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14,5-18, 요한 14,21-26):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겸손한 도구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그저 감사로 가득한 축복이며 은총인데, 어찌 그것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고 우리 자신의 것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요한복음 1장 20절에서, 세례자 요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과 행위로 드러나는 삶의 향기를 맡아 예언자나 메시아로 부르려 할 때,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단 일각(一刻)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부정하였지요. 그럴 수 있는 바탕에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앞에 올곧게 자신을 바라보려 부단하게 닦아왔던 성실함과 겸손함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지녀야 할 당연한 본성이고 도리입니다.
사도행전 14장 15절에서 바르나바와 바오로 사도 역시 앞선 11절에서 “신들이 사람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셨다.”라는 뭇사람들의 경탄과 칭송 앞에서, 결코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미천한 자신을 들어 높여주신 하느님을 경외하셨던 성모님의 찬가를 비롯하여,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과 지극한 자비를 체험하고 바라본 이들은, 나약하고 잠시 지나가는 우리의 생(生)을 성찰하며, 절대 스스로 자신을 높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1절, 23절에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받는 자에게 자비의 은총으로 당신을 열어 보이시는 하느님을 뵙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당신을 직접 뵙는 것을 ‘지복직관(至福直觀)’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궁극적인 복락을 마주하는 데도 더 바랄 것이 있어야 할까요?!
그리고 주님 말씀과 같이, 그 은총 가운데 있음을 우리 역시 사랑으로 깨닫는다면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해야 할’ 가장 앞선 도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잠시 누릴 영화(榮華)를 자화자찬(自畵自讚)하기 위해 다른 이를 업신여기거나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일관하는 것만큼 헛되고 허무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가장 소중한 기억은, 동반하는 여정에서 새겨지는 감동과 추억의 따사로움이 결정할 테니까요. 세월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고, 잊지 못할 그리움은 오히려 자신을 감추는 듯 묵묵하면서도 자신이 머문 곳과 만난 이들을 변화시킬 사랑의 영향력에서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돌아보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지력과 지혜, 능력과 재능 역시도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지요. 우리에게 주님께서 불러일으켜 주신 마음과,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도록 주신 모든 것을 활용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이지요.
그리고 독서 말씀의 두 사도처럼, 그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데 순수하게 두려 할 때, 더욱 그 결과는 찬연히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목적으로 한다면 드러나는 빛 역시 그것에 불과하겠으나, 하느님을 목적으로 한다면 한계를 두지 않은 무한한 은총의 열매가 맺어질 테니까요? 어떤 향방의 선택이 참으로 지혜로울지는 설명이 더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오늘도 새로 맞은 주간의 아침을 열면서, 우리 발걸음 닿는 곳마다 주님 부르심의 뜻을 되새기면서 아름다운 영적 열매를 맺어갈 수 있도록 지혜와 분별, 겸손한 사랑으로 응답할 침묵의 용기를 청해봅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해요!!
따뜻함과 생명 감사함과 그리움이 함께 깃든 5월 가정의달~~
조용히 마주한 시간속 더욱 뵙고 싶네요~~^^
고요한 피정 가운데, 사색과 평온을 더하는 나날들 속에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