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임레 케르테스가 1975년에 출판한 소설입니다. 2002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 유진일 옮김, 306페이지로 읽었습니다.
작가는 192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출생,2016 향년 86세의 나이로 사망. 그는 생애
의 대부분을 어린 시절에 겪은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로 인해 고군분투하며 힘겹게 살아온 헝가리의 대
표적인 현대 작가입니다. 1944년 6월 30일 열 네살의 어린나이로 7000여명의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폴
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고. 2차 대전이 끝나면서 1년만에 부다페스트로 귀향하였습니다.
Holocaust (홀로코스트)란 나치가 12년(1933~45) 동안 자행한 대학살을 말합니다.
주요 대상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 때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회적 권
리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강제수용소에 몰아넣고 강제노역에 동원하거나 가스로 죽였습니다.
대표적인 대량학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였습니다. 이 때 사망한 유대인만 575만여 명이며, 그 외 반(半)
유대인, 기타 집시, 슬라브인 등을 포함하면 더욱 늘어납니다.
《운명》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아빠와 새엄마와 함께 부다페스트에 사는 열 네살 소년 조르지 쾨베시는 유대인의 혈통으로 가슴에 노
란 별을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노동봉사의 명령을 받고 어디론가 끌려갔다. 얼마 후
쾨베시에게도 노동봉사의 명령이 떨어져 체펠섬에 있는 정유공장에서 조수로 일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체펠섬으로 일을 하러가던 중 경찰이 버스를 세우고 유대인은 모두 내리
라고 했다. 쾨베시는 역시 가슴에 노란 별을 달고 있는 몇몇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아우슈비
츠로 보내진다. 며칠 후 그는 부헨 발트수용소로 보내졌다가 얼마 후 다시 차이츠 수용소로 보내진다. 쾨
베시는 배고픔과 염증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으로 극한적 어려움을 겪지만 함께 지내던 번디 치트롬의 도
움으로 고비를 넘긴다. 얼마후 쾨베시는 다시 부헨 발트 수용소로 보내졌다가 독일 나치군의 패전으로
부헨 발트가 해방되면서 1년 만에 다시 부다페스트로 돌아온다. 1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아빠는 노동
봉사를 명령받고 떠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했고 새 엄마는 그들의 가게에서 일하던 쉬퇴 아저씨와 재혼
을 했다.>
이 소설은 작가가 실제로 나치의 수용소에 일년 동안 수감된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입니다. 열 다섯살의
나이에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는 죄르지 쾨베시는 작가 본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단죄해야할
나치의 잔혹성은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이 다
른 작품들과 다르게 특별한 것은 모든 잘못을 나치에게 돌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수용소에 끌려간 유
대인들에게도 마땅히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습니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어린 쾨베시는
그의 이웃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그의 이웃들은 나치의 수용소 일을 '어쩔 수 없었다' 라고만 말하고 있었습니다. 쾨베시는 분명 화가 났
던 것입니다. 쾨베시는 수용소 생활 중에 일어나는 일들을 원근법으로 보듯이 바라보았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관점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혹한 상황 속에서 가축 취급을 받더라도, 그는 결코 미
래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살을 기도하고,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죽는 다른 죄수들처럼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수용소 생활 속에서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찾았습니다.
여기 제목의 《운명》 은 헝가리어의 실제 뜻은 ‘운명은 없는 것’이랍니다.
“내가 나아갈 길 저만치에 행복이 피해갈 수 없는 덫처럼 숨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나는 안다. 가스
실 굴뚝 옆에서의 고통스러운 휴식시간에도 행복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내게
수용소에서의 역경과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만 묻는다. 나에게는 이러한 경험들이 가장 기억할 만한 일들
로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래, 사람들이 나중에 묻는다면 그때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행복에 대해 예기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사람들이 묻는다면 ,그리고 내가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매일 죽음의 고비와 맞딱뜨리고 주변에 시체가 나뒹굴고 가스실에서는 수 많은 생명들이 연기로
사라지고 상처에 이가 꿈틀거리는 지옥 같은 강제 수용소가 어떻게 행복한 장소가 될 수 있을까? 독자들
은 당황하고 황당헤 하며 결국에는 쾨베시의 고백에 분노하게 됩니다.
다른 작가들과 달리 아우슈비츠의 참혹상을 예술성에 바탕을 두고 지극히 객관적이고 간접적으로 기술하
였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은 주인공에게 공감하거나 같은 입장을 취하기를 거부하는데. 그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아우슈비츠를 통해서 사회적 힘과 폭력이 개인의 종말을 강요하는 시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기존
의 홀로코스트 작품들의 목적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는 기존의 작가들과 달리 주인공이 강제수용소에
서 경험하는 고통을 마치 남이당하는 양 지극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종국에는 강제수용소의 생활이 행
복했다고 고백함에 따라 독자들은 강제수용소의 현실과 주인공의 현실 인식사이의 괴리 때문에 더욱 크
게 분노하게 됩니다.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공범이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그
것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것과 함께 갔다. “ 라는 쾨베시의 언급을 통해 이걸 알 수 있습니다. 나
치군의 만행에 침묵을 지킨 대부분의 헝가리인 모두가 암묵적이 공범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아우슈
비츠의 만행은 특정지역과 특정시대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는 현재 진행형
의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 ”나치군은 언제든 다시 우리에게 돌아올 수 있다“라고 경고합니다.
세계 최악의 독재국가인 ‘북한’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시대에 큰 울림을 주는 경종으로 들어야 하겠습
니다. (2019.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