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여행, 보길도 가는 길/ 전 성훈
중학생 때 우리나라에 다도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후 다도해를 직접 가서 보고 싶은 꿈을 꾸었다. 그러다 1977년 여름 군 제대 기념으로 목포에 사는 선배 집에 찾은 적이 있었다. 선배의 배려로 홍도에 간 이후 거의 40년 만에 드디어 꿈을 찾아 여행을 나섰다. 같은 성당에 다녔던 동갑내기 모임에서 남도지방 섬을 찾는 여정을 꾸몄다. 일행 다섯 명이 승용차에 몸을 싣고 첫 목적지인 목포를 향해 기분 좋게 출발하였다.
목포로 가는 길에 함평에 들려 나비축제장을 찾았다. 매표소에 확인하니 입장료가 생각보다 상당히 비쌌다. 잠시 철 지난 나비축제장에 들어갈 것인지 고민하였다. 함께한 친구 중 어려서부터 다리가 불편한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위하여 휠체어를 빌렸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잘 걷지 못하는 나 역시 친구들이 강제로 휠체어에 태웠다. 휠체어를 탄 우리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고 친구들 모두 박장대소하였지만 나는 속으로 씁쓸했다. 썰물처럼 빠져버린 구경꾼들의 잔재를 보는 듯 축제장은 썰렁하기만 하였다. 게다가 바람마저 차갑게 불어 가뜩이나 심란한 마음에 서늘한 기운을 부채질 하였다. 그래도 간간히 사람들 모습이 눈에 띄어 그나마 이곳에서 나비축제가 열렸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비축제장의 나비는 별로 보지 못하였고 그 대신 다람쥐만 실컷 구경했다. 상당한 규모의 다람쥐 쉼터, 인공적으로 다람쥐들이 놀 수 있도록 나무를 심고 통로를 만들고 여기저기 먹을거리를 놓아두었다. 대부분의 다람쥐들은 즐거운 듯 놀이터에서 쳇바퀴를 돌리거나, 달리기 경주를 하며 잘 놀고 있었다. 다람쥐우리를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우연히 다람쥐 한 마리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만이 아니라 동물들도 무리와 떨어져 지내고 싶어 하는 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비축제장을 둘러보다가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십여 년도 넘은 옛날, 아내와 이곳 나비축제장을 찾은 적이 있었다. 그 때에는 축제 기간 중이라서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걸어 다니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마치 콩나물시루 속에 들어앉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당히 넓은 전시장을 한 참 이곳저곳 구경을 하다보니까 다리도 아팠다. 돌아가는 관광버스를 타려고 출입구를 찾았으나 출입구가 여러 곳이어서 상당히 애를 먹었다.
함평을 떠나 저녁 무렵 목포에 도착하니 비가 많이 뿌리기 시작하였다. 시내 어디서나 유달산 이정표가 보여, 유달산 공원을 찾았다. 그러나 쏟아지는 빗줄기에 우산을 받쳐 들고 걸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때문에 자동차를 타고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그것 역시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서 아름다운 목포의 경치를 볼 수 없었다. 국제여객선터미널에 가보니 마지막 배가 출항한 뒤라서 인적이 끊어진 터미널에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아 정적감 마저 감돌았다. 목포하면 떠오는 노래, 고 이난영 여사가 불러서 우리 심금을 울렸던 아련한 추억 속의 그 노래, ‘목포는 항구다’와 ‘목포의 눈물’ 노래가 귓전에 맴돌았다. 새로 개발한 북항 부근 횟집에서 상다리가 휘도록 가득 차린 저녁상을 받고서 허기진 배에 소주잔을 기울였다. (2015년 중순에)
꿈속의 여행, 강진 그리고 보길도에서
다음 날 아침 일찍 목포를 떠나 강진으로 출발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비도 세차게 쏟아졌던 어제와 달리 날씨가 맑았다. 그 덕에 수줍은 듯이 햇볕이 얼굴을 살짝 내밀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어 나들이하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5월을 왜 나들이의 계절이라고 칭송하는지 알았다. 목포에서 강진 가는 길은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거리가 단축되어 시간은 짧아졌지만 구불구불한 옛길보다는 구경거리가 별로 없어 운치가 없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과 고려시대 도자기요로 유명한 강진에는 오래전에 몇 번 다녀간 적이 있었다. 해외 견문을 익히라고 대학생이 된 아이들을 유럽지역으로 여행을 보내고 아내와 단 둘이 여름휴가 때 강진을 찾았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소개되었던 읍내 한 곰탕집을 찾아가서 아침식사를 맛있게 먹었다. 이번에 그 집을 찾으니 장소가 바뀌었다. 하지만 십여 년 만에 다시 가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 집 곰탕국물 맛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입맛을 사로잡았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찾았다. 새롭게 꾸민 다산초당 기념관은 옛 건물 아래로 옮겨서 문을 열었다. 백련사 입구 동백나무 숲길의 매력에 취하여 길을 잃을 뻔하였다. 동백꽃이 대부분 졌기에 활짝 핀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웠다. 동백 숲과 서러운 이별을 하고 보길도에 가기 위해서 해남 땅끝마을로 발길을 돌렸다.
전에 두 번이나 해남 땅끝마을을 찾았을 때는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섰다. 이번에는 한가한 때를 맞추어서 그런지 거의 사람이 없었다. 자동차를 실은 배는 노화도로 출항했다. 주변 바다에는 전복 가두리 양식장이 지천으로 널렸다. 노화도 해안도로를 따라 커다란 다리를 건너 드디어 꿈속의 땅 보길도에 들어섰다.
보길도에 들어서자 곧바로 윤선도 기념관을 찾았다. <어부사시사>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 선생, 그 분이 이곳에 머물면서 남긴 발자취를 보여주는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자, 세연정(洗然停)주위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다. 쓰라린 마음을 닦으며 자연을 벗 삼아 당신의 삶에 불을 태운 그 분을 그려보았다. 한양과는 아득히 멀리 떨어진 외딴 곳이나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우리 선조들, 비참한 삶의 조건에 힘들어 하고 치욕스런 고통을 당하면서도 후세에 길이 남을 글이나 그림을 남기신 분들의 ‘인고’(忍苦)의 원천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세연정을 벗어나 동백나무 가로수 길을 스치며 보길도 바닷가를 찾으니 거제도 몽돌 해변처럼 자갈 해변이었다. 해변 여기저기서 중년 여인들이 멋진 포오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으며, 어린아이들처럼 재잘대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과 아담한 수목들, 그렇게 조용할 수 없는 마을 분위기와 신선한 공기 냄새, 보길도는 요즘 유행하는 ‘힐링’이란 단어가 딱 어울리는 곳이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마음의 시간을 약 250년 전으로 되돌려보니 육지와는 완전 고립된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고 ‘신선의 나라’였다.
꿈속의 여행, 보길도를 떠나 다시 속세로
내 마음을 모두 빼앗은 보길도를 떠나 완도에 가려고 동천항 터미널로 갔다. 완도까지는 배로 약 40여분 소요되어 선실에서 잠시 낮잠을 즐겼다. 완도에 도착하여 완도타워 전망대에서 완도읍내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완도가 그렇게 큰 마을인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다. 완도는 가두리 전복양식으로 유명한 곳이다. 싱싱한 전복을 구하려고 전복양식창고를 찾았다. 토요일 오후에 빈 사무실을 혼자 지키며 졸던 내 나이또래 중늙은이가 권태로운 듯 기지개를 키고 있었다. 그새 육지가 그리운 듯 완도를 떠나 강진으로 되돌아와서 강진 성당 미사에 참례하였다. 소개 받은 한식집에서 맞이한 멋진 저녁식사, 친절한 안주인 덕분에 전복 회와 살짝 데친 전복 맛을 볼 수 있었다. 안주인의 친절한 마음씨는 맛난 음식을 먹을 때 더욱더 그 빛을 발휘하였다.
서울로 귀경하는 날,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하여 뻥 뚫린 강진-목포 간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자동차가 한 대도 보이지 않아서 정말 이상한 길이라고 느낄 정도였다. 고창 선운사에 들려 부처님 오신 날 준비에 바쁜 절집 경내를 구경하였다. 선운사 숲길에서 잠시 동안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숨을 고르며 명상에 잠겼다. 선운사를 뒤로하고 상경하다가 잠시 대천항을 기웃거렸다. 몇 해 전 동갑내기들과 환갑여행을 할 때 대천항에서 맛보지 못한 갑오징어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함께한 이번 여행은 여독을 느낄 짬이 없었다. 쉴 새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로 웃고 웃어서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여인들만 그릇을 깨트릴 정도로 웃음꽃을 피우는 것이 아니다. 남정네들도 여럿이 모이면 그릇이 아니라 맷돌도 깨트릴 수 있다. 이야기는 주로 손주아이들, 결혼 적령기가 넘은 자녀들 그리고 배우자와 늙고 병들어가는 우리 자신들의 서러운 이야기였다.
지금 내게는 두 가지 소망이 있다. 하나는 글쓰기이고 다른 하나는 여행이다. 내 나이 칠십이 되면 그동안 써왔던 글을 모아 자그마한 책을 내고 싶다. 그 꿈을 위해서 열심히 글짓기를 배우고 있다. 여행은 누구나 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내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몸이 성하지 못하여 잘 걸을 수 없기에 더욱 더 그렇다. 앞으로도 또 친구들과 나들이 길에 나서고 싶다. 아직 걸을 수 있고 떠들 수 있는 기력이 남아있을 때 우리 산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싶다. 자연과 인생의 길을 순례하면서 우리 신앙이 풍성하게 살찌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리고 싶다. (2015년 5월 중순)