨진 신진 사람파의 기수 조광조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한편 고려 충신 정몽주의 후손을 관직에 기용했다. 재해 때 백성들의 세공을 덜게 해주는 등 정치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그는 죽을 때 붕당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유소를 올려 3사의 규탄을 받았으나 뒤에 일어난 동서분당은 그의 선견지명을 입증했다.
선조조에 오성 이항복과 나란히 문장과 벼슬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한음 이덕형은 31세의 젊은 나이에 대제학에 임명된다. 그는 덕망이 있었던 재상으로 더욱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38세에 우의정을 거쳐 42세에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명나라에 가서 탁월한 외교 전략으로 5만의 원병을 끌어들여 서울 수복에 수훈을 세웠다.
전란 중에는 병.이조판서가 되어 구국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 즉위 후 폐모론에 반대하다 영상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덕형과 이항복(경주이씨)의 아름다운 우정, 기지와 익살로 수놓인 오성과 한음의 많은 일화들은 지금도 역사의 향기로 전해온다.
이 두 사람은 동문수학하고 같은 해 문과에 급제, 다 같이 영의정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덕형은 왕의 명을 받고 구원병을 청하기 위해 명나라에 가게 된다. 이 때 그가 이항복에게 “길을 곱이나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말이 없어 한”이라고 하자 이항복은 자기의 말을 선뜻 내주었다.
이덕형은 “만약 원병이 오지 않으면 나는 뼈를 버리고 압록강을 다시 건너지 않겠다”고 말했다.
눈물을 뿌리며 오성과 작별한 한음은 명에서 5만 병력을 끄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조선은 이 대군의 도움으로 평양을 탈환하고 서울을 수복했다.
한음은 오성보다 나이는 다섯 살이니 아래였지만 벼슬길은 늘 오성보다 조금씩 앞섰다. 한음은 31세에 대제학을 지내고 그 자리를 오성에게 물려준다. 38세에는 우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좌의정이 되니 이해에 오성이 우의정에 올랐으며, 또 한음이 42세에 영의정이 되자 오성은 좌의정이 되었다가 한음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광주 이씨 (廣州 李氏)의 중시조(中始祖)로 여겨지고 있다. 중시조(中始祖)란 쇠퇴한 가문을 일으킨 조상을 말한다.
이집이 주로 살았던 곳은 경기도 여주(驪州)이었다. 그는 고려 충목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정도전 등 신진사류들과 폭 넓은 교류를 가졌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과 교유관계에도 불구하고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대거 관계로 진출하던 공민왕 시절에도 그는 관직에 나가지 못 하였다. 그 사연을 알 수 없지만 그가 젊은 세력 중에서 좀 더 과격한 인물로 비쳐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공민왕(恭愍王)이 신돈(辛旽)을 중용하게 되면서, 신진사류들도 점차 밀리기 시작한다.
당시 그가 살던 여주(驪州)에는 주변에 권세가와 명유(名儒)들의 토지가 많았던 만큼 정계의 동향에 민감한 곳이었다. 신돈(辛旽)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 지방 토호(土豪)들의 권력구도와 행태에도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1368년 (공민왕 18 ), 李集은 어느 날 누군가와 말다툼을 하였고, 그 것이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당시의 실권자인 신돈(辛旽)을 비난하게 되었다.
이 야기기를 누군가 신돈에게 보고하였고, 신돈(辛旽)은 크게 화를 내어 당장 李集을 잡아 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이집은 체포되기 전에 도주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55세이었다.
정말 한마디 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여주 일대의 여론을 이끌어 가던 인물로 이를 고깝게 생각하던 신돈이 이를 기화로 李集을 제거하려 했는지는 모르지만 당시 사대부가에서는 대단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신돈은 오늘 날까지도 그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이지만, 적어도 당대에 이 사건은 신돈의 본성과 한계를 보여준 사건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 사건이 유명해 진 것은 그가 끝내 체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李集은 체포 소식을 듣자 병든 부친 (이당.李堂)을 업고 아내와 자식을 이끌고 도주하는데, 큰 길로 갈 수가 없어 산속으로숨어 들어 험한 길로만 도주한다.
그의 목적지는 경북 영천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인 최원도(崔元道)가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하고 초조한 도피생활은 공민왕 20년 신돈(辛旽)이 살해되기 까지 4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나 최원도(崔元道)는 의리있었던 인물로 두려워하지 않고 李集의 가족들을 돌보아 주었다.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의 우정은 역사적으로도 기록으로 남겨져 오늘 날에도 그들의 우정 사례는 많은 글에서 인용되고 있다.
병든 부친 이당(李堂)은 고향에 돌아 오지도 못하고 永川에서 죽게 되는데, 최원도는 그 장례를 극진하게 치루어 주었고 자신의 어머니를 안장한 곳에 묘를 차려 주었다.
나중에 이집(李集)의 가문은 크게 번성하였지만, 최원도의 가세(家勢)는 쇠퇴하였는데 풍수(風水)를 믿는 사람들은 객(客)이 主人의 운세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한다.
신돈이 사망하자 겨우 살 길이 마련된 李集은 이 일을 계기로 이름을 집(集)으로 바꾸고, 호(號)를 둔촌(遁村)으로 바꾸었다. 둔촌(遁村)은 촌(村)에 은둔한다는 의미인데 ,그는 자신이 살던 마을 이름까지 둔촌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의 강동구 둔촌동(遁村洞)이다.
이때에 비로소 이집은 벼슬을 받게 된다. 판전교시사(判典校侍事)로 임명된 것이다. 고관직은 아니었지만, 이 때 李集의 나이 60이 넘었다. 李集은 벼슬을 곧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 와 평생을 은거하다가 삶을 마쳤다.
李集이 죽은 후,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또한 그 후손들은 더욱 번성하였다. 이극배, 이극감,이극증,이극돈, 이극균 등 5형제는 모두 정승을 지내고, 그 외 사촌들 까지 관직에 진출하여 "극(克)"자 돌림 인물 8명이 한 조정에 있다고 해서 "8극 (8克)"이라고 부를 정도이었다.
이 처럼 한 집안 전체가 번성을 누린 것은 조선시대에서도 드문 일이라고 한다. 소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문벌을 양성한 경우는 있었지만, 광주이씨의 유명 인물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한 인물이라는 점이 독특하다고 한다.
연산군시절에 이 가문은 큰 숙청을 당하여 일가 수백명이 살해되거나 유배되는 불행을 겪게 되지만, 그러나 연산군이 축출된후 다시 재기한다. 이덕형, 이준경 등이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각형(四角形)의 망주석(望柱石)은 유일한 사례라고 한다
최원도(崔元道)의 우정(友情)
경상도 영천(永川)에 사는 영천최씨(永川崔氏), 최원도(崔元道)의 집에 제비라는 예쁜 계집종이 있었다. 그 때 제비의 나이 열아홉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최원도(崔元道)가 갑자기 밥을 세 그릇씩이나 먹고, 방안에서 용변을 보는 등 반미치광이 행세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 시중도 제비가 하게 되는데, 이 갑작스러운 발광을 수상하게 여긴 최원도의 부인은 제비로 하여금 알아보라 지시하였는데,
알아보니 벽장 속에 낯선 두 남자를 숨겨 두고 밖에 알려지지 않게 하려고 위장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숨어있던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정몽주, 이색 그리고 이숭인과 더불어 나라 안에 소문난
직신(直臣)인 광주사는 이집(李集)과 그의 노부(老父)인 이당(李堂)이었다.
신돈(辛旽)의 악정(惡政)을 비판하다가 신돈의 비위를 거슬려 포살령(捕殺令)이 내려지자, 병든 아버지를 업고 멀리 아버지의 친구인 영천(永川)의 최원도집까지 피난하여 왔던 것이다. 벽장 속에서 4년이나 숨어 살았으며, 집안 사람들에게 까지 그 비밀을 유지하고자 반광(半狂)을 연출한 것이다.
최원도의 부인도 대단한 여인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제비가 행여 부지불식간에 누설할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자 충직하기 이를데 없던 제비는 부인의 걱정을 눈치채고 사약(賜藥)을 내려 달라고 복걸(伏乞)하였다.
부인은 울면서 돌아 앉아 사약을 내렸고, 제비는 큰 절을 하고 그 것을 받아 마셨다. 제비 또한 역사상 기록될 의비(義婢)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친구의 우정과 의비(義婢)의 절의(節義)로 살아 난 이집은 광주로 올라 와 亡해가는 고려 말기에 義와 節의 정신적 우상으로 여겨지다 죽었다.
이 의(義)와 절(節)이 후세에 보답을 받아 그의 후손에서 5명의 정승, 6명의 판서, 7명의 공신이 나와 역사에 화려한 둔촌인맥(遁村人脈)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 최원도(崔元道)의 가문은 쇠퇴하였다고 한다.
출처 :김규봉(金圭鳳)의 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非山非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